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92


    ​
    ​
    “가만히.”
    ​
    ​
    평소 통통 튀어 오르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은 채 귓속을 파고들었다. 오싹한 기분에 몸을 파르르 떨자 진정하라는 듯 상체를 끌어안은 손이 느릿하게 몸을 토닥거렸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다정한 손길에 긴장이 맥없이 풀려버렸다.
    ​
    ​
    예민하게 반응하기엔 머릿속이 너무 둔하게 굴러갔다. 리안은 전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가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들어 올렸다.
    ​
    ​
    리안은 둔하게 흘러가는 생각의 끝자락을 겨우 붙잡으며 끝내 놓지 못한 생각을 입에 담았다.
    ​
    ​
    “제..스, 나는 정말… 괜찮아.. 괜찮으니… 까..”
    ​
    ​
    하얀 입김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눈이 쏟아지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리안의 나른한 목소리와 섞여 퍼져나갔다.
    ​
    ​
    ‘제스, 좀 더 자기 몸을 소중히 해야지.’
    ​
    ​
    리안이 제스를 밀어낸 것에는 제스를 어린아이로 보는 마음도 있었지만, 진심으로 걱정된 탓도 컸다.
    ​
    ​
    리안에게 이 정도 고통은 딱히 별난 것이 아니었다. 개그 필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평소보다 몇 배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해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
    ​
    칼에 베인 듯 날카로운 통증이 마비된 것처럼 제대로 느껴지지 않아도, 관절이 고장 난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제스의 행동이 자신을 아끼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
    ​
    ‘고작’ 이 정도 고통을 위해 제스가 수치심을 감수해야 하는가?
    ​
    ​
    리안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 탓에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말들은 전부 잔소리뿐이었다. 제스의 눈이 리안의 말이 이어질수록 가늘어졌다.
    ​
    ​
    “그러니까…”
    “나는”
    ​
    ​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리안의 말을 툭 잘라냈다.
    ​
    ​
    “리안을 위해서라면 내 심장도 내줄 수 있어.”
    ​
    ​
    애교가 가득 섞인 ‘쭈인님’이란 말 대신 불린 이름은 묘하게 이질적이면서도 자극적이라 당황스러웠다. 그저 어리게만 보이던 제스가 성숙한 여성의 모습을 보였을 때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 머릿속에 쿵 하고 울려 퍼졌다.
    ​
    ​
    충격에 빠진 리안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
    ​
    어쩐지 깨물렸던 귓바퀴에서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뜨거운 태양의 빛이 눈을 녹이는 것처럼 귓바퀴에서 시작된 열감이 얼어붙은 얼굴을 녹이기 시작했다. 느리게 흘러나오던 숨결이 원래의 속도를 되찾고 무겁던 눈꺼풀이 전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
    ​
    알 수 없는 부끄러움과 긴장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리안은 입술을 몇 번이고 벙긋거리며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지만, 쉽사리 꺼낼 수 없었다.
    ​
    ​
    마왕의 내면을 들여다본 이후부터였는지 아니면 낯선 몸에 들어선 이후부터였는지 알 수 없지만, 어째선지 제스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
    ​
    같은 말도 사람마다 품고 있는 무게가 다르듯, 제스가 뱉어내는 말속에 담긴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 그에 맞는 대답을 쉽게 뱉을 수 없었다.
    ​
    ​
    “왜…?”
    ​
    ​
    몇 번이고 혀를 깨문 끝에 뱉어진 말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그대로 담은 듯 제대로 된 뜻을 담지 못했다. 정리되지 못한 말이 조금씩 열기를 되찾아가는 입술 안쪽에서 이리저리 헤엄친 끝에 형태를 이루어 뱉어졌다.
    ​
    ​
    “나한테 그럴… 가치가 있어?”
    ​
    ​
    자존감이 바닥을 기는 사람이나 뱉을 법한 말이었지만, 리안은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 
    ​
    ​
    아무리 소중한 사람이라고 해도 단호하게 제 심장을 바칠 수 있을까?
    ​
    ​
    제스는 자신과 달랐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뒤틀리거나 죽음에 별 가치를 두지 않는 세계 속에서 살아왔던 그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왔다. 그런 만큼 가진 가치관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
    ​
    ‘죽음’의 가치가 무겁고, ‘죽음’이 곧 ‘절망’과 가까운 이 세계에서 쉽게 죽지 않는 자신이 제스의 죽음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
    ​
    만약 제스가 리안이 일반 사람들처럼 쉽게 죽는 존재로 보고 있었다면 지금의 말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몇 번이고 피투성이가 되었다가 회복되는 리안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
    ​
    과보호에서 벗어나고자 죽을 뻔한 상황에서도 몇 번이고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자주 떠들기도 했었다.
    ​
    ​
    머리가 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제스는 리안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옛 저녁에 눈치챘다. 노아나 아이리스보다 과보호가 적은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
    ​
    ‘도대체 왜?’
    ​
    ​
    그가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귀하디귀한 그녀의 목숨을 같은 저울에 올려놓는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
    ​
    고민이 깊어지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리안은 미간을 살포시 찌푸린 채 생각했다.
    ​
    ​
    ‘…개그 필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그런가? 생각이 너무 복잡해.’
    ​
    ​
