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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

       앨리스가 다녀간 지 하루가 지났다. 그동안 새로운 소식은 없었다.

        

       황제가 나에게 내린 명령은 아직 거두어지지 않았다. 앨리스가 아직 황제를 만나지는 못한 모양이다. 하긴, 자리를 비웠다고 들었으니까.

        

       앨리스가 풀어버린 짐은…… 아직 다시 싸지는 않았다. 일단은 가방에서 꺼내진 물건들은 다시 원래 있던 곳에 가져다 두었다.

        

       일단 앨리스가 손수 짐을 풀어놨으니, 조금은 눈치를 보다가 다시 싸기로 했다.

        

       아무리 앨리스가 그렇게 나온다고 해도, 그 똥고집 황제를 쉽게 설득할 수는 없을 거다. 딸을 사랑하더라도 자기 목표가 먼저인 황제였으니까.

        

       겉으로는 언제나 ‘제국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국정을 미친 듯이 좋아하는 국정섹서같은 인간이다. 만약 자기 국정에 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면 자기 딸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인간.

        

       리클란트 자치국은 아직 게임 본편에서 등장한 적은 없는 국가였지만, 설정으로는 존재한다. 후속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지도 모른다……라는 떡밥 정도뿐이었지만.

        

       게임 제작이야 이미 들어갔겠지만, 아직 발매하려면 한참 남은 시점에서 이 세계로 왔으니 나는 예고편도 보지 못했다.

        

       팬들 사이에서는 그때까지도 군벌로 불안한 리클란트 공화국으로 후퇴한 주인공이 그 군벌들을 정리하고 신임을 쌓아 거처할 곳을 찾는다는 내용이 될 것 같다는 추측이 대세였다.

        

       그 전에 내가 군벌을 완전히 정리해버렸다면 그런 추측도 의미가 없어지긴 하겠지만… 글쎄, 나는 황제가 군벌을 ‘전부’ 정리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치국을 괴롭힐 정도로는 남겨두고, 그러면서도 제국에 기대고 싶도록 맛은 보여줄 생각이겠지.

        

       만약 정말로 군벌들을 싹 밀어버리고자 했다면 황제는 그냥 군대를 보냈을 테니까.

        

       하긴 그렇게 군대를 보내겠다고 하면 자치국에서는 거부했을 가능성이 크긴 했다.

        

       세상 어느 주권 가진 나라가, 자기네 나라 안의 범죄자를 해결해주겠다며 군대를 보내는 것을 반기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엄연히 주권 침탈인데. 속이 뻔히 보이잖아.

        

       “……어, 잠깐만.”

        

       설마 황제가 ‘나를’ 보내려고 했던 건 그것 때문인가?

        

       제국군 부대를 통째로 보내면 당연히 리클란트 공화국에서 반대하겠지만, 암살자 하나 정도 파견해 주는 것은 그렇게 싫다고 하지 않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나를 군인의 신분으로 보내려던 게 아닐지도 모르지. 외교관 사이에 섞어 보내거나, 아니면 대놓고 황녀로서 보내버려도 상관없다.

        

       ……나라면 그런 공식적인 일정 사이에 틈을 만들어 자치국 안을 돌아다니며 암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니까.

        

       어…….

        

       황제가 나를 신임하는 수준이 좀, 많이 과해진 것 같지 않아?

        

       원작의 클레어가 이 정도로 신임받았던가? 아무리 그래도 임무 수행 하랍시고 클레어 혼자만 보내고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이마에 손을 얹은 채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자치국에 가서 군벌 우두머리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며 돌아다녔다면 미래가 심각하게 바뀌게 되었을지 모른다.

        

       하긴, 가끔 사람 뒤통수를 세게 쳐놓고는 즐거워하기도 하는 밀레니엄 사였으니 유저들이 그렇게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정도로만 스토리를 짜지는 않았겠지만.

        

       거부해야 하나?

        

       나는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만약 황제가 나를 진심으로 신임한다면,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믿고 있다면, 차라리 거기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오는 법도 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황제는 ‘그렇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하고 생각할 테니까.

        

       문제는, 황제가 나를 정말로 100퍼센트, 그러니까 단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에 대한 결론은 딱히 깊게 생각해볼 것도 없이 내놓을 수 있었다.

