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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

       이리드는 센트라가 휘말리지 않도록 앞으로 걸었다. 통로 저 너머에서 붉은색이 나풀거리며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걷는 소리가 번잡스럽게 울리다가, 어느 순간 동시에 멈췄다.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 황자와 용병이 대치했다. 이리드는 단검을 쥐고 똑바로 섰다. 

       

       스르릉.

       

       로냐는 롱소드를 뽑아 들어 어깨에 얹었다. 짜증과 분노가 머리 끝까지 솟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처음부터 촉이 안 좋다 싶었어. 재수 없는 얼굴이었거든.”

       

       “너도 방해였다, 천한 용병 놈.”

       

       “센트라 그년이 줍지 않았으면 진작에 노예였을 새끼가 입만 살아서는⋯⋯.”

       

       “말이 길군, 시간이 아까워. 입만 나불댈 거라면 지금이라도 도망쳐라. 굳이 쫒아가지 않을 테니까.”

       

       “누굴 개좆으로 보고──!!”

       

       

       로냐는 롱소드를 두 손으로 꼬나쥐고 돌진했다. 이리드가 알고 있는 동작이었다.

       일주일간의 짧은 준비였지만, 이리드는 손아귀가 터질 정도로 필사적으로 연습했다. 

       

       받아낼 수 있다!

       

       채앵-! 끼기기기긱.

       

       롱소드의 무게는 단검으로 받아넘기기엔 버거웠다. 칼날을 맞대고, 비틀어, 간신히 흘려낼 때마다 이리드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았다.

       

       한 합. 두 합.

       

       금속 긁히는 소리가 비밀통로의 벽에 부딪혀 꺼림칙한 메아리가 되었다. 어둠 속에서 불똥이 튀고, 그럴 때마다. 불똥이 옮겨붙는 것처럼.

       

       로냐의 눈동자에는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이리드의 의지는 굳건해졌다.

       

       

       막아내고, 흘려낸다. 로냐는 목이 바짝 마르는 것 같은 갈증을 느꼈다. 공격이 막힌다. 아무리 휘둘러도, 유효타가 들어가지 않는다!

       

       시간은⋯⋯ 황자의 편이었다. 센트라를 죽이고, ‘왕국 연합’의 짓으로 위장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레지스탕스 조직을 삼키기 위해 준비해 온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

       

       로냐의 움직임에 초조함이 실리고, 엉성해졌다. 이리드는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은빛을 뿌려내는 궤적과 궤적의 사이에, 칼날을 끼워 넣는다. 

       

       스걱──!

       

       피가 뿌려졌다.

       

       로냐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두 걸음 물러서며, 베인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흘렀다. 아주 새빨간 피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리드는 숨을 헐떡였다. 폐가 쪼그라들고, 팔에는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상처는 없었을지언정 피로는 쌓였다. 체력전으로 가면, 이리드는 언젠가 고꾸라지리라 확신했다.

       

       그 순간 로냐와 이리드,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했다. 

       

       이 전투를 끝내기 위한 승부수가 필요했다.

       

       

       로냐는 품 안에서 검은색 단약을 꺼내 들었다. 이리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저 단약의 정체는 알고 있었다. 흑마법사에 의해 생산되어 암중에 유통되는 마약성 도핑제였다.

       

       로냐의 목구멍 속으로 단약이 넘어갔다. 맛이 지독했던 듯, 로냐는 몇 번 켁켁거리며 마른침을 뱉더니. 실실 웃음을 흘렸다.

       

       “⋯⋯흐, 흐흐. 이거, 이것, 정말, 끝내주는데에⋯⋯.”

       

       전신의 근육과 핏줄이 도드라지고, 베인 팔뚝에서는 점차 검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검은 단약의 도핑 효과는 개인마다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3할. 

       

       작전 회의에서 나온 최악의 가능성 중 하나였다. 1황녀는 조심스럽게 패배를 예견했었다. 하지만, 이리드에게는 승산이 보였다.

       

       이리드는 단검을 역수로 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읊조리며, 미련을 깎아내었다.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었어. 못다 한 이야기도 끝내고 싶었다. 내 진심도⋯⋯ 전할 수 있다면, 전하고 싶었지.”

