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삶은 신분과 재력, 혹은 무력 등을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며 순서를 나누지만, 인간은 결코 강요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여신교의 사제들이 자주 읊던 말 중의 하나였다.
생명과 사랑의 고귀함을 설파하던 그들의 말이 귀족보다는 평민층에 넓게 퍼진 이유는 답답하고 고된 평민들의 삶을 그들이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리라.
인구의 대다수가 깊게 신앙하고 있지만 왕국은 딱히 여신교를 국교로 선언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런 친서민적인 여신교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 역시 적은 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귀족들이 그렇게나 못마땅한 여신교의 기부 요구를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신교의 정반대 위치에 서 있는 존재는 귀족이 아니라 마왕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왕은 인류의 적이기도 했지만, 여신교야말로 마족과 마왕의 진정한 적이자 상대였다.
신성력은 마족에게 끌 수 없는 불이자, 해독할 수 없는 독이기에, 인류의 역사 속에서 용사가 나타나 마왕을 죽일 땐 항상 여신교의 성녀가 함께해왔다.
그렇기에 여신교가 성녀를 배출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큰 사건인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사건의 무게를 정면으로 느끼고 있었다.
소름이 끼치는 마왕의 시선이, 끔찍하게 생긴 저 손가락이 나를 향하자 몸속의 불길이 빠르게 꺼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성력.
앨리스 누나가 내게 남겨준 신성력이 빠르게 타들어 갔다.
피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몸을 던져 저 시선과 손이 가리키는 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내 이성과 본능이 함께 합창하듯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인간은 강요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여신교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듯한, 오로지 강요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저 흉측한 괴물.
저 괴물의 손짓은 나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강요하고 있었다.
“두려워 말아라.”
세상에서 가장 깊은 해구보다 더욱 낮고 굵은 목소리와 세상에서 가장 높이 나는 새의 울음소리를 섞은 것 같은 기이한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렸다.
그 커다란 목소리는 마왕의 손가락 떨림에 맞춰 느릿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가여운 존재여, 자유로운 몸과 속박된 운명에 갇혀 고통받았구나.”
오직 저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실비아가 내지르는 비명 같은 기합 소리도 물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먹먹했다.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도 겨우 주변 시야에 흘끗 잡힐 뿐이었다.
당황하는 피아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젠 나를 향해 손을 뻗은 마왕의 모습도 사라져간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거라, 내가 그대에게 복을 내려주겠다.”
“…”
복?
“고통받은 자여, 그대가 바라마지않던…”
목소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커다란 섬광과 함께 나머지 말을 토해냈다.
“죽음을.”
그 말과 동시에 눈부신 섬광이 용암 같은 열기를 내뿜으며 내게 달려왔다.
폐 속의 공기가 순식간에 타버리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어째선지 내 두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 죽는다.
이제야 쉴 수 있게 된…
“그럴 줄 알았지, 이 개자식.”
그 순간,
욕지거리와 함께 무언가 찢겨나가는 듯한 질척한 파열음이 들렸다.
내 시야를 가득 채우던 그 눈부신 광채는 순식간에 사라져, 세상은 다시 짙은 암흑 속에 잠겼다.
“칵!”
나는 뒤로 넘어지며 고통에 신음했다.
온몸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따끔거렸고, 안 그래도 어두운 시야에 빛 번짐까지 생긴 시야가 어지러웠다.
“애쉬!”
피아는 넘어진 나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왔다.
나는 잇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으며 피아에게 말했다.
“뭐야…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몰라, 애쉬 조금 전에 내 말도 무시하면서 가만히 서 있었어, 가만히 서서 마왕이 쏘는 불꽃을 그냥 맞고 있었다고!”
“… 불?”
“애쉬를 옮기려 했는데도 안 됐어… 마치 애쉬가 내 도움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게… 대체 무슨,”
“애쉬가… 죽는 줄 알고… 내가, 내가아…”
피아는 울먹거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거칠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피아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일단 상황 파악이 먼저였다.
내가, 마왕의 공격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그럼, 조금 전의 그 목소리는 마왕의 목소리였던 건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나는 아직 고통스러운 왼쪽 눈을 비벼 가린 채, 간신히 반대쪽 눈만을 게슴츠레 떴다.
내 옆에서 훌쩍이는 피아와 저 멀리 마왕의 형체가 보였다.
마왕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고 있었다.
거대한 나사라도 된 것처럼 그의 창백한 허리는 빙글빙글 말려있었다.
그리고 그런 마왕의 옆에는 주문을 걸고 있는 자그마한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저 애는…”
“칫,”
남자아이는 혀를 한번 차더니 말을 이었다.
“하여간에 이래서 인간들한텐 뭘 믿고 맡길 수가 없어.”
