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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

       리디아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낙관하며 도착한 현장. 그곳에는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역시 알몸으로 꽁꽁 묶인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엘프 여자 둘.

       

       “게일! 우릴 속인 검까…!”

       “믿었는데! 너무함다! 

       

       그 앞에는 내 기준 재수 없는 표정, 판 대륙 기준 야릇한 표정을 짓고 칼을 휘적대는 남자 새끼가 하나.

       

       “우후후. 뇌가 아니라 젖으로 생각하는 여자란 참 단순하네~ 아, 엘프라 가슴도 작던가?”

       

       마지막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모든 것을 구경하며 낄낄대는 여자가 다섯.

       

       “죽여라 죽여!”

       “아니, 그냥 죽이는 건 아깝잖아.”

       “뭐? 너 이 미친년 설마….”

       “게일 한번 따먹어 보겠다고 온 년들인데, 죽이기 전에 아랫도리는 보여줘야지!”

       “천재였군. 좋네! 벗어라 게일!”

       

       아주 축제 분위기구만. 누구 하나 담그는 걸 재밌는 이벤트 정도로 여긴다는 태도가 팍팍 느껴진다.

       

       그나저나 전체적인 구도와 들려오는 대화. 사로잡힌 엘프 둘의 배신감 가득한 표정을 보면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이거 남자 쪽에서 꼬리 치면서 엘프 파티에 들어갔는데, 사실 약탈자 파티의 프락치였다는 전개 아냐?

       

       어휴. 저게 진짜 꽃뱀이란 건가. 나처럼 건전하게 재산과 몸만 노려야지 목숨까지 노릴 건 또 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문득 바닥을 굴러다니는 엘프 둘에게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알몸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엄한 곳으로 시선이 갈 법도 하건만, 어째서인지 얼굴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저 둘. 어디서 봤는데….

       

       “…어?”

       

       생각났다.

       

       일전에 내 8쿠퍼를 뜯어간 양아치 엘프 이인조!

       

       어제 우연히 만나서 10배의 복수를 천명하며 지갑을 털었지만, 기세를 타고 리디아에게 밥 사준다고 했다가 빚만 왕창 지게 만든 주범!

       

       그날 하루 사이에 강매당한 데이트 비용이 무려 2골드 38실버 76쿠퍼다! 리디아가 관대(?)하게 2골드 30실버로 깎아 줬지만, 그럼에도 가챠를 230번이나 돌릴 수 있는 금액!

       

       물론 리디아는 이걸 당장 갚으라고 재촉하지도 않고, 돈이 없으면 다른 걸로 갚으라며 착취하지도 않겠지. 그저 나를 오래 붙들 구실이 필요했던 것 같으니까.

       

       초보 시절의 리디아가 엘리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던가. 어쩌면 그때의 은혜를 나를 통해 갚으려는 걸지도 모르겠네.

       

       뭐, 그건 그거고 저 두 년 때문에 빚이 늘어난 건 별개의 문제.

       

       내 안에 흐르는 당가의 피가(아님) 속삭인다. 10배의 원한을 받아내야 한다고…!

       

       마음 같아서는 그냥 죽게 놔두고 싶지만…그건 리디아가 허락하지 않겠지.

       

       결국 살릴 수밖에 없다면, 살려서 뭐라도 받아내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아직 나한테 갚을 게 잔뜩 남은 년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죽게 생겼다.

       

       그리 생각하자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언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더는 참기 힘들 정도로.

       

       하여, 참지 않기로 했다.

       

       “갈!!!!”

       

       “요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잠시 모습을 숨기고 있던 리디아가 기겁하며 나를 말리려 들었지만…이미 늦었다.

       

       진작에 땅을 박차며 뛰쳐나갔으니까.

       

       “누구야!”

       

       괜히 약탈자가 아니라는 걸까. 내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실실대던 얼굴이 싸늘하게 굳히고 주변을 경계하는 게일.

       

       나를 발견한 녀석의 얼굴이 눈에 띄게 풀어진다.

