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후훗. 소중히 사용하겠습니다.”
시리안은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양손에는 2개의 차원 줄기가 들려 있었고, 방금 전 두 줄기를 서로 연결하는 훈련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느리고 어색하지만, 녀석은 분명하게 차원을 넘을 수 있게 되었다.
“혹시 부족하면 더 말해.”
“지금은 충분합니다.”
딱히 아깝진 않았다.
내가 없거나 비상시에 녀석이라면 유용하게 잘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필요할 떄마다 포탈을 열어주는 거 조금 귀찮았는데, 이걸로 조금 편해질 수 있겠지.
이걸로 자원 문제도 해결.
대충 보고는 전부 들었다.
다음 주제로 넘어가자.
“시리안. 레이븐이라는 마법사를 데려왔는데-”
이다음은 대충 레이븐에 대해 설명했다.
어떻게 데려왔고.
어떻게 머물게 되었고.
여기서 무얼 하게 되었는지.
혹시 모르니 잘 감시하고 지원해줬으면 한다는 내 뜻까지 내비쳤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마법을 배울 엘프를 모집하고 레이븐 마법사를 지원하겠습니다. 뛰어난 마법사라고 하니, 같은 마법사로서 저도 한 번 직접 보고 판단하고요. 가능하면 비서 형태로 엘프를 한 명 붙일까 합니다.”
“그건 알아서 해.”
이걸로 레이븐 문제는 해결.
만능 시리안이 나섰으니, 자잘한 건 내가 챙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 그럼 바로 다음 안건.
“그리고 나는 아칸벨리를 공격할 생각이야.”
“전쟁을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되겠냐? 일단 들어 봐.”
아칸벨리 침략.
얻을 게 많은 싸움이다.
드워프 시간을 벌 수 있고, 값비싸고 귀한 동력원과 비공정 설계도를 얻을 수 있고, 이동 문제도 샤엘라가 해결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런 상황을 모두 설명했다.
“하지만… 혼자선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아. 샤엘라가 위험하면 바로 돌려준다고 했었거든.”
“여신님의 힘은 저도 믿지만… 그래도 제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이참에 친위대를 데려가심이 어떻습니까.”
“친위대?”
친위대라.
마침 잘 나왔다.
아무래도 물어볼 참이었으니.
“시리안.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예. 말씀해주십시오.”
“네가 만든 친위대는 어떻게 훈련했길래 그리 강해진 거냐?”
내가 궁금한 것은 친위대의 강함.
이번 출정에서 다크 엘프들은 상상 이상의 강함을 보여주었다.
평범한 방법으로 강해진 것 같진 않았다.
그럼 어떻게 그리 빨리 강해진 걸까.
“간단합니다. 다른 저의 능력으로 시련 기억을 일깨웠기 때문이죠.”
“시련 기억을 일깨웠다고? 너 말고 다른 녀석들도 가능한 거였냐?”
“시련을 겪은 엘프라면 가능합니다. 다른 저는 그 시련 데이터를 저장하고 있었고, 제 합일화 능력으로 체험시켜줄 수 있었습니다.”
“체험?”
“예. 이들은 모두 동의 하에 시련 과거를 직접 겪고 왔습니다.”
“혹시 괜찮은 거냐? 시련 과거를 겪는 건 힘들 것 같은데.”
“신목님을 위해서라면 아무렇지 않습니다.”
“아니… 나 때문에 그런 식으로 괴로움을 감수할 필요 없는데. 왜 이런 짓을 했냐.”
솔직히 조금 놀랐다.
시리안은 그렇다 쳐도, 굳이 그런 고통스러운 기억을 체험해야만 했을까. 패배와 죽음, 절망뿐이었던 기억들일 텐데, 그렇게까지 해서 강해지길 바란 게 아니었는데.
이에 시리안은 차분하게 설득했다.
“신목님. 친위대는 모두 가족을 잃어 고아로 자란 이들입니다.”
“응?”
“시련 해방 이후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고, 어떤 이는 굶어 죽으려고도 했습니다.”
“그건 몰랐는데….”
“그때의 신목님은 바쁘셨으니까요. 어쨌든 그들에게 유일한 구원의 존재는 신목님 뿐입니다. 삶의 의욕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매일 신목님을 보고 있었으니까요.”
“……….”
“신목님. 그들에겐 강해져서 신목님을 모시는 것만이 구원이자 축복입니다. 부디, 친위대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마음이 무거워졌다.
과연 시리안의 선택이 잘못된 걸까?
나는 답할 수 없었다.
이들의 고충까진 제대로 몰랐으니까.
다크 엘프는 아픈 녀석들이 많다. 몸보다는 마음이 병든 이들이다. 시리안이 알게 모르고 그들을 보살피고 있었고, 이런 식으로나마 삶의 동기를 부여한 것이었다.
“혹시 이런 녀석들이 더 있나?”
“스물 정도 더 있습니다만, 변화한 왕국과 동포의 보살핌 덕에 여섯은 일상을 어느 정도 되찾았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애석하게도 그들은 웃고 있지 못합니다. 전쟁의 환각 속에 시달리고 있죠. 그들은 왕궁 수호대로 만들까 생각 중입니다.”