        

       황제는 절대로 남을 100퍼센트 신뢰하는 인간이 아니다. 황제가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신념뿐이다. 당연히 평소에 모든 임무를 매끄럽게 수행하던 내가 그냥 돌아온다면 내 말을 의심할지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까지는 믿어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이유’가 내가 상대를 암살할 수 없었던 물리적인 이유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을 거다. 정치적으로 엮어서 추측하겠지.

        

       그리고 그렇게 되기 시작하면 황제의 행동이 내 예상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게 된다.

        

       그건 좋은 일이 아니다.

        

       반드시 몇 사람은 죽게 되는 선택지를 취소하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는데, 황제가 내 예상과는 다르게 움직인다면, 그건 앞으로 내가 미래시 비슷한 것을 쓰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될 것이다.

        

       황제 암살을 굳이 실행해보지 않은 것도, 당장은 황제의 말을 따르고 있는 것도, 일단은 변수를 최소화하며 나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다. 깬다고 해서 새로운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회와 기회의 사이가 멀어질수록 꿰맞추기는 더 어려워진다.

        

       “…….”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조용히 고민해보았지만, 역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앨리스 핑계를 댄다고 해도, 이미 내가 하겠다고 한 마당에 이제 와서 말을 바꾸면 황제는 또 나를 의심할 거고.

        

       음.

        

       답이 없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벌컥, 갑자기 문이 열렸다.

        

       “…….”

        

       지난 10년 동안 굉장히 자주 있었던 일이기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사실 루카스 칼에 베이는 것 보다는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고.

        

       분명히 이번에도 앨리스일 거다.

        

       만약 황제를 만나고 왔다면 무조건 거부당했을 테니 엄청 시무룩하게 문을 열었을 거다.

        

       그러니까 아마도, 지금 나를 찾아온 이유는 황제에게 새로운 통보를 받은 것을 자랑하러 온 것이 아니라, 황제를 만나러 가는 자리에 나를 데리러 온 거겠지. 언제나 황제와 마주치기 전에는 기세등등한 앨리스였으니까.

        

       “됐어!”

        

       “네?”

        

       하지만, 앨리스가 그렇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 나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뭐가 됐다는 거지?

        

       고개를 돌려보니 위풍당당하게 웃고 있는 앨리스가 있었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아 머리카락이 황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 개선장군마냥 웃고 있던 앨리스가 말했다.

        

       “너는 북부에 가지 않아도 돼!”

        

       “…….”

        

       나는 앨리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무리 차기 황제라고 하시더라도 지금 당장 황좌에 앉은 분의 명령보다 더 위쪽에 계시진 않습니다.”

        

       내 차분한 목소리에, 앨리스는 흥, 하고 콧소리를 냈다.

        

       “나도 알고 있거든? 이렇게 보여도 진짜 황녀라고. 정 못 믿겠으면, 이거라도 보던가.”

        

       그렇게 말하며, 앨리스는 오른쪽 허리에 올려두었던 손을 들었다.

        

       이제 보니 그 손에는 황제의 명령서가 들려 있었다.

        

       [나, 아제르나 제국의 황제 아서 3세는 실비아 팬그리폰에게 내렸던 북부 파견 임무를 철회한다.]

        

       정식 명령서는 아니다. 그냥 아무 종이나 찍 찢어서 만년필로 대충 휘갈겨 쓴, 명령서라고 하기도 민망한 문서였다.

        

       하지만 그곳에 쓰여있는 필체는 많이 보던 것이었다.

        

       게다가 황제의 서명도.

        

       “……공문서위조, 혹은 사칭은 중범죄입니다. 그것이 황제 폐하의 이름을 사칭한 것이라면—”

        

       “아니거든!”

        

       내 말에 앨리스가 소리를 빽 질렀다.

        

       “정 의심 가면 직접 확인해보던가! 아무리 나라도 이런 걸로 거짓말은 안 해!”

        

       “…….”

        

       앨리스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거라면……

        

       ……설마, 진짠가?

        

       만약 진짜라면,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무표정은 간신히 유지했지만, 멍한 분위기가 보였는지, 앨리스는 위풍당당하게 나를 보며 외쳤다.

        

       “자, 됐지? 이제 같이 아카데미로 가는 거야! 뭐, 그래도 짐은 한참 뒤에 싸겠지만!”

