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9

       

         

         

       도시 외곽에 위치한 세이프하우스 안에서 베르너 그라임은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국장님… 정말 인사하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카린 메이븐 소위가 조심스럽게 되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다지 좋은 인연도 아니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말투였으나, 카린은 그 속에 숨겨진 진의를 어렴풋이 알아챘다.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고 있으려니, 창문을 바라보던 베르너가 입을 열었다.

         

       “조금, 머리가 복잡하군. 카린.”

         

       “아… 포비든 레이크 복귀는 내일이니까, 오늘만큼은 눈을 좀 붙이고 계세요. 어제도 하루종일 병실에 계셨잖아요.”

         

       “그건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대신 윗층에 있는 사람들 좀 불러주겠어?”

         

       “아… 네, 넵…! 지금 바로 다녀올게요.”

         

       “고맙군, 카린. 너도 지금까지 고생했으니 푹 쉬도록.”

         

       그녀는 베르너에게 경례를 하곤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왔다.

         

       “….”

         

       레아 길리아드.

         

       카린은 그 이름을 곱씹어보았다.

         

       동부군관구 브란베르크에 도착했던 첫 날, 발작을 일으킨 그가 애타게 부르던 바로 그 이름이었다.

         

       밤새 그 곁을 지켰던 카린이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베르너가 죽은 연인이나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했건만, 그녀는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가족도 아니었다.

         

       같은 부대원이었던 것이다.

         

       결국 고민 끝에 카린이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다.

         

       ‘그녀가 일방적으로 베르너를 떠났다.’

         

       그것 밖에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카린은 바닥에 엎드려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베르너의 모습을 떠올렸다.

         

       쉽게 상상조차도 되지 않는 광경이었으나, 그렇기에 이보다 더 비참할 수가 없었으니.

         

       “….”

         

       카린은 어쩐지 마음이 쿡쿡 찔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껏 자신이 버려졌던 수많은 기억이 떠올라 괴로웠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여기서 자신마저 발목을 잡을수는 없지 않은가.

         

       베르너 그라임은 충분히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럼 자신은, 부관으로서 임무에 충실하기만 하면 될 뿐.

         

       카린은 주먹을 꾹 쥐고는,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베르너 국장께서 직접 불러온 협력자들이 잠시나마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

         

         

         

       카린이 떠나가자, 베르너는 제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책이었다.

         

       인원을 식별하는 것에 조금 더 신중했으면, 단순히 시각에만 의존하여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레아 길리아드가 중상을 입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애써 인식하지 않으려 했던 후회의 감정들이 밀물처럼 몰려든다.

         

       만약 여기서 레아가 죽었다면?

         

       베르너는 지체 없이 창문 밖으로 몸을 내던졌을 것이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했던 선택들이, 또 한번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던 것이니.

         

       죽음과 동반되는 고통으로 속죄함과 동시에, 다음 회차를 시작해 그 죗값을 갚아나갔겠지.

         

       물론 나노머신 치료제를 챙겨온 덕분에, 그녀가 죽임당하는 끔찍한 일만은 막을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자신이 실패한 것은 실패한 것이었다.

         

       레아가 살았다고 해서 그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으니.

         

       결국 베르너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평안한 삶? 군을 은퇴하여 유유자적하게 살아간다?

         

       이제까지 살아왔던 모든 삶을 부정하는 개소리나 다름 없음을 깨닫는다.

         

       베르너 그라임.

       아니, 그레이브야드의 전 사령관 루터스 에단에게 주어진 의무는 아직 해제되지 않았다.

         

       빛과 그림자는 필연적이다.

         

       그녀들이 희생당하는 결과를 비틀고, 그녀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끝에 도달한 회차.

         

       그녀들이 영원히 빛 아래에 있으려면.

         

       자신은 영원히 어둠 속에서 있어야 한다.

         

       그녀들의 손에 더 이상 피나 더러운 오물을 묻히게 할 수는 없다.

         

       그건 그레이브야드에서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곳은 모든 추억이 깃들어있는 고향과도 같은 장소였지만, 모두의 고통이 새겨져있는 무덤가였으니.

