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90

       현재 시각은 저녁이 찾아오기 직전.

         

       사소한 사건이 좀 있었지만, 무사히 항로의 중간 지점인 아이론 왕국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 온통 새하얗네요. 이유가 있을까요?”

         

       라데아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항구를 바라봤다.

         

       “아이론 왕국 사람들은 새하얀 순백이 강녕과 평화의 상징이라고 믿어요. 그래서 건물이나 옷의 색도 순백으로 통일되어 있죠. 이유는 옆 나라의 영향이에요.”

         

       사소한 의문을 풀어주는 달리아. 성녀로서 높은 교육을 받았던 그녀는 간략하게 아이론 왕국에 대하여 설명해주었다.

         

       아이론 왕국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성국 단델리온의 영향을 받아 백성이 너무 신실한 나머지, 대신관의 권위가 왕권에 견줄 정도로 강한 기묘한 국가였다.

         

       “내일 새벽에 다시 출항합니다! 정확한 시각은 이전, 알토리아에서 출항했던 시각과 같습니다!”

         

       유람선이 완전히 정박하자, 안전을 책임지는 기사단장이 크게 소리쳤다.

         

       “귀빈 여러분들께서 머무실 여관은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대관해뒀습니다! 항구의 중앙, 메르세드 여관으로 가십시오!”

         

       그의 브리핑이 끝나자 귀족들은 제 호위기사와 같이 선착장에 발을 붙였다. 우리 일행 또한 배에서 내렸다.

         

       나는 자연스레 일행을 살폈다. 유람선의 시설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좋았던지라, 다들 얼굴 안색도 괜찮고 피곤해 보이진 않았다.

         

       ‘멀미를 하진 않았으니까.’

         

       선착장에 발을 붙인 카자르가 물었다.

         

       “어떡하실 거예요?”

       “글쎄. 프란체, 어떡할래?”

       “음…….”

         

       프란체는 턱에 손을 짚곤 눈썹을 좁혔다. 고민에 잠긴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모처럼의 타국이니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하다. 프란체도 외국은 처음인지라 기대감으로 부풀어있었다.

         

       “그러면 적당히 돌아다니자. 다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도 돼. 규칙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다들 고개를 주억이며 긍정했다.

         

       라데아 자매는 케일과 같이. 헬레나 카자르는 달리아와 같이 움직이기로 결정되었다.

         

       얘네들도 나와 프란체가 신혼임을 생각하여 자연스레 이렇게 나눈 거겠지.

         

       “어디부터 갈래?”

       “일단 적당히 돌아다녀보고.”

       “그래. 그러자.”

         

       프란체의 손을 잡았다. 마주보며 싱긋 웃던 순간.

         

       “데카르트 공작부군님.”

         

       뒤에서 기사단장이 말을 걸어왔다.

         

       “포박한 선장 관련해서 잠시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뭐지?”

       “그것이…….”

         

       기사단장은 멋쩍은 얼굴로 뒷목을 쓸어내리며 난처함을 표했다.

         

       “스칼렛 비스콘티는 명성이 높은 실력자입니다. 바다의 패왕이죠. 저희가 이대로 구속해두는 것도 일시적입니다.”

         

       그의 말을 해석하자면, 자신들이 잡고 있는 건 불가능하니 아이론 왕국에 넘기자는 뜻이었다.

         

       “흠.”

         

       딱히 상관은 없다만, 이용 가치가 높은 소드 마스터인지라 단순히 타국의 포상금만 받고 넘겨주기엔 아까운데…….

         

       ‘어쩔 수 없군.’

         

       노예에 관련하여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어 거북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다.

         

       “카자르?”

         

       나는 근처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던 카자르를 불렀다.

         

       “뭔가요?”

       “혹시 초월의 구속 각인을 새길 수 있나?”

         

       라드리엔이 내게 사용했던 초월의 각인. 몸에 새기는 일반적인 각인과는 달리, 영혼에 직접 새겨지는지라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한들 저항할 수 없다.

         

       “음, 새길 수야 있죠. 예전에 공작부군님 잡으려고 공작님이랑 영혼 관련 실험을 많이 해서 어려운 작업은 아니네요.”

         

       좀 무서운 소리를 들은 거 같다만, 애써 한 귀로 흘려보냈다.

         

       “그럼 이 선장한테 구속 각인을 걸지.”

         

       노예로 만든다는 말에 거부감이 들었는지, 카자르의 눈썹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어쩌시려고요? 설마 노예로 만드시게요?”

         

       그에 나는 고개를 슬쩍 내젓곤 어깨를 으쓱였다.

         

       “노예까진 아니고. 이대로 두기엔 능력이 아까워서 가문에 써먹으려고.”

