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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0

       유리 랜스터의 고향 마을에는 꽃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피어난 뒷동산이 있었는데, 어린 그녀는 그곳에서 노는 것을 참 좋아했다.

       

       마을 사람들도 그녀의 친구들도, 그런 아리따운 동산이 있었던 줄 아무도 몰랐다. 어린 유리만의 비밀 아지트라고 해야 할까.

       

       꽃내음도 맡고, 화관도 만들어 쓰고 놀던 중.

       

       어느 순간부터, 꽃동산에는 새하얀 순백의 여인이 와 있었다. 어린 유리는 잠깐 겁을 먹었으나, 그녀의 상냥한 웃음과 목소리에 금세 마음을 열었다.

       

       “저는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순백의 여인은 바깥세상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유리는 마을에서 있었던 소소하고 작은 일들을 들려주었다.

       

       여인은 꼬꼬마 아이들이 병정놀이를 했다는 사소한 이야기에도 마치 아이와도 같이 기뻐하며, 그녀를 어린아이라며 무시하거나 하지 않고 주의 깊게 들어주었다.

       

       자신의 존재는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하여, 들어주었다. 그녀는 유리의 비밀 친구였으니까.

       

       비밀 아지트의 비밀 친구, 어린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또한 그녀는 놀랍게도 ‘바깥의 서큐버스’였다. 마을의 어른들은 마을 사람 외의 서큐버스를 발견하면 몹시 위험하니 당장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지만⋯⋯ 

       

       구체적으로 왜 그래야 하는지, 자세한 사정은 알려주지 않았던 데다가. 유리가 보기에 그녀는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흰 여인은 자신도 서큐버스로부터 박해받고 따돌림을 받아 쫒겨 나온 거라고 했다. 자신이 머물 공간을 찾고 있다며 울었다.

       

       유리는, 자신이 사는 마을이라면 괜찮다고. 사람과 몽마가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좋은 마을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으면 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혹시나 그들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무섭다며. 부디 그들과 꿈속에서 만날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 

       

       유리와 그들의 친구들에게는 꿈속 방문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 오늘 엄마가 으깬 감자를 너무 많이 만들었으니까 나눠 받으러 와. 그런 소식을 전하기 위해, 친구의 꿈에 들어가 속삭이곤 했으니까.

       

       그래서⋯⋯.

       

       유리는 순백의 여인으로부터 받은 초를 켜고, 창문을 열어 두었다.

       

       마을 사람들이 서큐버스 여왕의 추적을 염려하여 힘껏 만들어 낸 공동 정신 방벽은, 내부로부터 열린 문에 저항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뒷내용이 어떨지는 뻔한 일이었다.

       

       “마을은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유리 랜스터의 눈동자에서 그날의 빛이 아른거렸다. 여왕의 농간으로 죽어가는 마을과, 그것을 홀로 살아남은 채로 지켜본 그녀가 느꼈던.

       

       짙은 적색으로 빛나는 분노의 마음이다.

       

       여왕은 마을의 서큐버스들을 폭주시켰다. 그들의 의식만은 선명하게 유지한 채로, 본능적인 성욕을 억제할 수 없도록 빗장을 풀어버렸다.

       

       “이웃끼리 범하고, 친구들끼리 범하여, 착취당한 쪽은 죽었고⋯⋯ 제 손으로 마을 사람을 죽이게 된 서큐버스는, 스스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유리만큼은 남겨두었다.

       

       ‘나를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라면서, 유리만큼은 손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섬세하게 지켜주었다. ‘스스로를 해치는 건 나빠요’ 라며, 정신에 쐐기를 박아 자결도 막았다.

       

       절규하며 어째서냐고 물으니. 여왕은 너무나도 가볍게 답했다.

       

       “멀고 먼 어느 산속 마을에,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서큐버스가 있다고 들었거든요. 이상하지 않나요? 나와 같은 존재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니⋯⋯ 그래서, 살짝 시험해 봤지만.”

