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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1

     

    대륙 연합군 연무회가 열린 왕국의 도시.

     

    모든 일정이 끝나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수많은 관중은 상당수가 도시를 떠났지만, 아직 수만 명은 남아 관광을 즐기고 있었다.

     

    내일은 폐회식도 남았고, 대륙 각국의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의 밤거리에 취하기에 바빴다.

     

    “어이 형씨, 안 비켜?! 도로 한복판에서 뭐 하고 있어!”

     

    혼잡한 길거리 가운데,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는 한 남자가 있다.

     

    멀끔한 정장을 입은 커다란 덩치의 남자는 흘러가는 인파 속에서는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차가 그 때문에 길이 막혀 마부가 화를 내자 시선이 조금씩 몰리기 시작했다.

     

    “…….”

     

    도로 정중앙에 서서 눈을 감고 집중하는 모습의 남자.

    안경을 쓰고 단정하게 정돈한 머리는 어딘가 학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십 분 넘게 참다 못 한 마부가 뛰어내려 그에게 접근했다. 가까이서 보니 일반인보다 더욱 장대한 기골에 조금 압도되었지만 선공필승,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 자네 때문에 뒤에 마차 다 막힌 거 안 보여? 나니까 이렇게 말 걸어주지, 다른 마부 같으면 치고 갔어! 빨리 길에서 나오라니까?”

     

    죽은 사람 마냥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

     

    “이봐…”

     

    마부가 그를 밀어내려 손을 뻗는 순간 콱, 남자가 마부의 팔을 잡았다.

     

    “의사 고트베르크. 재미있군.”

     

    “뭐라고?”

     

    남자는 매력적인 미소를 짓고는 일순간에 마부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컥…!”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고 마부는 직감했다.

    하지만 그 직감조차 틀렸다고 그는 금방 알게 됐다. 남자는 사람조차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콰직!

    마부의 목을 무언가가 파고들고 예상치 못한 뜨거운 통증이 덮친다. 그것이 남자의 날카로운 두 송곳니라는 걸 깨닫지도 못하고, 마부의 몸이 공중을 부웅 날았다.

     

    와장창! 마부를 마차까지 던져 날려버린 남자. 그는 정장 옷깃을 다듬고는 걸음을 걸어나갔다.

     

    “백작의 소체는 오래 쓸 생각이었거늘, 이제 쓸모없어졌으니 왕국은 적당히 끝내야겠지.”

     

    진조가 보조개가 움푹 패이도록 입꼬리를 올렸다.

     

    왕국을 붕괴시킬 준비는 한참 전부터 해오고 있었다. 왕실 회의의 백작으로, 군대의 수뇌부로, 재판관으로 잠입하여.

     

    연무회라는 좋은 기회가 생겼기에 급하게 계획을 서두른 감은 있었지만 상정 범위 안이었다.

     

    “준비하지.”

     

    “예.”

     

    그의 곁에서 명령을 하달받은 암살자들이 뛰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림자’. 흑마술사와 도적의 암살자 집단이다.

     

    “여기 사람 다쳤어!”

    “싸움인가?!”

     

    마부가 쓰러진 장소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소란이 일어나기도 잠시.

     

    “꺄아아악!”

    “뭐, 뭐야 이건!”

     

    마부가 눈을 까뒤집으며 사람들을 향해 달려들어 입을 벌려대기 시작했다.

     

    진조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세상엔 인간이 너무 많아.”

     

     

     

    ***

     

     

     

    아셀라는 자신의 팔을 잡은 라스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직 회담이 끝날 시간은 아니었다. 그건 어쩌고 나를 찾아왔을까.

     

    얘기가 잘 안 풀리기라도 했나 보지.

     

    라스가 다급하게 아셀라에게 말했다.

     

    “황녀님,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옛날 일을 떠올린 아셀라가 코웃음을 쳤다.

     

    “왜, 또 암살자라도 숨어들었니?”

     

    “비슷합니다만 훨씬 위험합니다.”

     

    라스의 태도에 아셀라는 짜증이 났으나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이전부터 그에게 쌓여온 불만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사지로 자기를 끌어들이는지도 모르고 쫄래쫄래 용사를 쫓아다니고.