         

       선장은 단순히 오러를 개방하여 소드 마스터 칭호를 단 것뿐만이 아닌, 강자의 영역에 도달한 자다. 오러의 특성도 매우 보기 드문 빛의 성질을 띠고 있고.

         

       ‘어차피 평생 판옵티콘 같은 감옥에서 썩을 거, 데카르트에 종사하는 게 낫지.’

         

       바다의 패왕이라고 불릴 정도의 해적이다. 그간 저지른 악행은 수도 없이 많을 터. 무기 징역은 당연했다.

         

       “선장을 데려와라.”

       “예!”

         

       이어 기사들은 내 명령에 따라 포박된 스칼렛 비스콘티를 데려왔다.

         

       해적의 특성상 바다에서 햇빛을 많이 받았음에도 잡티 하나 없이 말끔한 새하얀 피부. 손에는 검을 잡은 것치곤 굳은살도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손.

         

        길고 매혹적인 속눈썹. 뚜렷한 이목구비. 찰랑거리는 금발은 잘 익은 밀밭을 연상시켰다.

         

       외견만 보면 귀족 레이디라 하여도 믿을 상.

         

       인간의 바닥까지 긁어내야 하는 무법자 사회의 우두머리라곤 도통 믿기지 않았다.

         

       “…굳이 이 여자가 데카르트에 필요하니? 기사 숫자가 부족하진 않은데. 사회를 망치는 저급한 해적이기도 하고.”

         

       옆에서 조용히 선장을 바라보던 프란체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장은 바다에서 명성이 자자한 소드 마스터야. 이용할 수 있으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되겠지.”

         

       바다를 무대로 삼아 활동하는지라 대륙 전체에 이름이 닿진 않았지만, 바다의 패왕이라는 이명이 괜히 붙여진 게 아닐 거다.

         

       ‘케일에게 백귀라는 이명이 붙은 것처럼.’

         

       귀찮은 일을 처리할 때 많은 도움이 되겠지.

         

       “흐응.”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프란체는 여전히 입술을 일그러트린 채 눈을 얕게 떴다.

         

       “이상하게 예전부터 여자들이 꼬이네.”

         

       그녀는 고개를 내젓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됐어. 마음대로 하렴.”

         

       허락이 떨어졌지만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이는 나중에 풀어주는 수밖에.

         

       “카자르, 각인을 새겨.”

       “아, 네.”

         

       결국, 카자르의 마법으로 구속의 각인이 새겨진 스칼렛 비스콘티.

         

       “그럼 기사단장. 이 여자의 수송은 맡기지. 구속의 각인을 새겨뒀으니 저항은 하지 못할 거야.”

         

       그에 기사는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칼 같은 각도로 경례했다.

         

       “예! 맡겨주십시오!”

         

       이것으로 데카르트의 유능한 일꾼이 추가되었다.

         

         

       * * *

         

         

       자유 도시 판테온으로 향하기 위해 잠시 들른 아이론 왕국.

         

       이 국가는 생각 이상으로 재미가 없는 국가였다.

         

       백성들이 너무 신실한 나머지 기도에만 하루의 세 시간을 투자하고, 방탕한 삶은 안 된다며 술의 유통도 되지 않았다.

         

       그러면 다행이지, 외국의 물을 즐길 틈도 없이 해가 지기 시작하자 상점들이 일찍 문을 닫았다.

         

       “대체 이 사람들은 재미없어서 어떻게 살죠?”

         

       고풍스러운 여관에서 고개를 꺾으며 눈썹을 좁히는 라데아. 어지간히 어처구니가 없는 듯했다.

         

       “여기 사람들은 이게 익숙한 거겠죠.”

         

       달리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아이론 왕국이 파는 밀 빵을 입에 물고 있었다. 저거 아무 맛도 안 나던데.

         

       “나는 잠이나 자러 가보겠다.”

         

       상상 이상으로 재미없는 왕국에 흥미를 잃은 케일이 얼굴을 구긴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럼 저희도 일찍 쉬러 가볼게요. 내일 뵈어요.”

         

       이어서 라데아 자매와 카자르, 달리아도 자리를 비웠다.

         

       그리하여 나와 프란체만 남게 되었다만…….

         

       “…….”

         

       프란체는 여전히 어딘가 꽁해 있는 모습이었다.

         

       “프란체?”

       “…….”

         

       입술을 내민 채 답이 없다.

         

       “프란체?”

         

       한 번 더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자, 프란체는 뱀처럼 매서운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솔직히 말해. 그 선장의 얼굴이 예뻐서 동정심이 든 거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그년은 무법자야. 해적이라고. 그런데 단순히 도움이 된단 이유로 우리 가문에 들이겠다고? 나와 상의도 없이 왜 마음대로 결정해?”

