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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

       아이린은 숨을 몰아쉬었다. 요 며칠 동안 일부러 보지 않았다. 마음이 진정되고, 해야 할 말을 정리하기 위해 일부러 피했다.

         

       하지만 내일 곧바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더는 미룰 수도 없다는 말을 미어칸트가 전했다.

         

       「그렇게 보내도 괜찮겠느냐?」

         

       아이린은 그 말 한마디에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정했다.

         

       달이 밝았다.

         

       그를 처음 만난 그날처럼.

         

       “선배님?”

       “잠, 잠시만요.”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었다. 남자가 말을 걸어올 때면, 항상 얼음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심장인데, 뭔가 이상했다.

         

       도움을 받아서일까. 아니면 악몽에서 처음으로 끄집어낸 남자라 그런 걸까.

         

       아무도 해결 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주었다.

       마치 당연한 듯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도시는 조용했다. 이 산책로는 자신밖에 모르는 외진 곳이었고, 주변에는 온통 조용한 숲밖에 없었다.

         

       “…후배님은.”

         

       아이린은 자신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낯설었다.

       쓸데없이 떨리는 게 눈에 보였기에.

         

       “후배님은 교단 본부로 가면…어쩔 생각이에요?”

       “어쩌기는요. 있는 그대로를 다 말해야죠.”

         

       아무 걱정도 안 한다는 것처럼 씨익 웃는다. 아이린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인지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

         

       “나쁜 놈이라는 증거도 있고, 제가 직접 가서 딱딱 정리해서 말하면…다 좋게 풀릴걸요?”

       “교단 본부로 가면 베버릭 견습 사제의 아버지인 브로디 주교가 있어요.”

       “브로디 주교든 뭐든 잘못했으면 매 맞아야죠. 이참에 엮어서 같이 벌주지 않으려나.”

         

       풉 하고 아이린은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너무 개방적인 사고라 이따금 따라가기 힘들 때가 있었다.

       신기한 사람. 신비로운 아이.

         

       이대로 몇 년이 더 지난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어떤 사람이 될까.

         

       …어떤 남자가 될까?

         

       “후배님.”

       “네?”

       “궁금한 게 있어요. 후배님은 지금 몇 살인가요?”

       “…그걸 이제 물어봐요?”

       “그, 그럴 수도 있지 않나요? 저는 다른 아이들의 나이도, 미어칸트 사제님의 나이도 몰라요. 누군가에게 나이를 물어보는 게 처음이니까 다른 뜻은 없…”

       “괜찮아요. 뭐. 상처 안 받았어요.”

         

       자박자박 풀이 밟히는 소리.

       아이린은 조심스럽게 그를 돌아보았다.

         

       “…진짜죠?”

       “에이. 진짜죠. 사내대장부가 이런 걸로 상처를 받겠어요? 그냥 좀. 약간 삐진 정도?”

       “미, 미안해요. 그냥 정말 다른 의미는 없…”

         

       자하드가 웃었다.

         

       “농담이에요. 선배님은 귀여운 부분이 있네요.”

       “뭐, 뭐라고요?”

       “처음에는 완전 딱딱하게 대해주셨잖아요? 인형인 줄 알았어요. 사람이 예쁘기만 하면 다인가. 어느 정도 인간미가 있어야지.”

       “인간…뭐요?!”

       “그래. 그렇게 화를 낼 줄도 알아야죠.”

         

       자하드가 아이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때요. 이제 긴장 좀 풀렸어요?”

       “…아으?”

         

       아이린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더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다.

       설마 다 알고 배려해주었던 건가. 아이린은 찌릿하고 자하드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방금 그 발언은 용서 못 해요. 제가 훨씬 연상이잖아요.”

       “연상인 줄 누가 알아요?”

       “제가 알아요. 후배님은 아무리 봐도 열 다섯 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니까.”

       “…확신해요? 내가 그보다 더 많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확신해요. 그보다 더 많았으면, 키가 저보다는 컸을 테니까요.”

       “저 어제보다 0.5cm 더 커졌거든요?! 일 년만 기다려라. 선배님을 완전 밑으로 내려다볼 예정이니까 각오하세요.”

       “후후.”

         

       아이린은 걸음을 멈췄다. 옆에서 따라오던 자하드를 바라보았다.

         

       “기대해도 돼요?”

       “…기대요?”

       “네.”

       “뭐, 키 정도야…설마 여기서 안 크겠어요? 안 크면 신이라도 혼내러 가야지.”

       “불경해요.”

       “제가 그분과 좀 친해서.”

         

       친하다라. 남이 했으면 인상을 썼을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린은 그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너그러워진다. 그의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표정이 풀리고 만다.

         

       해야할 말.

       더는 미루면 안 되는 말.

