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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3

    피곤해 보이는 한 고등학생이 쌀쌀한 공기를 맞으며 통학로를 바쁜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이상한 악몽을 꾸는 바람에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학생은 피곤함 때문인지, 한기가 교복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에 옷깃을 단단히 여미며 등굣길을 서둘렀다.

    그렇게 갈 길을 서두르는 도중, 길 한복판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어서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은 학교에 갈 때 꼭 지나가야 하는 쓸데없이 높은 계단의 입구 근처였다.

    계단이 워낙 가파르고 위험해서 미끄러져서 다치는 사람이 자주 생기는 곳이니, 아마 또 누군가가 서둘러서 계단을 내려오다가 넘어진 게 아닐까 싶었다.

    “이번에도 연쇄 살인 사건이래.”

    “정말?”

    하지만 피곤한 학생이 점점 현장으로 다가갈수록, 다른 학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그의 예상을 뒤집어 버리고 있었다.

    잔뜩 모여든 경찰과 사람들.

    길을 완전히 막아버릴 기세로 설치된 차단선.

    예상과 달리 좀 더 심각한 사건으로 보였다.

    요즘 뉴스나 소문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연쇄 살인’과 관련된 사건이겠지.

    마포구에서 저녁 6시를 넘어서 혼자서 돌아다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살인 사건.

    벌써 피해자만 10명이 넘어가는 대형 사건인 데다가 하루도 빠짐없이 새로운 피해자가 나타나자, 마포구 전체는 공포에 질려버렸다.

    학원과 학교는 물론 편의점까지 저녁 6시가 되기 전에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이런 사건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피곤한 학생마저 알게 될 정도였다.

    학교에서도 다들 무서워하는 분위기였지만, 피곤한 학생은 분명 한 때의 해프닝이라고만 생각했다.

    이 정도 관심과 수사력이 집중된 이상, 살인범이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지금까지 잡히지 않은 것이 의아할 뿐이었다.

    “하암.”

    피곤한 학생은 하품하면서 학생들이 잔뜩 모인 곳 뒤로 줄을 섰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귀찮은 줄서기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계단을 통해서 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라면, 긴 시간을 들여서 빙 돌아서 가야 했으니까.

    학교에 가기 위해서 무조건 통과해야 하는 계단.

    차단선 때문에 좁아진 인도.

    이 두 가지 이유로 학생들은 살인 현장의 차단선을 빙 돌아서 줄을 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점점 계단으로 다가갈수록, 흐릿해진 악몽의 한 장면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계단 위로 내리쬐는 노란색 보름달.

    핏물이 고인 웅덩이.

    그리고 핏물이 넘쳐서 흐르는 계단.

    거기서 나는 달을 올려다보며, 웃고 있었던 것 같았다.

    무심코 차단선이 쳐진 현장을 바라보자, 아무것도 없는 아스팔트 위로 피 웅덩이가 부글거리며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피 웅덩이 속에서 덩그러니 떠오른 목이 잘린 남자의 머리.

    숨쉬기 힘들 정도로 피 냄새가 퍼져 나오는 것 같아서, 학생은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잠을 못 자서 그래. 피곤한 거야.’

    그리고 눈을 다시 뜨자 피 웅덩이는 온데간데없었고, 어느새 다가온 커다란 헬멧을 뒤집어쓴 이상한 사람이 학생의 눈앞에 서서 말을 걸고 있었다.

    “학생, 어디 아픈 데라도 있어?”

    고개를 내려 보니, 명찰이 있었다.

    <오브젝트 협회 소속 연구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제대로 된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왜 헬멧을 쓰고 있는 거지?

    그나저나 결국 오브젝트 협회가 와버린 건가.

    하긴 이렇게까지 안 잡히는 범죄자라면 오브젝트일 가능성이 농후하겠지.

    “아뇨. 괜찮습니다. 잠을 못 자서 어지러워서 그래요.”

    “그래?”

    연구원은 약간 미심쩍은 목소리였지만 학생을 놓아주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멀어져갔다.

    살인 현장을 지나쳐서 계단을 끝까지 오르자,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전경이 탁 트이는 높은 풍경과 모여있던 학생들이 넓은 길에서 흩어지면서 느껴지는 해방감이었다.

    그러던 중, 굉장히 생소한 향기가 어디선가 흘러오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절대로 맡아볼 일이 없었던, 왠지 맛있는 향기.

    향기의 원천을 찾아 고개를 돌려보니, 살인 사건 현장 구석 골목에서 작고 황금색의 무언가가 학생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뚜방뚜방.

    예린이의 뒤를 따라서 계속 나아간 끝에 도착한 곳은 공사 중이었던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화려해진 지하실이었다.

    전과 달리 지하실의 입구에는 첨단 보안 시스템을 갖춘 입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입구 양옆을 장식하는 것처럼 멋들어진 황금 사신 부조가 있었다.

    환영하는 것처럼 양팔을 쫙 펼치고 해맑은 미소를 짓는 황금 사신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그야말로 입구에 걸맞은 조각!

    그 부조를 보고 황금 사신은 굉장히 좋아하면서 부조 앞으로 마구 달려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예린이와 내 쪽을 바라보면서 환영하는 것처럼 양팔을 펼치고 활짝 웃었다.

    커다란 부조랑 똑같은 자세, 똑같은 표정이었다.

    황금 사신의 환영을 받으며 입구의 보안 문에 도착하자, 보안 문 위로 조그마한 손바닥 모양이 잔뜩 찍혀있었다.

    내 손 크기의 손바닥부터, 미니 사신들의 손바닥까지.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예린이 쪽을 돌아보자, 예린이가 손바닥을 벽에 대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손바닥 모양 홈에 손바닥을 찍어봐.”