       

       “뭐야. 이젠 미궁에 이런 꼬맹이도 들어오네. 예쁘장한 게 팔면 좀 비싸겠……아?”

       

       물론, 내 손에 들린 단검을 확인하고는 바로 검을 겨누었지만 말이다.

       

       저 게일이라는 놈. 화장이 진하고 남자 새끼가 쓸데없이 끼 부리는 표정으로 아양을 떠는 것 같아 재수 없지만, 그래도 칼 밥은 꽤 먹었나 보다. 급하게 잡았음에도 자세가 안정적이네.

       

       하지만 빈틈이 잘 안 보인다면 만들면 그만이다.

       

       “감히 제 23골드를…!!”

       

       “그게 무슨 개소리야!”

       

       어이없어하는 게일. 그러라고 한 말이니 당연하다. 집중력이 살짝 흐트러진 녀석을 겨누고 손목의 석궁을 발사했다.

       

       쐐애액!

       

       “흥! 같잖은 짓을.”

       

       코웃음 치며 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쳐내는 게일. 예상했다. 이 구역에서 활동한다는 건 혼 래빗을 가뿐히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증거 아닌가. 이 정도 화살이야 당연히 쳐내겠지.

       

       다만 그 과정에서 동작을 한번 소모할 수밖에 없다. 그거면 충분했다.

       

       상체를 한껏 낮춰 웅크리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무게중심이 변하며 자연스레 기울어지는 몸뚱이. 그렇게 완전히 넘어지기 직전. 전신을 활짝 펼쳤다.

       

       눌려있던 용수철이 튕겨 나가듯, 전신의 탄력이 이 작은 몸뚱이를 폭발적인 기세로 밀어낸다.

       

       타닷!

       

       “무슨?!”

       

       당황한 게일이 어정쩡한 자세로 재차 검을 휘둘렀다. 제대로 힘이 실려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흔들리는 검을 피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타이밍에 맞춰 허리를 살짝 꺾는 것만으로도, 목적지를 잃고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검날.

       

       그대로 반보 파고들어 녀석의 고간을 무릎으로 찍었다.

       

       터엉!

       

       “뭣!”

       

       무언가 단단한 것에 막혀 제대로 으깰 수 없었지만.

       

       “정조대를 차고 다니는 건가요?!”

       

       “고간 보호대다 멍청한 꼬맹아!”

       

       허여멀건한 화장을 일그러뜨리며 내 정수리를 향해 폼멜을 내리찍는 게일. 조금 전의 속도를 보고도 배운 게 없나 보다.

       

       몸을 옆으로 털어 폼멜을 피하는 동시에 무방비하게 드러난 손목 안쪽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가죽으로 된 장갑은 손가락을 보호해 줄지언정, 손목까지 감싸지는 못했다. 그러게 좀 더 좋은 거 쓰지.

       

       촤아악!

       

       “아아악!”

       

       게일의 손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힘줄까지 베인 탓에 검을 손에서 놓을 수밖에 없던 게일이었으나, 반대쪽 손은 멀쩡히 쥐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표독스러운 눈빛을 한 게일이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른다.

       

       “죽어…!”

       

       “음.”

       

       쉽게 제압당해 줄 것 같진 않네. 하긴 목숨이 걸렸는데 이게 당연한 일이지. 좀 더 철저하게 무력화시킬 필요가 있겠네.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게일의 허벅지를 밟아, 높이 점프했다. 그리고 허리를 뒤틀어 공중에서 몸을 뒤집는다.

       

       후웅-

       

       내 몸통이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검. 이번에는 멀쩡한 반대쪽 손목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거꾸로 뒤집힌 채, 체공하는 중이라 조금 각도가 안 좋았지만…어차피 손목이 진짜 목적은 아니니까 괜찮다.

       

       “같은 수법이 두 번이나 통할 것 같아?”

       

       코웃음 치며 손목을 꺾어 단검을 피하는 게일. 그런 녀석을 비웃으며 비어있는 팔을 뻗었다.

       

       “통할 걸요? 다른 수법이니까.”

