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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4

       ​

        “…정말로 곰이 되었구나.”

        ​

        “갑옷을 입으면 좀 커 보이긴 합니다.”

        ​

        ‘오래전에 곰탱이라고 불리기도 했었지.’

        ​

        그의 덩치가 기사 중에서도 큰 축에 속하니 자연스레 생긴 별명.

        ​

        채 반년도 되지 않아 사라지긴 했지만, 그에게는 퍽 그리운 별명이었다.

        ​

        “내 평생 갑옷을 입은 무인과 싸울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네.”

        ​

        “무림인들은 갑옷을 전혀 안 입으니 그럴 만 합니다.”

        ​

        “당연한 일 아니겠나? 관군이 아닌 자가 갑옷을 입는 건 지엄한 국법에 위배되는 일이라네. 반역자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으면 함부로 엄두도 내기 힘든 일이지.”

        ​

        윌리엄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어중간한 실력으로는 갑옷이란 게 의미가 없기도 하니.’

        ​

        맞고 살 가능성을 가늠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 대도 맞지 않는 법을 강구하는 것이 중원 무인들이었으니.

        ​

        허나 기사는 태생이 군인이요, 전장의 선봉에 서는 자이니 무림인들 처럼 공격을 피한다는 선택지는 드문 법.

        ​

        그렇기에 기사들은 공격을 피하는 것보다, 흘려내고 막아내는 법을 터득해 종자에게 가르쳤다.

        ​

        기사를 상징하는 중갑과 오러는 그것을 가능케 했으므로.

        ​

        “오랜만에 입으니 영 어색합니다.”

        ​

        “자네도 무림인이 되었다는 증거일세.”

        ​

        둘은 살가운 대화를 나누며 검을 뽑아 들었다.

        ​

        이미 수를 세는 것조차 번거로울 정도로 검을 부딪친 사이에, 신호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

        그저 검을 뽑으면 그것이 비무의 시작이고, 검을 집어넣으면 그것이 비무의 끝일 뿐.

        ​

        “맹주님. 평소보다 더 강하게 치셔야 할 겁니다.”

        ​

        “갑옷이 망가져도 책임 안 질 걸세.”

        ​

        윌리엄은 오랜만에 입은 갑옷의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발을 내디뎠다. 

        ​

        전질보.

        ​

        다리의 탄성을 이용해 돌진하는 보법.

        ​

        그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

        평소보다는 느리지만, 무시하기는 힘든 속도. 

        ​

        허나 함부로 공격하기엔 꺼려지는 돌진이었다.

        ​

        더 많은 질량이 추가된 그의 돌진은 잘못 받아내면 손목이 나갈 것 같이 묵직했으니.

        ​

        그렇기에 맹주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윌리엄을 관찰하기로 판단했다.

        ​

        조금 얍삽하기야 하지만, 갑옷을 입은 상태로 펼치는 무공이 어떤지 호기심이 동했던 탓도 있었다.

        ​

        판단을 마친 그는 보법을 펼쳐 윌리엄에게서 스무 걸음 정도 거리를 벌렸다.

        ​

        평소라면 충분히 따라갔을 거리였지만, 윌리엄은 추격하는 대신 멈춰서서 자신의 상태를 진단했다.

        ​

        ‘갑옷의 무게 때문에 움직임이 느려졌군.’

        ​

        눈에 띄게 느려진 속도.

        ​

        윌리엄은 근시일 내에 맨몸과 비슷한 수준으로 속도를 끌어올릴 필요성을 느꼈다.

        ​

        비무에서야 변명이 가능하지만, 목숨을 건 생사결에서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을 테니.

        ​

        “자네, 딴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게 아닌가? 아직 비무 중일세!”

        ​

        목을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검격. 

        ​

        당장이라도 목을 날려버릴 듯한 검격이 다가오자, 윌리엄은 손등을 들어 맹주의 검을 막아냈다.

        ​

        푸른 불꽃이 손등과 검 사이에 튀며 잠시 교착상태가 벌어졌다.

