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93

       

       

       

       

       

       193화. 신뢰의 방식 ( 4 )

       

       

       

       

       

       밤은 짙은 어둠과 함께 다가온다.

       온 세상에 드리운 밤의 장막은 만물에 평등하게 내려앉아 까맣고 짙은 세상을 선사한다.

       

       가난한 이에게도, 부유한 이에게도, 강하고 약하다는 것에 무관하게.

       모든 생명의 눈을 가린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밤에게 사랑받는 이들이 있었다.

       

       촤자자작! 푸욱!

       

       아득한 먼 옛날, 그들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며 부르기를.

       

       오오, 밤의 귀족들이여.

       어둠 속에서 빛나는 눈동자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에서 이르기를.

       

       하얀 머리카락은 밤이 그들을 사랑하기에, 어둠 속에서 그들을 더욱 잘 찾기 위해서 선물하였다.

       붉은 눈동자는 밤이 실수로 그들의 눈을 가릴까 봐, 다른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선물했다.

       

       이들이 밤에만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소문에 신빙성을 더했다. 물론 근거 없는 낭설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밤에게 사랑받는 것은 틀림 없었다.

       

       촤아악! 푸슉! 

       

       짙은 어둠 사이로 붉은 눈동자 서른 쌍이 이글거린다.

       도깨비불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오싹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키, 히에엑?!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거냐아!!》

       

       촤악!

       

       발광하며 사방을 휘젓던 악마가 고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침묵했다.

       

       밤을 맞이한 그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어둠이 그들의 손이었고, 그림자가 그들의 발이었다.

       

       온 사방에서 가죽 자루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세등등하게 사기를 높이던 전사들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게 만들 정도로 살벌한 소음.

       

       그것은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켰다.

       

       “도,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나라고 알겠어…? 일단 우리 편인 것 같으니까, 조용히 기다리자고.”

       

       퉁명스러운 북부 전사의 어깨에 올라가 있던 음침한 여인도 활기를 되찾았다.

       미꾸라지처럼 움직여 망토에서 빠져나간 여인은 우물쭈물하며 전사 앞에 마주 섰다.

       

       밤의 장막은 짙었지만, 앞에 있는 사람의 윤곽을 알아볼 정도는 됐다.

       덕분에 북부 전사도 제 앞에 구부정하게 서 있는 여인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여인의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으잉? 뭐야! 아직 덜 아픈 모양이네, 그렇게 움직이는 거 보니까.”

       “저, 저어… 다, 다 나았어요…”

       “뭐?! 크게 말해! 안 들리잖아!”

       “사, 상처… 저저저, 전부…”

       “더 크고 자신 있게 말하라고!”

       “상!처! 전!부! 나!았!어!요!”

       “좋아! 이렇게 활기차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그런데 뭐? 상처가 벌써 나았다고?!”

       

       음침한 여인의 말대로, 그녀의 등은 까맣게 굳어가던 화상 자국과 수포들 하나 없이 깔끔했다.

       태양이 남긴 상처를 밤이 감싸 안은 것이다.

       

       “모두 죽여라! 더러운 오물들을 전부, 한 줌 핏물로 만들어 버려라!”

       

       악에 받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터져 나왔다.

       루샨 공작과 이야기하던 사내의 것이다. 그는 악마들이 햇빛에 죽어가는 동족들을 둘러싸고 비웃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붉은 눈동자에 무채색의 분노가 차오른다.

       

       손짓을 따라 그림자가 솟구치고, 뭉치면서 날카롭게 변한다. 더욱 얇고 뾰족하게.

       

       마치 한 송이의 꽃잎처럼.

       종이보다 얇고,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그림자는 피어나는 꽃망울이 되어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푸슈슉! 촤악! 촤자자작!

       

       흩날리는 꽃잎은 공평하게 죽음을 선사했다.

       웨어울프의 다리를 토막 내고, 악마의 가슴을 반으로 가른다.

       

       썩은 지푸라기가 쓰러지듯,

       붉고 까만 피가 소리 없이 흩날렸다.

       

       쿠구구구구ㅡ

       

       잠시 태양을 가렸단 일곱 개의 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검은 원의 가장자리에서부터 환한 빛이 일렁인다. 밤이 물러나고 있다.

       

       이를 확인한 밤의 일족들은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짧은 밤이 너무나 아쉽다는 것처럼.

       

       촤아악! 퍼억! 콰앙!

       

       잡아 뜯는 소리, 꿰뚫는 소리, 터지는 소리.

       온갖 소음이 들려온다. 전사들이 저도 모르게 흠칫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쿠구구구구.

       화악ㅡ!

       

       빛이 어둠을 밀어내며 세상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한다.

       

       “윽.”

       “어우, 내 눈. 으… 눈부셔.”