         

       그래서 요새 사령부를 해체시켰다.

         

       과거를 딛고 일어나는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만큼, 그레이브야드의 이들은 무덤가를 뒤로하고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과연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절망에는 빠지지 않도록.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가정을 꾸리고, 자신을 똑 닮은 아이들과 함께 웃음 짓는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베르너는 그럴 수 없다.

         

       회귀.

         

       이 저주받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그는 결코 전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

         

       끊임없이 과거로 되돌아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행복을 방해하고, 안식을 망치려고 하는 이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제거해야만 했다.

         

       “이제야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알겠군.”

         

       베르너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바보같은 짓이란 말인가?

         

       애써 후회하지 않기로 결심했으면서, 또 후회할 선택을 하다니.

         

       그녀들에겐 아직 자신이 필요했다.

         

       티탄이 사라진 이후에도, 그녀들의 행복과 안전을 위협하는 것들은 수두룩했다.

         

       베르너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번뜩였다.

         

       아카샤에 남겨놓았던, 수많은 회차 속 루터스 에단의 모든 유지(遺旨)를 마무리 지어야만 한다.

         

       설령 눈앞에 있는 것이 독이 든 성배라 할지라도, 그 잔을 묵묵하게 들이키리.

         

       이번에도 그럴 뿐이었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베르너가 결심을 굳힌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준장님.”

         

       티탄에게서 인류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을 때, 루터스 에단 준장은 양지와 음지 모두를 섭렵한 인물이었다.

         

       그레이브야드의 이들이 양지의 동료였다면, 당연히 음지의 동료도 있는 법.

         

       “들어와.”

         

       그들이었다.

         

         

         

       ===

         

         

         

       다섯 번째 회귀 즈음이었을 것이다.

         

       루터스 에단은 자신이 가진 필연적인 한계를 체감하게 되었다.

         

       인류는 티탄하고만 싸우고 있지 않았다.

         

       인류 그 자체와도 싸우고 있었으니.

         

       세상이 당장 내일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제국 전체를 뒤덮었고, 제국은 온갖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총통의 권위가 더욱 견고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에게 군사적 식견은 없었으나 정치적 능력만큼은 뛰어났기에, 그는 전선의 관리는 최고 사령관 아서 필리아스에게 맡겨두고 국내 정세를 안정화시켰다.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때려잡고, 국가내란죄를 물어 모조리 처형했다.

         

       운이 좋으면 수용소.

       그것도 아니라면 사형.

       운이 나쁘면 일가친척이 모조리 몰살당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총통이 마냥 떳떳한 방법만을 동원하진 않았다.

         

       혁명파에 이은 국민파의 일원들이 그 당시에 어마어마하게 희생당했으니까.

         

       없던 죄목도 만들어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하던 총통의 잔혹함에 혀를 내두르기도 잠시.

         

       루터스는 그것 역시 일종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전황을 바꿀 수 없었다.

         

       완전한 승리를 위해서는 수면 아래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둠조차 이용해야 한다.

         

       다섯 번째 회귀에서 깨달은 진리.

         

       그렇게 여섯 번째 회차에서 연을 대둔 사람들은 마흔 번에 이르는 회차에 이르기까지 루터스 에단의 충실한 그림자가 되어 주었다.

         

       일명 ‘비석의 주춧돌’.

         

       베르너의 말에 다섯 명의 남녀가 우르르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은퇴한다고 했을 땐 우리 준장님이 드디어 정신이 나가버리셨나 했는데.”

         

       얼굴에 흉터가 죽죽 그어진 남성이 유쾌하게 웃는다.

         

       ‘대부’ 마테우스였다.

         

       그는 수도 일대의 폭력조직을 이끌던 조직폭력배의 두목으로, 국민파 탄압 당시에 총통의 명령에 반발해 숙청당했다.

         

       때마침 도움의 손길을 내민 루터스가 아니었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운명.

         

       때문에 마테우스는 그 후로 북쪽인 그레이브야드로 이동하여, 생존한 조직원들과 함께 루터스의 물밑 작업을 도왔다.

