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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3

       *

        우리의 삶은 신분과 재력, 혹은 무력 등을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며 순서를 나누지만, 인간은 결코 강요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

        여신교의 사제들이 자주 읊던 말 중의 하나였다.

        ​

        생명과 사랑의 고귀함을 설파하던 그들의 말이 귀족보다는 평민층에 넓게 퍼진 이유는 답답하고 고된 평민들의 삶을 그들이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리라.

        ​

        인구의 대다수가 깊게 신앙하고 있지만 왕국은 딱히 여신교를 국교로 선언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런 친서민적인 여신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 역시 적은 수는 아니었다.

        ​

        하지만, 그런 귀족들이 그렇게나 못마땅한 여신교의 기부 요구를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여신교의 정반대 위치에 서 있는 존재는 귀족이 아니라 마왕이었기 때문이었다.

        ​

        마왕은 인류의 적이기도 했지만, 여신교야말로 마족과 마왕의 진정한 적이자 상대였다.

        ​

        신성력은 마족에게 끌 수 없는 불이자, 해독할 수 없는 독이기에, 인류의 역사 속에서 용사가 나타나 마왕을 죽일 땐 항상 여신교의 성녀가 함께해왔다.

        ​

        그렇기에 여신교가 성녀를 배출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큰 사건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

        ​

        “…”

        ​

        ​

        ​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사건의 무게를 정면으로 느끼고 있었다.

        ​

        소름이 끼치는 마왕의 시선이, 끔찍하게 생긴 저 손가락이 나를 향하자 몸속의 불길이 빠르게 꺼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신성력.

        ​

        앨리스 누나가 내게 남겨준 신성력이 빠르게 타들어 갔다.

        ​

        피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

        당장이라도 몸을 던져 저 시선과 손이 가리키는 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내 이성과 본능이 함께 합창하듯 외치고 있었다.

        ​

        하지만,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인간은 강요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여신교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듯한, 오로지 강요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저 흉측한 괴물.

        ​

        저 괴물의 손짓은 나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강요하고 있었다.

        ​

        ​

        ​

        “두려워 말아라.”

        ​

        ​

        ​

        세상에서 가장 깊은 해구보다 더욱 낮고 굵은 목소리와 세상에서 가장 높이 나는 새의 울음소리를 섞은 것 같은 기이한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렸다.

        ​

        그 커다란 목소리는 마왕의 손가락 떨림에 맞춰 느릿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

        ​

        “가여운 존재여, 자유로운 몸과 속박된 운명에 갇혀 고통받았구나.”

        ​

        ​

        ​

        오직 저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

        실비아가 내지르는 비명 같은 기합 소리도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먹먹했다.

        ​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도 겨우 주변 시야에 흘끗 잡힐 뿐이었다.

        ​

        당황하는 피아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

        이젠 나를 향해 손을 뻗은 마왕의 모습도 사라져간다.

        ​

        ​

        ​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거라, 내가 그대에게 복을 내려주겠다.”

        ​

        “…”

        ​

        ​

        ​

        복?

        ​

        ​

        ​

        “고통받은 자여, 그대가 바라마지않던…”

        ​

        ​

        ​

        목소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커다란 섬광과 함께 나머지 말을 토해냈다.

        ​

        ​

        ​

        “죽음을.”

        ​

        ​

        ​

        그 말과 동시에 눈부신 섬광이 용암 같은 열기를 내뿜으며 내게 달려왔다.

        ​

        폐 속의 공기가 순식간에 타버리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어째선지 내 두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

        아, 죽는다.

        ​

        이제야 쉴 수 있게 된…

        ​

        ​

        ​

        “그럴 줄 알았지, 이 개자식.”

        ​

        ​

        ​

        그 순간,

        ​

        욕지거리와 함께 무언가 찢겨나가는 듯한 질척한 파열음이 들렸다.

        ​

        내 시야를 가득 채우던 그 눈부신 광채는 순식간에 사라져, 세상은 다시 짙은 암흑 속에 잠겼다.

        ​

        ​

        ​

        “칵!”

        ​

        ​

        ​

        나는 뒤로 넘어지며 고통에 신음했다.