그는 조금 전 까지 동족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있던, 마족 소년이었다.
*
소년은 아직도 내가 상황 파악이 안된다 판단했는지, 얼굴을 구기며 비아냥거렸다.
“하기야, 용사가 떼로 덤벼도 못이긴 마왕을 겨우 둘이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방금 그건…”
“환각마법이야. 이 개자식이 즐겨 쓰는 마법이지.”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마왕을 향해 뻗은 손을 천천히 회전시켰다.
마치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소년의 손바닥에선 은은한 자줏빛 광채가 퍼져 나오고 있었고, 마왕의 배배 꼬인 몸에도 같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소년이 마족의 마법으로 마왕을 공격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년의 팔은 힘에 부친 것인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주체가 안될 만큼 덜컹거리는 손목을 반대쪽 손으로 부여잡으며 말했다.
“뭐, 이놈이 환각 마법 같은 얕은수를 쓴다는 것 자체가, 아직 완벽히 회복되지 못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지만,”
“… 너는 대체…”
“뭐 그런 거 아무래도 좋아. 야,”
소년은 건방진 태도로 내게 말을 걸었다.
“멍청하게 앉아 있지 말고, 저기 가서 저 여자나 깨워.”
“… 뭐?”
소년은 힘겨운 몸짓으로 간신히 턱짓을 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소년의 턱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방금 전의 나처럼 멍하니 서 있는 실비아의 모습이 보였다.
“… 실비아도, 환각에?”
“그래, 가까이 다가가면 베일까 봐 너 먼저 깨운 거야. 정신 차렸으면 빨리 가서 깨워.”
“그, 그래. 알았어.”
“나 지금 엄청 힘드니까. 서둘러. 빨리!”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을 짚었다.
“으악,”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입에선 거친 비명이 튀어나왔다.
살짝 녹아 구부러진 갑옷이 푹 익어버린 피부를 날카롭게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짝 들어 보인 팔의 피부는 뜨거운 열기에 짓물러져 있었다.
감염이라도 된다면 치명적일 상처겠지만, 바보처럼 환각에 속아버린 나에겐 불평할 자격 따위 없었다.
“젠장, 몸이… 너무 무거워.”
“애쉬, 괜찮아?”
“피아, 나 좀 도와줘.”
“그럼 당연하지, 어떻게 해줄까?”
나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겨드랑이 사이에 위차한 가죽끈을 내보였다.
갑옷의 앞과 뒤를 연결하는 끈이었다.
피아는 잠시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교하게 조준한 날카로운 바람으로 가죽끈을 끊어내었다.
나는 가슴팍을 파고드는 쇳조각을 단숨에 벗어던졌고, 피아는 동시에 내 몸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기를 끼얹어 화끈거리는 화상을 가라앉혔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실비아!”
실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조금 전까지 경험해봤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녀의 목소리는 먹먹한 잡음처럼 들렸을 뿐이었으니까.
게다가 눈 앞에 펼쳐진 광경과 머릿속을 쩌렁쩌렁하게 울려대는 그 신비한 목소리에 모든 신경을 빼앗기지 않았나.
지금 실비아 역시 무언가 자신의 정신을 빼놓는 광경에 사로잡혀 있을 게 분명했다.
“가자, 피아.”
피로와 부상으로 가득한 몸이지만 갑옷을 벗어던진 만큼 한결 가벼운 느낌이었다.
통증만 참아낸다면 문제는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실비아를 향해 달렸다.
“실비아, 정신 차…”
순간, 짧은 빛줄기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거의 동시에 날카로운 바람 역시 그 궤적을 따라 불었다.
“… 실비아?”
휙,
소름이 끼치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뒤늦게 귓가에 포착되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느낀 이 기묘한 현상이 무엇인지 나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제발 내 생각이 틀렸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토록 간절하게 기도해 본 적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피아…”
“애쉬.”
“아니지?”
“우리 좆됐어.”
피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거울은 없지만 분명 내 얼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로써 명백해졌다.
방금 그 빛과 바람과 소리는, 실비아의 참격이었다.
“…”
“시, 실비아, 나야.”
나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실비아를 향해 걸어서 다가갔다.
하지만, 나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검을 쥔 실비아의 팔도 점점 각도가 위로 솟고 있었다.
“나야, 애쉬.”
“… 애쉬?”
“응, 애쉬, 나야 실비아. 잘 봐봐.”
“애쉬는… 내가 지킬 거야…”
실비아는 멍한 눈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 젠장!”
나는 서둘러 주문을 외웠다.
거대한 흙벽이 대리석 바닥을 뚫고 솟아올랐으나, 그와 동시에 흙벽은 가로로 갈라져 미끄러지듯 옆으로 쏟아져 내렸다.
.
히든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