       

       세상이 색을 되찾았다. 순간 밝은 빛에 눈을 찌푸렸던 전사들은 이내 주위를 둘러보며 경악했다. 

       

       “이, 이게 도대체 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여섯 신 맙소사…”

       

       순백의 설원이 붉게 물들었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온통 피와 내장, 시체.

       터지고 찢기고 꿰뚫린 시체가 설원에 즐비하게 늘어섰다. 흐르는 핏물이 눈에 녹아들어 질척하게 발을 적신다.

       

       몇몇 살아남은 악마와 웨어울프는 전의를 상실한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이 참혹한 현장이, 고작 서른 남짓한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전사들의 머릿속에 공통으로 스친 생각.

       

       ‘이거… 적으로 만들면 위험하겠는데?’

       

       위협적이라는 평가였다.

       어둠을 맞이한 밤의 일족은 굉장히 위험하고, 강력했다.

       

       꿀꺽…

       

       전사들의 눈에 사뭇 경계심이 돌았다. 그들이 고대 다섯 종족의 일원이라고 해도, 인간이라면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방금까지 함께 싸웠던 이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 피곤하군.”

       

       그림자 속에서 하얀 머리의 사내가 비척비척 일어났다. 붉은 눈동자 아래에는 까만 그림자가 드리웠다.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

       마치 밤새워 일하고 다음 날 다시 일터로 향하는 농부의 그것이다.

       

       “졸려… 이제 그만 쉴래요…”

       “하아암- 열심히 일했는데. 이, 이제 가도 되는 거죠…?”

       “시선… 사람들이 자, 자자자자꾸 쳐다봐… 히이익. 집에 갈래요…”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얼굴은 기본이고, 그림자 속으로 숨는 이도 있다.

       방금까지 어둠 속에서 악마들을 학살한 이들답지 않은 모습.

       

       허나 일방적인 학살을 목격한 전사들과 백성들은 쉬이 경계를 풀지 않았다.

       

       전사들은 알게 모르게 적개심을 피워 올렸고,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밤의 일족은 비틀거리며 피곤을 호소했다.

       

       설원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펄럭- 펄럭-!

       

       적막을 꿰뚫고 어디선가 날갯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늦어 버린 건가? 너무 늦장 부렸군 그래.》

       “요, 용…?”

       “푸른 빛의 용… 설마 성도에서 엘프들과 함께 나타났다는 그 용인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베르가 내려앉았다. 

       

       몇몇 사람들은 이베르의 크기가 생각보다 작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문에서는 거대한 산과도 같은 크기의 용이라고 했는데, 저건 고작 저택 정도의 크기 아닌가.

       

       “하암ㅡ 뭐야. 도착했어?”

       《그래. 이미 재밌는 부분은 다 끝났지만 말이야.》

       

       용의 등에서 프리가가 빼꼼 고개를 내밀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기겁했다.

       주변에는 온통 창자와 시체가 가득했다.

       

       “우와악! 제기랄, 이게 다 뭐야!”

       《으흠. 아, 여기 있군. 아마 이것들이 한 짓이 분명하다. 왜 갑자기 밤이 되었나 했더니, 이것들 때문에 위대하신 분의 별자리가 움직인 거였나.》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던 이베르가 발톱으로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 끄집어 올렸다.

       그림자에 작게 파문이 일더니 한 여인이 끌려 나왔다.

       

       “히이익… 놔, 놔주세요…!! 잘못, 잘못했어요…!!”

       

       하얀 머리, 붉은 눈동자, 창백한 피부.

       굽은 어깨와 축 처진 다크서클. 근처 그림자에 숨어있던 밤의 일족이었다.

       

       붉은 눈망울에는 눈물이 맺혀 아른거렸고, 바둥거리는 팔다리는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베르의 손톱에 잡혀 버둥거리는 밤의 일족을 바라보는 프리가의 눈에 의문이 맴돌았다.

       하는 행동도 그렇고, 생긴 것도 그렇고.

       

       이 참혹한 학살을 벌일 수 있는 이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얘네들이 이 미친 짓을 벌였다고…?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원래 이것들은 기본적으로 무해한 녀석들이다. 게으르고, 음침하고, 말도 제대로 못 하지. 굴러다니는 먼지 같은 놈들이다.》

       “머, 먼지라니… 말이 시, 심하신ㅡ 히익…!”

       

       작게 반항하던 밤의 일족 여인이 이베르의 시선 한 번에 얌전히 찌그러졌다.

       

       이베르를 향해 인간들이 이목이 쏠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어둠을 부리며 수많은 악마를 학살한 일족인데, 무해하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현명하고 위대한 용이시여! 그게 어떤 뜻인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루샨 공작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그렇지 않아도 밤의 일족이 과할 정도로 학살을 벌인 탓에 곤혹스러워하던 차였다. 함께 싸우며 신뢰를 쌓으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이래서야 오히려 경계심만 늘지 않았는가.

