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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

       인생은 회한의 연속이다. 각 지점은 미분가능하지 않다.

         

       또한 역함수는 없다.

         

       **

         

       황성까지 도착하는 동안 복도에 예술품 몇 개가 깨져있다는 걸 알았다.

         

       제2황자가 홧김에 부순 것들이다.

         

       성깔이 사납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몇 년 사이에 이 정도로 괴팍해졌을 줄이야.

         

       클라이스는 궁중에서 근무하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알현실로 들어갔다. 평소라면 똑바로 놓여있어야 할 카펫이 지진이라도 만난 것인 양 스리슬쩍 휘어있었다.

         

       그 앞에서는 황제와 제2황자가 서로를 쏘아보고 있었다.

         

       “어제부터 저런 식이었어요.”

         

       시녀가 한숨을 내쉬며 물러났다.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무너져가던 멘탈을 어떻게든 추스른 클라이스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거 누구신가요? 저와의 약속을 저버리신 사대공작 아니십니까?”

         

       비릿함이 묻어있는 목소리가 알현실 천장을 타고 쩌렁쩌렁 울렸다. 영 좋지 못한 음색에 클라이스의 미간이 한데 모였다.

         

       클리온 필리우트 제2황자.

         

       제 형의 어미가 측실이었던 탓에 황제의 두 번째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음에도 필리우트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될 것으로 지목된 망나니.

         

       망나니라고는 하나 뒷배는 탄탄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 축출당했을 것이다.

         

       성격이 고약하고 여성편력이 심하다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그를 지지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황실 내 정치에서는 그런 인간 밑에서 아부하는 인간군상도 어지간히 있는 법이다.

         

       클리온이 클라이스의 코앞까지 다가와 멈췄다. 그는 한 손에 예장용 검을 들고 있었다.

         

       ‘저걸로 사치품을 깨부수고 다닌 거로군요.’

         

       제 앞에서 설렁거리던 클리온이 날카로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스펠트 공작님, 저에게 금안족 소녀를 양도하신다고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약속을 파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시는 거죠?”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발뺌을 하려고 해─!!”

         

       콱!

         

       예장용 검이 카펫 아래로 틀어박혔다. 백성의 혈세로 만들어진 황궁의 기물이 또 하나 파손되었다.

         

       “필리온, 하스펠트 공작 앞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아버지. 아버지 같으면 이 상황이 부당하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제가 시종을 시켜서 다 봤습니다. 하스펠트 공작이 저에게 내주기로 한 노예년 목줄을 다시 채우고 다닌다는 사실을요!”

       “이 분수도 모르는 것, 아직 너에게 양도되기 전이지 않느냐! 그동안 공작이 자기 노예를 제멋대로 부리든 말든 네가 뭔 상관이라는 거냐!”

       “답답해 죽겠군요! 아버지께선 하스펠트가 뭔 짓을 벌였는지 듣지 못하셨습니까?”

       “이 녀석이 갈수록 싸가지가 없어지는구나! 애비는 널 그리 가르친 적이 없다─!!”

         

       황제의 노성에 클리온은 잠시 움츠러들었으나 곧 고개를 꼿꼿이 펴고는 항변했다.

         

       “그 노예년이 아카데미 입시에 지원했단 말입니다!”

       “흐음, 그게 진실인가?”

         

       그래봤자 황제에게 유효한 반응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그 노예가 아카데미에 지원하건 말건 별 신경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일전에 클라이스가 황제와 대화를 나눴을 때도 황제는 이런 반응을 보였었다.

         

       평민의 여식을 취하는 것이라면 몰라, 고작 ‘희귀하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천민을 황궁에 들이려고 하다니. 황제는 분명 그 점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고 제 입으로 말했었다.

         

       그러니 이 부분에서는 가감 없이 말해도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클라이스의 대꾸에 클리온은 한껏 고개를 치켜들며 알현실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스펠트 공작이 인정했군요. 끝까지 부정하실 줄 알았는데. 그래요, 유통기간 얼마 안 남은 노예를 아카데미에 입학시키려 시도한 저의를 물어보고 싶군요. 무언가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아뇨, 그건 제가 벌인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지 않았으면 대체 누가 했단 말입니까? 귀신이라도 나타나서 재산 소유도 못 하는 노예년한테 원서비를 주고 떠났단 말입니까?”

       

       클라이스는 황태자가 3개월 전부터 자신과 자신의 노예를 염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군영으로 침입한 위장형 마수의 기척조차 느낄 수 있는 그녀인데, 그쯤이야 어려울까.

         

       황자가 자기 노예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시점에서 에테르가 아카데미 입시에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점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클라이스가 반격에 나섰다.

         

       “그 점이 괘씸하여 목줄을 채운 겁니다. 허튼짓 못 하도록 말이죠.”

       “…….”

         

       그리 말하니 앞뒤가 맞았다. 노예가 그 이상으로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구속한다고 말한다면 황자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어졌다.

         

       대화와 대화 사이에 잠시간의 공백이 이어졌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다시 깨부순 건 클라이스 쪽이었다. 추가 진술을 하기 위해서였다.

         

       “황제 폐하. 폐하께서 이전에 명하신 북방 전선 시찰을 기억하십니까?”

       “암, 알다마다.”

