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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1

    뚜방뚜방.

    흐릿한 시야 속에서 진흙 위를 걸어 다니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한 세계에서 나만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 이상한 광경 속에서, 나는 이것이 명백히 꿈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검게 물든 진흙은 마치 바닥을 빠른 속도로 흐르는 것처럼 물결 무늬를 그려냈고, 그 위에는 진흙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침대가 하나 박혀있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진흙 위에 툭 하고 튀어나온 침대 하나.

    진흙에 잠겨 들어가고 있는 침대는 굉장히 익숙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커다랗고 푹신해 보이는 침대.

    푸른 소녀의 시체가 누워있던 침대였다.

    오늘 푸른 소녀와 그 침대를 보관하기 위한 과자집을 만들어줘서, 푸른 소녀의 꿈을 보는 걸까?

    나는 멈춘 시간 속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진흙 위를 딛고서, 침대까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섬세한 장식이 조각된 고풍스러운 침대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시간의 단면 속에서 ‘어느 순간의 대화’를 잘라 온 것처럼 느껴졌다.

    약간 장난기가 섞인 과장된 억양으로 말하는 푸른 소녀의 목소리였다.

    “인간은 신을 죽였다. 그리고 다시 필요로 했다. 신은 잔혹했지만, 인간을 지켜주었다.”

    “여기서 ‘잔혹하다.’가 문제에요. 신은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어쩌면 ‘이해’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인간이 신이 되어야만 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푸른 소녀의 침대는 검게 물들어 진흙처럼 무너져 내렸다.

    ‘인간이 신이 되어야 한다.’ 

    이 이야기가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침대가 무너지자, 저 멀리서 또 다른 물건이 나타났다.

    이번에도 익숙한 생김새를 가진 물건이었다.

    강하게 움켜쥔 오른 주먹을 하늘에 뻗어 올리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동상.

    조금 다른 점들이 보였지만 남자의 모습은 ‘눈동자 교’의 교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동상에서 또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광기에 젖지 않은 차분한 교주의 목소리였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마도서가 된 인간도 모두 미쳐버렸는데, 신이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우리는 그저 고행을 쌓아나가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자 교주의 동상은 침대처럼 진흙으로 변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저 멀리에 또다시 무언가가 떠올랐다.

    한없이 진흙과 닮은 티 하나 없이 완벽한 구체.

    <불변하는 검은 공>

    검은 공에 다가서자,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처럼 작은 목소리였다.

    “신을 죽인 마도서가 없어져야, 신이 돌아올 것이다.”

    “내 염원이 신에게 닿기를.”

    그 말소리가 끝나자, 흐릿한 시야가 점점 불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꿈이 끝나버렸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정적과 따뜻하게 나를 감싸 안는 침대.

    꿈에서 깨어나자, 고요한 격리실이 나를 반겨주었다.

    아직 아침은 오지 않았는지 세희 연구소는 고요했고, 미니 사신들이 내 몸 위에 잔뜩 달라붙어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리맡에 새하얀 손목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맛있는 코코넛 향을 풍기는 손목.

    그리고 그 손목 뒤편으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귀 사신이 있었다.

    마치 언제 그 손목을 먹는지 기대하는 눈빛으로 침대에 턱을 올리고 빤히 바라보는 아귀 사신.

    ‘먹으라고?’

    내가 손목을 들어 올리고 의지를 보내자, 아귀 사신은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었다.

    아침마다 쥐를 물어오는 고양이 같은 건가? 

    색만 제외하면 내 손목과 똑같이 생긴 젤리 손목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역시 맛있어.

    왠지 내가 나 자신을 뜯어먹는 기분이라 조금 재미있는 느낌이었다. 

    아귀 사신의 손목을 맛있게 뜯어먹다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미니 사신들의 손목도 맛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입맛을 다시며 황금 사신의 손목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황금 사신이 갑자기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깬 황금 사신은 갑자기 느낀 불길한 기분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찾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내 품속으로 들어와 잠들었다.

    나는 내 손바닥 위에 잠든 황금 사신의 미니 손바닥을 잘 펴서 올려두고 쓰다듬었다.

    ‘먹을까 말까.’

    그리고 굉장히 어려운 고민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러고 보니, 황금 사신도 굉장히 맛있는 향기가 난단 말이지….

    ***

    질감을 가진 어둠을 뚫고 들어가서 볼 수 있는 신비로운 도시. 

    공원에 뚫린 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오브젝트가 만든 지하 도시.

    연구원은 여러 문명이 어지럽게 뒤섞인 도시를 천천히 살펴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지는 않았지만, 오브젝트와 관련되어 간혹 나타나는 유적과 비슷한 문화를 품고 있어서, 연구할 가치가 충분해 보였다.

    물론 오브젝트 협회 보좌관 ‘황금충’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직원들의 출입을 막고 도시에서 황금을 잔뜩 실어 나르는 도중에는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추던 황금충이었지만, 지금은 몇 주째 현장에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값어치가 나가는 황금 같은 것들을 충분히 수거했다고 생각했는지, 협회 직원들의 출입을 허가했다.

    현재는 그저 그의 사병 몇 명만이 남아, 눈을 부라리며 다른 값나가는 뭔가가 있는지 감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협회 소속 연구원은 이 도시 깊숙한 곳에 놓인 방을 둘러보며,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분명 협회에서 사람들이 오기 전에 누군가 다녀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먼지가 쌓이고 치워진 모양새를 봐도 그러했고, 벽면에 그림이나 거울을 달았던 흔적들을 봐도 그랬다.

