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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0

       *

         

         

         갓 직조된 마법이 선연한 궤적을 그리며 내려 찍혔다. 콰앙, 건조한 폭음과 함께 고함이 들린다.

         

         피해! 제기랄, 이세르가 당했다!! 버려, 포기해!!

         

         목숨이 눈꽃처럼 흩날린다. 만년궁으로 향하는 길에서.

         

         이반은 그럼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시선은 오직 정면으로, 컨디션을 확인하고 마력을 살피고 근육과 뼈와 신경의 기능을 점검하며 걸었다.

         

         

         “사, 사형….”

         

         

         루시아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이반은 고개를 저었다.

         

         

         “시선을 두지 마라. 하나만 바라보거라.”

         “하지만….”

         “우리가 싸워야 할 전장은 언제나 이런 형상을 하고 있다.”

         

         

         마법은 전조 없이 터졌다. 화염, 냉기, 전격, 폭발, 염동, 정신지배와 환각…. 엘프가 구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마법들이, 전방위적으로.

         

         어쩐 사전 준비 없이 허공에서 나타나고, 그럴 때마다 수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런 주문들을 상대하면서 동시에, 하늘에서 이따금 내려 꽂히는 거대한 나뭇가지를 피해야 했다. 하나하나가 건물만큼 거대했으므로, 이쪽이 오히려 더 치명적이라 하겠다.

         

         그러나 엘프들도, 절멸부대의 요원들도. 결코 도주 없이 이를 악물고, 바로 곁의 전우가 얼어붙은 바닥을 구를 때에도 무기를 휘두른다.

         

         

        -여길 봐라.

         

         

         이 자리의 칠백여 명이 오직 그 생각만으로 전장에 임했다.

         

         

        -나를 봐라.

         

         

         지금 너를 향해 가는 용사파티가 아니라. 조금만 건드려도 금새 죽어 사라질 우리를 보아라.

         

         이것은 일종의 양동작전이다. 병력을 갈아넣어 시선을 돌리고, 용사파티라 불리는 비수를 꽂아 넣기 위한.

         

         지난 군역동안 언제나 그 작전을 수행해왔던 이반은, 그러므로 서두름 없이 걸음을 옮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들이 만들어낸 유일한 기회를, 조급함 탓에 잃어버리는 것은 그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일 테니까.

         

         

        -콰아아앙—!!

         

         

         만년궁으로 향하는 길목, 무너진 건물 하나가 폭발하며 무언가가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툭, 하고 떨어진 것에 시선을 돌리자 아는 얼굴이 보였다.

         

         이반은 이 자리에 있던 모든 요원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곁에 떨어진 ‘파편’은 과거 제 3 타격팀의 유일한 생존자의 것이었다.

         

         그러나.

         

         

         “먼저 떠난 이들을 애도하지 말라.”

         

         

         입술을 깨물고, 다시 한번 걸음을 옮긴다. 처음과 다를 바 없는 보폭과 감정으로.

         

         무릇 최고의 애도는, 승전 이후의 헌화일 테니까.

         

         너를 기억하마. 너희 모두를.

         

         이반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만년궁이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폭설이 휘몰아치는 아득한 저 너머, 붉은 극광을 베일처럼 두른 거대한 나무의 형상이 보인다.

         

         그 가지 하나하나가 만년궁 인근의 첨탑과 비견된다. 구더기와 거머리, 그 작디작은 마물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나무가 그들을 향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저걸 어떻게… 어디부터… 어어….”

         

         

         룬디스의 망연한 목소리에 이반은 짧게 대답했다.

         

         

         “곧장, 심장부터.”

         

         

         외부의 위용에 압도될 필요 따윈 없다. 저것의 심장부는 만년궁 내부에 있을 마일스톤이며, 그 외의 것들은 부차적일 따름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 없이 도전하는 저 병사들이 외부의 압력을 해소하고 있다. 거대한 몸체, 끝없는 마물, 산발적으로 터져나오는 마법 같은 것들은 모두.

