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이루어진 사슬에 오를레이앙의 몸이 감겼다.
“커, 허윽…….”
로즈마리는 눈동자를 뒤룩 굴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싶어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오를레이앙은 구천지대계. 즉, 절멸급 마수다. 플레어도 없이 저런 사슬만으로 제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년이, 뭐 하는 년이… 크아악!”
꽈악.
여인은 말없이 쇠사슬을 조였다. 그러더니 사슬을 잡지 않은 반대쪽 손을 치켜들었다.
손끝에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달려있었다. 철조(鐵爪)라고 불리는 무기였다.
촤악! 철조 끝에서 가는 실이 사출된다. 쇠로 된 실이 오를레이앙의 내핵을 파고든다.
모든 마수의 급소는 내핵. 그곳에서 동력원이 되는 마석을 뽑아내면 즉사하고 만다.
“아, 안 된다…! 여기까지 어떻게 와, 왔는데……!”
여인은 오를레이앙의 급소를 정확히 노렸다. 끼익! 철실에 걸린 마석이 강제로 딸려 나온다.
“크아아아악!!”
7석은 절규를 토해냈다. 스릉! 실이 줄자처럼 감긴다. 갈고리처럼 생긴 실의 끝부분에서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토르말린이 뽑혀 나왔다.
오를레이앙은 흐물거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설마, 나도 저렇게 되는 건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로즈마리는 상황을 분석했다.
오를레이앙을 한 번에 보내버렸다. 그것도 플레어라는 강력한 무기 없이.
그렇다면 인간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누구지?’
엘프, 수인, 드워프? 아니, 전부 아니다. 귀가 길지도, 꼬리가 나 있지도, 키에 비해 팔이 길지도 않았다.
눈이 노랗지만 금안족은 아닌 듯했다. 여인의 신체 주위로 은은한 마력파가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력초를 피운 냄새도 없다. 저건, 저 여자의 고유한 마력이다.
‘어째서, 금안이 자연적인 마법을….’
사락. 한참을 고민하던 로즈마리 앞에 여인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설마.
혹시.
상황을 종합해냈다. 로즈마리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몸을 굴릴 때마다 신음이 새어 나왔다.
로즈마리는 숨을 헐떡이며 구석으로 도망쳤다. 궁지에 몰린 쥐나 다름없었다. 여인은 공중에 살짝 발을 띄운 채로 서서히 다가왔다.
‘부양 마법까지 쓰고 있어.’
이젠 확실하게 알겠다.
‘……이 년은 정령이다. 그것도 최상급이나 대정령급.’
여인이 입을 붙였다 떼길 반복했다. 무언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로즈마리는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타락했기 때문이다. 마왕에게 혼을 바쳐 타락한 금안족은 정령의 말을 듣지 못한다.
대신 입 모양을 보고 여인의 말을 대강 유추할 수는 있었다.
‘남… 동… 생을…… 잘 보살… 펴… 달라……?’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로즈마리는 고개를 까딱이며 의문을 표했다. 그러나 여인은 그것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손에 새하얀 구체를 다듬어 올렸다.
파아앗! 주위가 밝아진다. 적어도 황성 주변만큼은 비가 그쳐가고 있었다.
“…아.”
로즈마리는 짧게 탄식했다.
조금 전보다 머리가 맑아졌다. 숨쉬기도 편해졌고 말이다.
로즈마리는 손으로 복부를 쓰다듬었다. 오장육부에 뚫린 구멍이 아물고 있었다. 팔다리는 여전히 가누기 힘들었지만, 아까보단 훨씬 나았다.
‘뭐 하는 녀석이야.’
몸뚱이를 더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인이 떠난 자리에는 깃털 몇 조각만이 남아있었다.
끔뻑, 끔뻑.
로즈마리는 멀뚱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의식이 혼탁해서 어지러웠다. 두 인격이 섞인 듯했다. 에테르는 머리를 부여잡다가, 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반사적으로 소맷단을 더듬었다. 분명히, 여기 어디쯤 담배를 쟁여두었는데.
“후우.”
마력초를 피우니 심신이 안정된다. 흐릿했던 잔상이 지워지는 느낌. 무언가 동화되고 있다.
에테르는 자신에게 물었다.
‘지금 난 누구지?’
몸에 잠시나마 마력이 돌기 시작했다. 에테르는 손을 까딱였다. 아공간에서 스태프를 꺼내 꽉 쥐었다.
스태프를 올려다보았다. 첨단에 달린 일곱 개의 마력파 위상이 선명하게 보인다.
팔정도(八正道)의 거의 모든 부분에 불이 들어와 있다.
‘전성기 시절 기술은 전부 쓸 수 있군.’
지금이라면 전자기력뿐만이 아니다. 약한 상호작용, 강한 상호작용. 중력을 제외하면 모조리 다룰 수 있다.
중성자를 전자와 양성자로 쪼개는 것도. 핵을 나누거나 변환하는 것도.
그녀도 완성하지 못한 ‘8식’을 제외하면 그 무엇이든 가능하다. 신에 준하는 권능을 현현할 수 있는 것이다.
에테르는 피식 웃었다. 강자가 지니는 여유의 미소였다. 프레이는 그런 에테르를 보며 로켓을 쏘다 말았다.
“너 분위기가 많이 변했다?”
“그래?”
