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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1

       *

         

         

         극광이 멈춘다. 너울거리는 붉은 오로라가 반듯하게 갈라졌다. 그 선을 따라 아래로, 쪼개어 진 여왕이 보였다.

         

         고작 단 한 번의 공세. 그것만으로 모두가 호흡을 잊었다.

         

         이반은 저릿하게 울리는 팔을 들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깊은 숨을 내쉬고 잠시 몸을 다스리는 잔심이다.

         

         닿았다. 그 시절, 막시밀리앙의 편린에.

         

         

         “그 힘.”

         

         

         반으로 나뉜 여왕이 음산하게 으르렁거렸다.

         

         

         “여의 것이로구나.”

         

         

         질척한 점액과 함께 그녀의 몸이 달라붙었다. 멈췄던 하늘이 다시 흐르고, 대기에 더 선연한, 진홍빛 극광이 이지러졌다.

         

         

         “엘피헤라. 해라.”

         “아, 앗!! 네!!”

         

         

         엘피헤라는 황급히 마일스톤을 향해 달렸다. 오스왈드와 룬디스, 루시아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런 와중에도, 여왕은 오직 이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 혹은, 자신의 것을 탈취해 사용하는 것에 대한 분노….

         

         아니.

         

         

         “두려움이로군.”

         

         

         이반의 말에 여왕의 기색이 바뀌었다. 이글거리는 감정이 피부 위에 화살처럼 틀어박힐 정도로 노골적이다. 저 수준의 살기는, 초인마저 상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실체를 지닌다.

         

         

         “네 놈. 감히…. 혀놀림을 보다 조심히 해야 할 것이다.”

         “공손하면 자살할 건가?”

         “…뭐?”

         “예의를 갖추면 자결하겠나? 그렇다면 고려해봄직하지.”

         

         

         싸울 필요 없이 이 사태가 끝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효율적이니까.

         

         이반이 이토록 자제력 높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강자’들은 이성과 합리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의 말을 가당치 않게도 도발로 들은 여왕은 기함하며 손을 뻗었다.

         

         

         “여는 너를 죽이지 않겠다—!!”

         

         

        -콰아앙—!!

         

         

         손을 들어올림과 동시에 마법이 터졌다. 공중폭발, 강대한 마력을 말미암아, 저급 주문임에도 이미 드워프의 화약병기에 준하는 충격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전조와 함께 공격을 인지했으나, 이반은 피하는 대신 충격의 방향을 틀었다.

         

         

        -투웅—!

         

         

         잘 방비한 팔로 충격을 흘렸다. 그 대신 몸이 튕겨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력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주위 지형이 빠르게 바뀐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공간이 순식간에 지나쳤다. 곁눈질로 착륙지점을 확인하고 빠르게 몸을 돌렸다.

         

         

        -타악.

         

         

         코트가 충격에 펄럭였다. 이반은 도사린 몸을 일으키며 날아오는 여왕을 바라보았다.

         

         좋다. 유인했다. 이제 마일스톤의 무력화가 끝날 때까지 시간을 벌어줄 밖에.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도 저 녀석을 끝장내지 못했다. 생명력 자체가 말이 안되는 자였다. 마일스톤이 작동하는 이상, 저 존재는 끝없이 되살아날 것이다.

         

         무한한 심해 마물들의 영육을 갈아 만들어진 점토에, 엘프의 종족 가능성. 그 총체를 반죽해 만들어낸 그릇.

         

         그리고 그 안에 신의 영성을 쏟아 넣고 여왕의 의식으로 밀봉한. 만들어진 신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하지만 괜찮다.

         

         나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으며.

         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는다.

         

         그렇게 훈련 받아왔다. 이반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달려드는 여왕을 바라보았다.

         

         

         “여는 네 놈을 죽이지 않겠다. 네겐 영생이 함께할 것이다. 영구동토에 갇혀서, 매순간 구더기에 파먹히며 네 족속의 종말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콰아아앙—!!