       

       빈손이 노리는 곳은 당연히 게일이 쥐고 있는 검. 안 그래도 한 손으로 들고 있는데, 그마저도 손목을 과하게 꺾느라 손가락에 걸친 것이나 다름없는 파지.

       

       그 사이를 파고들어 잽싸게 검을 소매치기했다.

       

       “어…?”

       

       얼빠진 소리를 내며 검을 빼앗긴 녀석. 그 앞에서 보란 듯이 몸을 웅크렸다가 다시 뒤집는다.

       

       자연스레 머리가 위로 올라오며, 들고 있던 검은 더 높이 올라온 상태. 그대로 낙하하며 게일의 하나 남은 손목을 내리찍는다.

       서걱.

       

       “끄아아아악!”

       

       자기 검에 손목을 절단당한 게일이 패닉에 빠져 멈칫한 사이. 착지한 자세 그대로 자세를 한껏 숙이고는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촤아악!

       

       “-아아아악!”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발목마저 베인 녀석이 더는 서 있지 못하고 쓰러진다.

       

       손목처럼 힘줄이 잘리거나, 아예 절단된 건 아니나, 충분히 깊게 베었다. 누가 치료해 주지 않는 이상 걷지도 못하리라.

       

       “아아…도, 도망쳐야…!”

       

       물론 아직 자신의 장르가 사지절단으로 바뀌었음을 모르는 게일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철푸덕.

       

       “어째서 다리가…?”

       

       전부 실패하고 제자리에서 버둥대는 게 전부였지만.

       

       물론 그렇게 버둥대는 와중에도 조금씩 기어가는 정도는 가능했다. 자신이 낚아챈 두 엘프 년들처럼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며 내게서 멀어지려는 게일.

       

       그런 게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직도 한 손에 쥐고 있는 녀석의 검을 들어 올렸다.

       

       역시 제대로 된 장검은 좀 무겁네. 순간 몸이 갸우뚱하는 것을 가까스로 버텨내며, 게일의 다리를 내리찍었다.

       

       “에잇.”

       

       푸욱!

       

       “끼, 아아아악!”

       

       곤충 표본처럼 자신의 검에 종아리를 꿰뚫리자, 이젠 아무것도 못 하게 된 게일이 헐떡이는 목소리로 내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내가 미안해! 아니, 죄송합니다! 뭐든 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아니. 누가 죽인다고 했어요? 그리고 오늘 처음 봤는데 저한테 잘못한 게 뭔가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벙찐 표정으로 멈칫하는 녀석. 진한 화장이 눈물과 콧물로 흘러내린 탓에 상당히 추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내가 바로 목을 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챈 녀석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물었다.

       

       “그럼…살려주시는 건가요?”

       

       “남자 새끼가 질질 짜기는. 진짜 죽여버리기 전에 뚝 그치세요. 뚝!”

       

       “히끅. 끄흑….”

       

       실로 하남자같은 반응에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꾸하자, 소리만 죽였을 뿐 더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녀석.

       

       거, 남자가 말이야. 아직 좆돼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좆된 상태라면 폼이라도 잡아야지.

       

       …물론 내가 저 상황이었으면 대성통곡했을 자신 있다.

       

       혀를 쯧쯧 차며 뒤쪽을 바라보았다. 아마 게일보다 훨씬 강한…약탈자 파티의 주력으로 보이는 여자 다섯이 있는 곳.

       

       거기도 여기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리디아가 반투명한 외날 검으로 약탈자들의 머리를 예쁘게 잘라둔 상태였으니까.

       

       세상에. 또 다른 검이잖아? 심지어 저것도 비싸 보인다. 대체 얼마나 장비에 진심인 거람.

       

       적당히 손을 흔들어, 이쪽은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는 리디아.

       

       좋아. 이걸로 상황 종료라고 보면 되겠구만.

       

       아직도 소리죽여 훌쩍이는 게일의 옆구리를 툭툭 발로 차며 말했다.

       

       “저쪽은 다 죽었으니까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잘 알겠죠?”

       

       “네…?”

