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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

       

       조영대군.

       그가 등장한 순간, 주변의 공기가 변한 게 느껴졌다.

       

       서연은, 처음으로 느꼈다.

       그동안 주변의 연기자들이 아역들을 배려해주고 있었음을.

       손끝이 긴장감으로 저릿해졌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촬영장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하.」

       

       

    짤막한 탄식이 흐르며, 조영대군의 사나운 눈이 은혜대비의 침소를 훑었다.

       자신의 어미를 바라보고, 이어 연화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 내 얼마나 찾았는지 아는가.」

       

       가라앉은 음성, 마치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갈라진 그 음성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윽고 그의 번들거리는 눈은 어미인 은혜대비에게 향했다.

       

       

    「이 아이가 뭐라 하더이까.」

       

       천천히 허리를 숙이며.

       

       「인륜을 저버린 일이라고, 왕실의 은혜를 잊은 일이라고, 그리 울부짖더이까.」

       

       큭큭큭, 목구멍에 들끓어 오르는 웃음소리가 방을 가득 찼다.

       은혜대비는 그저 눈을 감은 채 침묵했다.

       

       「그래.」

       

       차마 아들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것처럼.

       조영대군의 입매가 비틀렸다.

       

       「내 저버렸지. 인륜도, 왕실의 은혜도.」

       

       그의 뒤를 따른 이들조차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왕이었다.

       

       감히 고개를 드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그런 왕.

       폭군.

       

       「하지만, 이 길이 내 길이요.」

       

       

    인륜을 저버리고, 왕실을 뒤엎고.

       피로 적셔진 길을 걷는 이가 여기에 있었다.

       

       

    「……공주.」

       

       은혜대비에게 눈을 향한 채, 조영대군이 말했다.

       

       

    「공주……!!」

       

       사나운 호통에, 침소를 울리며 호롱불이 흔들렸다.

       옅은 불빛이 깜박이며, 조영대군의 얼굴을 비쳤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시선이 움직이며 연화공주, 이혜월에게 향했다.

       

       「어찌 하겠느냐.」

       

       

    고개를 돌리고, 이윽고 몸을 돌리며.

       그 작고 어린 공주를 내려보았다.

       

       「스스로 나가겠나.」

       

       

    본디 조영대군과 연화공주는 친밀한 사이였다.

       서로가 웃으며 대해온, 그런 관계였다.

       

       「아니면, 내 친히 모셔드릴까.」

       

       

    적어도 연화공주는 그렇게 여겼다.

       그것이 전부 거짓이었음을 오늘 깨달았다.

       

       어리석었다.

       고개 숙인 연화공주의 몸에서 그런 감정이 느껴졌다.

       

       

       카메라가 움직인다.

       조영대군에서 연화공주로.

       그것을 지켜보던 카메라 감독, 허정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고 카메라 속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광원이 흔들리며, 혹여나 이 장면을 못 담을까.

       반사판을 움직이고, 카메라를 서서히 조영대군에서 연화공주에게 옮겼다.

       

       조영대군 역의 윤종혁 배우는 연기파 배우다.

       그의 악역 연기는 늘 일품이라 극찬 받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숨을 쉬듯 내쉬는 광기와 같은 감정에는 엄청난 몰입력이 있었다.

       마치 한 화면에 오직 그만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위험…….’

       

       허정수는 이것이 그다지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저 연기를 받아칠 정도로 강렬한 연기력을 지닌 이는, 기껏해야 은혜대비 역의 정은선 정도.

       하지만 정은선은 이번 장면에서 그다지 대사가 없었다.

       애초에 존재감을 가져갈 역할도 아니었다.

       

       이 장면에서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자는.

       어린 연화공주 뿐이었다.

       

       하지만 아역이?

       

       ‘공 감독님은 화면을 줌인하여, 보다 감정이 드러나는 방향이 좋다고 했지만.’

       

       허정수도 경험이 많은 카메라 감독이다.

       여기서 어설프게 카메라를 앞으로 당기거나, 클로즈업하여 배우의 얼굴을 잡는다면 상황이 좋지 않아질 수 있었다.

       

       카메라를 가까이 잡으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만큼 배우의 감정 연기가 더욱 세밀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조영대군 상대로 연화공주가 가능할까?