         

         

         수많은 주문이 연쇄적으로 터졌다. 피부 위를 내달리는 전류가 긴 화상을 만들고, 화염구가 복강을 찢으며 내장 조각을 불태웠다.

         

         염력이 신경과 근육을 뒤틀고, 끔찍한 빙결에 살이 동사하기 이전에 동파한다.

         

         그러나.

         

         도끼를 쥐고, 호흡을 다듬고.

         

         다시 한 번.

         

         

        -쩌어어어엉—!!

         

         

         극광이 나뉜다. 와류가 흩어진다. 여왕의 몸이 절반 갈라져 부서진다.

         

         부서진 파편 사이로 잠시 흩어진 신성력들이, 이반의 호흡에 따라 다시 혈류 속에 녹아들었다.

         

         두근, 두근.

         

         어떤 부상을 입어도 맥동이 멈추지 않는다. 일반인이라면 수십 번은 죽고 남았을 지독한 저주, 폭력, 마법과 파괴를 겪으면서도. 끊임 없이.

         

         무릇, 신성력이란 그 방향성을 논외로 모두 한 가지 기조를 띈다.

         

         창생.

         

         어떤 악신의 사제들도 기초적인 회복 주문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애초에 신성력이란, 생명을 창조하던 힘의 파편이었으므로.

         

         그러니, 그 어떤 신의 신성력이라 할지라도 한낱 필멸자에게 새 살을 돋우고 삐걱거리는 관절에 다시 힘을 불어 넣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겠다.

         

         그러니. 고통은 환상이다.

         

         

         “쿨럭!!”

         

         

         죽은 핏물을 내뱉었다. 포션 통에서 샤워를 하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헤집어도, 그래도 눈을 부릅뜨고 일어섰다.

         

         고통이란 생명체가 느끼는 위기 감지 신호다. 신체에 대한 이상현상을 인지하기 위한, 일종의 조기경보기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부상은 모두 진정한 의미의 ‘위기’일 수가 없는 상황이니.

         

         고통은 환상이다. 필멸자의 몸이 신성력이라는 이형의 힘을 다루며 느끼는 환상통이다.

         

         억지라고 해도 좋다. 자기최면이라 불러도 좋았다. 다만 한 번만 더 도끼를 휘두를 수만 있다면.

         

         

        -쩌어어억—!!

         

         

         “소용없다!! 여는 네 하찮은 계획을 알고 있노라. 네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저 미숙한 오합지졸들이 여의 여과기에 손을 보겠다는 심산이렷다!!”

         

         

         그러니 이 둘의 싸움은 더 이상 투쟁이라 부를 수 없으리라.

         

         서로의 살을 물어뜯어 서로의 배를 채우는 형상이니.

         

         여왕의 몸을 찢어 발길때마다 나오는 신성력으로 살을 채우는 이반과.

         

         끝내 회복해 이반의 몸을 찢고 다시 신성력을 채우는 여왕의 싸움은.

         

         

         “소용이 있으리라 보느냐? 저 버러지들이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여의 세월은 만년이었고, 여의 계절은 영원하노라!”

         “내가 두려워서, 내게서 등을 돌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

         “뭐?!”

         

         

         이반은 다시 한 번 도끼를 내려 찍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방해하고 싶고, 내 동료들을 막고 싶으되. 내게서 등을 돌리는 것이 못내 두렵지 않았느냐?”

         “감히!!”

         “그래. 해보아라. 할 수 있다면 뒤를 돌아 내 일행에게 가라. 두렵지 않다면 행하라.”

         

         

         여왕은 그러나, 뒤를 돌지 못했다. 그녀는 텅 빈 얼굴로 으르렁거리며 이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야지.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가 겪은 30번의 겨울. 그 기간동안 그가 가장 잘 하던 것은 급습과 추적, 그리고 사냥이었으니.

         

         등을 돌린 상대를 잡아 먹으며 살아왔다. 절멸부대. 지금 저 밖에 허물어진 저 모든 사내들의 삶이 곧 그와 같았다.

         

         그러니, 뒤를 돌지 마라. 내게서 시선을 떼어놓지 말아라.

