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는 마수가 아니에요. 감정도 있고 상처도 받을 줄 아는 애라고요!”
헤를라인은 에테르를 필사적으로 변호했다.
처음은 감정적인 호소로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헤를라인의 주관적인 평가라는 소리다.
당연하게도 이곳에 모인 사람 중 대다수가 에테르를 만나본 적도,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었다. 하물며 깊은 관계를 가졌을 리가.
사람들은 공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민간인은 뒤로, 마도사들은 앞으로.
“헤를라인 백작. 이러면 당신만 불리해집니다.”
뫼스바이어가 입꼬리를 올렸다. 비릿한 웃음이었다.
헤를라인은 머리를 굴렸다. 머릿속 깊은 곳. 에테르를 변호할 합당한 근거를 떠올렸다.
“다들 몰라요? 에테르는 플레어도 만들었어요. 플레어가 뭔지 다들 아시죠?”
“플레어? 아, 그렇지.”
“에테르가 마수라고 쳐요. 마수가 마수 죽이려고 이런 걸 우리한테 과연 내줬을까요?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데요?”
정론이었다. 오죽하면 뫼스바이어가 뒤로 주춤할 정도로.
뫼스바이어에게 에테르는 적이었다. 플레어를 만들어 배포한, 마수의 적. 그는 로즈마리와 에테르의 관계를 전혀 몰랐다.
그러나 고장이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 법. 뫼스바이어는 여기서 에테르를 ‘마수’로 모함하는 편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로즈마리 님을 보호해야 한다. 이 녀석이 흑막이라고 뒤집어씌우면 돼.’
합당한 판단이었다. 제 딴에는 옳은 결정이었고.
“헤를라인 백작. 혹시 백작도 그 마수와 한패입니까?”
해서 조금 더 밀어붙이기로 했다.
“…네?”
“거기 있는 꼬맹이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마수가 내린 비를 맞고도 멀쩡한 괴물을 왜 감싸는 거요.”
“……자작, 말을 삼가시지요.”
“혹시 당신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진 않소?”
사람들은 우왕좌왕했다. 헤를라인도 전쟁영웅이었지만, 뫼스바이어도 전쟁영웅이었다. 수십년 전. 그는 수인족의 침공을 막아낸 적이 있었다.
“혹여나 그렇다면 자백하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전, 전 아니에요. 북부 전선에서 제가 재앙급을 얼마나 박살내고 돌아왔는 줄 아세요?”
헤를라인은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잃어버린 한쪽 눈. 절멸급 마수에게 당한 흔적이다.
“그때 마수와 접선한 모양이로군요. 어떱니까, 뇌물은 잘 받으셨습니까?”
“당신, 이렇게 억지 부리시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시면 저희만 혼란스럽습니다. 미개한 요호처럼 살랑거리지 마시고, 딱 말해 주시지요.”
아무렇게나 내뱉은 막말이었다. 그러나 민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지금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다. 저 소녀는 왜 멀쩡한가. 자신의 가족, 연인, 친구는 다 비를 맞고 죽었는데. 마수가 되었는데.
‘원래부터 저 소녀가 마수였다면…….’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모두가 피곤했다.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장례도 치러야 한다. 무너진 건물들도 복구해야 한다. 지금부터 분주하게 움직여야 할 사람도 있는 판에, 이렇게 정신을 소모하긴 싫었다.
무엇보다, 분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저 소녀가 아니라면, 누가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지?’
약점을 드러낸 먹이는 물어뜯기 좋은 법이다.
“야, 너희!”
보다 못한 프레이가 소리를 빽 내질렀다.
“너희 지금 이상해! 에테르가 저 거북이가 쏜 공격을 막아줬잖아! 나와 선생님도 도와줬어! 그런데 왜 다들 우리를 괴물로 몰아세우는 거야? 왜 몰아세우는 거냐고!”
“그럼 누가 흑막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뫼스바이어하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역사가 증명합니다. 이런 습격에는 항상 인간형 마수가 대동했죠. 저 거북이 같은 녀석은 대개 지능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수도에 저걸 풀어놓은 장본인이 있을 겁니다.”
“그럼 그 녀석을 찾으러 가던가!”
“바로 앞에 있는데 뭐하러 찾으러 갑니까?”
“내 친구는 플레어도 만들고 너희도 지켜줬어! 뭐가 더 필요한데!”
“친애하는 제국의 신민 여러분. 벌써 선동당한 피해자가 나왔군요. 여러분은 부디 휘둘리지 마시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시길 부탁드립니다.”
“너 이 새끼! 지금 말 다 했어?!”
“인간형 마수는 저리도 지능적입니다. ‘우리’가 괴물을 쓰러뜨리니 불리하다고 판단한 모양이겠지요.”
“이거 순 억지야!”
프레이의 말대로였다. 이건 억지였다.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심지어 오를레이앙의 세뇌도 풀렸다. 버멜이 토템을 사용하여 세뇌에 사용한 진을 파괴했다. 지금 사람들이 사고하는 것 모두가 그들 스스로의 의지였다.
하지만.
에테르는. ‘나’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리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라는 걸.
“순 억지라뇨. 제가 보기엔 오히려 당신들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뭐?”
“여러분도 알다시피 인간형 마수는 약한 개체가 대부분이지요. 때문에 사람을 흉내내고, 우리에게서 동정을 받으려고 해요. 이건 오해다, 나는 특이 체질인 인간일 뿐이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연민을 불러 일으킵니다.”