         

         용사 파티의 전장은 그런 곳이 아니다.

         

         아군이 소모전을 벌일 때, 그 소모전의 끝에 모든 아군이 말 그대로 ‘소모’되기 전에, 적의 핵심을 도려내는 것.

         

         비수다. 그리고 비수는 적의 크기와 능력에 압도될 필요가 없다. 가장 적확한 시간에, 정교한 일격만 꽂아 넣으면 그만이니.

         

         

         “루시아, 룬디스.”

         “네!”

         “엘피헤라와 오스왈드를 업어라. 이제부턴 달리겠다.”

         

         

         철컥, 마지막으로 무기를 점검했다. 도끼, 권총, 단검, 폭약과 각종 물약까지.

         

         무장의 상태를 빠르게 확인하고, 이반은 철컥, 권총의 약실에 탄환을 장전하며 말했다.

         

         

         “전투준비.”

         

         

        *

         

         

         마일스톤이 위치한 만년궁의 후원까지 가는 길은 이미 익숙했다. 이반은 조금의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궁의 내부는 가지와 마물로 가득했다.

         

         이계의 마력에 오염된 궁내 회랑들이 뒤틀린다. 환각이 막힌 벽을 길처럼 비추고, 뚫린 길을 벽처럼 감췄다.

         

         이따금 달려드는 마물 중 일부는 환상이었고,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갑작스레 마물이 튀어나와 어금니를 박아대기도 한다.

         

         그러나.

         

         

         ‘182.’

         

        -카앙!!

         

         

         이반이 휘두른 도끼가 깔끔한 궤적으로 덤벼드는 마물을 양단했다. 질척하게 쏟아지는 체액을 대충 손등으로 막아내고, 다시 걸음을 한 발자국.

         

         

         ‘183.’

         

         

         걷는 걸음, 그 한 보폭 한 보폭을 모두 외우고 있다.

         

         절멸부대 요원의 기초 훈련은 세 가지 버릇을 완벽하게 교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심(心), 한 호흡에 해낼 수 있는 최대 활동량을 규격화하고.

         신(身), 자신의 육신으로 해낼 수 있는 최대 효율을 인지하고.

         보(步), 걷는 걸음이 오차 없이 센티미터 단위에서 정확하게 헤아릴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

         

         그건 즉, 한 사람의 몸마저도 하나의 병장기로 취급하여, 자신의 몸이 갖는 ‘카달로그 스펙’을 확보하는 훈련이다.

         

         비록 이 개념을 처음 확립했을 때, 엔리케는 코웃음을 치며 불가능하다 단언하고 말았지만. 어쨌건, 이반은 이 ‘요원의 기초 훈련’을 이미 체화한 상황이었으므로.

         

         

         ‘184.’

         

         

         환각, 환청, 마물의 급습, 복잡하게 뒤틀어 놓은 구조물, 어둠, 갑작스럽게 시야를 마비시키는 빛과, 균형감각을 교란하는 소음.

         

         그런 모든 장애는 결국 외부의 것일 뿐. 훈련 받은 요원이며, 용사 파티의 척후라면 무릇. 그런 상황 속 왕거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어야만 하니.

         

         

         ‘185.’

         

         

         시간을 초 단위로 계산하고, 보폭을 센티미터 단위로 기억하고, 한번 본 지도, 한번 돌파한 지역은 결코 잊지 않을 훈련까지 마쳤다면.

         

         이 세상의 규칙에서 벗어난 왕거 속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기 마련이다.

         

         

        -촤악!!

         

         

         다시금 마물의 목을 잘라내며 이반은 발을 내딛었다. 186보. 후원까지 남은 거리는 2318보다.

         

         

         “정면!!”

         “저, 재장전 중!!”

         “제가 대응합니다!”

         

         

         길을 뚫는 이반의 뒤에서, 일행들이 제각기 무기를 휘두르며 교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반의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이반이 뚫은 지역 외부에서 밀려오는 마물들을 쓸어내는 것이다.

