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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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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작스러운 변화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새하얀 머리카락과 금안은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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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황은 곧 몽롱한 정신 속에 사그라들었다.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몸이 축 늘어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따스한 온기를 품은 신의 손이 보듬는 것만 같은 아찔한 평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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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들이 말하는 천국이 이런 곳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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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생각이 마왕의 머릿속에 싹을 틔우는 것과 동시에 리안의 손이 부드럽게 마왕의 머리를 어깨 뒤로 넘겨주었다. 마왕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리안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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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안정을 찾아 고요하게 반짝거리는 마왕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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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를 구하는 건 용사가 해야 하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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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그 세계에선 각자 ‘역할’이 정해져 있다. 개그 세계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한 채 제 역할을 수행하지만,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리안에겐 개개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훤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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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드사이언티스트는 10년이 지나도 매드 사이언티스트인 것처럼, 개그 세계에선 각자의 역할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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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틀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오랜 시간 살아왔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계를 구하는 건, 무고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구하는 건 ‘용사’가 해야 한다고 단정 지어 생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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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로 ‘마왕’으로 살아가는 엘렌시아같은 존재를 구원할 수 있는 건, 그런 거대한 서사를 소화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용사뿐이라고… 생각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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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고정관념이 마왕의 간절한 마음 앞에 무너져 내렸다. 마왕과 감정이 동화된 덕분일까? 그도 아니면 개그 필터의 힘이 약해진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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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를 명확히 알 순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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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드시 돌아와서 엘렌시아, 너를 이곳에서 구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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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오를 담은 말이 무겁게 뱉어졌다. 제 장르를 벗어난 듯한 감각에 살짝 오싹한 느낌이 들어 마지막엔 슬쩍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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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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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각오가 마왕의 귓바퀴를 타고 머릿속을 파고들고, 다정한 웃음이 망막에 새겨지자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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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곳에서 갑작스럽게 떠밀린 것처럼 아찔한 부유감에 마왕은 숨을 삼켰다. 신이 시간을 장난스럽게 늘린 것처럼 휘어지는 입술과 휘어지는 눈꼬리가 느릿한 시간 속에 갇혀 마왕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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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마왕은 쿵쾅거리는 소리가 제 심장에서 시작되었음을 인지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머릿속이 붕 떠올랐다.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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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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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색 기운이 넘실거리는 두 사람 사이로 살벌한 소리가 파고들었다. 난폭한 소리에 마왕이 시선을 돌려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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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가 사나운 표정을 지은 채 갈퀴손으로 벽을 긁어내리고 있었다. 매끄럽게 움직이는 손이 마치 순두부를 자르는 듯 가벼웠지만,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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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 길이만큼 푹 파인 채 길게 남겨진 상처만 봐도 제스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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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는 ‘이다음에 잘리는 건 네 녀석의 목이 될 거다.’라는 시선으로 마왕을 살벌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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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스?”
    “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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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의 시선이 제스를 향하는 것과 동시에 살벌하게까지 느껴지던 시선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시무룩한 얼굴만이 자리를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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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놓고 내숭을 부리는 제스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번쩍 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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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짐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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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간 그녀 본인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제스가 리안의 앞을 막아섰을 때와 비교할 수 없는 분노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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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왜 이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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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은 분노를 쏟아내는 대신 자신에게 의문을 던졌다. 그 정도로 그녀가 느끼는 감정의 크기는 거대했고 격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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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감정의 흐름이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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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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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성큼 다가온 제스가 뒤에서 리안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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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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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통수를 덮쳐오는 말랑한 습격(?)에 리안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제스의 두 팔이 자연스럽게 리안의 눈가를 가려버렸다. 그리곤 마왕을 내려다보며 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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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백한 경계에 마왕은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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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이게 그거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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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나라한 제스의 태도 덕분에 마왕은 자신의 감정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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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사랑’이라는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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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랜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한 타입이었다. 그 탓인지 그녀가 어릴 때부터 유독 ‘진실한 사랑’을 찾아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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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자각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긴 시간을 삽질했던 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느끼게 될 여러 느낌이나 반응을 세세하게 교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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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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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으로 듣게 된 ‘사랑’이란 터무니없는 내용이 많아, 그저 전설처럼 느껴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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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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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감정을 깨닫자 리안의 몸을 끌어안은 팔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가려 했지만, 그녀는 일부러 팔에 힘을 풀어 리안을 놓아주었다. 