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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0

    아르윈이 전하는 이야기에 사고가 굳는다.

     

     

    크룬드.

     

     

    아담 형의 목숨을 앗아갔던 마족의 이름이었다.

     

    “…예?”

     

    곁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게일도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같이 싸웠던 게일에게도 나만큼 커다란 의미가 있는 이름이었다.

     

     

    “…”

     

    나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미 아르윈을 만난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여기에 크룬드의 이름까지 들려오니 모든게 엉망으로 섞여갔다.

     

     

    역병에, 도적들에, 농사일에…이제는 크룬드까지.

     

    대체 얼마나 더 많은 문제를 넘어서야 이 모든게 끝날까.

     

     

    나는 믿기지 않는 그 이름에 실프리엔에게도 눈길을 던졌다.

     

    그녀 또한 우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르윈이 그러는 동안 설명을 덧붙였다.

     

    “…크룬드가 군대를 다시금 일으키고 있다 들었어요. 왕가에서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다고…”

     

    “여기서 또 전쟁이 터진다고…?”

     

    “…어쩌면.”

     

    “…”

     

     

    내 표정을 살피던 아르윈이 거리를 좁혔다.

     

    -스윽.

     

    멍하니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그녀는 내 팔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오랜 친구 사이에서나 할 것만 같은 손짓.

     

     

    그녀는 그 자연스러운 손짓 이후 굳은 표정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그저 대비를 하실 수 있도록 말씀을 드리는 거에요.”

     

    “…”

     

    “싸움이 번지지 않는게 최고겠지만…아시다시피 당신에게 불똥이 튈지도 몰라요.”

     

     

    ‘당신’이라는 말에 내 옆에 있던 시엔이 나의 손을 잡았다.

     

    시엔이 그렇게 반응하고 나서야 아르윈의 단어선택이 선에 걸쳐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아르윈은 나를 잊었다는 말을 증명하듯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며 말했다.

     

     

    “용사님은 팔을 잃어 싸울 수 없는 상태고. 전쟁의 투사 아크란은 사라진만큼 찾고 있어요. 실프리엔 언니는…이 싸움을 껄끄러워하고 있고…”

     

    아르윈의 눈이 이내 시엔에게 옮겨갔다.

     

    “…전 성녀님은 힘을 잃으셨으니. 결국 남은건 고독의 투사로 불리는…”

     

    “…”

     

     

    아르윈이 하는 말은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고독의 투사로 추앙받았으니 결국 나도 싸움을 피하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아르윈이 말한다.

     

    “…당신에게 책임이 없다는 걸 알아요. 굳이 다시 싸움을 시작할 필요는 없겠죠. 저도 당신이 다시 싸우는 걸 원하고 있는게 아니에요.”

     

     

    시엔이 곁에서 두려움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싸울 이유가 없죠. 베르그는…고독의 투사가 아니에요.”

     

     

    결국 고독의 투사만큼 허상 같은 지위도 없을 것이다.

     

    문양이 몸에 새겨지는 것도, 특별한 힘을 수여 받는것도 아니다.

     

    누군가 한 명을 확실히 지목할 수 있는게 아니었다.

     

     

    시엔이 곁에서 이어갔다.

     

    “베르그가 고독의 투사로 낙점받은건…결국 달리 누가 없었기 때문이었잖아요. 모든 값을 치른 베르그가 왜 다시 전쟁으로…”

     

    나를 또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시엔의 마음이 느껴졌다.

     

    나의 팔을 붙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점차 강하게 들어간다.

     

    “만약 베르그를 부른다면… 그건 그저…대신 싸울 사람을 한 명 찾는 것 뿐이잖아요…”

     

     

    아르윈이 시엔의 말에 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오히려 저도 그 동안 베르그가 고독의 투사가 아닌 이유를 찾았어요. 당장은 아담 단장님이 고독의 투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고요.”

     

    아르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베르그. 혹시라도 국왕 폐하께서 당신을 부르신다면 제게 알려주세요. 출정하지 않으실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릴게요.”

     

    “………..”

     

     

    나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갑자기 쏟아진 새로운 정보들에 머리가 어지럽다.

     

     

    아르윈이 전해온 이야기가 반쯤은 한 귀로 흘러 사라졌다.

     

    나는 그저, 우리의 땅에 다시 전쟁이 다가올수도 있다는 이야기에만 집중하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돌려 게일을 보았다.