    그 말을 듣고, 내 키 높이에 맞춘 홈에 내 손바닥을 올려놓자,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보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지문 인식이랑 비슷한 방식으로 동작하는 문이었다.

    “사신이들을 위해 만든 휴양 시설이니까,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든 입구야!”

    요즘 들어서 예린이가 내 손바닥을 종이나 점토로 자주 찍어간다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네.

    원래 하루에 한 시간은 내 손바닥을 조물조물하는 예린이라서 이런 문을 만들고 있는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뭐, 사실 유령화로 들어가면 그만이라서 입구는 없어도 괜찮지만, 손바닥을 찍고서 들어가는 것도 조금 색다른 기분이기는 했다.

    보안 문을 통과하자, 휴게실처럼 꾸며진 방이 있었다.

    온갖 과자와 음료수가 배치된 휴게시설.

    미니 사신을 배려한 자그마한 의자와 미니 과자들도 잔뜩 보였다.

    미니 사신들이 좋아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자, 미니 사신들은 보안 문에 잔뜩 달라붙어서 놀고 있었다.

    미니 사신들은 미니 손바닥 홈에 손을 대면 열리는 문을 보며 해맑게 웃으며 좋아했다.

    줄까지 길게 늘어서서, 자동으로 열리는 문에 손을 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미니 사신이 한 번씩 문을 여닫으려면 굉장히 오래 걸릴 것 같네.

    나는 보안 문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미니 사신들과 이미 손바닥 놀이를 즐긴 미니 사신들을 데리고, 휴게실 너머로 나아갔다.

    휴게실 너머는 아름답게 꾸며진 복도가 있었다.

    은은한 하얀 빛이 내리쬐는 복도의 양옆으로는 나와 미니 사신의 모양을 본뜬 황금상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미니 사신들은 각자의 모습을 따라서 만든 황금상이 신기한 것인지, 황금상을 감싼 유리 벽에 얼굴을 바짝 붙인 채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나와 1:1 크기로 만들어진 황금상도 있었는데, 그 황금상을 보니까 까먹고 있었던 인형이 떠올랐다.

    푸른 소녀의 공방에서 주워 온 나랑 똑같이 생긴 인형들.

    그 인형의 숫자가 상당히 많아서 ‘세희랑 예린이랑 서아에게 주면 되겠네!’라고 생각만 한 채, 그대로 까먹어 버린 인형들이 생각났다.

    그 인형들과 비교하면 저 황금상은 확실히 어설퍼 보였다.

    그야, 푸른 소녀의 공방에서 발견된 인형들은 옆에 누워있으면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황금상들을 구경하며 뚜방뚜방 걸어 나가자, 복도가 끝나고 넓은 목욕탕이 나와 미니 사신들을 반겨주었다.

    청량한 소리를 내는 거대한 분수와 수영장처럼 널찍한 탕.

    그리고 시선을 한눈에 잡아끄는 거대한 황금 동상.

    몇 번을 봐도 감탄이 나오는 크기였다.

    황금상은 천천히 올려다보고 있었더니, 물기가 있는 바닥을 마구 뛰는 작은 발소리가 마구 울려 퍼졌다.

    ‘거대 엄마 황금상!’

    이상하게 황금상을 좋아하는 황금 사신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폴짝폴짝 뛰는 소리였다.

    천장을 메운 거대한 모자이크에서 형형색색의 빛이 내리쬐는 목욕탕을 둘러보고 있었더니, 미니 사신들은 자신들의 크기에 맞춰서 작게 만든 탕에 들어가서 놀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의외인 건 주황 사신이었다.

    솜뭉치 같은 머리카락을 잔뜩 가지고 있어서 물을 싫어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장 먼저 몸을 푹 담그며 탕을 만끽하고 있었다.

    물속으로 한없이 풀어헤쳐지며 퍼져나가는 하얀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 속에서 헤엄치며 노는 미니 사신들.

    그리고 그 모습을 싱긋 웃으면서 바라보는 하얀 아귀. 

    그러고 보니 요즘 아귀 사신 때문에 하얀 아귀를 안 뜯어먹었더니, 하얀 아귀가 표정이 밝네.

    왠지 마음속에서 심술이 살짝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

    목욕탕에는 장난칠 기회가 많겠지?

    히히.

    ***

    등교 시간이 지나가자, 확연히 지나가는 사람이 줄어들어 한산해진 살인 현장.

    그 현장에서 경찰과 협회 소속 연구원이 현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진짜,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경찰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은 사건 현장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몇 번이나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증거를 전혀 찾지 못하고 있었다.

    CCTV나 여러 가지 정황 증거를 활용해서 용의자로 보이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유치장에 집어넣어도, 다음날이 되면 어김없이 살인 사건이 벌어져 버렸다.

    그야말로 해결 방법이 없는 사건이었다.

    게다가 이번 피해자는 경찰.

    2인 1조로 다니라고 그렇게 강조했지만, 결국 혼자 있을 때 살인이 벌어지고 말았다.

    같이 조를 이루고 있었던 경찰은 계속 같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CCTV나 여러 가지를 확인해 봐도 그 주장은 신빙성이 없었다.

    그런 현장에서 협회에서 파견 나온 연구원은 정신 오염 측정기를 들고 다니면서 현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기, 협회 양반은 뭐라도 나온 거 있소?”

    “네. 잠정적으로 이 사건을 ‘오브젝트에 의한 살인 사건’으로 협회에 보고할 예정입니다.”

    고개를 들면서 대답하는 연구원의 손에는 ‘위험’ 단계를 가리키고 있는 정신 오염 측정기가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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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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