    단순함은 개그 주민이 가지고 있는 기본 특성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저 해맑고 단순하기만 했던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도 전부 개그 핕러가 완벽하지 않은 탓이었다. 리안은 조금이라도 빨리 제 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제스가 입을 열었다.
    ​
    ​
    “리안은 내 전부야, 어떤 것들보다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내 전부.”
    ​
    ​
    과거였다면 그저 ‘어렸을 때부터 함께해서 그런지 가족처럼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넘겼을 말이 선명한 형태를 이루어 리안의 심장에 때려 박혔다.
    ​
    ​
    거대한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거대하여 숨이 턱 막혔다.
    ​
    ​
    “리안도 제스가 소중하지?”
    ​
    ​
    웃음기 섞인 목소리 속엔 기대감과 약간의 불안이 뒤섞여있었다. 리안은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
    ​
    “..응.”
    “그럼, 쓰다듬어줘.”
    ​
    ​
    제스가 리안의 어깨 위에 얼굴을 턱 하니 올리며 귀를 축 늘어뜨렸다. 반만 작동하는 개그 필터 덕분인지 그도 아니면 제스가 열심히 온기를 나눠준 덕분인지 조금씩 감각이 돌아온 손이 움직여 붉은 머리카락 위에 얹어졌다.
    ​
    ​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길에 따라 리안의 하체를 덮은 꼬리가 부채처럼 팔랑거렸다. 차가운 바람이 일어나자 움찔거리며 움직임이 멈췄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감정을 숨길 수 없다는 듯 다시 팔랑거리길 반복했다.
    ​
    ​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눈이 그치길 기다릴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리안의 볼을 보기 좋게 달아올랐다.
    ​
    ​
    좋아해, 정말 좋아해.
    좀 더 쓰다듬어줘, 더 많이 사랑해줘.
    ​
    ​
    말로 뱉어내지 않아도 느껴지는 선명한 애정은 고백이나 다를 바 없어 리안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
    ​
    ‘접촉 면적이 늘어날수록 더… 자세히 느낄 수 있는 거였나?’
    ​
    ​
    마왕 때보다 더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에서 눈을 돌리고자 다른 생각을 열심히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노력이 통한 건지 아니면 지친 몸이 한계에 달한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리안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제스는 잠이 든 리안의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만약 리안이 원래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면 쾌락 있는 책임을 질 뻔했지만, 깊게 잠든 리안이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
    ​
    ***
    ​
    ​
    영원히 쏟아질 것 같던 눈보라가 멈추고, 새하얀 세계가 설산을 뒤덮었다. 리안과 제스는 챙겨뒀던 옷으로 최대한 몸을 꽁꽁 싸맨 채 설산을 걷기 시작했다. 
    ​
    ​
    “제스, 정말 괜찮아?”
    “응!”
    ​
    ​
    제스는 허벅지 중간부터 발목까지 옆이 트여있는 원피스를 입은 채 꼬리를 살랑거렸다. 긴팔 소매를 반 정도 걷어 올린 모습을 보면 정말 춥진 않은 듯했다.
    ​
    ​
    ‘수인이라 몸에 열이 많아서 그런 걸까?’
    ​
    ​
    일반적으로 수인은 온몸이 동물 형태인 수인과 귀나 꼬리, 피부 같은 특징적인 부분만 닮은 수인이 존재했다. 제스는 후자에 속했다.
    ​
    ​
    커다란 붉은 색 귀와 풍성한 꼬리, 짐승의 눈과 비슷한 눈동자, 육감적인 몸매를 제외하면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
    ​
    육감적인 몸매도 인간적인 부분이라 볼 수 있었지만, 제스의 몸은 ‘여성’의 것에 가깝기보단 ‘암컷’에 가까웠다.
    ​
    ​
    비하적인 의미가 아닌 말 그대로 아이를 낳기 위한 최적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
    ​
    다산의 상징인 골반이 발달하여 하체가 튼실하고 가슴이 매우 컸다. 가진 힘의 크기만큼 온몸의 근육도 고루 발달하여 사냥에도 최적화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를 낳게 된다면 굶길 걱정은 없어 보였다.
    ​
    ​
    인간이 자연적으로 가질 수 있는 크기를 넘어선 몸은 인간의 특징이라 보기 힘들었다.
    ​
    ​
    하여튼, 제스의 몸은 부드러운 살결로 이루어져 있어 동물들처럼 두툼한 털로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훤히 드러난 다리와 팔은 보는 것만으로도 추워 보여 리안의 입에서 쉽사리 걱정이 떨어지지 않았다.
    ​
    ​
    걸치고 있는 겉옷이라도 하나 건네줘야겠단 생각을 하던 그때.
    ​
    ​
    “대장!”
    ​
    ​
    낯선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수인 남자 둘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
    ​
    “대장이 돌아왔다!”
    ​
    ​
    둘 중 한명이 큰 소리로 소리치더니 이내 뿔피리를 꺼내 들었다. 
    ​
    설산에서 뿔피리를 부는 건 산사태에 묻혀 생을 마감하는 신종 자살법이나 다를 바 없었다. 멍청한 수인의 행동에 제스는 욕설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
    ​
    “저, 저 -… 멍청이가!”
    ​
    ​
    그렇게 뱉어낸 욕설은 하찮기 짝이 없었지만 목소리는 지옥에서 올라오기라도 한 것처럼 무시무시했다. 리안이 흠칫 어깨를 떨며 제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제스가 뛰쳐나간 흔적만이 존재했다.
    ​
    ​
    뿌우..! 히이…이이…
    ​
    ​
    웅장한 뿔피리 소리는 제스의 주먹 앞에 힘없는 모기의 소리처럼 작게 늘어졌다. 리안은 남자 수인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는 제스에게 다가가며 생각했다.
    ​
    ​
    ‘…수인 친구를 많이 사귀었으려나?’
    ​
    ​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발걸음이 뚝 하고 멈춰버렸다.
    ​
    ​
    ‘제스에게 친구가 늘어난 건 축하할 일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
    ​
    손가락 끝에 생긴 거스러미처럼 느껴지는 묘한 불편함에 눈썹이 찌푸려졌다. 리안의 시선은 어느새 제스에게 탈탈 털리고 있는 남자 수인들을 향했다.
    ​
    ​
    ​
    ​
    ​
    ​
    ​
    ​
    ​
    ​
    ​
    ​
    ​
    ​
    ​
    ​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Ilham Senjaya님 오늘도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3