         

       비단 조직폭력배 두목인 마테우스 뿐만이 아니다.

         

       강력한 불법 약물을 제조하던 마약상, ‘헤타이라’ 도로시.

         

       어렸을 적부터 살인청부업을 천직으로 삼아왔던 ‘살귀’ 레고로도.

         

       마지막으로 밀수업과 정보를 주로 다루는 ‘백인대장’ 살로카.

         

       모두 뒷세게에서는 쟁쟁한 인물들이었으나, 동시에 루터스 에단의 충실한 수족이기도 했다.

         

       그들의 악명은 민간에도 널리 퍼져있는 만큼, 함께 끌려온 혁명파 다이엔 슈미트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이야.”

         

       “어머나, 못 본 사이에 엄청나게 훤칠해지셨네요. 본판도 원래 장난이 아니었다지만… 이건 좀 탐스러운데.”

         

       도로시가 제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가대며 유혹했다.

         

       당연히 베르너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쌀쌀맞은 건 여전하지만요.”

         

       “그런 어줍잖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부른 게 아니다. 대강 살로카에게 들어서 알고 있겠지.”

         

       베르너는 넷 중에서도 가장 수수한 복장을 입고 있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머나, 말해줘야 했던 거였어요? 난 다 알고 온 줄 알았는데~.”

         

       백인대장 살로카.

         

       그가 백인대장이라는 이명을 가지게 된 이유는 별 거 없었다.

         

       정보는 곧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살로카는 성대모사와 변장의 달인이기도 했으니, 무려 백 명분에 달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는 간드러진 도로시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이봐요, 흉내쟁이. 내가 다시 한번 나를 따라하면 죽여버린다고 했어요, 안 했어요?”

         

       “죽여버린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지?”

         

       이번에는 마테우스의 목소리였다.

         

       다만 마테우스는 오히려 살로카를 향해 빵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크하하하, 씨발 진짜로 골때린다니까. 그래 이거였어, 6개월동안 이 새끼를 안 봐서 얼마나 그리웠는 줄 알아?”

         

       정작 놀림의 대상이 된 도로시는 울그락불그락 얼굴을 붉히며 분노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장난은 그만하고, 그래서 어떤 용건으로 부르신 겁니까, 준장.”

         

       “사실 타겟은 많죠? 손을 털겠다고 말하셨으면서 다시 우리를 소집할 정도면 어지간히 거물일 거고… 그렇다면 총통? 최고 사령관? 그것도 아니면… 겁 대가리 없이 주인을 물어버린 아르헨 오르카?”

         

       “아 그래… 아르헨 그, 썅년이 당신을 배신했다고 들었어요. 매번 볼 때마다 사람을 무시하는 그 시선이 같잖아서, 고농도 미약에 한번 푹 담가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은데.”

         

       “…선 넘지 마라. 죽여버리기 전에.”

         

       그러나 아르헨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름 우호적이던 베르너의 목소리가 돌변한다.

         

       도로시는 그 모습에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 알았어요. 왜 그리 화를 낸담. 맘대로 말도 못해….”

         

       “아르헨은 잘못 없다. 내가 의도한 대로 행동해줬을 뿐이야.”

         

       “하긴 아무리 기쎈 그 여자라 해도 당신을 대놓고 적대하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베르너가 네 명의 주춧돌 사이에 끼어서 벌벌 떨고 있는 다이엔 슈미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 우리가 해체해야할 대상은 한 두명이 아니야.”

         

       “그럼 군부 그 자체라던가?”

         

       “아니, 혁명전선이다.”

         

       루터스 에단.

         

       그가 사용하는 다른 신분은 비단 안전국 국장 베르너 그라임 뿐만이 아니었으니.

         

       제국 뒷 세계의 거물이기도 한 그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혁명전선, 그 놈들을 모조리 찢어 죽여야 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사실 주인공은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100% 선인이 아닙니다
    다음화 보기


           


A War Hero With No Regrets

A War Hero With No Regrets

후회 안 하는 전쟁영웅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victory earned after forty regressions.

It was now my turn to leave their side.

Not by anyone else’s will, but by my own.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