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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

       *

        

        

        “선배, 아이 참 우리 이런데서 보면 좀 곤란하다니까요? 고아원 좋잖아. 고아원. 그런 곳에서 만나야지. 내가 괜히 선배 고아원에 정기 후원자로 들어가 있는 줄 알아요?”

        “급한 일이다.”

        “씁… 선배님 성격에 급한 일이니까 이렇게 왔겠지. 애들은 또 왜 때렸어요. 진짜. 그냥 말만 전하지.”

        

        

        드미트리는 투덜거리며 이반을 근처 카페로 이끌었다.

        

        대학 근방의 카페 2층은 입학식이 끝나길 기다리는 수많은 시민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물론, 보기엔 그렇다는 뜻이다.

        

        드미트리가 이반을 이끌고 2층 계단을 통과하자마자 떠들썩 하던 카페가 한 순간 고요해졌다.

        

        

        “아, 다들 하던 거 해. 평범하게.”

        

        

        드미트리가 손을 휘적 흔들자 카페를 가득 채우고 있던 요원들은 다시 시민으로 돌아갔다. 한 가운데, 창가와 계단 모두의 시야에서 교묘하게 벗어난 테이블만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앉아요. 하, 여기 명당이었는데 이제 못 쓰겠네. 프리첸카야 한복판에 안가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아요?”

        “미안하군.”

        “됐어요. 그래서, 뭘 가져왔길래 그래요?”

        

        

        드미트리가 웃으며 손을 펴자, 이반은 품 안에서 작은 폭발물 세 개를 꺼냈다.

        

        순간 드미트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의 손이 부드럽게 이동해 소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자마자 이반이 말했다.

        

        

        “신관은 빼 뒀다.”

        “그걸 먼저 말해요 좀!! 아오, 간 떨어질 뻔 했네!”

        “그렇게 의심할 거면 애초에 날 고용하질 말았어야지.”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저는 저희 부모님도 의심해야 하는 직업인데요.”

        

        

        드미트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폭발물을 살폈다. 한참 뒤적여보던 그의 얼굴에서 점차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재밌네. 얀스크 대학 내부에요?”

        “그래. 전문가더군.”

        “딱 봐도 그래요. 세 개라. 마력량을 보면 건물 폭파나 요인 암살은 아닌 것 같고, 이거 시선 돌리기 같죠?”

        “그래. 아마도 침투조가 따로 있었겠지.”

        “우리 쪽에서 놓친 인원은 없어요. 왕자파는 절대 아니야. 그쪽에 딱지를 얼마나 붙여놨는데.”

        

        

        드미트리는 싱글벙글 웃으며 손을 딱딱 쳤다.

        곧 평범한 아주머니로 분장한 요원 하나가 다가왔다.

        

        

        “이거 본사 마법부에 보내.”

        “예, 중령님.”

        “그리고 물건은? 준비 됐어?”

        “예.”

        

        

        그녀는 장바구니에서 두꺼운 서류 뭉치를 꺼냈다. 드미트리는 서류를 받아들어 한 차례 슥 훑고는 이반에게 밀었다.

        

        

        “선배가 부탁한 거요. 이거 급하게 준비한다고 진짜 진땀 뺐어요. 우리 각하께서 선배 지원에 진심이시지만 않으셨어도, 어휴.”

        “고맙군.”

        “뭘요. 아, 각하께서 언제 한 번 보자던데. 시간 괜찮아요?”

        “당분간은 어렵겠다.”

        

        

        이반은 서류를 챙겨들고 일어섰다.

        서류를 품고 돌아서려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음.”

        “눈이 좀 갔어요. 알아요?”

        “….”

        

        

        돌아보자 드미트리가 진지한 얼굴로 그를 올려보고 있었다.

        

        모자 아래에 그늘진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며 그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정해요. 여기 전장 아니야.”

        “…음.”

        “뭐어. 은퇴한 분 모셔놓고 일 한번 하자고 한 입장에서 이런 말 하긴 좀 그래도요. 어깨에 힘 좀 풀고, 주위를 좀 둘러보고 살아요. 왕녀 전하도 저도, 선배한테 완벽하길 바라진 않잖아.”