        ​

        온몸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따끔거렸고, 안 그래도 어두운 시야에 빛 번짐까지 생긴 시야가 어지러웠다.

        ​

        ​

        ​

        “애쉬!”

        ​

        ​

        ​

        피아는 넘어진 나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왔다.

        ​

        나는 잇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으며 피아에게 말했다.

        ​

        ​

        ​

        “뭐야…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몰라, 애쉬 조금 전에 내 말도 무시하면서 가만히 서 있었어, 가만히 서서 마왕이 쏘는 불꽃을 그냥 맞고 있었다고!”

        ​

        “… 불?”

        ​

        “애쉬를 옮기려 했는데도 안 됐어… 마치 애쉬가 내 도움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

        “그게… 대체 무슨,”

        ​

        “애쉬가… 죽는 줄 알고… 내가, 내가아…”

        ​

        ​

        ​

        피아는 울먹거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

        거칠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

        피아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일단 상황 파악이 먼저였다.

        ​

        내가, 마왕의 공격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

        그럼, 조금 전의 그 목소리는 마왕의 목소리였던 건가?

        ​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

        나는 아직 고통스러운 왼쪽 눈을 비벼 가린 채, 간신히 반대쪽 눈만을 게슴츠레 떴다.

        ​

        내 옆에서 훌쩍이는 피아와 저 멀리 마왕의 형체가 보였다.

        ​

        마왕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고 있었다.

        ​

        거대한 나사라도 된 것처럼 그의 창백한 허리는 빙글빙글 말려있었다.

        ​

        그리고 그런 마왕의 옆에는 주문을 걸고 있는 자그마한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

        ​

        ​

        “저 애는…”

        ​

        “칫,”

        ​

        ​

        ​

        남자아이는 혀를 한번 차더니 말을 이었다.

        ​

        ​

        ​

        “하여간에 이래서 인간들한텐 뭘 믿고 맡길 수가 없어.”

        ​

        ​

        ​

        그는 조금 전 까지 동족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있던, 마족 소년이었다.

        ​

        ​

        ​

        ​

        ​

        ​

        ​

        ​

        ​

        ​

        *

        소년은 아직도 내가 상황 파악이 안된다 판단했는지, 얼굴을 구기며 비아냥거렸다.

        ​

        ​

        ​

        “하기야, 용사가 떼로 덤벼도 못이긴 마왕을 겨우 둘이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

        “방금 그건…”

        ​

        “환각마법이야. 이 개자식이 즐겨 쓰는 마법이지.”

        ​

        ​

        ​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마왕을 향해 뻗은 손을 천천히 회전시켰다.

        ​

        마치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

        소년의 손바닥에선 은은한 자줏빛 광채가 퍼져 나오고 있었고, 마왕의 배배 꼬인 몸에도 같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아무래도 저 소년이 마족의 마법으로 마왕을 공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

        하지만 소년의 팔은 힘에 부친 것인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

        그는 주체가 안될 만큼 덜컹거리는 손목을 반대쪽 손으로 부여잡으며 말했다.

        ​

        ​

        ​

        “뭐, 이놈이 환각 마법 같은 얕은수를 쓴다는 것 자체가, 아직 완벽히 회복되지 못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지만,”

        ​

        “… 너는 대체…”

        ​

        “뭐 그런 거 아무래도 좋아. 야,”

        ​

        ​

        ​

        소년은 건방진 태도로 내게 말을 걸었다.

        ​

        ​

        ​

        “멍청하게 앉아 있지 말고, 저기 가서 저 여자나 깨워.”

        ​

        “… 뭐?”

        ​

        ​

        ​

        소년은 힘겨운 몸짓으로 간신히 턱짓을 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

        소년의 턱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방금 전의 나처럼 멍하니 서 있는 실비아의 모습이 보였다.

        ​

        ​

        ​

        “… 실비아도, 환각에?”

        ​

        “그래, 가까이 다가가면 베일까 봐 너 먼저 깨운 거야. 정신 차렸으면 빨리 가서 깨워.”

        ​

        “그, 그래. 알았어.”

        ​

        “나 지금 엄청 힘드니까. 서둘러. 빨리!”

        ​

        ​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을 짚었다.

        ​

        ​

        ​

        “으악,”

        ​

        ​

        ​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입에선 거친 비명이 튀어나왔다.