     

    이번 연무회에서 1왕녀와 붙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감정이 끝까지 폭발했다.

     

    화도 화지만 그를 걱정하는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서운함이 컸다.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알고 있으면서, 도무지 답해주려는 기색도 없고.

     

    벌써 그를 만난 지 4년이 다 되어간다.

     

    영아기의 기억이 희미한 걸 생각하면, 벌써 삶의 3분지 1을 함께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문제였을까. 그를 처음 만났을 땐 여성으로서도, 황녀로서도 부족했고.

     

    지금도 별 것 아닐 게 뻔한 일에 호들갑을 떠는 걸 보면, 라스는 아직도 자신을 그때 그 모습으로 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아셀라는 생각했다.

     

    “얼마든지 오라고 하렴. 찍소리도 하기 전에 머리통에 구멍을 뚫어줄 테니.”

     

    아셀라가 손가락을 튕겨 마나의 불꽃을 피워올렸다.

     

    허세는 아니었다. 지금의 아셀라는 실제로 손가락만 까닥여 고속시전으로 암살자 따위는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에 라스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장 움직이셔야 한다니까요. 심각해지면 왕국을 떠나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 타국 왕족과 접견 일정이 한참 남았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지금 누가 말도 안 되는 소릴…”

     

    라스는 답답해서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아셀라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지금은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이 연회장에서 서운한 마음을 표하며 일부러 어두운 자리에서 한참을 혼자 있었거늘.

     

    너는 용건이 없었으면 오늘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왜, 나를 왕국에서 쫓아내고 1왕녀랑 교제라도 즐기려고 그러니?”

     

    “대체 어떻게 그런 발상에 도달하신 건데요.”

     

    “저리 가.”

     

    아셀라가 라스의 팔을 뿌리치고 발코니를 걸었다.

    당연히 그녀를 보낼 수는 없었기에 라스가 바로 뒤를 쫓았다.

     

    별안간 회장에 울리는 음악이 커지고 아셀라와 라스를 향해 조명이 쏘아졌다.

     

    ―다음 참가자께서 올라오셨군요! 덴글리우드 제국의 아셀라 폰 뷔르템펠트 3황녀 전하와 그 혼약자, 의사 라스 고트베르크 주치의님입니다!

     

    두 사람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 회장은 무도회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사교계에서 유명한 커플들이 한 번씩 얼굴을 비추는 순서다.

     

    이미 사교계에서 두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제국에서 영향력을 키워 차기 황제 자리에 한 발짝 다가간 황녀 아셀라, 연무회에서 톡톡히 이름을 알린 고트베르크.

     

    그들이 혼약자라는 사실을 모르던 이도 있긴 했지만 사소한 문제였다.

     

    “나 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건만.

    아직 대피 소식이 안 전해졌나. 라스는 당장이라도 아셀라를 데리고 나가기 위해 그녀를 설득해야만 했다.

     

    “황녀님.”

     

    홱, 라스가 힘있게 아셀라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의 다급한 표정을 본 아셀라는 더욱 그를 놀리고 싶어졌다. 음악소리에 스텝을 맞추고 라스를 향해 몸을 뻗었다.

     

    “와아!”

    “저기 좀 보세요!”

     

    홀의 관객들이 아셀라의 열정적인 움직임을 보고 단숨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쩔 수 없지.’

     

    아셀라의 기분을 최대한 빨리 풀어주고 움직여야 한다. 그리 판단한 라스는 아셀라에게 응답하며 그녀의 허리를 깊게 감쌌다.

     

    적극적인 반응에 조금 놀란 아셀라의 동공이 커졌다. 하지만 두 번 속지 않겠다는 듯 덤덤하게 춤을 이어간다.

     

    “황녀님, 최근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지셨어요. 기분도 썩 좋지 않으시고요. 월광궁의 위상은 날로만 높아지고 있잖습니까. 황녀님의 이름이 대륙에 퍼지고 있다구요. 좋은 일을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음악에 맞추어 가볍게 튀어오르는 라스의 발을 보며 아셀라가 대답했다.

     

    “능숙해졌네.”

