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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2

       *

         

         

         이반은 매일 밤 악몽을 꾼다. 간혹 꿈이 없는 날은 있었어도, 악몽이 아닌 날은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30년이다.

         

         경험에 따라 악몽의 주체는 매번 달라지곤 했다. 어린 시절에 꾸었던 악몽이라면, 이 미개한 세계에서 초라하게 늙어 죽는 꿈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추위에 얼고, 굶주리고, 고향의 어떤 문물도 겪지 못하며 일생을 마쳐, 비루한 농노로 쓰러지는 것.

         

         초창기 악몽의 형태가 그러했다면, 군역 도중엔 달랐다.

         

         죽어가는 전우들, 불타오르는 프리첸카야, 깊은 침엽수림 속에서 붉은 눈을 빛내며 칼날을 들이미는 마족들.

         

         꺾여나간 크라실로프의 군기 아래에서, 황폐하게 불타오르는 이 나라의 토대 위에서, 불탄 시체를 붙잡고 헤매는 꿈을 꾸곤 했다.

         

         그리고 그의 긴 군역이 끝났을 때. 그의 악몽은 한 장면으로 고착되었다.

         

         

         “중령님은 오래 사세요. 최대한 늦게 오세요. 빨리 오면 하극상 할 거야.”

         

         

         목덜미를 덥히던 뜨거운 피.

         

         점점 가벼워지는, 등 뒤에 업힌 여인의 몸.

         

         거센 비 속에서, 차갑게 식은 긴 머리칼이 그의 뺨 언저리에 달라붙고.

         

         마지막 숨결이 서늘하게 귓가에 흩어졌다.

         

         

         “제발.”

         

         

         이반은 담당 사제의 소매를 붙들고 허물어졌다. 힐링 포션을 아무리 부어도 붙지 않는 상처를, 제발 치료해 달라고.

         

         사제는 그의 등에 업혀 있던 여인의 뜬 눈을 감겨주고, 그 위에서 성호를 그었다.

         

         여전히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다.

         

         매일 밤, 그 시간의 감정은 낡은 흉터 속에서 꿈틀거리며 심장을 옥죄어 왔으니.

         

         

         “세르게이, 니콜라이, 폴리나, 안나, 발레리아, 알리냐, 레오니드, 비살리, 사샤, 아나톨리, 율리야, 빅토리아, 크세리냐, 옐치나, 로만, 아르템…”

         

         

         아비디타스의 면전에서 스러져간 모든 이들의 얼굴을, 가족을, 성격과 목소리를, 취미를, 그리고 좋아했던 것들을 기억한다.

         

         매일 밤마다, 그는 죽어간 모든 전우들을 곱씹으며 허물어졌다.

         

         죽은 이들을 위해 바치는 헌화로, 전쟁 고아들을 거두어 먹여 살리고.

         

         그 대신 죽은 이들에 대한 사죄를 담아, 소파에 기대어 잠시 졸며 최소한의 수면을 보충할 때에도.

         

         

         “중령님.”

         

         

         어두운 밤,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떴을 때 언제나 보이는 이들의 얼굴은.

         

         밤의 창에 비쳐 보이는 실루엣, 일렁이는 커튼을 반사하는 거울 속 면면들은.

         

         

         “오래 사세요.”

         

         

         그를 원망하고 있지 않아서.

         

         그에게 언제나 웃으며,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어서.

         

         

         “체레노비카.”

         

         

         그녀는 장미를 좋아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김선우의 작은 용기 덕분이었다. 타우르스에게 복강이 찢어져도 웃던 그 강인한 여인은, 김선우에게 장미를 받고 처음 눈물을 보였으니까.

         

         그러니 이반은 남은 밤, 남은 시간동안 다시 소파에 앉아 도끼를 갈아내며 속삭였다.

         

         

         “세르게이, 니콜라이, 폴리나, 안나….”

         

         

         상처는 치유되어도 흉터는 사라지지 않으니.

         

         사람은 스러져도, 추억은 사라지지 않으니.

         

         모든 의욕을 잃고 저물어도, 이 감정. 그것 하나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

         

         

         “알렉산드르….”

         

         

         명령서에 도장을 찍던 그 청년의 붉은 미소를 기억한다.

         

         

        -스극… 스걱….

         

         

         날에 얹은 먼지가 두 갈래로 갈라질 정도로 예리하게, 숫돌을 멈추지 않고 슥, 슥. 기계적으로 밀어내며 건조하게 속삭였다.

         

         

         “그녀는 장미를 좋아했다.”

         

         

         지금은 아니다.

         

         크라실로프는 내전의 위기에 있으며, 다음 전쟁을 견딜 국체가 남아 있지도 않다. 이 나라의 경제는 극도로 빈약하고, 겨울은 위협적이며, 이제 막 재활을 시작한 상황이었으니.

         

         엘리자베타 왕녀는 힘겨운 투쟁을 하고 있다. 그가 왕세자를 암살하면 곧장 군정이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작 방첩사령부 하나를 손에 쥔 왕녀가 과연 왕국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인가.