        

        

        이반은 대답 없이 살짝 목례하곤 뒤돌아 떠났다.

        

        드미트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꺾었다.

        

        

        “저래서 사람이 연애를 해야 해. 콕 틀어박혀서 햇볕도 안 쬐고 그러니까 얼마나 칙칙해진다니. 그치?”

        “페트로비치 중령… 과연 ‘작은’ 이반. 명성이 헛되지 않았군요. 놀랍습니다.”

        “나도 처음 봤을 땐 오줌 쌀 뻔 했어. 어떻게 4년을 손 놓고 놀던 사람이 저런다니. 그나저나.”

        

        

        드미트리는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사람을 붙여. 저 선배, 혼자 두지 마라.”

        “행동이 선을 넘으면 막을까요?”

        “무슨 소리야. 죽고 싶어? 보고만 해. 그것도 아주, 아주 멀리서 지켜보고.”

        

        

        뭐, 선을 넘어 봐야 얼마나 넘겠어.

        왜 화가 났는 진 몰라도 폭발물 심어둔 요원을 찾겠다고 몸소 뛰겠다는 거겠지.

        

        기껏 해봐야 학생 몇 겁주고 그 정도에 불과할 텐데, 공연히 화난 ‘이반’을 건드릴 필요가 있을까.

        

        드미트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반은 원장실에서 도끼와 힐링 포션을 꺼내고 있었다.

        

        

       

       *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이 세계가 사실은, 어떤 종류의 게임에 불과하며 정교한 시스템에 의해 굴러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내가 직접 해야 한다.

        

        이반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으며 드미트리에게 받아온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교직원 일람.

       -신입생 명단.

       -학부생 총원 인적사항.

        

        

        올해 입학한 신입생은 300여명. 얀스크 대학은 3년제이므로, 학부생의 총원은 천여 명에 육박한다.

        

        거기서 교직원, 교수와 조교를 포함해 경비, 사무행정, 입학처 등을 모두 고려하며.

        

        대학원에 진학한 불쌍한 학부생들과 휴학 등의 사유로 졸업을 연기한 학생들을 다시 포함한다면.

        

        총원, 1733명.

        

        

        “거기서 하나 더.”

        

        

        입학식에 접근할 권한이 있는 학생 ‘가족’들을 살펴야 한다.

        

        입학식 당일 대학 교정을 밟을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만 있다면 그 모두가 용의자군에 포함될 수 있다.

        

        즉, 각국 귀빈과 학생 각자의 가족들까지 고려한다면. 총원, 2429명.

        

        

        “이 안에 네가 있음을 알고 있다.”

        

        

        이반은 항목 별로 분류해 펼쳐 놓은 서류더미를 툭, 툭. 무겁게 눌렀다.

        

        

        “쉽게 찾을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겠다.”

        

        

        오만은 요원을 죽이는 가장 날카로운 비수니까.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을 게다. 약속하마.”

        

        

        아카데미의 빙의자들은 결코 조용히 학창 생활을 보낼 수 없다.

        

        이것은 ‘상식’이다.

        

        습격을 막아내고, 기연을 독식하고, 어디선가 비전을 습득하겠지.

        

        아카데미물이란, 기본적으로 ‘나데나데’라는 표준 플랫폼을 따라간다. 그럴 수 밖에 없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졸업하는 이야기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따라서, 이 녀석이 [원작]을 알고 있다면.

        

        반드시 원작 속 주인공의 행보를 모방할 것이 분명했다. 모든 빙의자들은 그렇게 살아가니까.

        

        김선우마저도 처음 빙의했을 때 했던 생각은 ‘기연 독식’과 ‘현대 문물 전파’였으므로.

        

        그러니 모든 빙의자들은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변수로 가득 차있으며, 어떤 돌발 행동을 하더라도 이상할 것 없다.

        

        NPC들이 치열하게 싸웠던 지난 전쟁이 끝난 뒤에, 마음 편히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즐거운 게임 빙의물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배경 설정에 줄글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 따윈 알고 싶지도, 이해 하지도 못할 테니.

