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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

       

       

       

       

       

       

       

       최종 평가전이 시작되기 하루 전날 밤이었다.

       모시던 공자께서 난 데 없는 기권 선언을 하고 돌아와 채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게다가 짐보따리를 손수 싸고 있는 충격적인 상황을 목도했던 렌들러가 심부름을 받은 것을 챙겨 집무실에 도착한 터였다.

       

       “여기 있습니다. 하온데, 이건 갑자기 왜…?”

       

       렌들러가 전한 것은 다름 아닌, [혼약대전 참가 규율서]였다.

       대공가의 중앙보좌관과 참가자가 직접 사인한 규율서로, 혼약대전에 참가한 이들이 지켜야 할 규칙과 법률에 관해 적혀있었다.

       참가자가 가져야 할 도덕적 윤리와 어기지 말아야 할 법률이 총 100가지에 달하는 방대한 규율서.

       물론 대부분의 항목이 인간이 살아가며 ‘당연히’ 저지르지 말아야 할, ‘당연히’ 지켜야 할 것들이라 100가지 항목을 세밀히 확인하는 이는 드물었다.

       중요한 항목에 대해선 집사들이 간추려 알려주기도 하고 말이다.

       어쨌든, 기권 선언을 한 이가 이제 와 찾을 만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 확인할 게 있어서.”

       

       엘든이 펜을 들곤 한 장, 한 장 규율서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지점에서, 펜이 멈추었다.

       

       슥, 스슥.

       

       밑줄 2개에 별표를 다는 엘든.

       법적 규율 제 12절이었다.

       체크를 마친 엘든이 규율서를 놓으며 의자에 기댔다.

       어차피 기권에 관한 내용은 대공가에서 판단할 일이다. 규율서에 기권에 대한 항목이 있다면 그것을 근거로 들어 반려하던지, 참작해 승인을 하던지 말이다.

       이지선다인 답에 얽매이는 것보다 최악에 대비하는 것이 옳았다.

       그것이 법적 규율 제 12절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필요했다.

       

       “렌들러.”

       “예. 공자님.”

       “25번가에 좀 다녀와야겠는데.”

       “예…? 저녁 이후론 외출이 불가하시지 않습니까.”

       “알지. ‘후보’는 외출이 불가한 거.”

       “…예?”

       

       렌들러의 되물음에, 엘든이 자리에 일어서서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짚었다.

       

       “자넨 외출이 가능하잖아?”

       “예?”

       “25번가에서 사와야 할 게 하나 있어. 나한테 꼭 필요한 거야.”

       “그, 그렇지만 거긴 빈민가이며 밤에만 열리는 암시장이 있을 뿐이옵니다.”

       

       엘든이 히죽 웃으며 핑거스냅을 튕겼다.

       딱.

       어찌나 그 소리가 경쾌한지, 참으로 얄미울 지경인 렌들러였다.

       그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으니까.

       

       “그렇지. ‘밤에만’ 열리는 암시장. 미안하지만 자네가 나 대신 좀 다녀와줘야겠어.”

       “…거, 거긴 위험한 곳이라.”

       

       25번가는 빈민가였으며, 그에 걸맞는 취약한 방범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암시장이 열리는 곳이었으며, 질 나쁜 부류가 집결하는 곳이기도 했다.

       늙은 집사가 홀로 행차하기엔 위험한 곳.

       물론 든든한 방패가 있으면 얘기가 다르지만 말이다.

       

       “호위병을 데리고 가.”

       

       결국 노집사는 모시는 이의 명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사옵니다. 하오나, 거기서 무엇을…?”

       

       꼭 필요한 것.

       암시장에서만 살 수 있는, 그렇기에 원작의 데론 켈리드가 몰래 숨기고 다니던 물건이 필요했다.

       인간이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며,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선 그 최악을 최상의 상황으로 뒤집을 묘수를 강구해야 하는 법이니까.

       또한, 악인을 상대하는 데에 있어 윤리의식 같은 건 필요없는 법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비겁한 행위로 덤벼들겠다면, 응당 비겁하게 상대해주어야 하는 것이 옳았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데론 켈리드가 챙겨 다니던 것이 필요했다.

       

       “마나레코드가 필요해.”

       “그것은 왜…?”

       

       히죽.

       엘든이 미소지었다.

       

       “당하고만 사는 건 이제 그만하려고.”

       

       

       

       **

       

       

       

       데론 켈리드는 수족을 부리는 것에 능했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알며, 악인들을 교묘히 꾀어내는 것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악인들이 가진 고유의 악성을 뽑아내는 데에 유능했으며, 그것을 적절히 조합해 활용하는 것에 유능했다.