    침대처럼 커다란 무언가도 옮겨진 것을 볼 때, 조직적으로 많은 사람이 몰래 들어왔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물건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공간은 텅 비어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문자로 쓰인 책이나 유리병처럼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물건들뿐이었다.

    그래도 전혀 새로운 언어체계를 가진 책들을 다수 얻었으니, 나름대로 수확은 있다고 해야겠지.

    협회 소속 연구원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을 지상을 향해 부지런히 옮겼다.

    ***

    문신투성이 여자는 공방에 앉아, 하늘을 뚫을 것 같이 우뚝 솟은 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에도 만들어지기 시작한 제임스 타워였다.

    송파구 외곽의 저렴한 토지들을 잔뜩 매입해서 건설 중인 제임스 타워는 버려진 송파구에 변화의 바람을 불러왔다.

    제임스 타워가 지어지고 있어서 그런지, 황량했던 주택가도 입주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여동생은 싼값에 산 주택의 가격이 많이 올랐다면서 상당히 기뻐했다.

    문신투성이 여자 입장에서는 주변 상점가가 활성화되기 시작해서, 조금 편해졌다는 느낌뿐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자의 입장에서 ‘제임스 타워’보다 더욱더 직접적이고 큰 변화가 있었다.

    약초를 말리고 빻는 것 정도만 가능했던 그녀의 공방이 좀 더 ‘연금술사의 공방’ 다워졌다.

    공원에 발생한 ‘죽은 연금술사의 공방’에서 가져온 수많은 도구 덕분이었다.

    “이것도 먹어볼래?”

    여동생은 공방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서, 감자칩을 황금색 오브젝트에게 작게 쪼개서 먹이고 있었다.

    옴뇸뇸.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감자칩을 먹는 황금 사신.

    그리고 그 황금 사신을 보며 즐거워하는 여동생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공방에서 당장 내쫓아야 정상이었지만, 여자는 여동생이 하는 짓을 그냥 두었다.

    그 이유는 지금 여자가 연구하고 있는 주제가 ‘황금 사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흥미를 끌지 못하면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황금 사신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 연구의 시작은 ‘죽은 연금술사의 공방’에서 얻어낸 한 그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와 회색 사신이 세밀하게 그려진 그림이었다.

    회색 사신과 꼭 닮은 푸른 소녀의 모습을 보자, 이제까지 품었던 온갖 의문이 풀렸다.

    푸른 소녀의 존재는 연금술과 인연이 없던 세계에 갑자기 등장한 수호자에 대한 설명이 되었다.

    아마 회색 사신은 생전 대단한 연금술사였던 푸른 소녀의 회심의 역작이었던 것이겠지.

    그야말로 회색 사신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것도, 공방에서 가져온 수많은 도구도 모두 ‘푸른 소녀’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푸른 소녀를 향한 보답의 의미로 시작한 연구였다.

    회색 사신에게서 파생된 황금 사신을 연구해서, 회색 사신을 위한 무기나 방어구 혹은 비약을 만들어 주기 위한 연구였다.

    보답만을 위해 시작한 황금 사신 연구였지만, 연구하면 할수록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이 잔뜩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황금 사신은 마도서인 것이 분명하면서도, 연금술적인 조치가 취해진 것 같다던지.

    유령화나 시간 가속 같은 희귀한 능력을 다수 가지고 있다는 점이라던지.

    황금 사신에게는 이러저러한 흥미로운 점들이 많았지만,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에너지’였다.

    황금 사신의 심장에서 빛을 뿜어내는 에너지는 그 양이 그렇게 많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위력적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황금 사신은 그 에너지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했다.

    기껏해야, 태양 빛을 받아서 빔을 쏘아내는 정도에 그쳤다.

    그 점에 착안해서 문신투성이 여자는 황금 사신만을 위한 무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름하여, 황금 사신 빛의 검!

    “자, 위력 테스트를 시작하자.”

    황금 사신에게 손잡이만 있는 검을 넘겨주자, 황금 사신은 마치 재밌는 장난감을 받은 것 같은 표정으로 즐거워했다.

    “그럼, 준비!”

    여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금 사신의 손에 들린 손잡이에서는 황금색 불꽃으로 만들어진 검신이 만들어졌다.

    황금 사신은 해맑은 표정을 한 채, 지글지글 타오르는 광선검을 머리 높이 들어 올렸다.

    “시작!”

    그리고 ‘시작!’ 소리와 함께, 황금 사신은 검을 아래로 내리찍었다.

    그러자 검신이 휘두르는 것에 맞춰서 길쭉하게 늘어나더니, 목표로 삼은 철근을 싹둑 잘라버렸다.

    현재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튼튼한 ‘대 오브젝트’ 합금으로 만든 철근이었지만, 광선검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매끈하게 잘라내었다.

    철근이 잘리는 것을 보자, 황금 사신은 해맑게 웃으면서 폴짝폴짝 뛰었다.

    몇 달이나 걸려서 만들어 낸 무기의 최종 테스트가 성공했다.

    문신투성이 여자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황금 사신용으로 만들어진 작은 무기들이 5자루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회색 사신용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검의 손잡이도 놓여있었다.

    ‘이 정도면 보답이 되겠지.’

    여자는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무기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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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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