그리곤 몸을 뒤로 물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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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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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상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감사를 전한 후 몸을 휙 돌려 통로 한쪽을 바라보았다. 검지 끝이 통로 끝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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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길을 쭉 걸어가면 성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그… 것이 쫓아오기 전에 서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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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이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고 도망갈 길을 알려주자, 제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의미를 파악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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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툭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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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 제스? 이, 이것 좀 풀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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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의 말을 귀로만 듣고 있던 리안이 제 눈가를 가린 제스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부탁하자, 제스는 어쩔 수 없이 팔을 풀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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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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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왕은 망설임 없이 리안과 제스 옆을 지나 반대쪽 통로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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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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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다급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왕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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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의 부름에 마왕의 발걸음이 뚝 하고 멈췄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리안은 약간의 머뭇거림 끝에 겨우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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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다면 함께 떠나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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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와 구해주겠다고 한 주제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이상해 보일 수 있다는 건 리안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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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대로 두고 가는 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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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의 생각이 끝을 맺기도 전에 마왕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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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계약으로 묶인 몸이라 이곳을 쉽게 떠날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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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텀을 두고 말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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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어서 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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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치 못한 말에 리안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마왕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급히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마왕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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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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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과 제스가 시야에 닿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나서야 마왕은 몸을 돌려 어두운 통로 너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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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썩어 문드러진 시체들이 발목을, 목을, 팔을 잡아끄는 끔찍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필사적으로 리안을 찾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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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잠깐이라도 숨이 턱 막히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리안을 제 곁에 묶어뒀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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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선택에는 어디에도 리안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과격하게 말해, 리안을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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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만큼 그녀는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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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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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에 대한 감정을 자각한 지금, 그녀는 ‘살고 싶다.’라는 목표와 전혀 다른 목표를 머릿속에 하나하나 세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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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정도는 내가 선택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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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이 그녀를 구하겠다고 말한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죽음을 결심했다. 그것이 처음으로 자각하게 된 제 사랑에 대한 최고의 구애였으며 의미 있는 죽음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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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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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모든 눈송이가 전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거친 폭설이 새하얀 산을 뒤덮었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거센 탓에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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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억, 헉…”
    “흐읍,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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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서운 바람과 눈발 사이로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적발의 수인과 흑발의 인간, 제스와 리안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설산을 오르고 있었다.
    ​
    ​
    “하아, 하…저기 동… 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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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과 섞여 쏟아져 내리는 눈들이 산사태가 쏟아지는 듯한 거친 소음을 만들어 쉽사리 대화를 나누기 어려웠다. 그 탓에 오고 가는 대화는 짧은 단어로만 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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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은 겨우 ‘동굴’이라는 말을 알아듣곤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힘겹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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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그 필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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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 개그 주민 둘이 이런 눈보라 속에 갇히면 매우 높은 확률로 둘 중 한명은 골로 가게 되어있다. 남은 한명이 눈물을 흘리며 “안돼! 젠장 눈을 뜨라고!”라는 말을 소리치다가 산사태로 함께 세상을 떠나는 게 가장 흔한 클리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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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엔 장단점이 있다고. 개그 필터의 힘이 약해진 탓에 온몸에 상처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만, 덕분에 눈보라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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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열하는 사이 제스가 가리켰던 동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리를 푹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좁은 입구를 가진 동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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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쪽은 동물이 파놓은 굴처럼 안쪽으로 둥글게 파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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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헉,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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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어붙은 몸을 덜덜 떨며 동굴 안쪽에 주저앉았다. 삐걱거리는 몸을 더듬거리며 시선으로 제스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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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그 필터가 있는 내가 이 정도라면 제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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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Ilham Senjaya님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3