       

       간단한 매혹으로도 이렇게 되어버렸다, 며. 역시 몽마는 몽마답게 사는 게 좋다면서, 여왕은 유리에게 상냥하게 충고했다.

       

       “그러니까 시시한 마음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본능대로 사는 게 좋아요? 사람을 잔뜩, 잡아먹으면서.”

       

       “으아아아아아──!!”

       

       어린 유리는 그 자리에서 맹세했다.

       

       나 때문에 모두가 죽었고, 내가 따라서 죽을 수도 없다면.

       

       실수로 마을 사람 모두를 죽여버린 이 죄 많은 목숨은, 여왕을 도륙 내는 데 쓰자. 내가 죽더라도 그녀를 죽이자. 그마저도 해내지 못한다면, 내 친구와 가족들을 다시 볼 면목이 없으니까⋯⋯.

       

       ===============================================================

       

       새까맣게 잠겨 죽어가는 유리 랜스터는, 덤덤하게 말했다.

       

       “복수만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마음이라는 게 너무 무겁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가라앉히기로 했던 겁니다.”

       

       외면하자. 쓸데없이 피어나는 감정들을 모조리 뽑아서, 저 호수 아래로 던져버리자. 

       

       행복이나 애정, 우정과 소속감, 윤리와 도덕, 모든 좋은 것들도 저 아래로. 나는 이것들을 누릴 자격이 없으니.

       

       아픔과 슬픔, 고독과 죄책감도 저 아래로. 나는 이것들에 매여 있을 시간이 없으니.

       

       오직 분노만을 삶의 지침으로 삼으리라.

       

       그래서, 그녀의 우화는 분노만큼은 묶어서 가라앉히지 않는다.

       

       “⋯⋯그래도 너, 나를 만났을 때는. 장난도 치고 좀 풀려 있었잖아.”

       

       “C 덕분이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복수를 놓았으면 했나 봅니다. 여왕은 신출귀몰해서 잡히지 않는다. 어떤 천재가 나타나서 광역 감지 마법을 개발하기라도 하지 않는 한, 여왕의 색출과 사살은 극히 어렵다⋯⋯ 이렇게 말하더군요.”

       

       실제로 그랬다. 방위국은 여왕에 대한 정보 수집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이렇다 할 소득을 거둔 적은 없었다. 그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희미하다.

       

       그렇기 때문에, C는 유리에게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만약 애초에 이룰 수 없는 복수라면, 마을 사람들에 대한 속죄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예컨대, 행복하게 살아간다든가.

       

       지친 유리 랜스터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누그러졌다. 

       

       말살대에서 벗어나 방위국 현장 요원으로 직책을 옮기고, 사나운 늑대의 탈을 벗고, 아주 천천히 분노를 녹여갔다.

       

       그녀는 회고한다.

       

       “⋯⋯어쩌면, 저는 그저, 죄책감으로부터 도망칠 명분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로 마음이 굳센 사람이었다면, 어떤 상황에서든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을 테니.”

       

       “그렇게 말하지 마. 아프잖아.”

       

       “하긴, 저희는 지금 이어져 있군요. 실례했습니다.”

       

       “아니, 이런 관으로 이어져 있지 않았어도 아팠을 거야. 그리고, 그건 네 탓이 아니었잖아.”

       

       감사합니다. 하고, 유리는 그 마음만으로도 고맙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천천히 식어가던 유리 랜스터의 분노를 깨운 것은, 여왕에 대한 정보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물어다 준.

       

       여왕과 정보전으로 정면승부가 가능한 천재 마법사가, 있었다.

       

       내가 흑마법사 머리를 따고, 괜히 서큐버스를 잡아다가 넘겨서, 유리 랜스터는 마침내 복수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녀가 복수를 포기한 이유가 ‘불가능’이었으므로, 그게 가능해진 지금. 그녀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유리는 선택해야 했고, 그래서⋯⋯.

       

       내 죄책감을 느낀 걸까, 유리가 딱 잘라서 끊었다. 내 탓이 아니라고.

       

       “당신이 저를 부추긴 게 아닙니다. 미친 마법사님. 제가 고른 거예요.”