       

       “일단 숨겨둔 재산 있으면 전부 뱉어내세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른 동료나 다른 계획이 있는지 전부 자백해야죠. 그러면 길드까지 데려가 줄게요.”

       

       약탈자는 기본적으로 그 자리에서 처형당하지만…만약 살려서 밖으로 나오면 다른 선택지가 생긴다.

       

       몬스터의 부산물처럼 약탈자를 길드에서 노예로 매입해 주기 때문.

       

       이 경우엔 일반적인 노예가 아니라 범죄 노예기 때문에 자기 몸값을 지불해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평생을 노예로 살아야 하지만…어쨌든 살 수는 있잖은가.

       

       “네, 네에! 전부 말할게요! 전부 말할 테니까 부디….”

       

       “잘 생각했어요. 그럼 자세한 건 저기서 무서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빨간 머리 누나한테 말하세요.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저 엘프들한테 한 것처럼 꼬리치면 그땐 제 손에 죽는 거예요?”

       

       “……!”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일. 이 정도 했으면 알아들었겠지.

       

       그렇게 게일을 리디아에게 짬때린 후, 어째서인지 오들오들 떨고 있는 두 엘프 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금발에 녹안. 그리고 슬렌더한 미인이라는 전형적인 엘프의 모습을 한 둘. 심지어 혈연이기라도 한 건지, 이목구비까지 닮았다.

       

       유일한 차이점이라고는 장발과 단발이라는 머리카락 길이뿐.

       

       가까이서 보니 8쿠퍼 뜯겼을 때가 생각나네.

       

       괜히 화가 나서 엘프답게 빈약한 둘의 가슴을 찰싹찰싹 때리며 물었다.

       

       “오랜만이에요 예쁜 누나들. 제 8쿠퍼는 어디다 쓰셨나요?”

       

       “어어?”

       “그때 그….”

       

       다행히 나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걸까. 파르르 떨기 시작하는 둘. 그런 그녀들을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안 그래도 하얀 엘프의 피부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신선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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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

EP.19





       리디아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낙관하며 도착한 현장. 그곳에는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역시 알몸으로 꽁꽁 묶인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엘프 여자 둘.


       


       “게일! 우릴 속인 검까…!”


       “믿었는데! 너무함다! 


       


       그 앞에는 내 기준 재수 없는 표정, 판 대륙 기준 야릇한 표정을 짓고 칼을 휘적대는 남자 새끼가 하나.


       


       “우후후. 뇌가 아니라 젖으로 생각하는 여자란 참 단순하네~ 아, 엘프라 가슴도 작던가?”


       


       마지막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모든 것을 구경하며 낄낄대는 여자가 다섯.


       


       “죽여라 죽여!”


       “아니, 그냥 죽이는 건 아깝잖아.”


       “뭐? 너 이 미친년 설마….”


       “게일 한번 따먹어 보겠다고 온 년들인데, 죽이기 전에 아랫도리는 보여줘야지!”


       “천재였군. 좋네! 벗어라 게일!”


       


       아주 축제 분위기구만. 누구 하나 담그는 걸 재밌는 이벤트 정도로 여긴다는 태도가 팍팍 느껴진다.


       


       그나저나 전체적인 구도와 들려오는 대화. 사로잡힌 엘프 둘의 배신감 가득한 표정을 보면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이거 남자 쪽에서 꼬리 치면서 엘프 파티에 들어갔는데, 사실 약탈자 파티의 프락치였다는 전개 아냐?


       


       어휴. 저게 진짜 꽃뱀이란 건가. 나처럼 건전하게 재산과 몸만 노려야지 목숨까지 노릴 건 또 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도 잠시. 문득 바닥을 굴러다니는 엘프 둘에게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알몸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엄한 곳으로 시선이 갈 법도 하건만, 어째서인지 얼굴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저 둘. 어디서 봤는데….


       


       “…어?”


       


       생각났다.


       


       일전에 내 8쿠퍼를 뜯어간 양아치 엘프 이인조!


       


       어제 우연히 만나서 10배의 복수를 천명하며 지갑을 털었지만, 기세를 타고 리디아에게 밥 사준다고 했다가 빚만 왕창 지게 만든 주범!