어제.. 작업을 하다가 그대로 기절잠해버려서 흑흑…

늦은 김에 퇴고 좀 더 꼼꼼히 하자 하다가 또 지각하고.. (반성중..)

바로 다음화 써서 새벽 중에 업로드 하겠습니다 ㅠ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갑작스러운 변화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새하얀 머리카락과 금안은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황은 곧 몽롱한 정신 속에 사그라들었다.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몸이 축 늘어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따스한 온기를 품은 신의 손이 보듬는 것만 같은 아찔한 평온을 느꼈다.

‘인간들이 말하는 천국이 이런 곳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마왕의 머릿속에 싹을 틔우는 것과 동시에 리안의 손이 부드럽게 마왕의 머리를 어깨 뒤로 넘겨주었다. 마왕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리안을 향했다.

리안은 안정을 찾아 고요하게 반짝거리는 마왕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세계를 구하는 건 용사가 해야 하는 일이야.’

개그 세계에선 각자 ‘역할’이 정해져 있다. 개그 세계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한 채 제 역할을 수행하지만,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리안에겐 개개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훤히 보였다.

매드사이언티스트는 10년이 지나도 매드 사이언티스트인 것처럼, 개그 세계에선 각자의 역할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런 틀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오랜 시간 살아왔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계를 구하는 건, 무고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구하는 건 ‘용사’가 해야 한다고 단정 지어 생각해왔다.

강제로 ‘마왕’으로 살아가는 엘렌시아같은 존재를 구원할 수 있는 건, 그런 거대한 서사를 소화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용사뿐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 고정관념이 마왕의 간절한 마음 앞에 무너져 내렸다. 마왕과 감정이 동화된 덕분일까? 그도 아니면 개그 필터의 힘이 약해진 탓일까?

이유를 명확히 알 순 없지만.

“…반드시 돌아와서 엘렌시아, 너를 이곳에서 구해줄게.”

각오를 담은 말이 무겁게 뱉어졌다. 제 장르를 벗어난 듯한 감각에 살짝 오싹한 느낌이 들어 마지막엔 슬쩍 웃음을 흘렸다.

“…”

그의 각오가 마왕의 귓바퀴를 타고 머릿속을 파고들고, 다정한 웃음이 망막에 새겨지자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높은 곳에서 갑작스럽게 떠밀린 것처럼 아찔한 부유감에 마왕은 숨을 삼켰다. 신이 시간을 장난스럽게 늘린 것처럼 휘어지는 입술과 휘어지는 눈꼬리가 느릿한 시간 속에 갇혀 마왕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마왕은 쿵쾅거리는 소리가 제 심장에서 시작되었음을 인지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머릿속이 붕 떠올랐다.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만 같았다.

카드득!

분홍색 기운이 넘실거리는 두 사람 사이로 살벌한 소리가 파고들었다. 난폭한 소리에 마왕이 시선을 돌려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제스가 사나운 표정을 지은 채 갈퀴손으로 벽을 긁어내리고 있었다. 매끄럽게 움직이는 손이 마치 순두부를 자르는 듯 가벼웠지만, 결과는 전혀 가볍지 않았다.

손가락 길이만큼 푹 파인 채 길게 남겨진 상처만 봐도 제스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제스는 ‘이다음에 잘리는 건 네 녀석의 목이 될 거다.’라는 시선으로 마왕을 살벌하게 바라보았다.

“제스?”

“끼잉..”

리안의 시선이 제스를 향하는 것과 동시에 살벌하게까지 느껴지던 시선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시무룩한 얼굴만이 자리를 대신했다.

대놓고 내숭을 부리는 제스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번쩍 정신이 들었다.

‘저 짐승이…’

순간 그녀 본인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제스가 리안의 앞을 막아섰을 때와 비교할 수 없는 분노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마왕은 분노를 쏟아내는 대신 자신에게 의문을 던졌다. 그 정도로 그녀가 느끼는 감정의 크기는 거대했고 격렬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감정의 흐름이 당황스러웠다.

포옥!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성큼 다가온 제스가 뒤에서 리안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으헉..!?”

뒤통수를 덮쳐오는 말랑한 습격(?)에 리안이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제스의 두 팔이 자연스럽게 리안의 눈가를 가려버렸다. 그리곤 마왕을 내려다보며 사나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명백한 경계에 마왕은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래, 이게 그거로군.’

적나라한 제스의 태도 덕분에 마왕은 자신의 감정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사랑’이라는 감정.’

그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랜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한 타입이었다. 그 탓인지 그녀가 어릴 때부터 유독 ‘진실한 사랑’을 찾아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곤 했다.

제 감정이 사랑이라는 걸 자각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긴 시간을 삽질했던 아버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느끼게 될 여러 느낌이나 반응을 세세하게 교육했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설명으로 듣게 된 ‘사랑’이란 터무니없는 내용이 많아, 그저 전설처럼 느껴졌었다.