         

         다시 한번 내전이 벌어지면 이 나라는 반드시 멸망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죽어간 모든 영웅들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위대한 대왕도, 아낌없이 저물어간 무수한 전우들도. 그것을 바라지 않을 테니.

         

         참는다. 참았다. 인내란 곧 그가 가장 자신 있는 것 중 하나가 아니던가.

         

         슥, 슥. 스그윽. 깊은 밤, 도끼날에 숫돌을 밀며. 이반은 전우들의 이름을 속삭였었다.

         

         그런 시간이 4년여 흘렀다.

         

         때때로 꿈을 꾸지 않는 날은 있었어도, 꾼 꿈이 악몽이 아닌 날은 없었던 세월이.

         

         

       

       

       EP 31. 기억한다.

       

       

       

         

         

         이드란힐에 꽃비가 내린다. 따듯한 미풍과 함께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만년궁을 으스러트리며 자라난 거대한 나무가 천천히 흩어지고 있었다. 마물로 이루어진 거목이 천천히 흩어졌다.

         

         마물의 시체가 조각나며 마력이 되었다. 응축되었던, 뒤틀렸던 마력이 바람결에 흩어지며 꽃잎으로 승화했다.

         

         그 모든 기적들을 조율하며, 엘피헤라는 천천히 웃었다.

         

         

         “네, 아버지. 저도. 저도 사랑해요.”

         

         

         사랑했어요.

         

         따듯한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한차례 헝클였다. 그녀의 새하얀 콧잔등에 꽃잎이 한송이 톡, 떨어져서. 그게 너무 간지러워서.

         

         

         “흐윽….”

         

         

         엘피헤라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말았다.

         

         

        *

         

         

         이반은 빠져나가는 신성력을 느끼고 있었다.

         

         검각과 절멸부대의 생존자들이 던져준 모든 병장기들이 가루가 되어 바스라질 때까지 휘둘렀다. 신의 파편에서 신성을 빨아들이고, 그것을 다시 공세로 환원하며.

         

         그 결과, 그의 눈 앞에서 여왕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활짝 열려 터오르는 동녘을 바라보며, 바들거리는 손을 뻗어 허우적거리며.

         

         

         “신의 그림자가 희미해지는구나. 이제야 비로소 세상이 보인다… 여는….”

         

         

         여왕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마일스톤이 정지했다. 수천 년을 버텨온 신화 속 유물이 마침내 맥동을 멈추었다.

         

         여왕의 몸에서 신성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날개가 펼쳐지듯 그녀의 어깻죽지에서 치솟은 신성력이, 비늘처럼 흩어지며 하늘 저 너머로 흩어지고 있었다.

         

         여왕은 떨리는 손을 바라보았다. 손끝부터 천천히 먼지가 되어 부스러지고 있었다.

         

         

         “여는 그대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반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여왕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뒤를 향해 속삭이고 있었다.

         

         

         “폐하의 희생을 잊지 아니하겠습니다.”

         “여의 천문관이여. 이제… 길일이 보이는가…?”

         “예, 폐하. 온 하늘이 길합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되었다.”

         

         

         이반은 손끝하나 움직이기 어려운 짙은 탈력감 속에서도 고개를 들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그의 곁에, 로브를 입은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바람에 젖혀진 후드 너머로 밀밭처럼 찬란한 금발이 너울거렸다. 그 사이로 삐죽 솟은 귀가 경쾌하게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녹색 눈동자가 그를 내려보았다.

         

         

         “베올그린.”

         “우리의 사냥개. 수고 많았네.”

         “살아… 있었군.”

         “아직은.”

         

         

         베올그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폐하를 원망치 마시게. 신의 그릇을 완성하기 위해 기꺼이 몸을 내어준 분이시네.”

         “원망하지 않는다.”

         

         

         이반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적이 단지 적이라는 이유로 증오한 적 없다. 필요에 따라 투쟁했을 뿐.

         

         그의 말에 여왕이 작게 웃었다.

         

         

         “객이여. 우리 모두가 천문관의 손에 쥐인 꼭두각시였으나, 한바탕 놀음이 끝난 지금….”

         

         

         여왕은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여가 그대를 축복하겠노라. 그대, 우리 민족의 구원자야. 그대는 뭇 군왕, 그 누구의 앞에서도 감히 무릎을 꿇지 말지어다.”

         

         

         그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신의 마지막 자취가 사그라드는 것이 느껴졌다.

         

         

         “…신의 악의 속에서도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영혼이 필요했네. 그 지독한 뒤틀림으로 이성을 잃었어도, 마지막 순간에 사람으로 죽을 수 있는 분이. 이 세계에 그런 영혼은 한 손에 꼽지.”

         

         

         베올그린은 바람결에 흩어지는 여왕의 먼지를 한줌 쥐고, 짧게 경의를 표했다.

         

         그는 이윽고 이드란힐의 저 먼 바다를 향해 먼지를 흩어내고는 말했다.