     

    게일은 내 눈길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나도 게일을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일단 상황을 마무리 짓고자 말했다.

     

     

    “…돌아가자.”

     

     

    ****

     

     

    이후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도착한 셀레브리엔의 일행과 우리는 집무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란과 게일이 거의 모든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들이 머무를 숙소, 농사와 관련된 이야기, 크룬드의 정보, 역병의 상황 등등…

     

     

    나는 머리가 너무도 복잡해 대답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정신이 들때면 그저 아르윈만 한 번씩 확인할 뿐이었다.

     

    그녀는 차분한 태도로 그저 앞에 놓인 차만 마시고 있었다.

     

     

    네르가 그랬던 것처럼 내게 어떠한 관심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다.

     

    갈수록 나를 잊었다는 그녀의 말에 믿음이 가고 있었다.

     

    …그것조차, 왜인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를 마치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 휴식을 취하러 나왔다.

     

    아담 형의 묘 앞에 앉아서, 형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될까, 형.”

     

    그에게 답을 구해보았지만, 형은 당연히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니 상상만 할 뿐이다.

     

     

    형이라면 뭐라 말했을까.

     

    형과 가장 가까웠던 사이라 말하는게 부끄러울 정도로, 나는 알 수 없었다.

     

     

    -사박…사박…

     

     

    그때, 누군가가 곁으로 다가왔다.

     

    시엔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간결하고 고고하게까지 느껴지는 소리에 나는 상대를 금세 추측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알았다.

     

     

    “…여기 계셨네요.”

     

    아르윈이었다.

     

     

    그녀를 가볍게 돌아보니, 아르윈 또한 입 주위에 복면을 두르고 있었다.

     

     

    아르윈은 천천히 곁으로 다가와 아담 형의 묘에 꽃을 한 송이 내려놓았다.

     

    잠시 묵념까지도 이어가는 그녀.

     

     

    “…”

     

    그 모습에 나는 굳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애초에 나를 이제는 잊은 듯한 사람에게 드러낼 경계심은 없었다.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묵념을 끝낸 그녀가 물어왔다.

     

    “…”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힘에 부칠만큼 힘들었지만, 시엔이 곁에 있었기에 나름 버틸만 했다.

     

    거기다 더해 굳이 아르윈에게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넌?”

     

    그녀가 질문한 것에 대한 예의로 나도 질문을 되물었다.

     

    결국 우리는 한 때 부부였던 사이었다.

     

    그것이 끝이 났다고 한다면 나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나를 죽이려 했던 아르윈이지만… 그 선택을 내리려 했던 이유도 이제는 이해를 한 뒤였다.

     

    그때 느꼈던 배신감도, 네르와 그랬듯 내려놓았다.

     

    이제는 그저 갈라져버린 길 때문에 우리가 함께 할 수 없다는 점만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었다.

     

     

    아르윈이 내 곁에 천천히 앉았다.

     

    가깝게 느껴지는 거리였지만, 내 착각일지도 몰랐다.

     

     

    “…잠시 힘들었지만, 저도 잘 지냈어요.”

     

    “…”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예쁜 풍경도 보면서…항상 꿈꿔왔던 꿈을 이루고 있어요.”

     

     

    어째서인지 여유가 느껴지는 말.

     

    그녀가 행복을 찾은것만 같아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거 다행이네.”

     

    “…”

     

    그 여유가 부럽게 느껴진건 왜일까.

     

    고민 없이 살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행복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베르그?”

     

    아르윈이 나를 부른다.

     

     

    옆을 돌아보자, 나를 곧게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가 말한다.

     

    “…저를 용서했나요?”

     

    “…”

     

    나는 굳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를 용서하지 못했더라면 지금 도움조차 받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정도.”

     

     

    그 대답에, 표정을 찌푸리며 시선을 낮춘 그녀가 말했다.

     

    “…고마워요.”

     

    “…”

     

    “당신도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둘이 잘 어울리세요.”

     

     

    그 말에 나도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한 동안 침묵을 선택하던 아르윈이 이내 말했다.

     

    “베르그. 부탁이 있어요.”

     

    “…”

     

    “저도 당신을 열심히 도와드릴테니… 사소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

     

     

    아르윈이 아주 약한 힘을 들여 다시 내 팔에 손을 얹었다.

     

    “…우리 친구가 될 수 없을까요?”

