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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

       -뭐? 교장이 널 직접 데리러 와?

         

       “응. 내가 누군지 궁금해서 그랬다던데.”

         

       -이 노친네가 벌써 노망이 났나…무슨 같잖은 수작질을 부리려고…

         

       전화선 너머로 들려오는 단장의 목소리에 별안간 언짢은 기색이 실렸다.

         

         

       -그래서?

         

       “어?”

       

       -어는 뭐가 어야. 교장이 아무 꿍꿍이도 없이 너를 보자고 했을 리가 없어. 혹시 뭐 이상한 거라도 시킨 거 아니냐?

         

       “그…”

       

       아무 생각 없이 대화 내용을 말할 뻔했지만, 문득 머릿 속에 떠오른 생각에 다시 말을 삼켰다.

         

       평소 단장의 태도나 지금의 반응으로 봐선, 아까의 대화 내용을 곧이 대로 이야기하면 맘에 들어 하지 않을 게 뻔해 보였다.

         

       그러나 이미 결정을 내린 지 오래다. 단장도 진작 본인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이제 모든 일을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전처럼 모든 일을 그들과 상의한다면, 나는 단장의 명령을 영원히 이행할 수 없을 것이다.

         

         

       “…별일 없었어. 그냥 잡다한 이야기만 하시던데. 대화 상대가 필요하셨나 봐.”

         

       결국 나는 적당히 둘러대는 방법을 택했다. 양심에 조금 찔리기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거짓말은 아니다. 해월화는 정말 쓸데없는 신변잡기를 주제로 몇십 분을 혼자서 떠들어댔으니.

         

       거기에 나한테 종종 온실에 놀러 오라고 굳이 말한 걸 보면,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도 아마 사실이 아닐까.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솔직히 말…야! 비켜! 좀 꺼지…!

         

       -왜 너만…치직…길게…!!

       

       -치직…좀 나와 봐…! 나도…!

         

       -현아! 잘 있는 거지? 우리 현이…치직…혼자서 쓸쓸해서 어떡해…역시 나라도 따라갔어야…

         

       단장이 영 믿기지 않는다는 말투로 따져 들려던 차였다. 갑자기 전화선 너머에서 소란이 발생한 듯 잡음이 잔뜩 낀 고함들이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외치는 소리가 섞여 채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현아. 혹시 해쌤한테 이상한 거라도 당한 건 아니지? 그 사람 성격이 워낙 괴팍해서…

         

       결국 단장을 대신해 주도권을 잡은 건 누나들이었다. 세화 누나의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가 전화선 너머에서 울려 퍼졌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냥 좋으신 분 같던데요. 지금 묵고 있는 호텔도 그분이 잡아 주셨고…”

         

       -뭐? 호텔을 잡아 줘? 원래 예약했던 곳은 어쩌고?

       

       -호텔? 뭔 소리야?

         

       세화 누나의 목소리가 드물게 날카로워졌다. 그 뒤로는 채원 누나가 묻는 소리도 배경처럼 들려왔다.

         

         

       “그곳보다 여기가 더 괜찮을 거라고 하셔서요. 거절하기도 좀 애매했어요. 그리고 정말 좋은 곳 같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이렇게 고급스러운 숙소는 태어나서 처음 와 보는…”

         

       -…현아. 잘 때 객실 문은 꼭 잠그고 자야 해. 알았지? 아니다. 차라리 자물쇠를…

         

       돌연 진이 누나가 합세하여 심각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누나들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미리 정해둔 숙소로 가지 않아서 섭섭해서 그런 건지…

         

         

       “…네?”

         

       -현아. 사람은 외관이 전부가 아니야. 알겠지? 그건 불량식품이야.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이미 애저녁에 상해버린 거라고. 이렇게 순해 빠져서야…모성애를 노린 건가…

         

       -방심했어…다 늙었으면서 기운도 좋지…

         

       -현아. 조심해야 해. 우리 때 그 사람 별명이 뭐였는 줄 알아? 진짜…

         

       -야! 그만 좀 하라고 했지! 남들 눈에는 너네가 더 이상한 사람 같아 보여! 좀 그만…!

       

       -넌 조용히…치직…!

         

       -좀 나가라고…치직…했잖아…!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단장과 누나들의 목소리가 섞여 전화선 너머는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다. 단장을 쫓아낸 누나들은 영문을 모를 말들을 계속 주고받았다.

         

       그리고 나는 한참 동안 누나들의 설교 겸 걱정을 듣고 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세상에, 벌써 이런 시간이네. 미안, 현아. 우리가 너무 오래 붙잡았지?