         

         그렇게 되뇌이며. 이반은 도끼를 들었다.

         

         

        -쩌어억—!!

         

         

         신성력이 터져나간다. 짙은 분노와 살기 사이에 섞인 두려움을 물어 뜯으며.

         

         그렇게 수십 번의 공격이 오고간다. 서로의 몸을 허물고 잡아먹고 다시 채우며 영원히. 계절이 순환하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의 데칼코마니가 된 것처럼.

         

         그리고 어느 순간.

         

         

        -우뚝.

         

         

         “하!!”

         

         

         이반의 몸이 멈추자, 여왕이 크게 소리쳤다. 육체는 신성력을 감당할 수 있더라도 무구는 그렇지 못했으니까.

         

         도끼, 단검, 권총. 무엇 하나 할 것 없이. 과도한 신성력에 노출되어 으스러져 버렸으므로.

         

         여왕은 웃으며 소리쳤다.

         

         

         “이제 무엇으로 재주를 부리겠느냐? 두 손으로 짐승처럼 덤벼들겠느냐? 보아라. 너 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네놈은 지금 영원한 겨울 앞에 있노라!!”

         

         

         승자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살과 살이 부딪치는 근접백타는 어렵다. 신성력으로 살을 채워 넣는 이 상황에서, 피부가 겹칠 경우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서로가 섞인다.

         

         살이 섞인다. 사전적인 관점에서, 이반은 지금 여왕과 그리 다르지 않은 존재다. 같은 신성력을 끌어쓰며 회복하고, 살을 불리고, 일격을 꽂아 넣는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다른 것이 있다면 의지. 그것 하나 뿐이었으므로.

         

         

         “오라. 여의 품에 안겨라. 영원히 살게 해주마.”

         

         

         저렇게 이죽거리며 말하는데도, 이반은 멈춰서서 노려보기만 할 뿐 다가가지 않았다.

         

         여왕 또한 이반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본능적인 공포 탓일수도, 아니면 더 완벽한 승리를 쟁취할 방법이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후자일 것이다. 여왕은 당당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이대로, 놈에게 저항할 방법이 사라진 이상 마법을 폭격하는 것만으로도 놈은 소모되고 만다. 그렇게 놈이 완전히 소모되어 무력화되면, 그때 차근차근. 이 섬에서부터 시작하면 될 것이다.

         

         영원한 겨울로 이 세상을 덮고, 산 자의 살을 끝없이 포식하여.

         

         이 필멸 세계의 진정한 신으로 거듭나, 다시 한 번 천상에 오르리라.

         

         

         “여의 호의를 거절한다면, 좋다. 너. 홀로 선 짐승아. 홀로 죽을 짐승아. 바라는 바를 이루라.”

         

         

         여왕이 손을 뻗었다. 극광이 흐르고, 마력이 밀집하기 시작했다.

         

         이반은 쓴웃음을 지으며 부스러진 도끼자루를 보았다.

         

         충분히 시간을 벌어주었나. 얼마나 오래 싸웠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뭐, 베올그린이 생각이 있다면 저 꼬마들을 도와주겠지. 누구에게나 정해진 역할이 있는 법이며, 이것이 내 마지막 역할이었다고 생각해도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모이는 마력을 바라보았다.

         

         분절된 시간, 느릿하게 휘어진 공간, 너울지는 붉은 극광 아래에서. 초와 초가 도해된 이 정물화 속에서.

         

         

        -피잉—.

         

         

         사선 감지가 번뜩였다.

         

         

        -피이이이잉—!!

         

         

         이반은 재빨리 고개를 틀어, 사선감지에 걸린 궤적을 향해 손을 뻗었다. 투웅, 묵직한 감각과 함께 무언가가 손에 들렸다.

         

         크라실로프 제식 군용 장검이다.

         

         

         “드미트리….”

         

         

         작은 불출기호가 음각되어 있는. 드미트리 체르카토프 소령. 마지막 계급 부분 기호는 칼로 긁어낸 흔적이 있었다. 중령을 뜻하는 반점 하나가 억지로 그려져 있었다.