슬슬 제스도 쭈인님에서 졸업하여 주인님이라 부르는게 좋을지 아니면 리안이라 부르는게 좋을지 고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요번달은 부모님의 일을 돕느라 무단..휴재..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ㅠㅠㅠ
대신 다음달부터는 (일시적) 자유가 되기에 미친 듯이 연재를 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완결까지 돌격할 계획입니다. 후후후…

추천과 선작은 사랑입니다.다음화 보기

“가만히.”

평소 통통 튀어 오르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은 채 귓속을 파고들었다. 오싹한 기분에 몸을 파르르 떨자 진정하라는 듯 상체를 끌어안은 손이 느릿하게 몸을 토닥거렸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다정한 손길에 긴장이 맥없이 풀려버렸다.

예민하게 반응하기엔 머릿속이 너무 둔하게 굴러갔다. 리안은 전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가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들어 올렸다.

리안은 둔하게 흘러가는 생각의 끝자락을 겨우 붙잡으며 끝내 놓지 못한 생각을 입에 담았다.

“제..스, 나는 정말… 괜찮아.. 괜찮으니… 까..”

하얀 입김 사이로 흘러나오는 말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눈이 쏟아지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리안의 나른한 목소리와 섞여 퍼져나갔다.

‘제스, 좀 더 자기 몸을 소중히 해야지.’

리안이 제스를 밀어낸 것에는 제스를 어린아이로 보는 마음도 있었지만, 진심으로 걱정된 탓도 컸다.

리안에게 이 정도 고통은 딱히 별난 것이 아니었다. 개그 필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평소보다 몇 배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해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칼에 베인 듯 날카로운 통증이 마비된 것처럼 제대로 느껴지지 않아도, 관절이 고장 난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제스의 행동이 자신을 아끼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작’ 이 정도 고통을 위해 제스가 수치심을 감수해야 하는가?

리안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 탓에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말들은 전부 잔소리뿐이었다. 제스의 눈이 리안의 말이 이어질수록 가늘어졌다.

“그러니까…”

“나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리안의 말을 툭 잘라냈다.

“리안을 위해서라면 내 심장도 내줄 수 있어.”