       물론 철저한 계급 사회였기에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이었다.

       공작가의 차남은 그래도 되었으니까.

       

       왕립 아카데미의 숨은 폭군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도 모두 그 역량 덕이었다.

       

       뒷담화를 기반으로 한 이간질에 능한 모략꾼 카일.

       

       신속한 소식통으로써 귀가 되어주는 아첨꾼 블런드.

       

       그리고, 칼을 쥐어주면 대신 피를 묻혀주는 전투광 엘든까지.

       

       각기 다른 기질을 한 데 모았고, 그들의 머리 위에 앉아 숨은 폭군으로 지냈던 자가 데론 켈리드였다.

       

       《나만 따르면 수석 졸업의 영광을 안겨주지.》

       

       악인은 응당 악질을 해소할 수 있는 창구가 있어야 하는 법.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먹잇감이 에린시아 벨로크였다.

       사람과의 교류에 익숙치 않으며 누구보다 조용히 지내고 싶어 하며, 높은 학구열 탓에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아카데미를 졸업할 뛰어난 먹잇감.

       변방 영지의 이름없는 가문의 영애를 포획한 그가 악인들을 가둔 울타리에 던져주었던 것이다.

       

       악질 중의 악질.

       쓰레기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폐기물이 바로 데론 켈리드였었다.

       

       그렇기에.

       

       ‘옳지.’

       

       그가 먼저 나섰을 때, 절로 미소가 지어졌었다.

       수족의 기강을 잡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나서는 인간.

       그럼으로써 다른 수족이 허튼 짓을 못하도록 도모하는 인간.

       원작 엘든의 기억 속에 데론은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그리고 데론은 무지성 전투광인 엘든의 이빨이 자신을 물지 못하도록 당근보다 채찍질을 자주했었다.

       짐승을 효율적으로 길들이는 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후웅!

       

       그래서일 거다.

       그 버릇을 잊지 못 해 혼약대전이란 신성한 싸움에 주먹을 든 것은.

       부리던 짐승이 전하는 모욕에 치를 떨며 분노한 것은.

       물론 모든 계획은 그것을 위함이었고, 최악을 최상으로 뒤집을 훌륭한 기폭제였지만 말이다.

       

       퍼억!

       

       느리디 느리게 보이는 그 주먹을 잡았다.

       전투광 엘든 라펠리온이 유약한 그에게 채찍질 당하며 지냈던 이유는 그저 수석 졸업의 영광 때문이었을 뿐.

       비겁한 폭군의 그늘에서 떡고물을 받아먹기 위함이었을 뿐이었고, 더 이상 그에게 바라는 것이 없는 내겐 느리디 느린 주먹에 맞아줄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흉광한 미소를 그렸다.

       

       

       “예전처럼, 순순히 맞아드릴지 아셨습니까?”

       

       

       데론의 동공이 크게 흔들린다.

       엘든을 본보기 삼아 나머지 수족들의 기강까지 잡으려했던 폭군이, 역으로 본보기 삼아졌으니 인지부조화가 왔을 것이다.

       

       “뭐… 뭐라?”

       

       잡았던 주먹을 고스란히 놓아주었다.

       참전 의지를 불사르고 있던 카일과 블런드가 잽싸게 다가와 그의 옆에 섰다.

       과연 충성스런 수족들답다.

       그 알량한 충성심이 언제까지 이어질런지 모르겠다만.

       

       “데, 데론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엘든 자네, 정녕 미친 겐가?”

       

       블런드의 물음에,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답해주었다.

       

       “미치지 않고선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니까요. 그나저나… 부리던 짐승에게 꿈이 빼앗길까 걱정들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리고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그랗고 납작한 물건 하나를 꺼내었다.

       

       “걱정마십시오. 수십 번이고 얘기해도 믿지 않으시겠지만, 설령, 만에 하나의 확률로 대공녀님의 환심을 샀다 하더라도 결코 여러분들의 꿈을 빼앗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미 수차례 얘기했지만, 귀를 닫은 이들에겐 수십 번이고 얘기해주어야 하는 법이다.

       기권 선언이 전략이 아님을, 그것이 보류되었다고 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음을.

       중세 판타지물에 빙의한 현대인에겐 귀족가의 사위란 족쇄보다 낭만과 모험을 찾아 떠나는 방랑객이 어울림을.

       부리던 짐승에게 능욕당해버린 데론이 입을 떼지 못 했고, 그를 대신해 카일이 바톤을 이어받았다.

       

       “그, 그걸 어떻게 믿으라는 거지? 자네 행동이 말과 다르지 않나.”

       “이거라면 답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데론 공자님?”