       “그 시찰에서 갔다 온 직후, 저는 조수를 보기 위해 그녀가 묵고 있는 축사로 곧장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전 처음으로 조수가 아카데미 입시에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사실이 사실인 것과,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믿는 건 별개로 봐야만 하는 문제였다.

         

       “하스펠트 공작님, 거짓말을 치실 거면 좀 그럴듯하게 치십시오. 당신이 원서비를 대준 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느 년이 대 주었단 말입니까?”

        “글쎄요. 그 점까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콰아아앙─!!

         

       “지금 장난하나─!!”

         

       황태자의 급발진은 도저히 멈출 기미를 안 보였다. 알현실을 반파시켜놓은 성깔을 사대공작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걸 보아하니 제국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훤했다.

         

       비록 에테르를 남몰래 후원해준 흑막은 메리가였지만, 클라이스는 구태여 자신의 친구를 팔아먹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이실직고한다고 해서 클리온 황자가 그 말을 인정해줄 가능성도 희박했고.

         

       “예. 제가 하지 않았다고 증명할 수단은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제가 했다고 증명할 수단도 없는 셈이 됩니다.”

        “지금 저랑 말장난하시는 겁니까?”

       “말장난이 아닙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입니다.”

         

       이 이상 말해봤자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비록 그동안엔 말재간이 없었던 클라이스였지만, 최근 화술이나 전제군주제에서 귀족이 처세하는 방법을 다룬 책을 일독하며 최소한의 처세술은 익혀놓은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클라이스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황자께서 이번에 아카데미에 합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대화 주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렇네. 나름 20등 안쪽에 드는 성적으로 우수하게 입학했지.”

       “감축드립니다.”

         

       틸레트 아카데미의 입시 결과가 발표된 날은 다름 아닌 오늘이었다. 즉 황자의 합격 소식 또한 오늘에 이르러서야 확정된 것.

         

       20등 안쪽으로 합격했다면 특별반에 배정될 가능성이 높다. 클라이스는 머릿속에서 메리가가 자신에게 보여준 에테르의 합격통지서를 떠올렸다.

         

       ‘분명 입학석차가….’

         

       차석(次席), 수백 명에 달하는 입학생 중 2등이라는 자리.

         

       클리온 황자도 공부를 아예 안 한 건 아니겠으나, 에테르에 비하면 필기 성적이 심히 뒤처지는 수준이었다.

         

       실제 황실의 핏줄 같은 경우에는 아카데미 입시에서 가산점을 받는다는 등의 이야기도 있었으니 그런 비리를 모두 제외하고 난다면 두 학생 사이의 격차는 더 벌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도 두 사람 모두가 특별반에 배정되는 것만큼은 자명하다.

         

       ‘골치 아픈 일이네요.’

         

       분명 둘이 만난다면 영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러면 모든 걸 참작할테니 당장 그 노예를 데려오시죠. 가격을 깎아서라도 오늘 당장 거래해야겠습니다.”

       “황자 전하, 송구하지만 제겐 더 이상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깜빡하고 클라이스가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현재 에테르의 합격을 아는 사람은 입학처 직원과 헤를라인 교수, 그리고 당사자와 클라이스 본인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클라이스는 에테르가 아카데미에 지원해 합격했다는 사실을 황실의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애당초 에테르와 물리적으로 가장 가깝게 지낸 클라이스조차도 그녀가 합격했다는 걸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 정보가 황실까지 퍼졌을까?

         

       아니었다. 아카데미에서 굳이 합격생의 개인정보를 황실에 전달할 이유가 없었으며, 황실 또한 그런 사사로운 걸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현재 수요가 있는 건 클리온 황자 뿐이었다.

         

       “설마 그 노예년이 저와 같이 합격했다는 소리는 아니겠지요?”

       “정확하십니다, 전하.”

       “뭔…….”

         

       황자의 말문이 완전히 막혔다. 그 뒤에서 황제가 ‘호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태연한 반응을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아카데미는 황실과는 독립되어 제국과 인류를 구할 전투마도사들을 배출하는 기관. 이미 졸업한 교수라면 모를까, 그곳에서 가르침을 받는 학생은 어떤 외부 권력에도 제약받지 않는다. 어찌 보면 신성불가침의 땅과도 같았다.

         

       즉 아카데미에 학생으로 적을 두고 있는 이상 망나니 황자의 폭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반항할 수 있다. 오히려 에테르라면 황자를 거꾸로 밀어붙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이상 과실을 더 세세히 따지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하나 물어봅시다. 그 금안족이 아카데미에 지원해서 합격한 책임은 대체 누구에게 물어야 한단 소립니까?”

         

       셋 중 누구에게 책임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확실하지 않다.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는 의사를 보였던 것은 에테르였으며, 그걸 자신도 모르게 지원해준 건 다름 아닌 메리가였다. 하지만 자신이 주고 산 노예를 관리하지 못한 건 클라이스 그 자신이었다.

         

       “그건 제 불찰입니다.”

       “이제 와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제적시켜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네…?”

       “마법을 못 쓰는 종족인데 어쩌다 운 좋아 붙은 것이겠죠. 첫 학기만 하고 나가떨어지든, 돈이 없어서 학사팀에게 퇴짜를 맞든 결말은 똑같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클라이스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2022/07/31 : 클라이스와 황자 간 대화문을 전면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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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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