애교가 가득 섞인 ‘쭈인님’이란 말 대신 불린 이름은 묘하게 이질적이면서도 자극적이라 당황스러웠다. 그저 어리게만 보이던 제스가 성숙한 여성의 모습을 보였을 때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이 머릿속에 쿵 하고 울려 퍼졌다.

충격에 빠진 리안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어쩐지 깨물렸던 귓바퀴에서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뜨거운 태양의 빛이 눈을 녹이는 것처럼 귓바퀴에서 시작된 열감이 얼어붙은 얼굴을 녹이기 시작했다. 느리게 흘러나오던 숨결이 원래의 속도를 되찾고 무겁던 눈꺼풀이 전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과 긴장감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리안은 입술을 몇 번이고 벙긋거리며 무어라 말을 꺼내려 했지만, 쉽사리 꺼낼 수 없었다.

마왕의 내면을 들여다본 이후부터였는지 아니면 낯선 몸에 들어선 이후부터였는지 알 수 없지만, 어째선지 제스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같은 말도 사람마다 품고 있는 무게가 다르듯, 제스가 뱉어내는 말속에 담긴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 그에 맞는 대답을 쉽게 뱉을 수 없었다.

“왜…?”

몇 번이고 혀를 깨문 끝에 뱉어진 말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그대로 담은 듯 제대로 된 뜻을 담지 못했다. 정리되지 못한 말이 조금씩 열기를 되찾아가는 입술 안쪽에서 이리저리 헤엄친 끝에 형태를 이루어 뱉어졌다.

“나한테 그럴… 가치가 있어?”

자존감이 바닥을 기는 사람이나 뱉을 법한 말이었지만, 리안은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

아무리 소중한 사람이라고 해도 단호하게 제 심장을 바칠 수 있을까?

제스는 자신과 달랐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뒤틀리거나 죽음에 별 가치를 두지 않는 세계 속에서 살아왔던 그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왔다. 그런 만큼 가진 가치관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가치가 무겁고, ‘죽음’이 곧 ‘절망’과 가까운 이 세계에서 쉽게 죽지 않는 자신이 제스의 죽음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만약 제스가 리안이 일반 사람들처럼 쉽게 죽는 존재로 보고 있었다면 지금의 말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몇 번이고 피투성이가 되었다가 회복되는 리안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과보호에서 벗어나고자 죽을 뻔한 상황에서도 몇 번이고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자주 떠들기도 했었다.

머리가 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제스는 리안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옛 저녁에 눈치챘다. 노아나 아이리스보다 과보호가 적은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도대체 왜?’

그가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귀하디귀한 그녀의 목숨을 같은 저울에 올려놓는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민이 깊어지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리안은 미간을 살포시 찌푸린 채 생각했다.

‘…개그 필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그런가? 생각이 너무 복잡해.’

단순함은 개그 주민이 가지고 있는 기본 특성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저 해맑고 단순하기만 했던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도 전부 개그 핕러가 완벽하지 않은 탓이었다. 리안은 조금이라도 빨리 제 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제스가 입을 열었다.

“리안은 내 전부야, 어떤 것들보다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내 전부.”

과거였다면 그저 ‘어렸을 때부터 함께해서 그런지 가족처럼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넘겼을 말이 선명한 형태를 이루어 리안의 심장에 때려 박혔다.

거대한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거대하여 숨이 턱 막혔다.

“리안도 제스가 소중하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 속엔 기대감과 약간의 불안이 뒤섞여있었다. 리안은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며 대답했다.

“..응.”

“그럼, 쓰다듬어줘.”

제스가 리안의 어깨 위에 얼굴을 턱 하니 올리며 귀를 축 늘어뜨렸다. 반만 작동하는 개그 필터 덕분인지 그도 아니면 제스가 열심히 온기를 나눠준 덕분인지 조금씩 감각이 돌아온 손이 움직여 붉은 머리카락 위에 얹어졌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길에 따라 리안의 하체를 덮은 꼬리가 부채처럼 팔랑거렸다. 차가운 바람이 일어나자 움찔거리며 움직임이 멈췄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감정을 숨길 수 없다는 듯 다시 팔랑거리길 반복했다.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눈이 그치길 기다릴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리안의 볼을 보기 좋게 달아올랐다.

좋아해, 정말 좋아해.

좀 더 쓰다듬어줘, 더 많이 사랑해줘.

말로 뱉어내지 않아도 느껴지는 선명한 애정은 고백이나 다를 바 없어 리안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접촉 면적이 늘어날수록 더… 자세히 느낄 수 있는 거였나?’