         

         

         “괜찮다면, 이름을 지을 자격을 양보해 주겠나?”

         “음.”

         “영원의 세나스게오르. 우리 민족의 언어로 만년간 이어지는 겨울이라는 뜻일세.”

         “좋군.”

         “담당하던 관념은 식욕. 폭식의 신이었고.”

         “그랬군.”

         “그리고 축복은, 내가 받아가겠네.”

         

         

         베올그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이반을 바라보았다.

         

         

         “영향이 아주 없을 순 없으되, 적어도 영원하진 않을 걸세.”

         “음.”

         “내 딸을 부탁해도 되겠나. 그 아이도 처치에 공로가 있는 바, 이 애매한 상황에선 영향이 없을 순 없을 테니. 이제 그 아이는 혼자가 아닌가.”

         

         

         누가 끼니를 챙겨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자네가 내 딸을 밥 굶지 않게만 해주게.

         

         베올그린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반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꾹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다.”

         “파트리시아를 도와주게나.”

         “알겠다.”

         “미안하네. 부탁이 많았군. 내가 다하지 못한 것이 있으나, 이제 시간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지 않겠나.”

         “음.”

         

         

         잔잔한 대화가 이어졌다.

         

         이반은 매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베올그린은 거의 사라진 입술을 움직여 따듯하게 웃었다.

         

         

         “정말, 미안하네.”

         “괜찮다.”

         “자네가 해야 할 일들은… 자네가 해온 것보다 어려울 걸세. 내가 더 도와주었어야 마땅하거늘…. 언제나 자네에겐 신세만 지게 되는군. 그 시절부터.”

         “내 일이다.”

         “하하… 하하하… 자네의 일이라? 자네는 다른 세상의 이방인이거늘. 참으로, 많은 이들이 자네에게 빚을 지겠군.”

         

         

         베올그린은 낮게 물었다.

         

         

         “그 누구도 자네의 헌신을 이해하지 못할 걸세.”

         “괜찮다.”

         “자네의 업적은 어떤 명예도 없이 흩어질걸세.”

         “익숙하군.”

         “이 여정의 끝에서, 자네는 결코 편히 눈 감지 못할 걸세.”

         “그렇군.”

         

         

         천문관은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나아겠는가? 그럴 수 있겠나?”

         “해봤다.”

         

         

         이반의 대답에 베올그린은 허탈하게 웃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정말… 고맙네. 이반. 이젠 좀 피곤하군. 더 오래 함께했다면 좋았을 것을. 미안하군.”

         “…편히….”

         

         

         눈을 감고 있던 이반이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편히, 쉬어라.”

         

         

         내 오랜 친구.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사내는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맑은 하늘이 보일 뿐, 부서진 만년궁의 첨탑 위엔 그 혼자 뿐이었다.

         

         천천히 다섯을 셀 동안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던 이반은, 그러나 다시 허리를 펴 일어섰다.

         

         반쯤 부서진, 주인 모를 장검 한 자루를 꾹 움켜쥐고.

         

         

        *

         

         

         마력이 돌아왔다.

         

         만년궁으로 향하던 엘프들은 흩어지는 악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자세를 다잡았다.

         

         열두 개의 학회가 이드란힐로 모이고 있었다. 모든 엘프들은 곧 모두 정치적인 생물이었으므로, 이드란힐에 도착하는 시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백 척의 함선들이 이드란힐 근해의 해역을 빼곡히 채우고,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공중 전함들이 하늘 위를 유영하며.

         

         학회의 인장과 군기를 높게 들고, 다시금. 추밀의원들이 항구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제 신은 없다. 마일스톤이 멈추고 겨울이 끝나 봄이 도래했다.

         

         영원한 번영을 약속하던 마일스톤이 멈췄다는 뜻은 곧.

         

         엘프들은, 이제 서로를 향해 ‘내전’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는 뜻과 같았다.

         

         번영을 저해하는 모든 요인에 강제력이 사라졌으므로.

         

         전쟁 또한 정치의 연장일 따름이라.

         

         다음 왕위, 다시 집결할 추밀원, 그리고 죽어 사라진 이들이 쥐고 있던 수많은 이권들은, 그러한 ‘과격한’ 정치로 얻어내야 하는 것이므로.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혹시 여왕 폐하를 알현할 수 있을까요?”
    “한번 여쭤보지 뭐. 요새 적적하신 모양이더라. 이틀 뒤?”
    “딱 예상대로네요.”
    “나도 죽겠다. 맨날 자기가 언제 죽는 게 가장 길일이냐고 물어보신다니까.”

    EP27. 천문 (2)

    *
    민족 전체를 위해 결단하소서. 윤허하신다면 신이 행하겠나이다.
    그리하라.
    여는 선조들의 유물을 파괴한 폭군으로 기록될 터이나, 여의 백성들은 영원히 칭송 받으리라.

    EP28. 만년의 겨울, (2)

    *
    아버지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랑했다. 내 딸.”

    EP30. 겨울을 죽이기 위하여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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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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