         

       “…고마워요.”

         

       아이린은 손을 뻗었다. 그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자하드. 나를 도와줬던 것, 나를 감싸줬던 것 전부 잊지 않을게요.”

       “그냥 나 좋자고 한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자식이 마음에 안 들기는 했잖아요? 살다 살다 그런 쓰레기는 처음 봤다니까.”

       “그래도 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다면…난 아마 그날을 평생 저주하면서 살았을 거예요.”

         

       손끝에 스치는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살짝 날카로운 눈매도 사랑스럽다.

       아이린은 조용히, 천천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은혜는 갚을게요.”

       “은혜가 아니라니까요.”

       “그러면 뭔가요?”

       “…존경심?”

       “존경이요?”

       “선배님은 제게 많은 걸 가르쳐주었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선배님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가르쳐줄 거로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선배님은 제가 은근슬쩍 약 올려도 자기 본분에 충실했잖아요.”

         

       자하드가 쓱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이린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제가 그런 사람 좋아하거든요.”

       “조, 좋아…?”

       “존경하거든요.”

       “바로 바꿀 필요는 없거든요.”

         

       아이린은 고개를 휙 돌렸다. 자하드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있잖아요. 선배님.”

       “뭔가요.”

       “저 점수 몇 점이에요?”

       “…점수라뇨?”

       “첫날에 말씀하셨던 거 있잖아요. 감점이 엄청 많던 거. 요즘 들어 한 번도 안 내뱉으시던데…이 정도면 벌레는 졸업했나요?”

       “벌레는 무슨 벌레인가요.”

         

       아이린이 자하드의 머리에 가볍게 꿀밤을 때렸다.

         

       “눈앞에 있는 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뭔가 부끄러운 기분. 그래도 말하고 싶어서 아이린은 끝까지 말을 내뱉었다. 중간에 조금 떨렸지만 괜찮겠지.

         

       “사랑스러운 제 후배밖에 없는걸요.”

       “…아하하.”

         

       자하드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귀가 약간 붉어져 있었다.

         

       “그건 좀 부끄럽네요.”

       “부끄러워요?”

       “에이. 저라고 부끄러운 게 없을 리가.”

       “그래요? 정말이죠?”

         

       아이린은 지긋이 그를 쳐다보았다. 아아. 라이시여.

       대화를 하다 보니 깨달았습니다. 지금의 배덕감을 부디 용서해주시길.

         

       “그래서 정말 몇 살이에요?”

       “열다섯 맞아요. 선배님은요?”

       “저는 열여덟이니, 세 살 차이가 나네요.”

         

       평생 남자를 모른 채 살아가려 했으나, 이건 어쩔 수 없는 정당방위인 거 같아요.

       부디 자비를.

         

       “적당하네요. 무척이나.”

       “…뭐가요?”

       “그런 게 있어요. 이번에 가는 파견, 아마 제가 갈 거 같아요. 후배님과 약속을 깨버렸네요.”

       “이미 주먹부터 나간 순간 못 갈 걸 알았는데요. 뭐. 괜찮아요. 저는 천재니까, 어디에서든 배울 수 있어요.”

       “…그 말이 맞아요. 후배님은 천재니까, 분명 많은 걸 배울 수 있겠죠. 후배님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 만큼, 저도 많이 배울게요.”

       “우리 지부에서도 성기사 출신이 나오는 건가요?”

       “반드시 되겠어요.”

         

       목표가 하나 더 생겼다. 성기사는 태양신교의 교단 본부에서도 가장 잘 사는 사제 중 하나.

         

       돈을 벌면, 분명 할 수 있겠지. 교단 본부가 있는 도시에 집 한 채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게 분명하다.

         

       거기서 단둘이서, 매일 밤 성경을 읽으며.

         

       “모든 게 끝나면, 데리러 올게요.”

       “…예? 왜요?”

       “후배님. 아까 점수에 대해서 물었죠?”

         

       아이린은 몇 걸음 앞서나갔다. 빙글 돌아 그를 쳐다보았다. 흩날리는 은발. 푸른 눈에는 별빛이 담겨 곱게 빛났다.

         

       한순간 멈춰버리는 시간. 아름다움이 형상화된 것 같은 밤의 풍경 속에서 그녀가 속삭였다.

         

       “만점이에요. 축하해요.”

         

         

         

       . . .

         

         

         

       …프러포즈였나?

       설마 아니겠지.

         

       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어째서인지 후련해 보이는 표정의 미어칸트와 아이린의 배웅을 받으며, 도시 베넬다를 떠났다.

       그러고보니 처음에는 이곳에도 마차로 왔지 않았던가. 허허. 이것참.

         

       금의환향인가!

         

       아니지, 고향이 없으니 뭐. 그 정도는 아닌가.