       


       그날 하루 사이에 강매당한 데이트 비용이 무려 2골드 38실버 76쿠퍼다! 리디아가 관대(?)하게 2골드 30실버로 깎아 줬지만, 그럼에도 가챠를 230번이나 돌릴 수 있는 금액!


       


       물론 리디아는 이걸 당장 갚으라고 재촉하지도 않고, 돈이 없으면 다른 걸로 갚으라며 착취하지도 않겠지. 그저 나를 오래 붙들 구실이 필요했던 것 같으니까.


       


       초보 시절의 리디아가 엘리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했던가. 어쩌면 그때의 은혜를 나를 통해 갚으려는 걸지도 모르겠네.


       


       뭐, 그건 그거고 저 두 년 때문에 빚이 늘어난 건 별개의 문제.


       


       내 안에 흐르는 당가의 피가(아님) 속삭인다. 10배의 원한을 받아내야 한다고…!


       


       마음 같아서는 그냥 죽게 놔두고 싶지만…그건 리디아가 허락하지 않겠지.


       


       결국 살릴 수밖에 없다면, 살려서 뭐라도 받아내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아직 나한테 갚을 게 잔뜩 남은 년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죽게 생겼다.


       


       그리 생각하자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언가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더는 참기 힘들 정도로.


       


       하여, 참지 않기로 했다.


       


       “갈!!!!”


       


       “요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잠시 모습을 숨기고 있던 리디아가 기겁하며 나를 말리려 들었지만…이미 늦었다.


       


       진작에 땅을 박차며 뛰쳐나갔으니까.


       


       “누구야!”


       


       괜히 약탈자가 아니라는 걸까. 내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실실대던 얼굴이 싸늘하게 굳히고 주변을 경계하는 게일.


       


       나를 발견한 녀석의 얼굴이 눈에 띄게 풀어진다.


       


       “뭐야. 이젠 미궁에 이런 꼬맹이도 들어오네. 예쁘장한 게 팔면 좀 비싸겠……아?”


       


       물론, 내 손에 들린 단검을 확인하고는 바로 검을 겨누었지만 말이다.


       


       저 게일이라는 놈. 화장이 진하고 남자 새끼가 쓸데없이 끼 부리는 표정으로 아양을 떠는 것 같아 재수 없지만, 그래도 칼 밥은 꽤 먹었나 보다. 급하게 잡았음에도 자세가 안정적이네.


       


       하지만 빈틈이 잘 안 보인다면 만들면 그만이다.


       


       “감히 제 23골드를…!!”


       


       “그게 무슨 개소리야!”


       


       어이없어하는 게일. 그러라고 한 말이니 당연하다. 집중력이 살짝 흐트러진 녀석을 겨누고 손목의 석궁을 발사했다.


       


       쐐애액!


       


       “흥! 같잖은 짓을.”


       


       코웃음 치며 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쳐내는 게일. 예상했다. 이 구역에서 활동한다는 건 혼 래빗을 가뿐히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증거 아닌가. 이 정도 화살이야 당연히 쳐내겠지.


       


       다만 그 과정에서 동작을 한번 소모할 수밖에 없다. 그거면 충분했다.


       


       상체를 한껏 낮춰 웅크리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무게중심이 변하며 자연스레 기울어지는 몸뚱이. 그렇게 완전히 넘어지기 직전. 전신을 활짝 펼쳤다.


       


       눌려있던 용수철이 튕겨 나가듯, 전신의 탄력이 이 작은 몸뚱이를 폭발적인 기세로 밀어낸다.


       


       타닷!


       


       “무슨?!”


       


       당황한 게일이 어정쩡한 자세로 재차 검을 휘둘렀다. 제대로 힘이 실려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흔들리는 검을 피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타이밍에 맞춰 허리를 살짝 꺾는 것만으로도, 목적지를 잃고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검날.


       


       그대로 반보 파고들어 녀석의 고간을 무릎으로 찍었다.


       


       터엉!


       


       “뭣!”


