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곰이 되었구나.”
“갑옷을 입으면 좀 커 보이긴 합니다.”
‘오래전에 곰탱이라고 불리기도 했었지.’
그의 덩치가 기사 중에서도 큰 축에 속하니 자연스레 생긴 별명.
채 반년도 되지 않아 사라지긴 했지만, 그에게는 퍽 그리운 별명이었다.
“내 평생 갑옷을 입은 무인과 싸울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네.”
“무림인들은 갑옷을 전혀 안 입으니 그럴 만 합니다.”
“당연한 일 아니겠나? 관군이 아닌 자가 갑옷을 입는 건 지엄한 국법에 위배되는 일이라네. 반역자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으면 함부로 엄두도 내기 힘든 일이지.”
윌리엄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중간한 실력으로는 갑옷이란 게 의미가 없기도 하니.’
맞고 살 가능성을 가늠하는 것보다, 차라리 한 대도 맞지 않는 법을 강구하는 것이 중원 무인들이었으니.
허나 기사는 태생이 군인이요, 전장의 선봉에 서는 자이니 무림인들 처럼 공격을 피한다는 선택지는 드문 법.
그렇기에 기사들은 공격을 피하는 것보다, 흘려내고 막아내는 법을 터득해 종자에게 가르쳤다.
기사를 상징하는 중갑과 오러는 그것을 가능케 했으므로.
“오랜만에 입으니 영 어색합니다.”
“자네도 무림인이 되었다는 증거일세.”
둘은 살가운 대화를 나누며 검을 뽑아 들었다.
이미 수를 세는 것조차 번거로울 정도로 검을 부딪친 사이에, 신호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저 검을 뽑으면 그것이 비무의 시작이고, 검을 집어넣으면 그것이 비무의 끝일 뿐.
“맹주님. 평소보다 더 강하게 치셔야 할 겁니다.”
“갑옷이 망가져도 책임 안 질 걸세.”
윌리엄은 오랜만에 입은 갑옷의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발을 내디뎠다.
전질보.
다리의 탄성을 이용해 돌진하는 보법.
그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평소보다는 느리지만, 무시하기는 힘든 속도.
허나 함부로 공격하기엔 꺼려지는 돌진이었다.
더 많은 질량이 추가된 그의 돌진은 잘못 받아내면 손목이 나갈 것 같이 묵직했으니.
그렇기에 맹주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윌리엄을 관찰하기로 판단했다.
조금 얍삽하기야 하지만, 갑옷을 입은 상태로 펼치는 무공이 어떤지 호기심이 동했던 탓도 있었다.
판단을 마친 그는 보법을 펼쳐 윌리엄에게서 스무 걸음 정도 거리를 벌렸다.
평소라면 충분히 따라갔을 거리였지만, 윌리엄은 추격하는 대신 멈춰서서 자신의 상태를 진단했다.
‘갑옷의 무게 때문에 움직임이 느려졌군.’
눈에 띄게 느려진 속도.
윌리엄은 근시일 내에 맨몸과 비슷한 수준으로 속도를 끌어올릴 필요성을 느꼈다.
비무에서야 변명이 가능하지만, 목숨을 건 생사결에서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을 테니.
“자네, 딴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게 아닌가? 아직 비무 중일세!”
목을 향해 날아오는 날카로운 검격.
당장이라도 목을 날려버릴 듯한 검격이 다가오자, 윌리엄은 손등을 들어 맹주의 검을 막아냈다.
푸른 불꽃이 손등과 검 사이에 튀며 잠시 교착상태가 벌어졌다.
강철로 된 장갑과 검의 충돌은 어느 쪽도 피해를 주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맹주는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나 검에 실린 기를 회수하곤, 황당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갑옷을 입으니 더 튼튼해졌구먼?”
“그게 갑옷 아니겠습니까.”
“평소보다도 기의 흐름이 약한데 검강이 뚫지를 못하다니. 끄응…”
“그런 무공이니 말입니다. 그럼 이젠 제 차례입니다.”
“오게나.”
다시 한번 땅을 박찬 윌리엄의 신형이 맹주를 향해 쇄도했다.
마치 성난 황소와 같은 돌진.
맹주는 유성보를 펼쳐 윌리엄의 돌진을 피해냈다.
갑옷을 입은 채로 펼치는 보법이 익숙하지 않아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한 탓에, 윌리엄은 아쉬운 표정으로 맹주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적응을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갑옷을 입은 채로 보법을 펼치니 자세가 쉽게 흐트러지는군요.”
“조금 더 발끝에 힘을 싣는 게 어떻겠는가?”
“발끝에 말입니까?”
“갑옷은 아주 무거우니, 보법을 펼치려면 보다 강한 힘으로 정교하게 움직여야 할 걸세. 다리를 좀 더 굽혀보는 것도 방법이라네.”
보법의 완성도는 정교한 움직임에서 나오는 법.
갑옷을 입은 상태에서의 보법은 맨몸 상태보다 더 힘차고, 더 섬세해야 하리라.
“알겠습니다.”