       

       와중 용이 나타나 밤의 일족이 무해한 자들이라고 말해주다니.

       뜻하지 않은 기회였다.

       

       《흠… 특별히 알려주지.》

       

       시큰둥하게 바라보던 이베르가 선심 쓴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까 말한 그대로다. 이 녀석들은 게으르고, 빈둥거리기 좋아하고, 제 영역에서 나오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놈들이지. 거기에 남들과 대화도 잘 못하는 대인 기피증에 걸린 놈들이다. 어쩐 일로 이렇게 밖에 나왔는지 의문이군.》

       

       신랄하기 그지없는 평가!

       이베르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밤의 귀족이 아니라, 밤의 외톨이 아닌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이베르에게 붙잡힌 밤의 일족을 바라봤다. 다름 아닌 신화의 시대를 살았던 용이 하는 말이 아닌가.

       말의 무게가 달랐다.

       

       이베르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히이이익ㅡ!”

       

       한순간 수많은 사람의 시선에 노출된 밤의 일족 여인이 경기를 일으키며 눈을 감았다.

       오들오들 떨면서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 확실히 다른 이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

       

       “… 진짜 그런가 본데.”

       “허어. 정말로 대인 기피증이라고?”

       “거짓말 아니야? 설마 종족 통째로 대인 기피증에, 밖에 나가기 싫어할 리가 없잖아.”

       “용이 우리한테 거짓말을 한다고? 뭐가 아쉬워서 우리한테 거짓말을 해?”

       

       용기를 낸 몇몇 전사들이 그림자에 숨어있는 밤의 일족에게 다가갔다.

       그림자에 붉은 눈동자만 둥둥 떠다니는 모습은 어딘가 소름 끼치는 풍경이었지만.

       

       “크흠. 저기… 이봐요. 잠깐 나랑 말 좀 해봅시다.”

       “거기 계십니까? 제가 좋은 말씀 좀 전하려고 하는데요. 잠시 나와서 차라도 한 잔ㅡ”

       

       샤샤샥!

       

       말을 걸기 무섭게 눈동자들이 사라졌다. 

       머쓱해진 전사들이 머리를 긁적였다.

       

       유일하게 루샨 공작과 이야기하던 사내만이 모습을 나타냈는데, 그의 얼굴에도 피곤한 기색이 뚜렷했다.

       

       “… 하암. 공작님, 일단 저희는 잠시 쉬다 오겠습니다… 너무 오랜만에 열심히 돌아다녔더니… 몹시 피곤하군요.”

       “뭐, 뭐?”

       

       돌연 쉬러 가겠다고 말하는 사내. 루샨 공작이 드물게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갑자기? 이 상황에서?

       

       사내는 루샨 공작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스르륵 그림자로 사라져 갔다.

       루샨 공작이 당황하여 외쳤다.

       

       “어, 얼마나! 얼마나 쉬다 올 참인가!”

       “… 정말 조금만 쉬다가 오겠습니다. 진짜 조금… 아마 석 달. 조금 늦으면 반년 정도…”

       

       조금 쉰다는 것이 석 달?

       

       “허.”

       

       루샨 공작의 입이 떡 벌어졌다. 도대체 이들의 시간 감각은 어떻게 되먹은 것인지.

       그제야 대충 감이 잡혔다.

       

       저 멀리 까마귀 가면을 쓴 5호가 대신 부끄러움에 몸서리쳤다.

       

       그녀의 일족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긴 수명, 태양에 나갈 수 없는 몸, 어둠에 특화된 능력.

       

       이 세 가지가 어우러져 유례없는 은둔형 외톨이에 게으름뱅이가 탄생한 것.

       

       《석 달이면 정말 눈만 붙이고 올 참인가 보군. 먼지 주제에 제법 노력했어. 스스로 영역에서 나오려는 모습이 정말 장하군. 눈물이 날 지경이야.》

       

       유일하게 이베르만이 밤의 일족에게 공감했다. 심지어는 감격했다는 어투로 드물게 칭찬까지 했다.

       

       물론, 백 년도 못사는 인간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시간 감각이었다.

       

       “… 무해하기는 무해하네.”

       “그러게…”

       

       어둠 속에서 악마들을 학살하던 밤의 일족은, 그렇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무해한 종족으로 각인되었다.

       

       밤의 귀족에서 은둔형 외톨이, 게으름뱅이, 대인 기피증을 앓고 있는 이들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댓글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신선우’님!! 후원 정말로 감사합니다!!!
    ??? : 밤의 귀족은… 서비스 종료다..
    ??? : 에..?? 혼또…?!

    다음화 보기


           


I Install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I Install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방치형 무기 만들기 게
Status: Ongoing Author:
Out of boredom, I downloaded an idle weapon crafting game.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