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병이 적습니다.”
“동쪽이나 서쪽에 병력을 배치한 건가.”
물속에서 머리만 남긴 채로 중얼거리던 금천강은 함 속에 고이 밀봉된 벽력탄을 만지작거렸다.
‘일이 끝날 때까지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하나하나가 천금 같은 물건이지 않은가. 가능하면 쉽게 일이 해결되기를 바라며 그는 손가락에 내공을 끌어모았다.
‘슬슬 움직일 때다.’
그는 물속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원래라면 거품 몇방울 이는 게 끝이었겠지만, 내공을 실었기에 얆은 기파가 파도를 타고 뒤쪽에 있는 흑사대원들에게 퍼졌다.
‘두 패로 나눠서 움직여야겠군.’
금천강은 언젠가 배웠던 손자병법을 떠올리며, 신호를 세 번 보냈다.
준비한 대로 양측으로 갈라져 침투하라는 지시. 흑사대원들은 삼호와 흑사대주 금천강을 중심으로 반으로 갈라져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하군.’
그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의문이 떠올랐다. 뭍까지 거리는 이제 채 1리도 남지 않은 거리. 조금만 헤엄치면 부두에 닿을 거리까지 왔건만, 아무도 반응이 없다고?
‘서쪽과 동쪽에 병력을 몰아넣었나?’
금천강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망설임 때문이었다.
혹시 이게 적의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정신을 다잡았다.
이미 시작한 이상 후퇴는 불가능하다.
죽거나, 죽이거나.
선택지는 이미 두 개밖에 없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기를 꺼내야 할 터.
금천강은 목책 앞에 붙어 잠시 숨을 돌렸다. 뒤이어 흑사대원들이 하나둘씩 목책에 붙어 숨을 죽였다. 건너편도 마찬가지인 상황.
금천강은 시선을 돌려 심복인 삼호를 쳐다보았다. 그의 충실한 심복인 삼호는 금천강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금천강이 고개를 까딱였다. 꽤 먼 거리였지만, 그를 주시하고 있었던 삼호는 단번에 신호를 알아채고 단전에서 내공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하나.
둘.
셋.
둘은 한 몸인 것마냥 동시에 물속에서 튀어나와 목책을 넘어갔다. 뒤이어 수백의 흑의인들이 그를 따라 조용히 목책 너머로 착지했다.
“…조용하군.”
남쪽 항구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마치 그들이 올 것이라는 걸 진작에 눈치채고 전부 숨어버린 모양새. 금천강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뜨며 말했다.
“주변을 경계하며 은밀하게 해남검문을 향해 접근한다.”
흑사대가 한밤중에 골목을 누비는 고양이처럼 조용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변을 경계하면서 한 발짝.
지나칠 정도로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에 의문을 품으며 한 발짝.
신경을 곤두세우며 한 발짝.
“대주님. 전부 비어있습니다.”
“모두 피난 간 것 같습니다.”
‘마을 사람은 전부 대피한 모양이군. 그럼…’
금천강은 가슴팍에 끼워놓은 함을 만지작거렸다.
십육호에게 건넨 하나를 제외하고 두 개. 시의적절하게 던지면 적을 일망타진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북쪽에서 벽력탄을 사용했으니 해남검문도 벽력탄의 존재를 눈치챘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건 희망 사항에 불과하리라.
금천강은 수하들이 잘 뒤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며 마을 외곽을 따라 이동했다. 해남검문을 들어가려면 마을에서 곧장 이어진 길로 가는 것이 보통이지만, 흑사대는 어디까지나 침투조.
손님도 아닌데 길을 따라 들어갈 수는 없었다.
첫 실전이라도, 그 정도 생각할 머리는 있었으니까.
‘해남검문에 모여있는 건가.’
금천강은 함 속의 내용물을 꺼내 품속에 집어넣고, 함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범의 아가리로 얼굴을 들이밀어야 한다니. 암울하군.”
“금 대주. 허나 이건 대업을 위한 과업입니다.”
“나도 안다. 그러니…목숨을 걸어야겠지.”