         

       “이, 이거 좀…느슨하게 해주면…”

       “닥쳐라! 이단!”

         

       옆에서 꿈틀거리는 베버릭을 쥐어팼다. 이단심문관들이 움찔했으나 말리지는 않았다.

         

       “이단이니…그럴만 하지.”

       “손톱 안 뽑는 게 어디야.”

       “신실한 형제님 아니던가.”

       “패는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암.”

         

       구워 삶은 보람이 있었다. 그 철두철미한 라다토크마저 한 마디를 얹지 않았으니!

       그저 쓱 눈을 떴다가 다시 감은 게 끝. 나는 심심할 때마다 베버릭을 쥐어 팼다. 그동안 당한 걸 생각하면, 아무리 패도 패도 모자랐다.

         

       이게 진짜 스트레스 풀이지! 그렇고말고!

         

       마차는 부지런히 나아갔다. 라의 교단 본부가 위치한 곳은 잘 사는 도시 중의 하나인 도시 ‘아인카드(Ainkad).‘

         

       제법 먼 곳이라 마부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 중간중간에 들릴 마을도 없어 야영하기도 했다.

         

       매일 밤 고기를 굽는 게 얼마나 귀찮은지 아는가.

         

       나는 은근슬쩍 집게를 놓으려 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들이 대놓고 눈치를 줬다.

         

       “형제님의 고기를 맛보고 싶군.”

       “아, 알아서 하세요. 저 진짜 많이 구워줬잖아요.”

       “다른 녀석들이 굽는 건 영 맛이 없어서 말이지.”

         

       나는 눈물을 머금고 고기를 구웠다. 이 새끼들. 신성 재판 건만 끝나봐라.

       다시는 안 구워줄 테다!

         

       베넬다를 떠난 지 육 일 째 되던 밤. 나는 어김없이 고기를 굽고 있었다. 이 망할 이단심문관들은 디모나 밑에 있는 녀석들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무력들이 상당했다.

         

       밤마다 지치지도 않고 짐승을 덥석덥석 잡아 오니 사제들이 아니라 무슨 사냥꾼을 보는 기분.

         

       나는 눈물을 머금고 산돼지 고기를 구웠다. 아예 바비큐 느낌으로 나무 꼬챙이에 끼워 빙글빙글 돌렸다.

         

       이단심문관들이 모여 군침을 삼켰다. 그러다가 일부가 문득 일어섰다.

         

       “…기척이군.”

       “주변에 누군가 있다.”

         

       나는 덩치들 사이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눈에 보이는 건 기나긴 상단이었다. 태양신교의 문양이 찍혀 있는 마차들.

         

       “…교단 휘하의 상단?”

         

       근데 왜 거지꼴이냐?

         

       반파된 마차를 끌고 걸어오던 이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부리나케 달려온 남자가 넢죽 엎드렸다.

         

       “아이고! 사제님들! 영락없이 죽을 줄 알았더니, 이렇게 만나게 될 줄 몰랐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라다토크의 물음에 남자가 굽신거리며 답했다.

         

       “망할 놈의 산적들이 상단을 습격했습니다! 교단으로 가져갈 공물이 전부 도둑맞고 말았습니다! 이대로 돌아가면 저희는 전부 죽을 게 분명합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도와주고 싶지만…저희도 지금 급한 용무가 있어서…”

       “하, 하지만 사제님! 산적들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적 중에 일부 성흔을 가지고 있던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상단주님! 그, 그건…!“

       ”자네가 보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자네를 믿네!“

         

       남자가 처절하게 외쳤다.

         

       “뱀 교단 녀석들입니다! 그 썩어빠진 독사들이 저희를 공격했습니다!”

       “뱀이라면 설마…”

         

       라다토크의 얼굴이 굳었다.

         

       “교단 ‘나가(Naga)’. 말씀이십니까?”

         

       내 얼굴 또한 굳었다. 먹던 돼지고기를 툭 내뱉었다.

         

       아니, 시발!

         

       엮여도 하필 그 광신도랑 엮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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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ladin Monopolizes the Sacred Relics

The Paladin Monopolizes the Sacred Relics

성기사가 성물을 독차지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 world where magic reigns supreme and the influence of gods wanes, a young boy finds himself unexpectedly thrust into the role of an acolyte in the declining Sun God’s Temple. Blessed with the divine stigma of the Sun God, he must navigate the temple’s internal politics, the hostility of his fellow acolytes, and the challenges that come with his newfound powers.

As he delves deeper into the mysteries of the temple, he discovers hidden secrets and powerful artifacts that could change the course of his destiny. With the guidance of an enigmatic senior acolyte and the unwavering faith in his own abilities, he sets out to prove his worth and carve his own path in a world that has all but forgotten the true power of the div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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