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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

       교수실 창가에 걸터앉아 아침 햇빛을 쬐며 육포를 뜯어 먹었다.

       이 육포는 양고기 육포로 웨이버한테 선물받은 것. 저번 야간침투수업 때 먹은 게 맛있었다고 하자 한 바구니를 가져다 줬다.

       

       “전투수석교수님. 황성 정기보고서 작성회의 들어가실 시간입니다.”

       

       교수실 문이 열리며 전투학과 조교 한 명이 들어왔다.

       

       황성 정기보고서.

       아카데미에서는 운영현황과 특이사항 등을 상급기관인 황성 안보실에 정기적으로 보고한다.

       그렇다고 황성에서 아예 목을 잡고 이리저리 흔드는 건 아니고 대부분은 아카데미에 재량과 권한이 있다.

       하지만 제국에서 활용하는 요원들을 배출하는 곳이니 황성에서도 어느 정도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필요하면 개입을 해야 하니까.

       

       “그래, 알았어. 이것만 먹고.”

       

       반쯤 먹은 양고기 육포를 입에 쑤셔 넣고 망토에 기름기 묻은 손가락을 닦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남은 육포 하나는 나중에 간식으로 먹으려고 주머니에 넣었다.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복도를 걸어가니 저쪽 교장실 앞에 누군가 서있는 것이 보인다.

       거의 남자만큼이나 훤칠한 키에 스스로 빛나는 금발과 기다란 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엘프. 이론수석교수 이스메라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아, 디안 교수님. 때맞춰 오셨군… 요….”

       

       온화한 미소로 내게 고개를 돌린 이스메라는 내가 육포를 껌처럼 씹고 있는 것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마치 하층민의 천한 행동거지를 보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 경멸이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참는 듯한 표정.

       

       자고로 엘프들은 겉으로는 항상 온화하게 웃지만 속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음흉한 족속들.

       스스로를 고귀한 고등종족이라 여기며 자기네들의 숲에 모여 사는데 굉장히 배타적이고 다른 종족을 업신 여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나 저번 공작 방문 때 보니 이스메라는 유독 그런 경향이 심해 보였다. 웃는 낯으로 음습하게 돌려 까는 게 꼭 교토 사람 같단 말이지….

       

       

       # # # # #

       

       

       이론수석교수 이스메라는 아카데미 교내를 살랑살랑 걷고 있었다. 황성 정기보고서 작성회의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그래요. 좋은 아침이에요.”

       

       인사하는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미소를 지어주며 이스메라는 곧 있을 회의에 대해 생각했다.

       

       황성 정기보고에는 민감한 내용이 많이 들어가 교장과 수석교수 두 명만 참석하는데 공교롭게도 교장과 전투수석은 이스메라가 싫어하는 사람들.

       키르린은 예전부터 꾸준하게 증오해 왔고 디안의 경우는 자신의 큰그림을 망쳤기 때문에 최근부터 혐오하기 시작했다.

       

       이스메라의 큰그림은 나이틀리 건으로 화가 난 공작이 아카데미를 뒤집어 엎고 이것을 빌미로 황성에서 키르린을 해임, 그 자리에 자신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디안이 공작과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오히려 굉장히 좋게 상황이 종료되어버렸다. 키르린은 그대로 붙박혀 있고 교내에서는 디안에 대한 평판만 올라가고.

       

       어쩌면 디안 교수 역시 인맥으로 전투수석이 된 것은 아닐까? 이렇다 할 경력도 알 수 없는 희멀건한 인간이 전투수석이라니.

       전투학과의 덩치만 큰 늙은이 모턴이나 그 무식한 오크 교수 같은 외양이면 모를까 희멀건해서는 목검 들고 교내나 어슬렁거리는 인간이 전투수석에 합당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교장실 앞에 멈춰선 이스메라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치켜떴다.

       

       불합리하다. 

       누구는 전쟁 때 숲을 잃고 도망쳐 나와 낯선 곳에서 10년 동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공부해 겨우 수석교수가 되었는데 정작 다른 것들은 모두 부모빨 인맥빨로 호의호식하고 있다니.

       

       “안녕하세요, 이론수석교수님.”

       

       그때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투수석교수 디안이었다.

       

       “아, 디안 교수님. 때맞춰 오셨군… 요….”

       

       뭔가를 우적우적 씹고 있는 모습을 본 이스메라는 말끝을 흐리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지금 대체 뭐하는 짓이지? 걸으면서 음식을 먹는다고? 이제보니 어지간히 몰상식한 인간이었군.