마왕 때보다 더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에서 눈을 돌리고자 다른 생각을 열심히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 노력이 통한 건지 아니면 지친 몸이 한계에 달한 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리안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제스는 잠이 든 리안의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만약 리안이 원래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면 쾌락 있는 책임을 질 뻔했지만, 깊게 잠든 리안이 이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

영원히 쏟아질 것 같던 눈보라가 멈추고, 새하얀 세계가 설산을 뒤덮었다. 리안과 제스는 챙겨뒀던 옷으로 최대한 몸을 꽁꽁 싸맨 채 설산을 걷기 시작했다.

“제스, 정말 괜찮아?”

“응!”

제스는 허벅지 중간부터 발목까지 옆이 트여있는 원피스를 입은 채 꼬리를 살랑거렸다. 긴팔 소매를 반 정도 걷어 올린 모습을 보면 정말 춥진 않은 듯했다.

‘수인이라 몸에 열이 많아서 그런 걸까?’

일반적으로 수인은 온몸이 동물 형태인 수인과 귀나 꼬리, 피부 같은 특징적인 부분만 닮은 수인이 존재했다. 제스는 후자에 속했다.

커다란 붉은 색 귀와 풍성한 꼬리, 짐승의 눈과 비슷한 눈동자, 육감적인 몸매를 제외하면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육감적인 몸매도 인간적인 부분이라 볼 수 있었지만, 제스의 몸은 ‘여성’의 것에 가깝기보단 ‘암컷’에 가까웠다.

비하적인 의미가 아닌 말 그대로 아이를 낳기 위한 최적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다산의 상징인 골반이 발달하여 하체가 튼실하고 가슴이 매우 컸다. 가진 힘의 크기만큼 온몸의 근육도 고루 발달하여 사냥에도 최적화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를 낳게 된다면 굶길 걱정은 없어 보였다.

인간이 자연적으로 가질 수 있는 크기를 넘어선 몸은 인간의 특징이라 보기 힘들었다.

하여튼, 제스의 몸은 부드러운 살결로 이루어져 있어 동물들처럼 두툼한 털로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훤히 드러난 다리와 팔은 보는 것만으로도 추워 보여 리안의 입에서 쉽사리 걱정이 떨어지지 않았다.

걸치고 있는 겉옷이라도 하나 건네줘야겠단 생각을 하던 그때.

“대장!”

낯선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수인 남자 둘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장이 돌아왔다!”

둘 중 한명이 큰 소리로 소리치더니 이내 뿔피리를 꺼내 들었다.

설산에서 뿔피리를 부는 건 산사태에 묻혀 생을 마감하는 신종 자살법이나 다를 바 없었다. 멍청한 수인의 행동에 제스는 욕설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저, 저 -… 멍청이가!”

그렇게 뱉어낸 욕설은 하찮기 짝이 없었지만 목소리는 지옥에서 올라오기라도 한 것처럼 무시무시했다. 리안이 흠칫 어깨를 떨며 제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제스가 뛰쳐나간 흔적만이 존재했다.

뿌우..! 히이…이이…

웅장한 뿔피리 소리는 제스의 주먹 앞에 힘없는 모기의 소리처럼 작게 늘어졌다. 리안은 남자 수인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는 제스에게 다가가며 생각했다.

‘…수인 친구를 많이 사귀었으려나?’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발걸음이 뚝 하고 멈춰버렸다.

‘제스에게 친구가 늘어난 건 축하할 일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손가락 끝에 생긴 거스러미처럼 느껴지는 묘한 불편함에 눈썹이 찌푸려졌다. 리안의 시선은 어느새 제스에게 탈탈 털리고 있는 남자 수인들을 향했다.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I’m the Only One With a Different Genre

나 혼자 장르가 다르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n the world of comedy anime, I was living an ordinary life until I became possessed by a dark fantasy novel I was reading before falling asleep. ‘Hahaha! Don’t hold a grudge -..!’ ‘Ugh, cough cough…seriously…my clothes are ruined.’ ‘…!?’ Though I was stabbed in the stomach, I calmly stood up and pulled out the spear. Originally, residents of the comedy world are a race that can be torn into 100 pieces and still come back to life the next day. ‘Stop it! Stop now! How long do you plan to sacrifice me?’ ‘No…I mean..’ ‘I’ve become strong to protect you…what have I become?’ Residents in the comedy world are just a race that vomits blood even if they stub their toe. I never made any sacrifices..but my delusion deepens and my obsession grows. One day, while I was half-imprisoned and taking care of some pitiful kids… ‘Are you the boss?’ ‘Excuse me?’ Before I knew it, I had become the behind-the-scenes boss of a huge underworld organization.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