       허정수는 서연의 재능을 믿는다.

       

       그러니, 이번 오디션에서도 조서희가 아닌, 서연에게 한 표를 준 것이고.

       하지만 결국 아역이다.

       

       연기파 배우인 윤종혁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

       여기선 차라리 화면을 넓게 잡아, 인물이 아닌 장면에 집중해주는 게 나았다.

       

       힐끗, 공정태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지시는 없었다.

       처음 이야기했던 그대로 진행하려는 것처럼.

       

       ‘이거 NG나면, 다시 감정 잡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롱테이크 끝난 이후부터 다시 찍으면 되나?’

       

       허정수만이 아니었다.

       다른 스태프들도 이미 NG 이후 재촬영을 염두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른 이들이 조영대군의 연기를 제대로 받지 못하면, 도리어 붕 뜨게 되는 건 조영대군 쪽이다. 감정 과잉처럼 보이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때, 감겨있던 연화공주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조용히 있던 연화공주를 끌고 나가기 위해, 군사들이 움직이던 순간.

       

       

       「놔라!!」

       

       아이의 것이라 느껴지지 않는 날카로운 일갈에, 군사들의 몸이 굳었다.

       아니, 조영대군을 제외한 모두가.

       

       

       “……!!”

       

       순간, 스태프 한 명이 헛바람을 들이키다 급히 입을 막았다.

       

       

       고요한 적막.

       호롱불의 빛이 그다지 닿지 않는 장소.

       어둠 속에 앉은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연화공주 이혜월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며, 이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어둠 속에서 치켜떠진 이혜월의 눈이 움직였다.

       

       붉은 눈이었다.

       그것은 호롱불의 불빛에 반사되었기 때문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몰랐다.

       

       어느 때보다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조영대군을 직시했다.

       그의 광기에 뒤지지 않는 감정이, 그 눈에서 강렬하게 느껴졌다.

       

       분노, 증오.

       살을 에는 감정이 번졌다.

       

       

       

       

    감정 연기인가?

       아니, 허정수는 알았다.

       

       메소드 연기.

       마치 그 배역과 하나가 된 것 같은 감정 연기.

       

       여태 서연의 감정 연기는, 아역 치고 굉장히 훌륭한 수준이었다.

       적어도 허정수가 아는 아역 중에선 단연 제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역치고’라는 수식어는 사라졌다.

       

       

       

    「예.」

       

       

       서연의 작은 수족관이 깨어지며, 바다에 발을 담근 순간.

       바로 지금.

       

       

       「알겠습니다.」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에 짙은 노여움이 느껴졌다.

       아이의 것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짙고 어두운 음성.

       

       

    「제 발로, 나가도록 하지요.」

       

       

    조영대군을 스치며, 그의 군사가 지키는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은혜대비를 등지고.

       

       「이 두 발로, 나가겠습니다.」

       「공주…….」

       

       꺼질듯한 은혜대비의 목소리가 스쳤다.

       하지만, 연화공주는 그곳에 시선 한번 주지 않았다.

       몸이 떨렸다.

       

       부서져라 움켜쥔 작은 양손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군사들은 저마다 흠칫하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 시선을 마주할 수 있는 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조영대군 하나.

       

       「그래, 그래야지. 내 그래서 공주를 좋아하는 것이야.」

       

       조영대군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연화공주의 붉은 두 눈에 힘이 들어가며,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이 달싹였다.

       

       당장, 그 자를 향해 뭐라 외치고 싶었다.

       

       반드시.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연화공주는 그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조영대군의 군사들과 함께.

       

       그리고.

       쾅, 하고 은혜대비의 침소의 문이 닫혔다.

       

       

       

       “……컷!!”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나누는 공정태의 외침이 들리며, 숨을 참았던 모두가 겨우 숨을 내쉬었다.

       설마 했던 원테이크.

       단 한 번의 NG도 없이 찍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특히 가장 놀란 건, 조영대군 역의 윤종혁이었다.

       방금, 그 감정 연기는 아이의 것이라 보기 힘들 정도였다.

       

       ‘천재, 천재라 말은 들었지만…….’