         

         저 아래, 그가 딛고 선 첨탑을 기준으로 저 먼 아래에서, 이 멈춘 시간을 넘어 웃음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절멸부대는 홀로 선 상황에서도 군단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훈련이 곧 모두를 대표하고 있으니.

         

         이반은 고개를 들었다.

         

         수십 가닥의 사선감지가 그의 몸에 꽂혔다. 피잉, 피이잉, 어떤 것은 너무 크고, 너무 작고, 너무 빠르고, 너무 느릿했지만. 모두 방향은 하나로.

         

         그의 몸을 향해 내려 꽂히는 수십 개의 병장기들이. 그 안에 담긴 뜻과 의지가 읽힌다.

         

         도끼창, 장검, 세검, 단검과 단창까지.

         

         

        -퍼버버버벅—!!

         

         

         수많은 무구들이 그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처박혔다. 눈이 풀썩, 하고 일었다. 부서진 첨탑 위에서 돌가루가 비산했다.

         

         그 가운데에 선 이반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언젠가 이 풍광을 고향이라 불렀던 적이 있었지. 기억하느냐, 욘.”

         

         

         낮은 목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한쪽 눈과 한쪽 팔을 칠용장에게 잃고도, 여전히 엘프 최강을 자부하는 한 검사의 목소리가.

         

         

         “그때 나는 네게 이 의념을 추억이라 명명하겠노라 말한 바 있었다.”

         

         

         눈 내리는 침엽수림의 겨울, 수많은 무구가 박힌 전장에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활용하여, 기억하는 모든 기술을 복제하며 투쟁하는 그 시절의 의념이 곧, 그의 삶이 녹아든 인생 전반의 추억이니까.

         

         그러니.

         

         

         “어떤 필멸자도 영원히 살 수는 없지만. 추억은. 네가 애도하는 모든 이들은 곧 영원을 함께하리라. 그러니—.”

         

         

         영원을 베어라.

         

         검사는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장검을 투척했다.

         

         피잉, 이제껏 없을 정도로 맹렬하게 사선 감지가 경고를 외쳤다.

         

         그러나 사선 감지가 발달한 이상, 초인에게 투사 무기는 모두 무용지물이다. 아무리 강렬한 예감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피하고, 튕기고, 붙들 수 있으니.

         

         

        -콰악—!!

         

         

         날아드는 장검이 느릿하게 보인다. 이반의 왼손이 장검의 긴 검신을 쓸고, 마침내 검파에 멈춰, 우득. 붙들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그대로 흘려내, 그 힘의 방향을 곧장 이어가 신성력을 쏟아 부었다.

         

         에델플라트의 일격에 자신의 힘을 싣고, 무예가 계승되어 세대를 이어가듯이 곧장.

         

         

        -쩌어어어엉—!!

         

         

         멈춘 시간 속에서, 이반은 검을 휘두르고, 도끼를 내려치고, 창을 꽂아 넣고, 단검을 박아 넣으며 달려들었다.

         

         

        *

         

         

         “거기서 오른쪽으로 1.2mm. 그리고 75도 방향으로 3mm. 그렇게 움직여라.”

         

         

         엘피헤라는 식은땀을 흘리며 마력을 흘렸다. 그녀의 귓가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쿠우우웅…. 마일스톤이 대지를 울리며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밖으로 아득하게, 고함치며 싸우는 동료들의 외침이 들렸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수많은 마물들을 막아내면서도, 엘피헤라에겐 단 한 마리도 도달하지 못하도록.

         

         오스왈드의 비명이 들렸다. 괴수가 그의 몸을 덮친 듯 하다. 그 위로 타앙, 날카로운 총성이 들렸다. 룬디스가 달려와 총을 쏘고 어깨로 괴수를 밀어내고 있었다.