윌리엄은 다시 한번 땅을 박찼다. 전보다 땅을 박차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자, 맹주는 씨익 웃으며 한층 더 빨라진 윌리엄의 돌진을 피해 보법을 밟았다.
“그걸세!”
직선적인, 하지만 그렇기에 더 위협적인 보법.
윌리엄은 맹주의 몸을 들이받을 기세로 달려가다 오른발로 바닥을 찍었다. 폭음과 함께 바닥이 움푹 파이고, 윌리엄의 몸에 급제동이 걸렸다.
갑옷의 무게가 더해진 만큼 어지간한 힘으로는 방향을 선회하기 힘든 탓에 택한 고육지책.
윌리엄은 전보다 다리에 더 힘을 실은 채로 유성보를 펼치는 맹주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따라잡기 힘들군요.”
“갑옷을 입고 나와 속도를 맞출 수 있으면 자네가 천하제일인일세.”
유성보가 어떤 보법인가. 무림에서도 일절로 소문난 변화무쌍한 움직임을 자랑하는 보법 아닌가.
그런 보법을 사용하는 맹주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따라가는 것만 해도 세간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낼 일일 터.
하지만 당사자인 윌리엄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멈추어 섰다.
“한동안 갑옷을 입은 상태로 보법을 펼치는 것을 집중적으로 연습해야겠습니다.”
결국 갑옷을 입은 채로 펼치지 못하면 반쪽짜리 보법일 뿐. 윌리엄의 선언에 맹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야기를 해놓을 테니 필요하면 이곳을 쓰게.”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자네, 한 번만 때려도 되겠나?”
나는 맹주님이 툭 쏘아붙인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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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갈아입기가 귀찮아 갑옷을 입은 채로 해남관에 귀가한 나는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혜령이와 마주쳤다. 혜령이는 나를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저씨! 이게 아저씨가 전에 말했던 갑옷이에요?”
“뭐…그렇지.”
기사 갑주가 신기하게 느껴지는 걸까. 나는 내 주변을 빙빙 돌며 갑옷을 구경하는 혜령이를 바라보다 조용히 내게 다가온 목경이와 눈을 마주쳤다.
“…잘 어울리십니다. 은공.”
입가에 걸친 은은한 미소.
바람을 타고 은은한 꽃향기가 내 코를 자극했다.
씻고 나온 건가.
“이거 입고 있으면 엄청 불편할 것 같은데…입고 움직일 수 있는 거 맞아요?”
“저거 입고 보법도 펼칠 수 있는데.”
“보법 펼치다 넘어지고 그러는 거 아니예요?”
“그렇게 안 되도록 연습해야지.”
“은공.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도와준다면야.”
“저도 도와드릴게요!”
“어떻게?”
“저도 나름 천재 소리 들었거든요!”
나이 생각하면 천재 맞긴 한데.
근데 나랑 목경이는 초절정이잖아. 천재 소리 하기엔 좀 모양이 떨어지지 않나?
“천재?”
“저 절정고수거든요?”
“미안하지만 난 초절정인데.”
“저, 저도…”
“아, 아무튼 저도 나름 후기지수 소리 듣고 살았거든요?”
“그래그래.”
나는 장갑을 낀 손으로 볼을 부풀린 혜령이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강철로 된 장갑을 껴서 그런지, 혜령이의 머리가 통쨰로 흔들렸다.
“어지러워요오오오.”
“아, 미안.”
“사과의 의미로 무릎 꿇어봐요.”
나는 혜령이의 말대로 무릎을 꿇고 혜령이를 올려다보았다. 혜령이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갑작스럽게 얼굴을 들이댔다.
“헤헤.”
“혜, 혜, 혜령 소저…”
볼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나는 내게서 떨어져 장난스럽게 웃는 혜령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펭귄이 강아지가 되었구나.”
“강아지라니…”
“그만큼 귀엽다는 이야기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그래요?”
“아무튼, 슬슬 갑옷 좀 벗을 테니 나가 줄래?”
내 말에 혜령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가야 해요?”
“내 옷 벗는 거 구경하게?”
“헤헤.”
저 음흉한 눈길은 뭘까.
나는 묘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는 혜령이와, 그 옆에서 쭈뼛대는 목경이를 보곤 곧장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갑옷은 입는 게 엄청 복잡하네요.”
“온몸을 감싸려면 복잡할 수밖에 없지.”
몸을 최대한 보호하는 게 갑옷의 역할이니까.
“이런 옷을 입고 전장에 나서다니…은공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런 걸 가지고 뭘. 그나저나 수련 상태는 어때?”
“이제 검강은 자유자재로 꺼낼 수 있게 됐습니다.”
“다행이네. 나머지는 비무하면서 알아보기로 하고…난 씻으러 갈 테니 다들 볼일 봐.”
쉴 때는 쉬어야지.
근 며칠간 경지를 최대한 끌어올린다고 맹주님과 끝없는 비무를 했기에, 정신과 몸 양쪽 다 피로가 누적된 상태.
이제 푹 쉬고 명상을 좀 해야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오리라.
“아저씨, 씻겨드릴까요?”
“됐다.”
“칫.”
혜령이가 혀를 차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욕실로 향했다.
일요일…어이하여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