        

        그저 즐겁겠지. 잘 만들어진 테마파크를 즐기는 기분일 것이다.

        

        

        이것이 그저 화풀이라는 것은, 갈 곳 없는 증오라는 것은, 어쩌면 저열한 질투심일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미 납득하고 있다.

        

        

       -저건 뭐야, 산타클로스야?

        

        

        가벼운 한 마디에 불과하지만 녀석이 타인을 대하는 방식을 명확히 알 수 있었던 그 한 마디.

        

        빙의했다는 것을 숨기지도 않고, 그저 즐기는 마음으로 보내고 있을. 그 한마디가 이반의 가슴을 헝클여 놨다.

        

        상대를 그저 ‘오브젝트’로 바라보는 듯한 그 한 마디가.

        

        

       -중령님! 보셨어요? 와, 나 진짜 개쩔었다. 그쵸? 칠용장 씩이나 됐는데 모두 막아냈어요.

       -말 하지 마라.

       -아하하, 또 하라면 또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아쉬워요. 그때 차라리 방패를 오른쪽으로 좀 더 꺾을 걸 하기도 하고.

       -체레노비카. 입 열지 마.

       -그랬으면 샤샤, 그 멍청이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진짜 아쉬워요. 중령님. 진짜.

       -거의 다 왔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텨라.

       -가서 샤샤한테 한 대 맞죠 뭐. 그래도 외롭진 않을 거에요. 우린. 천국이나 지옥이나 인맥 관리 잘 해 놨잖아요?

       -제발. 조용. 피가 더 빨리 식는다. 체레노비카. 제발.

        

       -중령님은 오래 사세요. 최대한 늦게 오세요. 빨리 오면 하극상 할 거야.

        

        

        이들의 이야기는 배경설정이 아니다.

        

        이반은 흩어진 서류철 사이에서 악몽을 꾸고 있었다.

        

        오랜 옛 시절의 기억이다.

        

        

       -먼저 떠난 이들을 애도하지 말라.

       -나 또한 그들과 같은 대열에 서 있으니.

        

        

        이들의 이야기는 배경 설정이 아니다.

        

        

       -이 시대에 가장 훌륭한 사내들 대신 살아남았지요.

       -우리 모두가 그렇지.

        

        

        이들의 역사는 시나리오 따위가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악몽 속에서 이반은 천천히 중얼거렸다.

        등을 두드리는 김선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치찌개, 떡볶이, 치즈 찍어 먹는 나초, 제육볶음, 회덮밥, 속초 물회, 따듯한 라면.

       

       

       -고향, 집, 한국, 서울, 옥탑방, 부모님.

       

       -지하철역, 편의점, 밤거리, 고향, 돌아가야지. 마음을 굳게 먹고, 흔들리지 말고, 정면을 바라보고.

       

       -괜찮다. 우린 혼자가 아니야.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들을 두서 없이 주워 섬기며.

        

        밤이 끝날 때 까지.

        

        

       *

        

        

        학기가 시작되고 난 뒤, 에시디스는 참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누구도 그녀와 함께 밥을 먹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세계 각지의 귀족이 모여 있는 이 학교에서 ‘왕족’이란 타이틀은 당연하게도, 왕따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왕족’의 호위무사(중년 남성, 근육 덩어리, 도끼를 들고 있음)가 언제나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꼴을 본다면 갓 스물 남짓 된 어린 학생들에겐 참 큰 부담이라 할 수 있겠다.

        

        

        “아 삼촌 때문에 진짜 나 망했어!!”

        “그게 내 잘못이라고? 애초에 우리 조카한테 꼬리 치는 것들이 문제가 아닐까?”

        “그럼 왜 여자애들도 막는 건데!”

        “그 계집들이 뒤에서 우리 조카 욕을 하는 소릴 이미 삼촌은 듣고 있었단다.”

        “으아아아아… 내 대학 생활… 내 인생…. 아빠… 미워…!”

        

        

       

        입학 첫날 왕따가 된 사상 최강의 음대생이 흐느끼며 뛰어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반은 행복해질 겁니다…
    피폐물 아니에요! 이건 로코에요! 이제 학기 시작한 아카데미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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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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