         

         루시아는 사방을 뛰어다니며 괴수들의 목덜미에 단검을 쑤셔박고 다시 뽑아낸다. 마물의 피를 빨아 마시며 두 눈을 붉게 빛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엘피헤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그들 모두를 하늘 위에서 내려보고 있었다.

         

         시야가 넓어진다. 온몸이 부서지면서도 싸우는 이반의 등이 보였다.

         

         다시 시야가 넓어진다. 수많은 엘프들이 멍하니 오로라를, 또는 자라난 거대한 나무를 올려보고 있다.

         

         다시 시야가 넓어진다. 칼리온이 한 눈에 내려보인다.

         

         열두 개의 마일스톤에 거미줄처럼 이어진 마력의… 아니. 천기의 흐름이 보인다.

         

         다시 시야가 넓어진다.

         

         바다 아래 가라앉은 대지. 옛 칼리온 대륙의 흔적이 보인다….

         

         검은 우주와 새파란 대양이 대비를 이루고, 태양이 반구를 돌아 다시 터오르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손 위에, 아버지의 따듯한 손이 겹쳐진다.

         

         

         “미안하구나. 엘피헤라.”

         “예…?”

         “네가 나의 마지막 퍼즐이었다. 내 마지막 기물이었다. 이 놀이판 위에서 마침내 손아귀를 바라볼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 나는 너를 이용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옅어진다. 그 답지 않아서, 엘피헤라는 문득 서글퍼졌다.

         

         

         “나를 용서하지 말거라. 이제 너의 삶을 살아라. 무엇을 이루든, 너는 해낼 수 있는 아이다. 그리고 조금의 미련을 담아 말하자면….”

         

         

         아버지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랑했다. 내 딸.”

         

         

         그녀의 손을 감싸쥔 온기가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흩었다. 쓰다듬는 것처럼.

         

         엘피헤라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 아버지…! 아, 아니… 아빠…!”

         “만년간 겨울이 계속되었지만.”

         

         

         이제 베올그린의 목소리는 더 이상 엘피헤라를 향하지 않았다. 그는 저 하늘 어딘가를 향해 선언하고 있었다.

         

         

         “해가 뜨고, 지고. 달이 뜨고 지며, 비와 바람, 구름이 일고 흩어지듯. 이 세상이 저 먼 태양을 돌아 한 해. 그리고 한 해.”

         

         

         그러니 어떤 계절도 영원할 수 없는 법이라.

         

         

         “겨울의 만년이 지났다면, 이제 봄이 도래하며.”

         

         

         새로 올 계절의 기한이라면 다시금 만년이 되리오.

         

         또한, 그 계절의 이름을 붙이자면.

         

         

         “사람의 봄이라.”

         

         

         신의 겨울이 끝난다. 모든 놀이판이 쓰러졌다. 신이 지상에 추락해 흩어진 파편을 흡수하고, 한 손에 들어 휘저어서. 이제 이 세상과 신들의 세상을 구분 짓는다.

         

         오직 하나.

         

         겨울을 죽이기 위하여.

         

         

        -철컥.

         

         

         엘피헤라의 손이 마지막 회로를 건드리자—

         

         

        *

         

         

         눈이 내리는 이드란힐에서, 한 엘프가 문득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새하얀 눈송이가 그의 손끝에 톡, 떨어졌다.

         

         잠시 후에도 녹지 않는 눈을 바라보며, 엘프는 흐릿한 눈가를 꾹 눌러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차갑지 않고, 녹지도 않던 눈송이는 어느새, 그의 손등 위에서 꽃잎이 되어 하늘거리고 있었다.

         

         

         “꽃잎…?”

         

         

         저 멀리, 동녘이 터오르기 시작했다.

         

         엘프는 멍하니 꽃비 내리는 이드란힐의 동녘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EP30. 겨울을 죽이기 위하여.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분량 좀 오바했는데, 어쨌건 이번 주 안에 끝내고 싶어서 걍 쑤셔 박았어요!
    휴!
    주말엔 전여친(현와이프)와 피크닉 갑니다! 후일담과 못 다한 이야기들은 다음주에!
    *
    다음화 보기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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