       

       데론을 불렀다.

       그리고, 동그랗고 납작한 물건을 들어보였다.

       영롱한 흑색빛이 감도는, 단 한 번, 사용자의 주변 상황을 녹화할 수 있는 그 물건을 들어 부채를 펼치듯 흔들었고, 후회캐 3인방의 얼굴이 사색빛이 되는 것은 그 다음 순서였다.

       

       《그 역겨운 음식이 맛있었다고?》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여긴 보는 눈도, 듣는 귀도 없으니까.》

       《네놈 아카데미 때의 기억은 완전히 잊은 모양이군.》

       《후웅! 퍼억!》

       

       또한.

       우두머리의 옆에 찰싹 붙어있던 카일과 블런드가 거리를 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악인들의 알량한 충성심은 파도 한 번에 무너질 모래탑과 같으니까.

       마나레코드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만약 기권이 전략이었다면, 이걸 들고 중앙보좌관께 달려가 여러분들의 실체를 알리겠지만 저는 그저 고이 간직하기만 할 겁니다.”

       

       “뭐? 대, 대체 무슨.”

       

       “속세를 떠나 안식과 낭만을 즐기고 싶은 기권자에게 훼방만 놓지 않는다면 이 기록은 영원히 빛을 보지 못 할 것이니, 부디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차피 기권 선언이 공식 승인되지 않는 이상 대공성에 체류할 수밖에 없었다.

       오디션 결승전을 앞둔 참가자가 돌연 기권을 선언하곤 멋대로 잠적해버리면 업계에서 제명되는 법이니까.

       특히 이 세계는 철저한 계급 사회이며, 북부령의 왕과 다름없는 ‘윈터펠 대공가’는 무소불위의 공작가조차 벌벌 떨게 만들 힘을 지닌 가문이다.

       대공가문은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곳.

       이미 혼약대전 역사상 첫 기권 선언으로 불편한 눈도장을 찍었으니 적당히 몸을 사리며 탈주 기회를 엿보는 것이 당연한 노릇이었다.

       

       길어야 13일 남았다.

       13일만 참으면 본격적인 힐링 여행이 시작되기에, 잠적보단 인내가 옳은 일.

       

       더군다나 여주인공께서 변화를 부정하고 있다.

       이제 와 도망치는 것은 부정에 큰 힘을 실어주는 꼴이며, 자유롭게 떠나야 될 식도락 여행에 불편을 초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우매한 짓을 저지르고자 탈주를 선언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저 기권이 승인되길 바라며, 또는 이 혼약대전이 끝나길 바라며 최상의 힐링과 안식을 도모할 환경을 구축하면 그만인 일.

       떠나겠단 소신은 결단코 굽혀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굳어있던 데론이 이제야 상황 파악을 마치곤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게 네놈 계획대로 된 것이로군.”

       “하하. 저는 그저 엄한 곳에 힘쓰실 필요가 없음을 알려드리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건방진 녀석 같으니. 후환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냐.”

       

       당연히 후환에 대해서도 생각해둔 터였다.

       혼약대전 참가 규율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자가 내뱉을 무지의 협박에, 씨익 웃으며 답해주었다.

       

       “아, 데론 공자님께선 참가 규율서를 정독하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뭐?”

       

       빙의 첫째 날, 밑줄 두 줄을 긋고 별까지 달아놓았던 법적 규율 제 12절.

       

       

       “혼약대전 기간 중에 일어난 일들로 상대에게 사후 보복을 가하는 이는 이유를 불문하고 ‘윈터펠 대공가’에 보복을 가한 것으로 간주한다.”

       

       

       더 이상 부당함에 무릎 꿇지 않으리라.

       더 이상 원통함에 눈물 흘리지 않으리라.

       

       

       “법적 규율 12절에 있는 내용인데 혹시 읽어보지 못 하신 겁니까?”

       

       

       그 다짐들을 지키기 위해 세웠던 계획은 부당함에 두 무릎을 꿇어야 했던, 원통함에 긴긴밤을 눈물로 지새워야 했던 지난 날의 이준우에게 보내는 심심한 위로였다.

       

       이제, 편히 즐겨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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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Transmigrated Into A Tragic Romance Fantasy

후피집물의 후회캐가 되었습니다
Score 10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was curious about what a female-oriented tragic romantic fantasy was like, so I skimmed through only the free chapters. And then… “…Ha.” I found myself transmigrated into one of the main male characters, destined for tears of regret, exhaustion, and obsession. So, the first thing that had to be done was… “I, Elden Raphelion, hereby declare my withdrawal from the competition for the betrothal of the Third Northern Duchess.” To escape this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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