에테르는 겸연쩍게 미소를 지었다.
“자세히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난 원래부터 이랬다, 꼬맹아.”
이제야 감이 잡힌다.
주도권은 반반. 정확히는, 다른 세상에서 온 ‘나’에게 지분이 조금 더 많다.
– 누군가가 몹쓸 뒤통수를 치기 전까지는, 내가 이 몸을 움직인다.
자기 자신과 그런 계약을 나눈 까닭이다.
덧붙여서 조금 전. ‘내면의 거울’에 두 번째로 들어갔을 때 스스로와 한 가지 약속을 추가로 맺었다.
지금, 그 약속을 시험해 볼 차례였다.
“야! 가만히만 서 있지 말고 버멜 좀 도와줘! 앞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잖아!”
“…그래야지.”
에테르는 정면을 응시했다. 프레이의 말대로였다. 버멜은 자신이 만든 EMP 발생원을 들고 부리나케 뛰었다.
그가 반타 토터스의 발을 이리저리 피하며 움직였다. 다리 밑으로 들어갈 최적의 타이밍을 노리는 듯했다.
쾅! 콰앙! 콰앙!
연속해서 발이 내리찍힌다. 움직임은 둔한 편이었다. 때문에 버멜은 모든 치명타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뻐억!
“크윽……!”
발길질의 반동으로 튀어오른 돌조각까지 전부 회피하지는 못했다. 화산 쇄설물처럼 튕긴 돌이 버멜의 머리에 직격했다.
분명 작은 돌이었는데, 상상 이상으로 아팠다. 골통이 징징 울렸다.
“야!”
프레이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빗소리 때문에 크게 들리진 않았다.
에테르는 눈을 부릅뜨고 왼손에 마력을 담았다. 뇌를 거치지 않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팔정도(八正道) 제5식(式), 차지 커런트(Charged Current)]
쏴아아아!
빗발치는 증기 사이로 빛의 궤적이 그려진다. 경로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에 강한 자기장과 압력이 걸린다.
핵종이 꿈틀거린다. 약력으로 변환된 마력을 견뎌내지 못한 중성자가 제 모습을 바꾼다.
만들어지는 것은 베타선. 즉, 전자의 흐름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입자가 토터스의 몸통에 맞닿는다. 베타선은 종이 하나 투과하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다. 그러나, 에테르가 내쏜 전자는 초기에 막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었다.
그것이 차폐물에 닿았다.
기긱! 기기긱!
토터스가 땅고르기를 멈추고 옆으로 기우뚱했다. 급하게 멈춘 전자선이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X-선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제동복사(Bremsstrahlung) 현상이었다. 토터스는 내상을 입고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괴성을 내지르며 여러 사람의 고막을 찢어놓았다. 포대가 달린 등딱지에선 어느 때보다도 많은 물이 뿜어져 나왔다. 덕분에 버멜은 제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지금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촤아아악!
버멜은 토터스의 아래로 미끄러지듯이 들어갔다. 그러더니 스태프를 소환해 땅에 꽂았다.
카카카캉! 평범한 스태프에 부하가 걸린다. 중간 마디가 끊어질 정도로 강한 제동이었다.
버멜은 두 번째 다리가 있는 곳 직전까지 파고 들어갔다. 스태프가 고장났지만 쥐포가 되는 불상사는 면했다.
아슬아슬했던 상황. 멀찍이서 상황을 바라보던 에테르는 저도 모르게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내가 왜 안도하는 거지?’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 아닌가? 우리 동향 사람이잖아. 당연히 걱정하는 게…….’
따지고 보면 조금 전 도와주었던 것도 이상하다. 저 엘프, 분명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을 텐데. 대체 왜.
이번에는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인격장애가 생긴 듯한 기분. 불쾌하고도 어지러운 감각이었다.
그때였다.
쿠웅!
토터스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마법을 하도 많이 맞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명백한 고의였다.
“어……!”
에테르는 헛숨을 들이켰다. 프레이도 로켓을 내려놓고 비명을 질러댔다.
가장 패닉에 빠진 건 헤를라인이었다. 그녀는 다른 마수를 견제하다 말고, 버멜이 있는 방향으로 골렘 두 체를 할애했다.
“버멜…!!”
둘 다 그녀를 호위하던 최상급 골렘. 최정예 전력이었다. 예티처럼 생긴 두 골렘은 비를 맞으며 쿵쿵 뛰어갔다.
그러나.
끽! 끼긱! 끼기긱!
어째서인지 토터스는 주저앉다 말고 기계음을 토해냈다. 녀석이 다시 일어나며 다리를 비틀거렸다.
‘주, 죽을 뻔했다.’
찰나와도 같은 순간. 버멜은 ‘윈드 커터’로 토터스의 연한 부분을 찢고 들어갔다. 그 사이에 숨어서 절삭계 마법을 난사하고 나온 참이었다.
어디 그뿐일까.
‘거의 성공이다.’
에테르가 만든 EMP 생성기까지 심어놓고 나왔다. 버멜은 머릿속에서 상태창을 불렀다. 반타 토터스의 체력바가 떠올랐다.
‘3분의 2가량 깎았다. 슬슬 패턴을 바꿀 때군.’
그런 생각이 떨어지자마자, 토터스의 등에서 전례 없는 양의 증기가 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