       

       “⋯⋯그래도,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여왕의 여자도 흘러 나가지 않게 꼭꼭 숨겨두고, 내가 혼자서 처리했어야⋯⋯ 아니지. 그랬으면 나도 혼자서 꼴아박은 유리 꼴이 났을 수도 있다.

       

       “승산 있었습니다. 미친년이 이상한 걸 들고 와서 그런 거지.”

       

       “개 발려놓고 그런 소릴 해도⋯⋯.”

       

       “당한 건 당신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제 모습을 했다고 헤벌레 해가지곤.”

       

       “아니 그러면, 이쁘게 생기지를 말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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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당신은요?”

       

       “⋯⋯나?”

       

       유리 랜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가 뭘 묻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어서, 고개를 기울이고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보았는데.

       

       내가 그녀의 과거사를 궁금해했던 만큼, 그녀가 어째서 나 대신에 복수를 선택했는지를 궁금해했던 만큼⋯⋯ 그녀도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마탑주님의 마음, 왜 받아주지 않는 겁니까.”

       

       “뭣⋯⋯.”

       

       나는 마음 깊숙한 곳을 찌르는 일격에 몸을 잔뜩 움츠려야 했다. 하지만 내 목숨이 간당간당하다는 사실이, 어쩐지 긴장을 조금씩 풀어줬다.

       

       죽는 마당에 할 말 못 할 말이 어디 있겠느냐, 하고.

       

       내가 스스로를 다독이는 동안, 유리 랜스터는 자신의 의문을 말로 풀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각으로 본 ‘미친 마법사’라는 인물에 대한 의문점이다.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족이 몽마에, 함께 한 시간도 짧고, 연인보다도 친구 같은 느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마탑주님은 다르지 않습니까.”

       

       “⋯⋯⋯⋯.”

       

       “모르는 척도 아니고, 알고 있는 티는 있는 대로 내면서도. 마탑주님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지 않는 건, 어째서입니까?”

       

       사랑을 몰라서라는 대답은 어떨까.

       

       “여자로 변장해서 남자 꼬시는 법을 그렇게 잘 알고 계시는 분이 말입니까? 정말로 몰랐다면, 태생부터 요녀였다는 걸로 알고 넘어가겠습니다만.”

       

       “⋯⋯⋯⋯.”

       

       “그래서 놀린 겁니다. 그 고백 멘트는 구리기도 했지만, 가짜투성이였으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세션에서 틈만 나면 사랑을 연출한 녀석이, 그 작용기전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겠지.

       

       서로를 위하고, 그렇고 그런 감정까지 느끼고, 성욕 억제를 걸어야 하고, 옆에 없으면 불안한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하겠는가. 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았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상황이 받쳐주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마탑주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라면⋯⋯ 뭡니까. 어장관리?”

       

       “아니야.”

       

       “아니면 감정보다도 우선시되는 무언가가 있다거나요. 하지만 그것도 이상합니다. 당신은, 다 제쳐놓고 저를 구하러 오지 않았습니까.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그랬지.”

       

       감정을 배제한다고 생각하면, 휘둘리는 타입이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감정을 억누르려고 온갖 수단을 쓰고 있고.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다.

       

       내가 그토록 나를 억누르던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미쳐 있으니까.

       

       ===============================================================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과 동반하는, 오랜 병이다.

       

       솔직하게 말하자. 나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이 너무 좋다. 척추가 찌르르 떨릴 정도로 아찔한 즐거움을 느낀다. 뿌리 깊은 악성(惡性)이다.

       

       비극적인 운명에 얽혀 연인과 이별하게 되는 이야기가 좋다.

       

       과거의 상처를 마주 봐야만 하는 이야기가 좋다.

       

       자신의 정의에 짓눌려 갈 길을 잃어버리는 이야기가 좋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각성하는 이야기가 좋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이야기가 좋다.

       

       격렬한 전투 끝에 소중한 친구를 잃어버리는 이야기가 좋다.