       

       과연, 까칠한 정은선 배우가 그리 관심을 두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라고 생각한 순간, 윤종혁은 흠칫했다.

       

       이미, 정은선 배우가 서연의 곁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막 감탄사를 내뱉으려던 스태프 몇이 몸이 굳었다.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 탓이다.

       

       “…….”

       

       정은선은 숨을 몰아쉬는 서연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붉은 눈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핏방울이 맺힌 손을 보았다.

       스스로의 감정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하는 아이를 두 눈에 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깊이 호흡하세요.”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그리고 작디 작은 서연의 손을 천천히 펴게 했다.

       그러자, 얼마나 꽉 쥐었는지 손톱이 파고들어 핏방울이 맺힌 손이 보였다.

       

       그것을 본 정은선이 눈이 찌푸려졌다.

       

       “뭣들 하는 건가요. 서둘러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지 않고.”

       

       그런 정은선의 외침에 스태프들이 당황하며 서둘러 달려왔다.

       

       “아, 네. 네네!”

       “그, 진짜로 상처가 난 거였습니까?”

       

       당연히 무슨 소품인가 싶었다.

       그야 아이의 악력으로 꽉 움켜쥐어봐야 손에 피가 흐를 리가 없으니까.

       

       “……이래서.”

       

       정은선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이내 입술을 곱씹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선은 상처를 치료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그리고, 방금 연기를 보았기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나, 방금 연기를 위해 연습했는지 눈에 선했으니까.

       

       “너무, 자주 하지는 마세요. 그래도…….”

       

       잠시 망설이던 정은선은 서연에게 말했다.

       

       “……훌륭한 연기였습니다.”

       

       정은선은 그저 그렇게 이야기한 뒤, 수아에게 서연을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잠시 그것을 지켜보다 등을 돌려 사라졌다.

       

       발을 동동 구르며 딸을 기다리던 수아는, 그제야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그동안 서연이 계속 연습했던 연기.

       그것을 훌륭히 해냈다는 걸, 수아는 알 수 있었다.

       

       “괜찮아?”

       “……네.”

       

       솔직히 괜찮지 않다.

       서연은 걱정스레 말하는 수아의 말에 시선을 피하며 눈물을 닦았다.

       감정이라는 건, 익숙하지 않다.

       

       정확히는 이렇게나 짙은 감정에 스스로 발을 담그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손바닥을 보면, 이미 작은 상처가 몇 개나 있었다.

       

       ‘역시 연습과는 다르구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감정의 여운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아마 아직 어린아이이기에 더욱 그런 거겠지.

       괜히 자주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었다.

       

       “이거 참, 놀랐습니다.”

       

       그때, 그런 수아와 서연에게 조영대군 역의 윤종혁 배우가 다가왔다.

       

       “솔직히 말로는 들었는데, 깜짝 놀랐네요. 연기한지 이제 1년이라고요?”

       “아, 네.”

       “나중에 아주 대단한 배우가 되겠어요. 저 정은선 배우님도 뭐라 한 마디 하고 싶은데 아무 말도 못했잖아요?”

       

       아이일 때 감정 연기는 자제하는 게 좋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도 입을 닫게 만든 연기였다.

       

       “……뭐, 그래도. 되도록 지금은 자제하는 게 좋긴 합니다. 아이니까요. 감수성이 예민할 때이니 관심을 가져주세요.”

       “네네. 알겠습니다.”

       

       수아의 대답에 만족한 윤종혁은 자신을 올려보는 서연의 머리를 씩 웃으며 쓰다듬었다.

       

       “자, 우선 영상이 어떻게 찍혔나 보러 가야지.”

       

       그런 윤종혁의 말에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인생 최초의 진짜 감정 연기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심 서연도 궁금했다.

       

       여태, 서연은 자신의 연기를 보고 ‘흠, 그 정돈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이번에도 그렇다면 내심 실망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쓰자마자 올려서 오타가 좀 있었습니다.

    약간 어디서 끊을지 고민했네요. 플러스를 신청하려 했는데 생각해보니 주말이고, 프롤로그는 0화라 아직 19화네요..

    다음화 보기


           


I Want to Be a VTu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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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s: Ongoing Author:
I definitely just wanted to be a VTuber... But when I came to my senses, I had become an a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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