       

       “무엇을 그리 맛있게 드십니까? 디안 교수님 드시는 모습을 보고 저와 교장님 모두 이른 시간부터 허기질까 무섭습니다.”

       

       천박하고 예의도 없게 입에 음식 넣고 돌아다니지 말라는 말을 우아하게 돌려 말한 것이다.

       스스로를 고귀하다 여기는 엘프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말하기는 하지만 이스메라는 그 정도가 유독 심하다.

       

       이것은 모두 고향과 일족을 잃고 낯선 인간사회에 던져진 이스메라가 살아남기 위한 나름대로의 생존방식.

       의지할 곳 없는 소수 입장에서는 아주 작은 갈등과 싸움도 피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자존심 강한 엘프다 보니 아주 머리를 숙이는 것은 죽어도 싫어서 택한 타협안이 웃으며 돌려까기다.

       

       “아, 이거요? 양고기 육포입니다. 웨이버 교수가 줬어요. 직접 만들었다는데 정말 맛있어요.”

       

       이스메라의 말에 디안 교수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뭔지 전혀 궁금하지 않아, 인간아. 이스메라가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그렇군요. 웨이버 교수는 아카데미에서도 저 유명한 퀴라나 사냥꾼의 전통을 이어가는 모양입니다. 아마도 전투수석교수님께서 그러한 여건을 잘 보장해주신 덕분이겠지요.”

       

       교수라는 인간이 육포나 만들고 있다니, 전투학과는 할일이 더럽게 없나 보지? 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맛있는 육포를 먹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듣자하니 이거 만들어서 여기저기 선물하는 게 취미라 하더라고요. 이스메라 교수님께는 드리지 않던가요?”

       “저 역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그것을 맛보고 싶네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도 절대 그딴 거 먹을 일 따위는 없다는 이스메라식 완곡한 표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사치레로 자주 쓰는 표현이기도 하니 디안도 알아 먹겠지.

       

       “그러세요? 마침 하나 가져왔는데, 드셔보실래요?”

       

       그런데 갑자기 디안의 주머니에서 육포가 나오자 이스메라는 당황해서 하마터면 미소를 잃을 뻔했다.

       

       “너무도 감사합니다만 어떡하죠? 사실은 제가 아침을 막 먹고 온 터라….(절대 싫어!)”

       “그러면 이따가 일하시다 입이 궁금하실 때 드세요. 자요, 어서요.”

       

       하지만 디안 교수는 알아채지 못했는지 이스메라의 로브 주머니에 육포를 마구 밀어 넣었다.

       

       “맛 보시고 괜찮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웨이버 교수한테 이스메라 교수님 것도 해달라고 부탁해 놓겠습니다. 이거 한번 먹으면 헤어나오기 힘들어요.”

       “감사한 제안입니다만 혹여나 웨이버 교수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닐지요.(필요 없다고, 그런 미개한 음식!)”

       

       그러자 디안이 양손을 내저었다.

       

       “아뇨아뇨. 말씀드렸잖아요. 웨이버는 여기저기 선물하는 게 취미라고요. 분명 기뻐할 겁니다. 끄윽, 죄송.”

       

       그러면서 디안이 트림을 하자 이스메라의 눈꼬리가 살짝 경련했다.

       

       “그럼 들어가시죠. 디안 교수님과 함께 들어간다면 교장님께서도 반가워 하실 겁니다.(네가 여기서 멍청하게 구는 바람에 지체됐잖아)”

       “헤헤, 그럴까요? 하긴 제가 요즘 워낙 일을 열심히 했으니까요.”

       

       디안은 아무 것도 모르고 웃으면서 어깨를 으스댔다. 아니, 무슨 인간이 저리 눈치가….

       디안의 일관된 반응에 이스메라는 약간 체한 듯한 답답함을 느끼며 교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 어서와, 디안!”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던 키르린이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스메라 교수….”

       

       디안에게는 세상 밝게 인사하던 키르린의 목소리가 이스메라에 이르러서는 급격히 쪼그라 들었다.

       책상 위에 위태롭게 쌓인 서류들을 돌아보며 이스메라가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는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불철주야 아카데미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교장님.(책상 정리 좀 하고 살아라)”

       “아무래도 교장이니까 더욱 잘 해야지… 요. 격려 고마워, 이스메라 교수.”