       


       무언가 단단한 것에 막혀 제대로 으깰 수 없었지만.


       


       “정조대를 차고 다니는 건가요?!”


       


       “고간 보호대다 멍청한 꼬맹아!”


       


       허여멀건한 화장을 일그러뜨리며 내 정수리를 향해 폼멜을 내리찍는 게일. 조금 전의 속도를 보고도 배운 게 없나 보다.


       


       몸을 옆으로 털어 폼멜을 피하는 동시에 무방비하게 드러난 손목 안쪽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가죽으로 된 장갑은 손가락을 보호해 줄지언정, 손목까지 감싸지는 못했다. 그러게 좀 더 좋은 거 쓰지.


       


       촤아악!


       


       “아아악!”


       


       게일의 손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힘줄까지 베인 탓에 검을 손에서 놓을 수밖에 없던 게일이었으나, 반대쪽 손은 멀쩡히 쥐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표독스러운 눈빛을 한 게일이 한 손으로 검을 휘두른다.


       


       “죽어…!”


       


       “음.”


       


       쉽게 제압당해 줄 것 같진 않네. 하긴 목숨이 걸렸는데 이게 당연한 일이지. 좀 더 철저하게 무력화시킬 필요가 있겠네.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게일의 허벅지를 밟아, 높이 점프했다. 그리고 허리를 뒤틀어 공중에서 몸을 뒤집는다.


       


       후웅-


       


       내 몸통이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검. 이번에는 멀쩡한 반대쪽 손목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거꾸로 뒤집힌 채, 체공하는 중이라 조금 각도가 안 좋았지만…어차피 손목이 진짜 목적은 아니니까 괜찮다.


       


       “같은 수법이 두 번이나 통할 것 같아?”


       


       코웃음 치며 손목을 꺾어 단검을 피하는 게일. 그런 녀석을 비웃으며 비어있는 팔을 뻗었다.


       


       “통할 걸요? 다른 수법이니까.”


       


       빈손이 노리는 곳은 당연히 게일이 쥐고 있는 검. 안 그래도 한 손으로 들고 있는데, 그마저도 손목을 과하게 꺾느라 손가락에 걸친 것이나 다름없는 파지.


       


       그 사이를 파고들어 잽싸게 검을 소매치기했다.


       


       “어…?”


       


       얼빠진 소리를 내며 검을 빼앗긴 녀석. 그 앞에서 보란 듯이 몸을 웅크렸다가 다시 뒤집는다.


       


       자연스레 머리가 위로 올라오며, 들고 있던 검은 더 높이 올라온 상태. 그대로 낙하하며 게일의 하나 남은 손목을 내리찍는다.


       서걱.


       


       “끄아아아악!”


       


       자기 검에 손목을 절단당한 게일이 패닉에 빠져 멈칫한 사이. 착지한 자세 그대로 자세를 한껏 숙이고는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촤아악!


       


       “-아아아악!”


       


       비명이 끝나기도 전에 발목마저 베인 녀석이 더는 서 있지 못하고 쓰러진다.


       


       손목처럼 힘줄이 잘리거나, 아예 절단된 건 아니나, 충분히 깊게 베었다. 누가 치료해 주지 않는 이상 걷지도 못하리라.


       


       “아아…도, 도망쳐야…!”


       


       물론 아직 자신의 장르가 사지절단으로 바뀌었음을 모르는 게일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철푸덕.


       


       “어째서 다리가…?”


       


       전부 실패하고 제자리에서 버둥대는 게 전부였지만.


       


       물론 그렇게 버둥대는 와중에도 조금씩 기어가는 정도는 가능했다. 자신이 낚아챈 두 엘프 년들처럼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며 내게서 멀어지려는 게일.


       


       그런 게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아직도 한 손에 쥐고 있는 녀석의 검을 들어 올렸다.


       


       역시 제대로 된 장검은 좀 무겁네. 순간 몸이 갸우뚱하는 것을 가까스로 버텨내며, 게일의 다리를 내리찍었다.


       


       “에잇.”


       


       푸욱!


       


       “끼, 아아아악!”