        ​

        강철로 된 장갑과 검의 충돌은 어느 쪽도 피해를 주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

        맹주는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나 검에 실린 기를 회수하곤, 황당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

        “갑옷을 입으니 더 튼튼해졌구먼?”

        ​

        “그게 갑옷 아니겠습니까.”

        ​

        “평소보다도 기의 흐름이 약한데 검강이 뚫지를 못하다니. 끄응…”

        ​

        “그런 무공이니 말입니다. 그럼 이젠 제 차례입니다.”

        ​

        “오게나.”

        ​

        다시 한번 땅을 박찬 윌리엄의 신형이 맹주를 향해 쇄도했다. 

        ​

        마치 성난 황소와 같은 돌진. 

        ​

        맹주는 유성보를 펼쳐 윌리엄의 돌진을 피해냈다. 

        ​

        갑옷을 입은 채로 펼치는 보법이 익숙하지 않아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한 탓에, 윌리엄은 아쉬운 표정으로 맹주를 바라보았다.

        ​

        “아무래도 적응을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갑옷을 입은 채로 보법을 펼치니 자세가 쉽게 흐트러지는군요.”

        ​

        “조금 더 발끝에 힘을 싣는 게 어떻겠는가?”

        ​

        “발끝에 말입니까?”

        ​

        “갑옷은 아주 무거우니, 보법을 펼치려면 보다 강한 힘으로 정교하게 움직여야 할 걸세. 다리를 좀 더 굽혀보는 것도 방법이라네.”

        ​

        보법의 완성도는 정교한 움직임에서 나오는 법.

        ​

        갑옷을 입은 상태에서의 보법은 맨몸 상태보다 더 힘차고, 더 섬세해야 하리라.

        ​

        “알겠습니다.”

        ​

        윌리엄은 다시 한번 땅을 박찼다. 전보다 땅을 박차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자, 맹주는 씨익 웃으며 한층 더 빨라진 윌리엄의 돌진을 피해 보법을 밟았다.

        ​

        “그걸세!”

        ​

        직선적인, 하지만 그렇기에 더 위협적인 보법.

        ​

        윌리엄은 맹주의 몸을 들이받을 기세로 달려가다 오른발로 바닥을 찍었다. 폭음과 함께 바닥이 움푹 파이고, 윌리엄의 몸에 급제동이 걸렸다.

        ​

        갑옷의 무게가 더해진 만큼 어지간한 힘으로는 방향을 선회하기 힘든 탓에 택한 고육지책.

        ​

        윌리엄은 전보다 다리에 더 힘을 실은 채로 유성보를 펼치는 맹주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

        “따라잡기 힘들군요.”

        ​

        “갑옷을 입고 나와 속도를 맞출 수 있으면 자네가 천하제일인일세.”

        ​

        유성보가 어떤 보법인가. 무림에서도 일절로 소문난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자랑하는 보법 아닌가. 

        ​

        그런 보법을 사용하는 맹주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따라가는 것만 해도 세간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낼 일일 터.

        ​

        하지만 당사자인 윌리엄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멈추어 섰다.

        ​

        “한동안 갑옷을 입은 상태로 보법을 펼치는 것을 집중적으로 연습해야겠습니다.”

        ​

        결국 갑옷을 입은 채로 펼치지 못하면 반쪽짜리 보법일 뿐. 윌리엄의 선언에 맹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이야기를 해놓을 테니 필요하면 이곳을 쓰게.”

        ​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

        “자네, 한 번만 때려도 되겠나?”

        ​

        나는 맹주님이 툭 쏘아붙인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

        ———————————–

        ​

        옷을 갈아입기가 귀찮아 갑옷을 입은 채로 해남관에 귀가한 나는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혜령이와 마주쳤다. 혜령이는 나를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

        “아저씨! 이게 아저씨가 전에 말했던 갑옷이에요?”

        ​

        “뭐…그렇지.”

        ​

        기사 갑주가 신기하게 느껴지는 걸까. 나는 내 주변을 빙빙 돌며 갑옷을 구경하는 혜령이를 바라보다 조용히 내게 다가온 목경이와 눈을 마주쳤다.