       

       나는 대부분의 이야기에 비극을 담아 왔다. 역경과 고난은 언제나 필요하다⋯⋯ 고 포장했지만, 그 형태가 꼭 영구적인 상실일 필요는 없었을 터다. 하지만 나는 했다.

       

       그들이 이 이야기를 현실이라고 믿을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믿게 했다. 지극히 몰입한 그들의 고통을 보고 싶었으니까.

       

       사람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그들의 여리고 약한 부분에 칼을 박았다. 그리고 선심 쓰듯이 약을 뿌려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겨내라고.

       

       너희들을 위한 시련이었다고.

       

       하지만 내심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재밌어서 했다. 난생처음 본 플레이어들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게 될 정도로, 즐겁게 해버렸다.

       

       타인의 비극을 바라보며 웃고 떠드는 악마가 있다.

       

       나는 그게 두려웠다. 내 마음이 두려웠다. 제대로 남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공감할 수 있는데⋯⋯ 한편으로는 그 모든 것들을 비웃을 수 있는 이중성이 무서워서 참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내 욕망에, 아주 사악한 것을 기워 붙여둔 것 같았다. 그것이 내가 아니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이미 한 몸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권력을 움켜쥔 황자와 황녀에게도 했다. 내가 가르쳐야 하는 학생들에게도 했다. 어쩌면 나는, 이걸 통제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을 느꼈다.

       

       아니, 위협을 느꼈다. 

       

       그 화살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향하게 될까 봐.

       

       나를 사랑하는 유나를⋯⋯ 언젠가 내 손으로 망가뜨려 놓고 웃을까 봐!

       

       어느 날 내가 사용하던 노트를 보면, 내 필적으로 적힌 무서운 계획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이런 시시한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내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묻고 있다.

       

       학생들에게 경쟁하는 분위기를 부추기고, 우연한 사고로 정신을 날카롭게 몰아붙이고, 언제 그들이 깨져서 조각조각이 나 버릴까 내기하자고 한다.

       

       그리고, 그리고⋯⋯.

       

       언젠가, 내 무릎을 배고 잠이 든 유나의 목덜미를 노려본 적이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계속. 그리고 경동맥을, 슬쩍 베어 낸 다음에.

       

       상냥하게 뺨을 두드려 그녀를 깨우면, 깜짝 놀라서 죽어가는 유나가, 나를 어떤 표정으로 바라볼까를 상상해 버렸다.

       

       그런 결말을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망설였다. 번민했다. 나는 내 마음의 악독한 부분을 달래려 애를 쓰고, 이야기를 꼬아서 비극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무대의 막이 내리고 나면 웃을 수 있도록.

       

       언젠가는 내 사악함을 꾹 눌러 참고, 상당히 배제해 보기도 했다. 

       

       돌파구를 찾으려고도 해 봤다. 이야기의 NPC들에게 고결한 신념을 부여해서, 그들이 어둠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보았다.

       

       하지만 봐라. 나는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억눌렀다.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던 거다. 머릿속에 도시 하나가 들어찰 정도로 찍어 눌렀다. 그래도, 나는 또 한 번의 세션을 고민하고 있다.

       

       나는 이세계에 환생한 이후, 감정에 대해서⋯⋯ 깊게 생각한 적이 없던 것 같다. 아니, 마주 본 적이 없었다. 이래서다.

       

       마주 보면, 이 악성(惡性)을 긍정하게 될까 봐.

       

       사실은 내 머릿속의 ‘그것’이, 나일까 봐.

       

       핑발레즈가 말하는.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사람이 말하는.

       

       ‘미친 마법사’라는 호칭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인 이유였다.

       

       ===============================================================

       

       엉망이 된 얼굴에서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진다. 이게 눈물인지, 녹은 정보인지는 구분할 수 없다. 구분하고 싶지 않다. 나는 피부를 박박 긁으면서 고해했다.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쥐어뜯으며 웅크린 내 곁에서, 유리 랜스터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농담조로.

       

       “그러면, 퍽 즐거우시겠습니다. 옆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녹아가고 있는데.”