         

         마물 하나가 엘프의 형상으로 달려들었다. 루시아의 단검이 깔끔하게 목과 팔을 날리자, 그 뒤에서 장전하던 마물이 화살을 쏘아냈다.

         

         룬디스의 앞에 대뜸 거대한 방패가 척척 펴진다. 방패를 따앙, 때린 화살이 다시 마물의 형태로 돌아가 바닥을 기었다.

         

         룬디스가 그 충격에 뒤로 주륵, 밀리자 엘피헤라가 손을 펼쳤다.

         

         

         “6시 방향, 머리 숙여!!”

         

         

         루시아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자 콰릉, 뇌전이 전방을 휩쓸었다. 마물과 마물을 징검다리 삼아 통통 튀어나간 전격이 벽에 닿아 사그라들고.

         

         그 사이로 남은 것은 매캐한 탄내를 풍기는 마물의 시신 뿐이었다.

         

         

        -카앙!!

         

         

         방전으로 비틀거리는 엘피헤라의 곁에서 오스왈드가 검을 휘둘렀다. 엘피헤라의 목덜미를 노리던 마물의 공격이 오스왈드에게 막히고,

         

         

         “죽어어어!!”

         

         

         오스왈드는 피눈물을 흘리며 다른 손에 쥔 지팡이를 거칠게 마물의 몸 안에 쑤셔 박았다. 곧, 콰앙. 폭음이 터지며 마물의 몸이 산산조각났다.

         

         

         “재장전 완료!! 발포 개시!!”

         “으윽!”

         

         

         룬디스의 외침에 오스왈드가 귀를 막으며 몸을 웅크렸다.

         

         

        -콰아아아앙—!!

         

         

         압도적인 폭음과 함께 측면에서 기어나오던 마물들이 일격에 사라졌다. 말 그대로, 발목 위로 형태가 사라졌다. 화염과 함께 뻗어나간 탄환이 마물을 휩쓸고, 회랑의 벽에 구멍을 뚫어버렸다.

         

         뚫린 벽 너머로 눈 내리는 하늘과 일렁이는 극광이 비쳤다. 일행은 멍한 귀를 탁탁 두드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과정을, 만년궁에 진입한 매 순간 겪으며.

         

         

         ‘281.’

         

         

         이반은 선두에서 걸음을 내딛었다.

         

         

        *

         

         

         후원엔 단 한 그루의 나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수많은 엘프들의 영면을 위해 만들어진, 이 고대의 숲은 그저 야트막한 언덕이 되어 있을 뿐.

         

         눈 덮인 언덕 위에 거대한 비석이 외롭게 서 있었다. 붉은 극광을 받아내며, 심장 박동이 맥박치듯, 마력을 하늘 위로 쏘아내고 있었다.

         

         두근, 두근. 한 번의 맥동에 극광이 새로 나타나고 사그라든다. 마력이 동맥처럼 하늘을 뒤덮고, 그 사이로 흉조가 뚝뚝 떨어져 칼리온의 전역으로 흩어졌다.

         

         이반은 도끼를 꾹 쥐고 걸음을 옮겼다. 언덕을 올랐다. 눈이 발치에서 부스러지고, 말라 비틀어진 뿌리나 가지 같은 잔해물이 발 아래에 으스러졌다.

         

         그 너머, 마침내 드러난 마일스톤의 앞에서.

         

         한 여인이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아, 왔는가?”

         

         

         비석을 올려보며, 고요하게.

         

         

         “여의 객이여. 여는 그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많은 백성들의 목소리와 함께. 오늘 이 날만큼, 여가 진정으로 이 나라의 군주였던 적이 있던가.”

         

         

         여인의 손짓에 극광이 깃들었다. 천천히, 더 밝게. 그리고 더 붉게. 질척한 핏물처럼 모여들었다.