       

       키르린이 어색하게 웃자 이스메라는 속으로 욕을 했다. 저 멍청한 검둥이년이, 말귀를 전혀 못 알아 먹고 있어.

       

       “앉아. 차를 내올게.”

       

       행정실장이 가져온 차를 한 모금 마신 이스메라가 웃으며 말했다.

       

       “이 차는 참으로 재미있는 맛이군요.(맛없어)”

       “그래요? 이건 내가 공립 아카데미에서 공부할 때 즐겨 마신 차야. 정신을 맑게 해주는 효능이 있대요.”

       “그런 효능이 있다니 신기하네요. 이 차 덕분에 교장님께서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실 수 있었던 것이로군요.(근거 없는 개소리. 하찮은 공립 출신이 어디서 잘난 체야)”

       “이스메라 교수도 필요하면 몇 봉 챙겨줄게… 요. 수석교수는 항상 힘들고 피곤한 자리니까, 도움이 될 거예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저도 꼭 그 정신이 맑아진다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습니다.(필요없어)”

       

       그러나 키르린은 전혀 알아먹지 못하고 반색을 하면서 행정실장을 불러 이따 회의가 끝나면 이스메라에게 남은 차 봉지를 다 내주라고 지시했고, 이에 이스메라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감사의 인사를 해야만 했다.

       진짜 눈치라고는 전혀 없는 족속들이로군….

       

       교장과 수석교수들은 회의용 원탁에 앉아 황성으로 보낼 정기보고서의 내용을 토의했다.

       이번 1분기 정기보고서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다룰 것은 전투학과 개편에 대한 내용.

       

       디안이 전투학과와 관련한 현안업무들을 차례로 보고했다.

       

       “일단 모든 전투과목 수업의 실습 비중을 팔 할 이상으로 편성했고요. 이에 따른 교육훈련계획도 수정 및 보완을 완료했습니다.”

       “으응….”

       

       키르린은 직접 잉크펜을 들고 디안이 보고하는 것들을 보고서에 써내려 갔다. 글씨가 동글동글 반듯한 것이 다크엘프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아기자기한 필체였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이스메라의 눈빛은 마치 살아 꿈틀대는 벌레는 보는 듯한 기분나쁜 것.

       

       “교장님의 필체는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것이로군요.(다 큰 성인 글씨체가 왜 그 따위지?)” 

       “오, 글씨체가 엄청 귀엽네요.”

       

       이스메라의 말에 키르린의 글씨를 힐끔 본 디안이 칭찬했고 그러자 키르린의 얼굴이 검붉어졌다.

       

       “교장님. 다크엘프분들께서는 다들 그렇게 예쁜 필체를 가지신 것인가요?(너희 무식한 다크엘프들의 수준을 알만하다)”

       “그건 아니고 공립 아카데미 다닐 때 연습한 거예요. 저는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은 좋게 봐주니 좀 부끄럽네.”

       “저는 잘 모르지만 공립 아카데미라는 곳, 참으로 좋은 곳인 듯합니다.(글씨 연습이나 시키는 곳이라니 쓰레기 아카데미잖아?)”

       “이스메라 교수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행이다. 나는 사실 학력이 딸려서 이스메라 교수가 속으로 무시하는 건 아닌가 하고 걱정했어요.”

       

       이 시점에서 이스메라 교수는 정말로 자신이 체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 이것들 왜 이렇게 못 알아 먹는 거야?!

       이스메라는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교장님. 교장님과 저는 걸어온 길은 다르지만 결국 여기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보람찬 일을 하고 있는데요.(당연히 너랑 나랑은 하늘과 땅 차이지. 같은 학교에서 일한다고 동급이라 착각하지 마)”

       “캬아-!”

       

       그 말을 들은 디안 교수가 감탄하면서 박수를 짝짝 쳤다.

       

       “역시 이스메라 교수님! 고결한 외모만큼이나 어쩜 생각하시는 바도 그리 빛이 나시는 겁니까. 엘프란 과연!”

       “아니… 제,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급작스러운 현기증과 함께 이스메라 교수는 기어이 말을 더듬고 말았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공지사항에 이스메라 일러스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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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A Quiet Life

The Retired Supporting Character Wants to Live Quietly 은퇴한 조력캐는 조용히 살고 싶다
Score 3.9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stead of causing chaos with my knowledge of the original work, I assisted the protagonist.

I successfully completed the story and now planned to retire and live peacefully.

However, it seems the protagonist still needs my help.

An academy professor? That’s nothing much.

But why is the state of the academy so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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