“얘기하지 그랬냐.”
“바쁜 와중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 당시엔 신목님은 폐기장에 집중하고 계셨고요.”
아… 내가 썩을 놈이었네.
에라. 왜 그랬냐. 멍청한 나야.
후훗.
“걱정 마세요. 지금 그들도 신목님을 모실 수 있다는 것에 매일 알아서 훈련할 정도로 큰 동기를 얻었고, 적절히 휴식을 주어 일상에도 모자람 없게 챙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겪은 만큼 더욱 강하게 피어날 테죠.”
“그러냐….”
“그러니 약조해주시지요. 부디, 친위대를 데리고 다녀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들은 다시 어둡게 변할지도 모릅니다.”
“……….”
낙장불입이라고 할까.
뭔가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말을 들어버리면 거부할 수가 없잖아.
하아.
“그래. 네 뜻대로 해라. 해.”
“후후후. 감사합니다.”
결국, 시리안에게 설득당했다.
*
왕궁 알현실.
“신목님을 위하여!!”
척!
10명의 다크 엘프가 무릎을 꿇었다.
이들은 시리안이 비밀리에 개설한 친위대로, 시련에서 가족을 잃고 방황하다가 친위대로 새로 태어난 불쌍한 존재들이다.
나는 이들을 받아들일 생각이다.
시리안의 간곡한 설득을 떠나서 이들은 정말 나만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앞으로 곁에 자주 머무를 녀석들이니, 이렇게 불러서라도 얼굴은 알아놓을 필요가 있다.
“어떻습니까. 신목님.”
멋들어진 의자에 나를 앉힌 시리안이 친위대를 바라보며 물었다.
녀석의 의도를 바로 이해했다.
평가를 내려달라는 거다.
그리고 지금의 내 평가는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될 테고.
[너무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부담스러워하시면 이들은 매우 슬퍼할 겁니다.]
시리안은 내게 몰래 전했다.
부담 가지지 말란다.
네가 더 부담스럽다고….
뭐, 솔직히 말하자.
딱히 깎을 건 없거든.
“다들 멋지구나.“
10명의 친위대.
이들은 그냥 기세가 다르다.
단순히 육체적인 능력을 떠나서 산전수전 겪고 수많은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듯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시리안에 비해 모자라나, 강해지기 위한 필사의 각오가 서려 있다.
시련은 총 몇 번 진행됐었을까.
아마 최소 수백 수천 번일 터.
즉, 이들은 수백 수천 번 가족을 잃고 수많은 유형의 등반자와 싸우며 죽음과 전투를 반복했다. 정말 시리안처럼 전부 체험한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의 울분과 증오.
그 과오를 막기 위한 충성.
이들은 약할 수가 없다.
정신적으로 그 누구보다 강할 것이고, 물리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질 것이다. 손에서 검을 놓지 않을 테니까.
정말이지.
“터무니없을 정도야.”
내가 다 부담스러울 정도.
이들은 죽음의 공포를 가볍게 초월하고 더 강해지기 위한 길을 걷고 있다.
궁금하다.
얼마나 강해질지.
“나는 너희의 미래가 기대된다. 얼마나 강해질지 나도 모르겠거든.”
“영광입니다!”
한 여성 엘프가 답했다.
친위대의 대표 같았다.
이들을 보며 생각했다.
‘나중에 지배자 전력도 하나둘 나오려나….’
가능성이 보인다.
지금도 비약을 먹으면 폐기장 신목의 엘프와 동급의 힘을 내는 놈들이다. 만약 이들이 지배자급이 될 수 있다면.
‘저놈들이 더 성장하면 재밌어지겠는데?’
문득 샤엘라의 말이 떠올랐다.
시리안과 친위대가 아칸벨리와 교전할 때 분명 그리 평가했었다.
말 그대로다.
재밌어질 거다.
두려울 게 별로 없을 테니까.
자신보다 강한 자를 찾기 어려울 테니까.
“신목님. 이들을 받아주시겠습니까?”
가만 살펴보고 있으려니, 합의한 대로 시리안이 내게 물었다.
저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그래. 너희는 내 친위대다. 앞으로 너흰 나를 보좌하게 될 거야.”
녀석들과 함께하는 것.
그것이 녀석들의 삶의 동력이다.
“영광입니다!!”
“언제든 대기하겠습니다!!”
“매일매일 수련에 매진하겠나이다!!”
“빠르게 성장하여 신목님이 저희를 돌보는 것이 아닌, 저희가 신목님을 보필할 수 있도록 성장하겠습니다.”
다들 의지가 매우 높다.
내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시련에서 봤을 때만 해도 이렇게 과분한 충성을 얻을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다.
시리안은 내 친위대라고 했지만, 계속 달고 다니긴 힘든 노릇이다. 이번만 해도 다 함께 이동하는 건 샤엘라의 부담만 커질 터.
고로.
“너희의 특별한 거처를 주마.”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
사박~
“얽힌 실 줄기가 풀리는 기분.”
왕궁 밖을 나왔다.