     

    “…”

     

     

    기시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처음 우리가 혼인을 맺어, 아르윈이 나를 경계할 당시 내가 그녀에게 해주었던 말이었다.

     

    친구부터 시작하자는 말.

     

     

    그때와는 분명 다른 상황에, 다른 의도임이 분명함에도 나는 그 추억을 떠올렸다.

     

    아르윈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을 추억일지도 모르겠다.

     

    “…굳이 당신과 계속해서 다투며 지내고 싶지 않아요.”

     

    “…”

     

     

    아르윈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쉰다.

     

    한동안 생각을 이어갔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미 영지일만으로도 지치고 힘들다.

     

    아르윈에게까지 그런 압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나의 말에 아르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그러면 잘 부탁할게요.”

     

    아르윈은 그 말과 동시에 가볍게 악수를 제안해왔다.

     

     

    나는 그녀의 제안에 맞추어 손을 뻗었다.

     

    -스윽…

     

     

    “…”

     

    그러자, 아르윈은 내 손을 쓸 듯 손을 맞잡는다.

     

    엄지가 어렴풋이 내 손등을 어루만졌다.

     

     

    가벼운 악수가 끝나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볼게요, 베르그. 조금 더 쉬다 오세요.”

     

     

    나는 아르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할게.”

     

     

    이렇게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상황을 정리하니, 내 마음도 조금은 더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짹! 짹! 짹!

     

     

    아르윈이 떠나자, 루아가 홀로 남은 내게 날아왔다.

     

    오늘따라 굉장히 흥분해 내 주위를 맴돈다.

     

    요새 루아는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한때 화가 난 것 같다가도, 다음 순간 이렇게 애교를 피운다.

     

    루아는 내 얼굴에 날아들어 제 몸을 온통 비비기 시작했다.

     

     

    입술을 가볍게 쪼기까지 한다.

     

    -짹! 짹!

     

    나는 루아의 애교에 큭큭 웃으며 그녀를 붙잡았다.

     

    “…왜 또 흥분한건데?”

     

     

    나는 어느새 대답이 없는 두 존재에게 말을 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

     

     

    “..하아…하아…”

     

     

    아르윈은 베르그와 이별한 순간, 한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 제 파랑새에게 시야를 공유받았다.

     

     

    ‘애교 떨어줘.’

     

    아르윈의 부탁에 베르그가 ‘루아’라고 이름붙인 새는 몸을 온통 베르그에게 비비기 시작했다.

     

     

    아르윈은 참아왔던 흥분을 흘리며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가까이서 본 베르그 덕에 몸이 뜨거웠다.

     

     

    첫 단추는 잘 꿰맨 듯 했다.

     

    거부감 없이 그에게 다가가는데 성공했다.

     

    시엔을 인정하며 다가서니 그도 경계심을 내려놓은 듯 했다

     

     

    친구로서 다시 시작하기도, 그의 손을 붙잡기도 했다.

     

    아르윈이 항상 기다렸던 순간인만큼…신체접촉은 이 정도로 턱없이 부족했으나.

     

    그래도 시작이 좋았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이렇게 천천히 스며들 듯 그에게 다가가면 될 일이었다.

     

    끝까지가면 그녀가 이긴다.

     

    시엔의 수명이 다하기만을 기다리면, 이후 베르그와 함께할 몇 백년이 남을 것이다.

     

     

    당장의 욕구는 그나마 루아 덕에 버티고 있었다.

     

    짙은 욕구와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던것도, 결국 루아가 현재 시야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환하게 미소를 지어주는 베르그의 모습을 루아를 통해 쉽게 볼 수 있었다.

     

    루아가 그의 입술을 쪼아대면, 입술을 맞추는 듯한 착각에 들 수 있었다.

     

     

    이마저도 없었으면 이렇게 이성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르윈은 덜덜 떨리는 손을 억누르며, 몸을 진정시켰다.

     

     

    “…하아…하아…”

     

    루아의 시선으로, 아르윈은 자신을 쓰다듬어주는 베르그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허공에 손을 뻗어, 베르그의 얼굴을 쓰다듬어본다.

     

     

    ‘…당장은 시엔에게 양보할게요…’

     

    그녀가 생각한다.

     

    ‘…하지만 미래에는…’

     

     

    아르윈은 그렇게, 어렵게 감정을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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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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