       

       “하지만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마법사는 미쳤을지언정, 자신이 자신을 속이고 있을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마법사는 이 차원 이동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첫 차원 이동에서 귀환했을 때, 미래의 크라운홀에서 온갖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리드의 육신에는 변화가 없었다. 

       

       차원 이동의 육체와 현실의 육체는 별개.

       

       그렇다면, 차원 이동한 세계에서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답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이리드는 손목의 시계 문신을 내려다보았다.

       

       1에서 0으로 향하기 시작하는 시계 문신에는,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어쩌면 1과 0 사이에는, 센트라에게 고백하는 자신의 모습이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는 상상으로 남겨 두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그륵. 그르륵. 로냐는 거품 섞인 침을 흘리며 괴로운 듯이 몸을 비틀었다. 헛것을 보는 것인가, 고개를 몇 차례 꺾고. 뒤집힌 눈으로 이리드를 바라보았다.

       

       붉은 짐승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죽어, 죽어버려라, 죽어, 영락제──!!”

       

       카아앙-!!

       

       로냐가 휘두르는 롱소드는 속도도, 위력도, 이전보다 배는 빠르게 느껴졌다. 한 합 만에 이리드의 팔이 크게 튕겨 나가고, 가슴이 무방비하게 열렸다.

       

       로냐는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예상대로, 결정적인 마지막 수는 단검으로 왔다. 막아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막아내더라도 결과는 같을 것이다. 다음, 다다음의 참격을 막아내지 못 하고 베일 터.

       

       그러니, 이리드는 끌어안았다.

       

       불에 지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갈비뼈 사이를 뚫고 정확하게 심장에 박혔다. 피가 흐르고, 심장박동이 울릴 때마다, 자신의 생명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서늘한, 죽음의 느낌이었다.

       

       “⋯⋯크, 이래, 놓고는, 환상⋯⋯ 이라고?”

       

       이리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통증은 생각보다 무뎠지만, 죽어가는 감각은 소름 끼치도록 선명했다. 이게 환상이라면, 정말 죽어가던 사람의 감각을 옮겨놓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 순간에, 시계 문신이 찬란한 보라색 빛을 터트렸다. 시곗바늘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에서 0으로 흩어져 간다.

       

       예상대로였다.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면, 죽음을 판돈으로 내건다.

       

       이리드는 팔을 뻗어, 로냐의 뒤통수를 잡아 단단히 고정했다. 

       

       “⋯⋯마지막, 포옹이. 네년이라는 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지만.”

       

       “주, 죽어-! 죽⋯⋯ 떨어져-!!”

       

       역수로 쥔 단검을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린 칼날에 희미하게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창백한 몰골을 하고서도 유쾌하게 웃고 있다. 그럴 수밖에. 끝끝내 지켜냈으니.

       

       푸우욱-! 푹-!

       

       이리드는 로냐의 목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몇 번이고. 움찔거리던 몸이 싸늘한 시체가 될 때까지. 로냐의 움직임이 멎었다.

       

       손에서 힘을 풀자, 로냐의 시체가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다. 이리드는 가슴께의 상처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다가, 주저앉았다.

       

       “죽어, 영락제⋯⋯ 라고 했겠다? 그게 소원이라면, 몇 번이고 죽어주고말고.”

       

       제국을 무너뜨릴 영락제(零落帝)는 이제 없으니.

       

       ===============================================================

       

       당신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힘겹게 올렸습니다. 비가 오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랬더니, 당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서럽게도 울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습니다. 많이 무거웠지만, 그래도 눈꺼풀을 올리길 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리드⋯⋯, 이리드! 정신 좀 차려봐요, 제발⋯⋯!!”

       

       괜찮다.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뿐이야.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니다. 100년 전으로⋯⋯ 조금 먼 곳으로 가는 것뿐이지.

       

       입술을 달싹거려도, 소리는 나지 않았습니다. 야속한 일입니다.

       달래주어야 하는데. 이 사랑스러운 여인에게는 웃음이 잘 어울리는데.