용담호혈(龍潭虎穴)에 들어가는 심정이란 게 이런 걸까. 금천강은 생소한 감정에 쓴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쓴웃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금천강은 굽혔던 무릎을 폈다.
“전원, 최대한 빠르게 침투한다.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전부 베어라.”
대답 대신 흑의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선두에 선다.’
수틀리면 벽력탄을 적들이 모여있는 곳에 던져버리리라.
금천강은 발끝에 내력을 모으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마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리라.”
한평생을 들었던 말.
이제는 정말로 그러기를 바라야 하는 순간이 왔다.
금천강의 발끝에 실린 내기가 터져 나오며 그의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 흑의인들이 해남검문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맞이한 것은…
“화살이다! 모두 검막을 펼쳐라!”
그의 말에 흑의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검막을 펼쳤다. 수백명의 무인이 일제히 검막을 펼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날아가는 수백발의 화살도 그에 못지않은 그림을 그려냈다.
화가가 있었다면 이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으리라.
살아있을 수 있다면.
어두운 밤하늘이 화살이 검에 튕겨 나가는 소리로 메워졌다.
“으윽…”
“우욱…이거 똥이잖아!”
“시발…”
검술이 아직 미숙해 검막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화살에 맞은 흑의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검막을 펼치던 동료들은 곁눈질로 슬쩍 낙오자들을 바라보고는, 굳게 마음먹은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구할 시간은 없다.’
애초에 등을 보여주는 순간 곧바로 고슴도치가 될 게 뻔한 상황이니 당연한 일. 흑의인들은 하나둘씩 생겨나는 낙오자를 버려두고 해남검문으로 가는 대로에서 화살을 날리는 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부 죽여라!”
“후퇴하라!”
허나 누구 마음대로 싸운단 말인가. 해남검문의 무인들이 신속한 움직임으로 뒤로 빠지자, 그들에게 달려들던 흑의인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것 마냥 볼 수밖에 없었다.
거리가 꽤 되는 데다가, 산의 초입에 도달한 순간 바닥이 꺼졌으니까.
“대주! 함정입니다!”
“사십 이호! 괜찮나!”
“…죽은 것 같습니다!”
“…독이라고? 설마 당가가…”
“당가는 아닌 듯합니다.”
‘활에 함정이라.’
금천강은 이대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면 큰 피해를 볼 것임을 직감했다.
보나 마나 해남검문 무인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함정이 깔려있을 테니까. 아무리 고된 훈련을 받은 흑사대라도 함정을 피하면서 해남검문과 검을 맞대야 하는 상황은 버거웠다.
‘이런 식으로 싸우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대부분의 무인은 활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정파의 무인은 더더욱 그런 면모가 있어서, 그는 해남검문이 죄다 활을 들고 방어한다는 상황을 예상치 못했다.
그렇게 그들의 진격이 막힌 동안,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윌리엄이 혀를 찼다.
“아쉬운데요. 무작정 돌격했으면 쉽게 상대했을 텐데.”
윌리엄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산 초입에서 멈춰선 흑사대를 내려다보았다.
저들의 뒤에 남쪽 항구 촌락이 존재하는 이상, 독화살과 함정만으로는 상황을 끝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꽤 유의미한 타격을 준 것 같군.’
전장에서 걸리적거리는 건 시체가 아니다.
전장에서 가장 걸리적거리는 것은 다름 아닌 부상을 입은 동료의 존재. 저놈들이 강시라면 모를까, 살아있는 사람인 이상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부상을 당한 동료만큼 눈에 밟히는 게 있을까.
윌리엄은 전장에서 한창 활약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당한 걸 내가 써먹고 있다니.’
“저놈들이 물러나는 것 같구나.”
장문인이 꺼낸 말에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장문인의 말대로, 적들은 쉽사리 해남검문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함정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이리라.
보통이라면 후퇴를 고려해보겠지만…마교의 무인들이 그럴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해남검문의 무인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은 배를 버리고 항구에 들어왔으니.
그러니, 저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개.