        ​

        살짝 녹아 구부러진 갑옷이 푹 익어버린 피부를 날카롭게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살짝 들어 보인 팔의 피부는 뜨거운 열기에 짓물러져 있었다.

        ​

        감염이라도 된다면 치명적일 상처겠지만, 바보처럼 환각에 속아버린 나에겐 불평할 자격 따위 없었다.

        ​

        ​

        ​

        “젠장, 몸이… 너무 무거워.”

        ​

        “애쉬, 괜찮아?”

        ​

        “피아, 나 좀 도와줘.”

        ​

        “그럼 당연하지, 어떻게 해줄까?”

        ​

        ​

        ​

        나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겨드랑이 사이에 위차한 가죽끈을 내보였다.

        ​

        갑옷의 앞과 뒤를 연결하는 끈이었다.

        ​

        피아는 잠시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교하게 조준한 날카로운 바람으로 가죽끈을 끊어내었다.

        ​

        나는 가슴팍을 파고드는 쇳조각을 단숨에 벗어던졌고, 피아는 동시에 내 몸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기를 끼얹어 화끈거리는 화상을 가라앉혔다.

        ​

        나는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

        ​

        ​

        “실비아!”

        ​

        ​

        ​

        실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

        나도 조금 전까지 경험해봤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

        나 역시 그녀의 목소리는 먹먹한 잡음처럼 들렸을 뿐이었으니까.

        ​

        게다가 눈 앞에 펼쳐진 광경과 머릿속을 쩌렁쩌렁하게 울려대는 그 신비한 목소리에 모든 신경을 빼앗기지 않았나.

        ​

        지금 실비아 역시 무언가 자신의 정신을 빼놓는 광경에 사로잡혀 있을 게 분명했다.

        ​

        ​

        ​

        “가자, 피아.”

        ​

        ​

        ​

        피로와 부상으로 가득한 몸이지만 갑옷을 벗어던진 만큼 한결 가벼운 느낌이었다.

        ​

        통증만 참아낸다면 문제는 없었다.

        ​

        나는 이를 악물고 실비아를 향해 달렸다.

        ​

        ​

        ​

        “실비아, 정신 차…”

        ​

        ​

        ​

        순간, 짧은 빛줄기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

        곧이어 거의 동시에 날카로운 바람 역시 그 궤적을 따라 불었다.

        ​

        ​

        ​

        “… 실비아?”

        ​

        ​

        ​

        휙,

        ​

        소름이 끼치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뒤늦게 귓가에 포착되었다.

        ​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

        지금 느낀 이 기묘한 현상이 무엇인지 나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제발 내 생각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토록 간절하게 기도해 본 적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

        ​

        ​

        “피아…”

        ​

        “애쉬.”

        ​

        “아니지?”

        ​

        “우리 좆됐어.”

        ​

        ​

        ​

        피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

        거울은 없지만 분명 내 얼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이로써 명백해졌다.

        ​

        방금 그 빛과 바람과 소리는, 실비아의 참격이었다.

        ​

        ​

        ​

        “…”

        ​

        “시, 실비아, 나야.”

        ​

        ​

        ​

        나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실비아를 향해 걸어서 다가갔다.

        ​

        하지만, 나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검을 쥔 실비아의 팔도 점점 각도가 위로 솟고 있었다.

        ​

        ​

        ​

        “나야, 애쉬.”

        ​

        “… 애쉬?”

        ​

        “응, 애쉬, 나야 실비아. 잘 봐봐.”

        ​

        “애쉬는… 내가 지킬 거야…”

        ​

        ​

        ​

        실비아는 멍한 눈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

        ​

        ​

        “… 젠장!”

        ​

        ​

        ​

        나는 서둘러 주문을 외웠다.

        ​

        거대한 흙벽이 대리석 바닥을 뚫고 솟아올랐으나, 그와 동시에 흙벽은 가로로 갈라져 미끄러지듯 옆으로 쏟아져 내렸다.

        ​

        ​

        ​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히든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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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나를 살려준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Score 4.2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Having lost all my family, I fled. As I was running away, she saved me when I was on the brink of death due to an accident. The moment our eyes met, I knew I couldn’t leave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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