         

       “저는 괜찮아요…”

         

       -얼른 가서 자야겠다. 잘 자, 현아. 전화는 안 돼도 편지는 가능하니까 꼭 꼬박꼬박 쓰고!

       

       -잘 자~

         

       “그럴게요. 누나들도 안녕히 주무세요.”

         

       -현이도 잘 자! 누나들이 항상 응원하는 거 잊지 말구!

         

       -뚝

         

       “…”

         

       시끄럽게 주고받던 말들이 끊기니, 문득 고요한 바닷속에 홀로 내던져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장과 누나들은 휴식을 좀 취한 뒤 동부로 떠날 예정이라 했다.

         

       서부 수도에 있는 나와는 물리적인 거리도 더욱 멀어지는 데다, 동부는 전화선도 깔리지 않은 오지가 대부분이라 한동안은 이렇게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 사실을 떠올리니, 이제는 정말 혼자라는 게 확실히 실감이 된다.

         

       어느덧 그들과 만나 함께 지낸 지도 2년이 다 되어간다.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떠나보낸 고통은 여전히 날 괴롭혔지만, 단장과 누나들의 배려 덕분에 지금은 어느 정도 슬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지금도 깊이 감사하고 있고, 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은 마음 뿐이다.

         

       그러나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분도 너무나 많이 있었다.

         

       우선은 단장의 정체가 그랬다.

         

       누나들에게 상식을 막 배우기 시작하면서 단장의 성씨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을 때는 상당히 놀랐었다.

         

       그 불량하고 사나운 인상의 단장이 대 명문가의 일원, 그것도 최초의 다섯 가문에 속하는 흑련 사씨의 후계자라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니, 그간 단장의 주변에서 벌어졌던 이상한 일들을 비로소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상급 부대의 대장이 오히려 그에게 쩔쩔맨다던가.

         

       최상급의 보라색 인장이 찍힌 신분증을 너무나 손쉽게 나에게 만들어준다던가.

         

       내가 요람에서 이상한 사고를 쳐도 무마해줄 수 있다고 큰 소리를 떵떵친다던가 하는…

         

       하지만 그런 대단한 사람이 왜 굳이 변방을 돌며 험한 일을 자처하는지는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궁금한 건 나와 아무 연고도 없는 단장이 굳이 나를 거두어준 이유였다.

         

       아마 그 권능이라는 것의 정체와 무감응자 판정을 받은 내가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배경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단장은 얄밉게도 마지막까지 입을 꾹 닫아버렸다.

         

       남에게는 절대 밝혀져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기까지 했으니, 따로 품을 들여 알아보기도 마땅찮고.

         

       하지만 내 권능이 탐이 난다고 말한데다 실제로 그 정체를 알고 있는 듯 보였지만, 단장은 단 한 번도 내 권능을 자신을 위해 써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다.

         

       그들을 따라 전장에 나선 것도 오롯이 내 고집이었지, 단장과 누나들은 끝까지 나를 만류했다.

         

       그 외에 백가의 가주가 단장에게 가진 원한이라던가.

         

       교장과 과거에 있었다는 일이라던가.

         

       궁금한 게 너무도 많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들을 굳이 캐물어 볼 생각은 없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그날 내 손가락에서 빠져나간 반지나 흉터와 관련된 트라우마 같은 일이 그렇다.

         

       하지만 단장과 누나들은 그런 부분에 대해 일절 묻지 않았다. 그러니 나 역시도 마땅히 그리하는 게 옳다.

         

       결국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요구에 따라 충실히 아카데미 생활에 임하는 것, 그와 연계해 단장과 누나들이 피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3년만 있다가 졸업해서 돌아가면, 그때는 단장도 사실을 알려줄 수밖에 없겠지.

         

         

       “…”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자연스럽게 아까 교장이 건네준 서류 봉투로 눈길이 갔다.

         

       아까 누나들이 일찍 자라고 하기는 했지만 되려 고독함에 잠이 깨버린 참이다.

         

       나는 봉투를 열고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종이들은 어떤 학생의 세세한 인적 사항이 적힌 학적부였다.

         

       남의 기록을 같은 학생이 열람해도 되나 싶지만, 그냥 일이라고 생각하자…

         

       나는 그리 생각하며 서류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어떤 여학생이 정면으로 찍힌 사진이었다.

         

       그녀의 성격을 처음 듣고는 혹시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닐까 하고 가슴을 졸였지만, 다행히도 전혀 다른 사람이 확실했다.

         

       갸름하고 선이 얇은 얼굴에, 크고 또렷한 눈망울과 창백하게 물든 입술.