     

    “황녀님께서 알려주셨으니까요.”

     

    “그것도 마음에 안 들어.”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있을 것이지.

    라스가 모든 것에 능숙해질수록 그가 받게 될 다른 여자들의 관심이 짜증 난다.

     

    전에는 라스를 자랑하는 게 기뻤지만 지금은 정반대였다.

     

    자신이 라스를 통제할 수 없게 될 것 같아서, 지금처럼 무조건적으로 붙들어들 수 없을지도 몰라서 불안해진다.

     

    어쩌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 아래 자신이 최고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셀라의 자만심이 조금씩 흔들려서 그럴지도 몰랐다.

     

    같은 혈통인 헤이케조차 압도할 수 없다고도 깨달았고.

    리셰라는 신비에는 근본에서 차이가 있다고도 깨달았으니.

     

    “제가 문제란 말씀이신가요.”

     

    “당연하지.”

     

    아셀라는 그 책임을 라스에게 전가하며 날카롭게 그를 노려보았다.

     

    “저는 월광궁의 신하이자 황녀님의 혼약자로서 역할을 다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이었다고 생각해요. 대체 뭐가 불만이세요.”

     

    조금 감정적으로 변해버린 라스도 그녀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네가 꼬리 치고 다니는 게 불만이라고.”

     

    “제가 언제요.”

     

    “용사는 말할 것도 없어. 왕녀도 그렇고, 저 수호대장인지 하는 야만스러운 여자는 어디서 주워왔어?”

     

    “아니.”

     

    라스로서는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아셀라가 언급한 여성들에게 연애감정이란 걸 품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뜬구름을 잡아다 유령이라 우기고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리고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거사를 망치는 게 말이나 되는가.

    용사든 왕녀든 아셀라 입장에서 더 활용할 방법이 있었을 터였다. 황제가 되고 싶다고 그렇게나 원한 건 아셀라 본인이었는데.

     

    ‘무엇보다.’

     

    라스가 최소한의 연심을 가지게 된 여성이 한 명 있다고 하면, 그건 단연코 아셀라 뿐이었다.

     

    라스도 어느 정도는 자각하고 있었다.

     

    호숫가에 일어난 그 조그마한 파문이 아니었다면, 결코 자신을 수도 없이 죽였던 여자의 곁에 남아있자는 미친 생각은 못 했으리라.

     

    자신이 어떤 기분으로 여태 당신의 곁에 있었는지.

     

    주치의로 처음 들어왔을 때 아침마다 구역질을 참던 상태에서, 지금 당신을 조금은 보고 싶어졌다고 변한 이 마음을.

     

    도무지 전할 수가 없는 라스는 답답한 심장을 주먹으로 퍽퍽 때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타탓.

     

    말없이 음악과 함께 스텝도 빨라진다.

    서로에게 몸을 맡기며, 10년은 함께 한 부부처럼 호흡이 맞는 두 사람의 몸놀림을 보고 관객이 더욱 열광한다.

     

    “황녀님.”

     

    라스가 낮은 목소리로 아셀라를 불렀다.

    조금은 화가 섞인 목소리.

     

    아셀라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손을 잡아 팔을 뻗으며 그녀의 허리를 젖힌다.

     

    음악의 끝과 함께 마무리 동작에 들어가고, 한 쌍의 백조처럼 포즈를 취한다.

     

    “어머, 저기 봐.”

    “꺄악!”

     

    관객석에서 가벼운 감탄이 터져 나왔다.

     

    저항할 수 없는 자세의 아셀라에게, 라스가 격정적으로 입술을 부딪쳤다.

     

    아셀라는 생각지 못한 기습에 잠시 넋을 놓았다.

    설마 라스가 자신을 먼저 요구하리라고는.

     

    얼굴이 떨어지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황녀님뿐이에요.”

     

    그의 긴 흰색 앞머리가 눈가를 스쳤다.

     

    “그러니 말 좀 듣죠.”

     

    아셀라는 입을 꽉 다물었다.

     

    붉게 물든 자신의 뺨이 그에게 다 보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또 졌다.

     

    …그래도.

     

    조금은 기분 좋은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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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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