         

         이반은 도끼를 쥔 채 작게 턱짓했다.

         

         

         “엘피헤라, 마일스톤을 정지해라. 오스왈드, 엘피헤라를 돕고. 루시아와 룬디스는 날 보조해.”

         “소용없는 짓이다.”

         

         

         여인은 마침내 등을 돌렸다. 그녀의 드러난 얼굴에, 엘피헤라는 간신히 비명을 억누르고 숨막힌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여인은 얼굴이 없었다. 거머리의 아가리처럼 쩍 벌어진 구멍에 톱날 같은 이빨이 줄지어 늘어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머리칼과 옷차림, 말투와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그렇군.”

         

         

         이반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일스톤에게 지성, 마법, 신성을 부여해도 하나 모자란 것이 있었지.”

         

         

         엘프 학회들이 마일스톤을 이용해 연구한 수많은 기술들엔 단 하나 부족한 것이 있었다. 그들의 기예는 분명, 종족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산물이라 평해도 모자람이 없었지만, 단 하나.

         

         애초에 엘프에겐 필요가 없어 연구할 필요도 없었던.

         

         그러나 칠용장이 만들어지려면, 아니. 어떤 존재가 ‘지적생명체’로 존속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했던 단 하나.

         

         

         “의식. 혼은 있으나 영이 없던 이 녀석에게 마지막 퍼즐이 당신이었군.”

         “여의 몸에 신이 깃들었다. 이런 잡스러운 유물의 힘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신이. 저 하늘에서—.”

         

         

         여인이 활달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반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권총을 들어 여인을 겨누었다.

         

         여인의 고개가 정확히 이반을 향했다. 그녀의 입에선 이제, 소년과 노인, 여성과 남성의 목소리가 뒤섞인 소음이, 해충의 날갯짓처럼 겹쳐 들렸다.

         

         

         “너, 인간. 필멸자야. 신의 강림이 끝났으니 무릎 꿇어 이제 올 영원한 겨울을 찬양하라. 네 가엾은 영혼을 다해, 네 진정한 신을 위해 기도해라.”

         

         

         그녀의 목소리에 일행이 핏물을 흘렸다.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울컥 치솟은 핏덩이가 입술 밖으로 스며 나왔다.

         

         이반은 눈을 가늘게 뜨며 크게 숨을 쉬었다. 베올그린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여인이 내뿜는 강대한 압박감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기분 나쁠 정도로.

         

         ‘저것’의 신성력. 그 부서진 파편들이 허공에 비산할 때마다 이반의 팔과 다리에 새로운 힘이 들어갔다.

         

         

         “본디 여에겐 수많은 이름이 있었다. 너희가 하늘과 계절을 두려워할 때마다 속삭였던 저주들이 곧 여의 이름이라. 너, 필멸자야. 감히 두 팔로 하늘에 대적하겠느냐?”

         “처음이 아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일행의 앞에서, 해일 앞의 방파제처럼 서서.

         

         그 압박감을 해소하며, 다시 한 걸음.

         

         

         “자신을 신이라 믿는 이들을 만난 적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신’들을 만나게 되겠지만.

         

         단 하나, 경험해봤고, 확신하며, 시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래, 언제나 진리는 단 하나였다.

         

         

         “죽더군.”

         

         

         이반은 도끼를 들어, 자세를 잡고, 호흡을 정리하고, 양팔에 치미는 신성력을 일점에 모아.

         

         하늘을 향해.

         

         

        -쩌어어엉—!!

         

         

         그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자신을 신이라 믿는 이들을 만난 적 있다.”
    “죽더군.”

    흥분이나 열정, 스스로 행하고 있을 위업에 대한 명예, 성취감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 메마른 목소리.
    그저 담담히, 과거에 경험했던 사실을 토로하듯 건조하게 속삭이고는.

    Ep11. 성 얀스크 대학과 비밀의 방 (11)
    *
    이번주에 이번 에피소드 클라이막스 씬까지 끝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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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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