       

       “⋯⋯솔직히 조금 꼴려.”

       

       “⋯⋯⋯⋯.”

       

       아무리 그래도, 이 얘기에는 천하의 핑발레즈도 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안다. 어쩌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조금은 후회가 된다.

       

       흉한 부분을 내보이지 않고 끝내는 편이 좋았으려나.

       

       하지만, 어쩌면 죽기 전이니까. 유언이니까. 말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유리는 긴긴 시간 동안 말이 없다가⋯⋯.

       

       “괜찮지 않을까요.”

       

       “⋯⋯너희를 장난감으로 쓰는 게?”

       

       “설마요, 그건 싫습니다. 제가 말하는 건, 미친 마법사님이 미친 것치고는 잘하고 계셨다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게, 당신의 모든 이야기는 해피 엔딩이지 않았습니까.”

       

       “⋯⋯⋯⋯.”

       

       복수심을 못 참고 사고를 낸 저보다는 낫습니다. 유리 랜스터는 그렇게 자조하면서 웃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등을 두드렸다.

       

       “결국, 우리 둘은⋯⋯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던 거군요. 당신은 선과 악 사이에서, 저는 복수와 일상 사이에서. 서로 친해진 이유가 있었습니다.”

       

       “못난 놈들끼리는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난대잖냐.”

       

       “이게 유언이라면, 이걸로 좋습니다. 서로 고해의 시간을 가졌으니, 후련한 마음으로 무덤에 들어가면 끝⋯⋯ 입니다만.”

       

       어때, 정말 이걸로 끝?

       

       유리 랜스터는 그렇게 말하는 듯한,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완전히 패배하여,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해진 상태였다면⋯⋯ 여기서 끝을 내도 좋다. 하지만 우리는 여왕과의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만약에, 그 불리한 전투에서 어떻게든 이겨.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이다음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들은 서로에게 요구했다.

       

       “너는, 복수보다 우리들을 소중하게 여겨 줘. 우리가 그 상실감보다도 커다란 기쁨이 되어 줄 테니까.”

       

       “당신은, 그 마음속의 악마를 확실하게 마주 보셔야 할 겁니다. 저희가 탈선하지 않게끔 방파제가 되어 드리죠. 이 자리에는 없지만, 마탑주님이라면 분명히 그럴 겁니다.”

       

       “⋯⋯내용이 유언 같지는 않은데.”

       

       “여왕의 유언인 셈 칩시다. 남기지도 못할 테니까.”

       

       ===============================================================

       

       ⋯⋯받아들여주는 건가. 머리가 좀 회까닥한 미친 마법사도.

       

       그러면. 그렇다면.

       

       혹시나 삼켜질까, 저 깊은 우물을 바라보면, 우물 속 괴물에게 끌려들어 가지 않을까 걱정해 왔지만. 나를 지켜봐 준다고 한다면.

       

       마주 보는 건 어떨까. 그동안 이리저리 도망치기만 했던 내 마음과 말이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돌이켜보았다. 내가 만든 이야기와 함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래 기다리셨죠? 제가 왔습니다요.
    다음 화도 맞춤법검사기로 따땃하게 데우고 있으니까, 드시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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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herworld TRPG Game Master

Otherworld TRPG Game Master

Another World TRPG Game Master, 이세계 TRPG 게임마스터
Score 8.6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wizard of the Illusion Magic School and decided to create a virtual reality with illusion magic to play a tabletop role-playing game (TRPG). It was great to create a virtual reality, but I was in trouble because there were no suitable players. During that time, I received an offer to be the professor from the Royal Academy. The offer was to use illusion magic to fill the students’ lack of practical experience safely. And so, I became a professor at the academy. “Send me back, send me back to that world right now-!” “Outer god, someday an outer god will be our doom, we’ll all die!!” “I am not the bastard of the Redburn Ducal Family. I am the foremost disciple of the Great Namgung Clan, Namgung Qinghui!” But it seems there is a bit of a misunderstanding. This isn’t a spell for dimensional travel, kids. It’s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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