‘이젠 알겠어.’

제 감정을 깨닫자 리안의 몸을 끌어안은 팔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가려 했지만, 그녀는 일부러 팔에 힘을 풀어 리안을 놓아주었다. 그리곤 몸을 뒤로 물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 고마워.”

여상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감사를 전한 후 몸을 휙 돌려 통로 한쪽을 바라보았다. 검지 끝이 통로 끝을 가리켰다.

“이 길을 쭉 걸어가면 성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그… 것이 쫓아오기 전에 서둘러.”

마왕이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고 도망갈 길을 알려주자, 제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의미를 파악하려 했다.

툭툭.

“저기 제스? 이, 이것 좀 풀어줄래?”

마왕의 말을 귀로만 듣고 있던 리안이 제 눈가를 가린 제스의 팔을 가볍게 두드리며 부탁하자, 제스는 어쩔 수 없이 팔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마왕은 망설임 없이 리안과 제스 옆을 지나 반대쪽 통로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잠깐..!”

리안은 다급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왕을 돌아보았다.

리안의 부름에 마왕의 발걸음이 뚝 하고 멈췄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리안은 약간의 머뭇거림 끝에 겨우 말을 꺼냈다.

“괜..찮다면 함께 떠나지 않을래?”

돌아와 구해주겠다고 한 주제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게 이상해 보일 수 있다는 건 리안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두고 가는 건 -..’

리안의 생각이 끝을 맺기도 전에 마왕이 입을 열었다.

“난 계약으로 묶인 몸이라 이곳을 쉽게 떠날 수 없어.”

잠시 텀을 두고 말이 이어졌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어서 가.”

“…!”

예상치 못한 말에 리안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마왕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급히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마왕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

리안과 제스가 시야에 닿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고 나서야 마왕은 몸을 돌려 어두운 통로 너머를 바라보았다.

썩어 문드러진 시체들이 발목을, 목을, 팔을 잡아끄는 끔찍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필사적으로 리안을 찾았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숨이 턱 막히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리안을 제 곁에 묶어뒀을 터였다.

그 선택에는 어디에도 리안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과격하게 말해, 리안을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만큼 그녀는 ‘살고 싶었다.’

‘미안해.’

리안에 대한 감정을 자각한 지금, 그녀는 ‘살고 싶다.’라는 목표와 전혀 다른 목표를 머릿속에 하나하나 세워나갔다.

‘마지막 정도는 내가 선택하고 싶어.’

리안이 그녀를 구하겠다고 말한 그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죽음을 결심했다. 그것이 처음으로 자각하게 된 제 사랑에 대한 최고의 구애였으며 의미 있는 죽음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

세상의 모든 눈송이가 전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거친 폭설이 새하얀 산을 뒤덮었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거센 탓에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허억, 헉…”

“흐읍,흐…”

매서운 바람과 눈발 사이로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적발의 수인과 흑발의 인간, 제스와 리안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설산을 오르고 있었다.

“하아, 하…저기 동… 굴로..!”

“…!”

바람과 섞여 쏟아져 내리는 눈들이 산사태가 쏟아지는 듯한 거친 소음을 만들어 쉽사리 대화를 나누기 어려웠다. 그 탓에 오고 가는 대화는 짧은 단어로만 오고 갔다.

리안은 겨우 ‘동굴’이라는 말을 알아듣곤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힘겹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개그 필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보통 개그 주민 둘이 이런 눈보라 속에 갇히면 매우 높은 확률로 둘 중 한명은 골로 가게 되어있다. 남은 한명이 눈물을 흘리며 “안돼! 젠장 눈을 뜨라고!”라는 말을 소리치다가 산사태로 함께 세상을 떠나는 게 가장 흔한 클리셰였다.

모든 것엔 장단점이 있다고. 개그 필터의 힘이 약해진 탓에 온몸에 상처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만, 덕분에 눈보라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열하는 사이 제스가 가리켰던 동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리를 푹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좁은 입구를 가진 동굴이었다.

안쪽은 동물이 파놓은 굴처럼 안쪽으로 둥글게 파여있었다.

“헉,흐으…”

얼어붙은 몸을 덜덜 떨며 동굴 안쪽에 주저앉았다. 삐걱거리는 몸을 더듬거리며 시선으로 제스를 찾았다.

‘개그 필터가 있는 내가 이 정도라면 제스는..’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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