         

       그녀의 분노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섞여 있었다. 작은 질투심부터 시작해 서운함까지.

         

       연인과 부부는 사소한 배려가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이는 미처 생각하지 않은 내 탓이었다.

         

       “상의하지 않은 건 미안해. 그런데 사심은 전혀 없어. 나는 프란체밖에 없다는 걸 알잖아?”

         

       프란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의 화를 풀어주기는 의외로 간단하다.

         

       “나는 프란체 말고 다른 여자는 그저 감자로밖에 안 보여. 아니, 그보다 더 못하지.”

         

       달콤한 말을 좀 속삭여주면 된다.

         

       “프란체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올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 선장, 노란색 감자로밖에 안 보였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자 슬쩍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보는 프란체.

         

       “…정말?”

       “정말로.”

       “그럼 증명해.”

         

       프란체는 목을 젖히며 매끈한 목을 드러냈다. 내가 어제 새겨놓은 붉은 멍 자국이 있었다.

         

       “그냥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던 거 아니야?”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달라붙자 프란체는 휙, 고개를 돌렸다.

         

       “무, 무슨 소리니? 나 그렇게 밝히는 여자 아니야.”

         

       그게 거짓이란 건 누구보다 잘 아는 나인데, 솔직하지 못하다.

         

       “그래?”

       “…다, 당연하지.”

         

       끝까지 모르쇠 하는 게 꽤 귀여우니 넘어가 주고. 나는 프란체의 목에 입술을 맞댔다. 후, 하고 바람을 불자 그녀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오늘은 다섯 번만 할 거야.”

       “…알고 있어.”

       “어제처럼 졸라도 안 돼?”

       “……알겠어.”

         

       대답에 간격이 있는 걸 보니 더 요구할 생각이었나.

         

       ‘귀엽네.’

         

       처음에는 프란체가 단순히 성욕이 강한 건 줄 알았는데, 그저 내 사랑에 대한 욕망이 컸던 것뿐이었다.

         

       그걸 안 지금은 그녀가 더욱 사랑스러웠다.

         

       “그럼.”

       “응…….”

         

       자연스레 목덜미에 휘감아지는 프란체의 팔. 나는 오늘도 그녀를 덮치듯이 누웠다.

         

         

       * * *

         

         

       해가 뜨기 시작한 새벽.

         

       우리는 출항을 위해 여관에서 나와 유람선으로 걸음을 옮겼다.

         

       댕- 댕-

         

       머릿속을 맑게 만들어주는 청량한 종소리가 항구 전체에 울려 퍼졌다. 아이론 왕국의 성당에서 아침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여긴 기상도 빠르네요?”

       “그러게…? 아직 새벽 5시인데…….”

         

       비몽사몽 눈을 비비던 라데아와 카자르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론 왕국의 하루는 일찍 끝나잖아요? 당연히 그만큼 일찍 시작하는 거죠.”

         

       이번에도 사소한 의문을 풀어주는 달리아.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단순한 얘기긴 했다.

         

       “아, 그랬었죠…….”

       “제국이랑 많이 달라서 적응이 안 되네요.”

         

       이 왕국은 지금껏 살아온 제국과는 완전히 다른지라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빨리 가지.”

         

       케일이 재촉했다. 흥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 곧 자유 도시 판테온이니까.”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이 지루한 왕국에서 벗어나자는 생각으로 걸음에 속도를 올렸다.

         

       이어 선착장에 도착하고, 유람선에 탑승한 우리는 다시 갑판으로 올랐다.

         

       “새벽에 맡는 공기가 참 좋네.”

         

       프란체가 싱긋 웃으며 정면을 바라봤다. 저 멀리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이 보였고, 그 위로는 태양이 뜨고 있었다.

         

       “왕국이 좀 지루하긴 했어도 이런 건 좋구나. 분위기가 조용하니 고즈넉해.”

         

       싱긋 웃으며 내 어깨에 몸을 기대는 프란체. 근심과 걱정은 찾아볼 수 없는, 평온하지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그러게. 단점만 있는 것도 아니었어.”

         

       나는 프란체의 어깨를 당겨 몸을 밀착했다. 그것이 좋았는지 그녀는 더욱 달라붙으며 내게 파고들었다.

         

       같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며 감상에 잠긴 사이.

         

       “출항합니다!”

         

       -우우웅!!

         

       커다란 고동이 울리며 유람선이 출발했다.

         

       목적지는 자유 도시 판테온.

         

       곧 장종원으로 인해 가득해진 신문물을 모두에게 보여줄 시간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다음화 보기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