        

       이번에는 성적으로 반드시 이겨줄게! 그렇게 덧붙이는 황녀의 표정은 한없이 밝았다.

        

       어…….

        

       아니, 그러니까 진짜 모르겠네.

        

       대체 어떻게?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내 머리 한구석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하고 있었다.

        

       *

        

       몇 분 전—

        

       파삭!

        

       뭔가 깨지는 소리는 황제 알현실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소리다. 황실에서 일하는 시녀들은 모두 귀족가의 여식들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고, 당연히 황실 안의 귀한 물건을 실수로 깨 먹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일부러 물건을 깰 일도 없다. 알현실에서 식기를 들고 식사하는 일은 좀처럼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 소리는 바닥에 작은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깨진 유리 파편 사이로 투명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워낙 적은 양이라 황제의 옷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이게 무슨 짓이냐?”

        

       무려 황제의 앞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횡포를 부리는 자기 딸을 보며, 황제가 직접 물었다.

        

       옆에 호위로 있던 루카스도 어이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앨리스는 그 표정을 가뿐하게 무시했다.

        

       평소라면 황제, 그러니까 그녀의 아버지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분위기도 굉장히 좋지 못했고.

        

       하지만 앨리스는 머리끝까지 화나 있었다.

        

       그리고 화난 팬그리폰은 보통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진다.

        

       앨리스도 팬그리폰이었고.

        

       아버지한테 이렇게 화가 난 것은 처음이었다. 앨리스는 실비아를 이기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실비아가 경쟁 출발선에 서지도 못하는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건 모르핀입니다. 실비아 방에서 나온 거고요.”

        

       “음?”

        

       그 말에, 황제의 표정이 단박에 바뀐다. 불쾌하다는 표정에서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실비아가 모르핀을?”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실비아의 능력을 여러모로 가장 잘 써먹고 있는 존재가 황제니까. 암살은 한 번이었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정보를 알아 오는 데는 실비아만 한 인재가 없었다.

        

       그런 실비아에게 모르핀이 필요할 거라는 상상은 하기 힘들다. 애초에 총알이고 검이고 맞은 적이 없으니까.

        

       놀란 것은 루카스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평소의 능글거리던 표정은 어디로 사라지고,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기는 했지만, 앨리스는 그 점이 조금은 마음에 들었다.

        

       “비상용이라고 했습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겼을 때, 상처가 나을 틈도 없이 싸워야 한다면 쓰겠다고.”

        

       “……호오.”

        

       무려 그 ‘실비아’가 한 말이라면, 결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 실비아가 ‘다치고’, 그 상처를 치유할 틈도 없이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대체 어떤 위험 때문에?

        

       “……폐하.”

        

       평소라면 아버지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황녀로서 황제를 뵙고 있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그저 딸이 아니라, 실비아의 말대로 차기 황제……아니, 그 후보로서 하는 말이었다.

        

       “실비아는, 제가 차기 황제가 될 존재라고 했습니다.”

        

       “…….”

        

       황제는 듣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그 후보가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게 그 자리를 넘기겠다고 했습니다.”

        

       “흠.”

        

       황제는 주의 깊게 황녀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 폐하. 실비아는 저의 사람입니다. 황제 폐하의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고, 앨리스는 웃어 보였다.

        

       진심 어린 미소라기보다는 허세였다. 긴장으로 뒤틀리고, 조금은 떨리는 미소.

        

       하지만 팬그리폰은 도망치지 않았다.

        

       ‘팬그리폰’이었으니까.

        

       “실비아가 그리폰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 황제 팬그리폰께서는 그리폰이 아니셨죠. 팬그리폰은 그리폰이 아닌, 그리폰의 우두머리. 그리폰을 휘어잡고 그 위에 타는 자. 무리를 통솔하는 자입니다. 그리폰보다 반드시 강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 그리폰이 아닌, 팬그리폰. 그리폰의 우두머리라는 의미다.

        

       무리를 통솔하는데 반드시 무력만이 정답은 아니다. 특히, 그게 인간의 무리라면.

        

       “그러니, 실비아는 제가 받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필요하시다면 빌려드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이번만큼은 아닐 겁니다.”

        

       실비아가, 그 실비아가 ‘진짜 황녀’를 차기 황제로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의미를 황녀는 깨달았다.

        

       깨닫고, 그 사실을 현 황제에게 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언을 들은 황제는 웃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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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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