       


       곤충 표본처럼 자신의 검에 종아리를 꿰뚫리자, 이젠 아무것도 못 하게 된 게일이 헐떡이는 목소리로 내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내가 미안해! 아니, 죄송합니다! 뭐든 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아니. 누가 죽인다고 했어요? 그리고 오늘 처음 봤는데 저한테 잘못한 게 뭔가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벙찐 표정으로 멈칫하는 녀석. 진한 화장이 눈물과 콧물로 흘러내린 탓에 상당히 추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내가 바로 목을 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챈 녀석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물었다.


       


       “그럼…살려주시는 건가요?”


       


       “남자 새끼가 질질 짜기는. 진짜 죽여버리기 전에 뚝 그치세요. 뚝!”


       


       “히끅. 끄흑….”


       


       실로 하남자같은 반응에 약간 신경질적으로 대꾸하자, 소리만 죽였을 뿐 더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는 녀석.


       


       거, 남자가 말이야. 아직 좆돼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좆된 상태라면 폼이라도 잡아야지.


       


       …물론 내가 저 상황이었으면 대성통곡했을 자신 있다.


       


       혀를 쯧쯧 차며 뒤쪽을 바라보았다. 아마 게일보다 훨씬 강한…약탈자 파티의 주력으로 보이는 여자 다섯이 있는 곳.


       


       거기도 여기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리디아가 반투명한 외날 검으로 약탈자들의 머리를 예쁘게 잘라둔 상태였으니까.


       


       세상에. 또 다른 검이잖아? 심지어 저것도 비싸 보인다. 대체 얼마나 장비에 진심인 거람.


       


       적당히 손을 흔들어, 이쪽은 괜찮다는 사인을 보내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는 리디아.


       


       좋아. 이걸로 상황 종료라고 보면 되겠구만.


       


       아직도 소리죽여 훌쩍이는 게일의 옆구리를 툭툭 발로 차며 말했다.


       


       “저쪽은 다 죽었으니까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잘 알겠죠?”


       


       “네…?”


       


       “일단 숨겨둔 재산 있으면 전부 뱉어내세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른 동료나 다른 계획이 있는지 전부 자백해야죠. 그러면 길드까지 데려가 줄게요.”


       


       약탈자는 기본적으로 그 자리에서 처형당하지만…만약 살려서 밖으로 나오면 다른 선택지가 생긴다.


       


       몬스터의 부산물처럼 약탈자를 길드에서 노예로 매입해 주기 때문.


       


       이 경우엔 일반적인 노예가 아니라 범죄 노예기 때문에 자기 몸값을 지불해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평생을 노예로 살아야 하지만…어쨌든 살 수는 있잖은가.


       


       “네, 네에! 전부 말할게요! 전부 말할 테니까 부디….”


       


       “잘 생각했어요. 그럼 자세한 건 저기서 무서운 표정으로 다가오는 빨간 머리 누나한테 말하세요.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저 엘프들한테 한 것처럼 꼬리치면 그땐 제 손에 죽는 거예요?”


       


       “……!”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일. 이 정도 했으면 알아들었겠지.


       


       그렇게 게일을 리디아에게 짬때린 후, 어째서인지 오들오들 떨고 있는 두 엘프 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금발에 녹안. 그리고 슬렌더한 미인이라는 전형적인 엘프의 모습을 한 둘. 심지어 혈연이기라도 한 건지, 이목구비까지 닮았다.


       


       유일한 차이점이라고는 장발과 단발이라는 머리카락 길이뿐.


       


       가까이서 보니 8쿠퍼 뜯겼을 때가 생각나네.


       


       괜히 화가 나서 엘프답게 빈약한 둘의 가슴을 찰싹찰싹 때리며 물었다.


       


       “오랜만이에요 예쁜 누나들. 제 8쿠퍼는 어디다 쓰셨나요?”


       


       “어어?”


       “그때 그….”


       


       다행히 나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걸까. 파르르 떨기 시작하는 둘. 그런 그녀들을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안 그래도 하얀 엘프의 피부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신선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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