차근차근 일이 해결되고 있다.
폐기장에선 꽉 막혀 살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일이 별로 없었다.
“친위대 문제에 당황했지만….”
그 문제도 원만히 해결했다.
매우 특별한 거처를 줬거든.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다.
아칸벨리를 마무리 짓는 것.
이 상쾌함을 유지하려면, 당장 아칸벨리 문제부터 잘 해결해야겠지.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을까.
잠시 산책하며 고민했다.
사박~
대충 떠오르는 방법은 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명확하지 않을 뿐.
차근차근 머리를 정리하면서 슬쩍 왕국 엘프들을 살폈다.
훈련하는 엘프.
농사짓는 엘프.
건물 짓는 엘프.
공부하고 연구하는 엘프.
무구나 직물을 생산하는 엘프.
하이 엘프들을 가르치는 교사 엘프.
딱히 하는 일의 큰 틀을 달라지지 않았지만, 드워프 기술을 도입하면서 그 효율과 질이 예전과 크게 달라졌다.
최신식 운동 기구.
온도에 따른 스프링쿨러 가동.
안전 설비와 건설 재료 컷팅기.
드워프가 정리한 전자 태블릿 논문.
드워프 기술로 세운 공장의 물품 양산.
3D 투영 기술과 언제든 다시 재생할 수 있는 형식의 교과서.
확실히 드워프 기술이 좋긴 좋다.
다크레아 삶의 질이 확 높아졌으니까.
지금도 이럴진대, 드워프가 본격적으로 다크레아에 이주하고 기술을 공유하면 더 미친 문명의 도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꼭 드워프 기술만 발전한 건 아니다.
다크레아도 고유한 엘프 기술이 있다.
이른바 착침(鑿鍼) 기술.
무언가를 뚫는 침이라는 뜻이다.
엘프들 훈련에 혁명을 가져온 수련 방식으로 약방에서 제조한 신체 강화 포션과 이얀의 침술을 적절히 활용해 신체를 강화하고 수련 효율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기술이다.
물론, 이런 착침 약방은 별로 없다.
침술을 쓸 줄 아는 인재가 매우 적다.
워낙 어려운 기술이고 절대적으로 공급이 부족한 상황. 하지만 보급이 잘 된다면, 왕국 전력은 크게 증강되겠지.
이건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괜스레 보는 게 뿌듯하네.’
내 아이가 잘 크면 기분 좋은 법.
이것도 같은 틀에 속한다. 다크레아가 발전하면 내 기분이 좋다.
더 무럭무럭 자라길.
자박자박.
기분 좋게 산책했다.
그러면 번뜩 떠오른다.
“그래. 그렇게 침입하면 되겠군.”
*
“준비됐어.”
“벌써?”
나는 샤엘라에게 당당히 선언했다.
모든 준비를 끝마쳤으니, 이제 날 101층에 올려달라고.
아칸벨리는 별로 좋은 세력도 아니다.
드워프 왕국 침략한 것처럼 자신들을 위해 남을 짓밟는 놈들이니까. 다행이라면 작은 신생 세력이라는 것 정도.
이제 그들과 마주할 시간이다.
나는 모든 준비가 되었다.
허나.
“좋아. 그럼 일로와서 고개를 숙여봐.”
“응?”
샤엘라는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우선 나를 가까이 오게 한 뒤.
툭.
쓰담~
오랜만에 머릴 쓰다듬었다.
이미 적응되서 그런지, 거부감은 없다. 손길을 느끼며 의문을 표했다.
“갑자기 뭐 하려고?”
“후후. 잠자코 받아들여.”
파아아!~
황금빛이 퍼진다.
내 주변을 겉돌기 시작한다.
마치 옛날 카르델피온을 만나러 가기 전 내게 격을 씌운 것처럼. 녀석의 신성과 함께 온전한 격이 내게 파고든다.
이 또한 거부하지 않았다.
도움이 됐으면 됐지, 방해될 힘이 아니다.
“좋아. 완전히 날 신뢰하는 모습.”
“…굳이 그런 말을 입 밖으로 해야겠냐? 애초부터 거부한 적도 없거든?”
“네가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좋으니까.”
“……….”
“오랜만에 보는 귀여운 무찬이네.”
“이상한 소리 말고 빨리 해.”
“응. 끝났어~”
스륵.
녀석이 손을 치웠다.
일순간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와 별개로 충만한 맛이 느껴진다.
잠깐, 맛?….
무슨 맛이지.
따뜻하고 풍요로운 맛?
이럴 수가. 아무리 감각이 강화되었다지만, 신성에서 맛을 느낄 수 있게 된 건가.
샤엘라의 신성은 신비로운 맛이다.
그리고 지금은 따뜻하고 풍요롭다.
하지만 때에 따라 또 달라질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느껴진다.
달콤하게 느껴지는 맛이다.
이걸 어찌 표현하리.
“샤엘라. 너는 시원하게 녹아내리는 맛이야.”
“뭣?… 가, 갑자기 뭐라는 거야!?”
“그냥 네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어.”
“히에에엑!!?”
녀석이 질겁한 표정으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