       

       “누구, 누군가⋯⋯ 누가, 누가 좀 도와주세요! 누군가⋯⋯!”

       

       비밀통로에 사람이 나타날 리가 없었습니다. 나타나더라도, 당신이 입은 상처는 심각한 중상인데다가⋯⋯ 그 누구도 흘러간 시간을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까요.

       

       움직이는 부위는 없는 건가. 전해야 하는 게 있는데.

       

       다행히도 손이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려, 센트라의 눈물을 닦아내었습니다. 사실 효과는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걸요.

       

       그렇다면.

       

       당신은 센트라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녀가 당신을 이끌어 주었듯, 당신도 그녀를 이끌어 주고 싶었습니다. 온기를 나누어, 슬픔보다는 기쁨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이 전해졌던 걸까요. 센트라는 울상을 지은 채로 애써 웃었습니다. 두 손으로 당신의 힘 없는 손을 소중하게 잡고, 가지 말아 달라는 듯 꼭 끌어안고, 웃었습니다.

       

       “사랑⋯⋯ 사랑해요. 이리드.”

       

       너무나도 기쁜 말을 들었습니다.

       

       답변을 해 주어야 했습니다. 당신 또한 같은 마음이라고 전해야 했습니다. 당신은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솜털이나 쥘 수 있을까 싶은 가벼운 힘이었지만. 그래도 센트라는 이해한 것 같았어요.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가지 말아요. 제 옆에 있어줘요⋯⋯ 죽지 말아요, 안 돼요 이리드⋯⋯!!”

       

       드디어 사랑을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습니다. 연애로써는 이제야 첫 발자국을 뗀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다 되었고⋯⋯ 이게 마지막 발자국이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당신이 마지막 숨을 내뱉을 때쯤.

       

       센트라는 무언가를 결심하고, 고개를 기울였습니다. 긴 속눈썹과, 울어서 빨갛게 부어버린 눈, 슬픔에 잠긴 반짝이는 눈동자와, 입술.

       

       센트라는 당신에게 입을 맞추⋯⋯.

       

       ===============================================================

       

       “⋯⋯⋯⋯.”

       

       2황자 이리드는, 허탈함에 헛웃음을 흘렸다.

       

       마법진에 누운 채로 멍하게 있었다. 아쉬움, 기쁨, 온갖 감정이 뒤엉켜서 어지러울 정도였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시간이 될 줄은. 

       

       3초⋯⋯ 아니, 1초만 더 있었더라면. 그랬다면.

       

       아니, 어쩌면⋯⋯ 센트라의 정결을 지켜준 게 다행인 걸지도. 그녀 또한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깟 키스 정도는, 없었어도⋯⋯.

       

       아니, 역시 아쉬웠다.

       

       이리드는 마른 세수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미친 마법사는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괴로워하고 있었고, 자색 마탑주는 미친 마법사를 달래고 있었다.

       

       무슨 난리통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리드는 다른 사람의 고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지금 막 첫사랑과 작별한 참이 아닌가.

       

       두 환상 마법사를 내버려 두고 마탑 밖으로 나왔다.

       

       1황녀와 소년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1황녀에게는 차원 이동 마법이라는 사실을 알린 상태였다. 1황녀 일레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구해냈니?”

       

       “구했다. 앞으로가 걱정되지만⋯⋯ 센트라라면 잘 헤쳐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래, 다행이구나. 정말로⋯⋯.”

       

       사건은 끝났다. 이제는, 100년 전인 이곳에서. 센트라가 살아갈 미래를 위해 노력하면 된다. 지금이라도, 정말 다음 기회는 없는 거냐며.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내놓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건, 정말로 버틸 수 없을 것 같을 때를 위해서 남겨두었다.

       지금은, 센트라를 구해냈다는 것으로 만족하자.

       

       이리드는 닿지 못 한 입술의 감촉을 상상하면서, 미래로 향하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쪼끔 늦었다 그죠⋯⋯!

    요기서 두 화 정도 후일담이 나가는 걸로, 첫 번째 에피소드가 마무리 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디어 마이 프렌즈!
    오늘도 부디, 좋은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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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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