         

       예술적으로 솟은 오똑한 코와 잡티 한 점 없는 맑은 피부.

         

       고혹스럽고 도도한 외모에 확 눈길이 가는 게, 과연 생김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안의 오만함과 시건방짐 역시 아주 잘 느껴졌다.

         

       나는 사진 아래 적힌 여학생의 여러 정보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이름: 연민하

       -재학 중인 학년: 2학년

       -나이: 18세

       -주 전공: 방출계 정령학

       -출신 가문: 적화 연씨

       -1학년 최종 종합 순위: 2등…

         

       정령사라. 그러고 보니 연씨 가문은 분명 유서깊은 정령사 가문으로 이름이 높다고 했다.

         

       여명기에 개화한 최초의 다섯 마법사 중 한 명이 처음으로 정령 마법을 정립했고, 그의 후손인 연가는 그 선구자격으로 다른 정령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영향력을 행사해오고 있다고.

         

       하지만 그녀가 정령사인지 아닌지는 지금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내 눈길을 끄는 건 그 아래 기타사항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1학년 당시 가장 많은 결투 신청을 받은 전적이 있음(전승)

       -동년 3월 4일에 일어났던 대규모 소요사태의 배후 중 한 명으로 추정되지만 물증이 없어 징계 심의 기각

       -동년 7월 12일에 동급생과 우발적인 시비가 붙어 전치 10주의 중상을 입힘. 본인은 동급생 쪽이 먼저 선공을 가했다고 주장. 그와 배치되는 증거가 발견됐지만 징계 심의는 기각.

       -동년 8월 23일에 에 말을 거는 친우에게 심각한 폭언을 행사하여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동년 9월 12일과 17일에 각각…

         

       “…”

         

       글씨가 몹시 작았음에도, 한 장의 종이를 다 써버릴 정도로 전과가 몹시 화려했다. 하나같이 징계가 아예 기각되었거나 아주 가벼운 처벌만을 받았다는 것 역시 눈에 띄었다.

         

         

       -해당 학생은 연씨 가계 특유의 난폭함, 통칭 ‘정령사의 저주’를 유독 진하게 물려받은 것으로 추정됨. 또한 이는 정령사의 고질적인 부작용이 극대화된 것인듯하지만, 사료의 부족으로 현시점에서 결론을 내리기는 불가능.

         

       마지막 문단이 뜬금없이 내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정령사 특유의 부작용이라. 그런 게 있었나?

       

       정령사는 마법사 중에서도 아주 귀한 축에 속했다. 더구나 나는 항상 변방을 전전했기에 정령사는 한 두 번 본 게 전부라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래도 이 부분을 제대로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정령사의 고질적인 부작용과 이 ‘정령사의 저주’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어쩌면 내 일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후우…”

         

       아직 시작도 하기 전이지만 벌써부터 벽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교장이 힘을 실어주라고 하기는 했어도, 아무리 봐도 본인이 나를 거부할 거 같은데.

         

       더구나 아직 만나보기도 전이지만, 나 역시 그녀의 인상이 썩 좋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 시건방짐과 오만함은, 꼭 닮은 예전의 무언가를 내게 떠올리게 했으니.

         

       이런 사람과 내가 친교를 맺는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

         

       문득 예전에 진이 누나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이 난다.

         

         

       -우리는 포로야.

         

       -포로요…?

         

       -응. 과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망령과, 그에게 사슬로 묶인 포로들…

         

       그 자조적인 말투와 씁쓸한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

         

       굳이 캐묻지는 않았지만, 그 말만으로도 그들의 관계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누가 망령이고 포로인지도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오히려 부러웠다.

         

       한때는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던 탓이다.

         

       행복하고 꿈만 같은, 그래서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던 나날들 또한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게 무참히 짓밟힌 과거의 한때가 되어버렸다.

         

       내 심장은 이미 갈가리 찢겨버린 지 오래였다.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른 생각은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단장이 말하고, 누나들이 말하고, 해월화가 말했다.

         

         

       ‘야. 친구들 사귀고 공부 열심히 하는 게 대체 뭐 그렇게 어렵겠냐? 응?’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반드시 누나들에게 먼저 상담을 받을 것…’

         

       ‘우리 아카데미는 이성 관계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하단다. 정혼자가 아닌 이상에야 교내연애는 절.대.금.지.란다. 알겠지? 절.대.금.지.야.’

         

       “…”

         

       어느 쪽이든 하등 쓸모없는 걱정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이제 나에게 그런 시절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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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recting the Villainess of the Academy

Correcting the Villainess of the Academy

아카데미 악당영애 교정하기
Score 3.8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reunited with the girl who left me when I lost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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