대부분은 보고 싶은 부분만 본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믿고자 하는 것만 믿는다.
“플레어를 만든 것도, 우리를 보호하는 척했던 것도. 전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 흔적이라는 걸 모르겠습니까?”
“그, 그렇네.”
“근데 플레어는 또 뭐야? 또 지들끼리 아는 얘기만 하고 있어, 에잉 쯧.”
에테르가 남긴 도움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기억에 남은 건 오직 하나. 눈앞의 소녀가 비를 맞고도 멀쩡하다는 사실뿐이었다.
“아니, 그런데 뫼스바이어 자작님, 당신 말도 뭔가 좀 이상… 으윽……!”
“마수 끄나풀이 여기 또 있었군!”
의구심을 품고 항변하는 목소리가 뒤에서 나오기도 했지만, 금세 린치당했다.
다수가 지배하는 분위기. 이상함을 느낀 사람들도 입을 다문다. 마왕군의 하수인으로 몰리고 싶지 않았다.
에테르는 저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느끼는 불쾌함인지, ‘에테르’가 느끼는 불쾌함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두 자아 모두 각자의 세계에서 겪었던 역함이었다.
그래도.
에테르는 참았다. 헤를라인. 프레이. 자신을 변호하는 이들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불리한 줄 알면서도 본관을 변호해주다니.’
고마웠다. 어쩌면, 세상은 아직 멸망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
조금 더 결정을 미뤄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쐐액! 속공으로 만든 마법이 날아들었다.
“크윽!”
헤를라인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졌다. 프레이가 비명을 질렀다. 에테르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국민 여러분.”
척, 척, 척!
군기가 바짝 든 발소리. 최신식 군복을 입은 전투마도사들이 현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장년의 여성이 깃발을 든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건…….”
여자는 에테르와 사람들을 번갈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이 사태는 저희 토츠펠 가문에서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제 지시에 따르시지요.”
“과, 관군이다!”
“남방 정예 기사단이 왔어!”
수도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 남쪽 땅에서 황급히 달려온 토츠펠 가문의 공작이었다.
“3중대는 시신을 수습하고 제 딸아이를 찾으세요. 2중대는 건물의 복구를, 4중대는 수도의 의료진과 협력하여 부상자 치료를 서두르시고요.”
토츠펠 공장의 말에 따라 마도사들이 움직인다. 질서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후우, 하며 안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5중대는 황성으로 가 폐하와 황족들의 신변을 살펴 돌아오세요. 마지막으로 남은 인원은…….”
촤아악! 토츠펠 공작이 스태프를 빼들었다.
“저와 함께 현행범 체포에 들어갑니다.”
에테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헤를라인 교수가 쓰러진 방향으로 무릎을 꿇었다.
“…이봐, 괜찮나?”
“끄윽….”
헤를라인이 신음을 흘렸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마법을 맞았다. 당장 일어나기란 무리였다.
“너희……. 내 은사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에테르는 내려놓았던 스태프를 다시 쥐었다.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머리가 부글부글 끓었다.
본능이 부르짖었다. 캘리퍼스를 휘둘러라. 예전처럼만 해라. 머릿속에서 명백한 살의가 차올랐다.
[…악의가 느껴진다.]
한동안 침묵하던 정령들이 말을 꺼낸 건 그 무렵이었다.
[긴가민가해서 가만히 있었는데, 저건… 오도 가도 못하겠네.]
[조금 전까진 잘 몰랐어요! 하지만요!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녀석, 마수가 맞는 모양이에요!]
정령들의 판단 기준은 두 가지였다.
사악한 생각이나 기운, 그리고 ‘증기의 비’에 대한 면역.
악한 생각을 품는다고 반드시 마수인 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여태껏 많은 사람이 마수로 몰려야 했다.
하지만 저런 독한 비를 맞고도 멀쩡하다는 것.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것이 정령들의 추론에 확신을 더한 셈이었다.
“거, 거 보쇼! 내 말이 맞다니까!”
좋은 흐름이었다. 뫼스바이어는 토츠펠 공작의 가세에 힘입어 선동을 계속했다.
‘여기서 저 토츠펠이 나올 줄이야!’
토츠펠 공작. 그녀는 영악한 정통파 귀족이다. 능력만 있으면 등용하려 하는 하스펠트 공작과는 달리, 평민 중에서 기재를 지닌 이가 나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평민 출신이면서 귀족이 된 헤를라인. 그리고 그녀의 뒤를 밟으려는 에테르라는 저 소녀.
어디서 굴러 들어왔는지 모를 저 프레이라는 꼬맹이까지.
‘전부 눈엣가시일 터.’
뫼스바이어는 혀를 끌끌 차며 웃었다.
‘정치적인 의도로 나타난 게 눈에 선하구나. 아무렴, 이번 일로 황실이 무너졌으니 상국(相國)을 해 먹고 싶겠지.’
그녀는 또한 권력욕이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능구렁이 같은 년.’
평소에는 마음에 들지 않던 사람. 그러나 지금은 든든한 아군이었다.
‘여기서 가세한다.’
그리 생각하며 스태프에 마법을 장전할 때였다.
깡!
“꺄아악!”
뫼스바이어는 똑똑히 보았다.
콰아앙─!!
스태프에 맞아 날아가는, 토츠펠 공작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