비어있는 남쪽 항구로 돌아가서 재정비하고 다시 전투에 임하던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돌격해오거나.
‘돌아가거나 숨는 선택지는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니 사실상 선택지는 하나.’
윌리엄은 폴액스를 바닥에 꽂아 넣고 손을 들었다. 해남검문의 무인들과 미리 짜 맞춰 놓은 신호. 활을 내려놓았던 무인들이 일제히 화살을 메기고 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흑의인들의 얼굴에 긴장이 달렸다. 이대로라면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다가 전멸당할 터. 막상 뒤로 도망치려 해도 텅 빈 남쪽 항구뿐.
배는 바다 한복판에 떠 있기에 배를 타고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숨어서 농성하면 천천히 말라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금천강은 상황을 타개하려면 한 가지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노린 건지, 아니면 우연인 건지.’
어느 쪽이든 그가 쥔 패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것. 금천강은 품에 고이 모셔져 있는 벽력탄을 쓸데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어떻게든 접근해야겠군.”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흑사대원들이 하나둘씩 그의 앞으로 나와 그를 둘러쌌다. 어떻게든 접근만 하면 벽력탄으로 큰 피해를 줄 수 있으니, 시도라도 해봐야 할 상황.
금천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눈을 뜨고 읊조렸다.
“술은 저승에서 사겠네.”
흑의인들이 넓게 퍼진 채로 땅을 박찼다.
“결국 돌진을 택했나.”
윌리엄은 침착한 얼굴로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화살이 시원한 밤바람을 가르고 적들을 향해 날아간다.
활 한 번 쏴본 적 없는 무인들의 활 솜씨란 처참해서, 인접한 거리가 아닌 이상에야 명중률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무시하고 직진으로 달려도 무방한 수준.
하지만 그런 화살이 수백발에, 함정까지 더해지면…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화살조차 위협적으로 변하는 법.
“바닥에 함정이 있다!”
“올가미를 조심해!”
“그물이다!”
“젠장!”
사방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금천강은 오로지 앞만 보며 달려 나갔다. 어떻게든 벽력탄만 던지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었으니까.
확실한 희망이 있었기에, 그의 눈에는 아직 투지가 가득했다.
그리고, 눈에 실린 투지를 본 윌리엄이 폴액스를 바닥에서 뽑아냈다.
“저놈이 대장인 모양입니다.”
“자네가 나설 생각인가?”
“예. 저놈이 벽력탄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 이쪽으로는 아예 얼씬도 못 하게 하겠습니다.”
“그러다 자네가 다칠 수도 있네.”
“걱정마십시오. 벽력탄에 대한 대책은 이미 해두었습니다.”
윌리엄은 허리춤에 매달아 놓았던 호리병을 꺼내 들었다. 그는 호리병의 뚜껑을 열고는, 장문인을 바라보며 손을 활짝 펼치며 선언했다.
“벽력탄을 쓰지도 못하게 만들어놓겠습니다.”
‘이 짓 해보는 것도 오랜만인데.’
기사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윌리엄이 앞으로 나아갔다.
목표는 누가 봐도 ‘내가 대장이오’하고 기운을 흩뿌리는 금천강.
윌리엄은 가벼운 움직임으로 해남검문과 마교 사이에 착지해 금천강의 앞을 막아섰다.
“색목인…?”
“네가 대장인가?”
“…비켜라. 색목인.”
“그건 안될 말이지. 네가 벽력탄을 들고 올라가게 할 수는 없어서 말이다.”
윌리엄이 천천히 폴액스를 들어 올렸다. 자루 끝부분을 금천강을 향해 겨눈 자세. 그것이 곧 기수식임을 눈치챈 금천강이 위쪽의 눈치를 보며 검을 뽑아 들었다.
눈앞의 색목인을 잡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터.
‘빠르게 처리하고 달려나가야겠군.’
이렇게 발목을 잡힐 수는 없는 노릇.
“…앞으로 나선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색목인 무사와 마교의 무사가 격돌을 시작했다.
와! 기사 VS 마교!
SYSTEM:작가는 장염에 걸렸다! 작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