        ​

        “…잘 어울리십니다. 은공.”

        ​

        입가에 걸친 은은한 미소.

        ​

        바람을 타고 은은한 꽃향기가 내 코를 자극했다.

        ​

        씻고 나온 건가. 

        ​

        “이거 입고 있으면 엄청 불편할 것 같은데…입고 움직일 수 있는 거 맞아요?”

        ​

        “저거 입고 보법도 펼칠 수 있는데.”

        ​

        “보법 펼치다 넘어지고 그러는 거 아니예요?”

        ​

        “그렇게 안 되도록 연습해야지.”

        ​

        “은공.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

        “도와준다면야.”

        ​

        “저도 도와드릴게요!”

        ​

        “어떻게?”

        ​

        “저도 나름 천재 소리 들었거든요!”

        ​

        나이 생각하면 천재 맞긴 한데.

        ​

        근데 나랑 목경이는 초절정이잖아. 천재 소리 하기엔 좀 모양이 떨어지지 않나?

        ​

        “천재?”

        ​

        “저 절정고수거든요?”

        ​

        “미안하지만 난 초절정인데.”

        ​

        “저, 저도…”

        ​

        “아, 아무튼 저도 나름 후기지수 소리 듣고 살았거든요?”

        ​

        “그래그래.”

        ​

        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볼을 부풀린 혜령이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강철로 된 장갑을 껴서 그런지, 혜령이의 머리가 통쨰로 흔들렸다.

        ​

        “어지러워요오오오.”

        ​

        “아, 미안.”

        ​

        “사과의 의미로 무릎 꿇어봐요.”

        ​

        나는 혜령이의 말대로 무릎을 꿇고 혜령이를 올려다보았다. 혜령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갑작스럽게 얼굴을 들이댔다.

        ​

        “헤헤.”

        ​

        “혜, 혜, 혜령 소저…”

        ​

        볼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나는 내게서 떨어져 장난스럽게 웃는 혜령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

        “펭귄이 강아지가 되었구나.”

        ​

        “강아지라니…”

        ​

        “그만큼 귀엽다는 이야기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

        “그래요?”

        ​

        “아무튼, 슬슬 갑옷 좀 벗을 테니 나가 줄래?”

        ​

        내 말에 혜령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

        “나가야 해요?”

        ​

        “내 옷 벗는 거 구경하게?”

        ​

        “헤헤.”

        ​

        저 음흉한 눈길은 뭘까.

        ​

        나는 묘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는 혜령이와, 그 옆에서 쭈뼛대는 목경이를 보곤 곧장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

        “갑옷은 입는 게 엄청 복잡하네요.”

        ​

        “온몸을 감싸려면 복잡할 수밖에 없지.”

        ​

        몸을 최대한 보호하는 게 갑옷의 역할이니까.

        ​

        “이런 옷을 입고 전장에 나서다니…은공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

        “이런 걸 가지고 뭘. 그나저나 수련 상태는 어때?”

        ​

        “이제 검강은 자유자재로 꺼낼 수 있게 됐습니다.”

        ​

        “다행이네. 나머지는 비무하면서 알아보기로 하고…난 씻으러 갈 테니 다들 볼일 봐.”

        ​

        쉴 때는 쉬어야지.

        ​

        근 며칠간 경지를 최대한 끌어올린다고 맹주님과 끝없는 비무를 했기에, 정신과 몸 양쪽 다 피로가 누적된 상태.

        ​

        이제 푹 쉬고 명상을 좀 해야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오리라. 

        ​

        “아저씨, 씻겨드릴까요?”

        ​

        “됐다.”

        ​

        “칫.”

        ​

        혜령이가 혀를 차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욕실로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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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eval Knight in a Martial Arts Novel

Medieval Knight in a Martial Arts Novel

무협소설 속 중세기사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fter two years of being reincarnated as a medieval knight, he finally realizes that he's been reincarnated into a martial arts 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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