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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4

       즐거운 때는 찰나와 같다고 하였나.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여행의 끝이 다가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출항 직전 선착장에서 장종원이 씁쓸히 웃었다. 그의 얼굴에서 외로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따로 친구가 없나 보네.’

         

       그럴 만도 하다. 우리는 조건을 보지 않고 누구와 친해질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니까.

         

       장종원은 그럴 마음이 없다 하여도 자연스레 상대는 그의 눈치를 보게 됐을 것이다. 또한, 자본을 노리고 들러붙는 악질도 있을 거고.

         

       그런 면에서 우리가 반가워 환대해준 걸지도.

         

       “다음에 또 올 테니 걱정 마.”

       “그래…….”

         

       나는 장종원의 어깨를 토닥이며 피식 웃었다.

         

       “네 이름은 따로 귀빈 취급해 놓을 테니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편지 보내. 페델리안의 안이라면 우리가 못 들어주는 건 없으니까.”

         

       제국의 실세 데카르트. 심지어 황제인 라자 페델리안도 우리 편이다.

         

       장종원이 원한다면 귀족 작위를 얻어주는 것도 모자라, 그의 능력을 생각하여 백작위로 받아낼 수 있겠지.

         

       “그럼 간다.”

       “그래. 다음에 보자.”

         

       정겨운 악수 이후 걸음을 옮겼다. 승선하여 갑판 위로 올라오니 프란체가 싱긋 웃으며 반겨주었다.

         

       “인사는 다 했니?”

       “응. 다음에도 오라더라.”

       “좋은 친구구나. 이렇게까지 환대해주고.”

       “그러게 말이야. 보답은 꼭 해줘야지.”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이번 관광은 정말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냥 식당을 둘러봐도 됐는데, 자신이 음식을 직접 대접해준 것도 모자라, 그가 진행하는 문화 사업까지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으니까.

         

       ‘대단하긴 했지.’

         

       굶고 있는 화가들을 대거 채용. 그들과 협력하여 본인이 만든 소설을 만화로 만들어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환영 마법사들을 고용. 아예 숙소를 만들어주고 연구에 필요한 설비들을 지원하는 계약까지.

         

       그들은 연구에도 도움을 받고 매주 주말마다 환영 마법으로 그 이야기를 환영을 통해 보여주기만 하면 됐다.

         

       ‘여기서 창작물 사업을 할 줄이야.’

         

       대단하긴 하다. 자본을 기반으로 한 여유도 있었겠지만.

         

       “공랴… 진! 다음에도 놀러와라! 기다리고 있을게!”

         

       갑판 난간에서 아래를 바라보자 장종원이 격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대로 헤어지는 게 정말로 아쉬운 듯했다.

         

       “우리가 많이 반가웠나 보네.”

       “종원은 친구를 사귀기 쉽지 않으니까.”

         

       아래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음 같아선 페델리안에 초대하고 싶은데.’

         

       여러 이유로 불가능했다. 그는 현재 사업에 집중해야 할 때인지라.

         

       “출항하겠습니다!”

         

       우우우웅!!!

         

       출항의 신호를 알리는 고동이 울렸다. 나는 장종원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어준 뒤 자리를 옮겼다.

         

       제국으로 도착하기 전에 할 일이 있다.

         

         

       * * *

         

         

       유람선의 짐칸.

         

       먼지로 가득해서 호흡이 힘들다. 불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하기까지 하다.

         

       대부분 짐을 싣는 칸이었지만, 내 요구로 인해 한 자리가 비게 되었다.

         

       그곳에는 유람선을 습격한 해적의 선장. 스칼렛 비스콘티가 묶여 있었다.

         

       덜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가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부라렸다.

         

       “듣자 하니 진 데카르트라던데? 굳이 나를 따로 잡아 온 걸 보니 네놈도 다른 남자들과 다를 바 없군. 짐승 같은 놈.”

         

       보자마자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조용히 그녀를 굽어봤다. 일단 들어나 보자.

         

       “뭘 모른 척하는 거냐? 내 얼굴을 보고 따로 잡아둔 거잖아! 대체 내게 뭘 시키려는 거지?!”

         

       철컹! 철컹! 그녀의 발목과 손목에 묶인 쇠사슬이 격하게 흔들렸다.

         

       “뭐라는 거야, 노란 감자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나도 모르게 생각으로만 하던 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노, 노란 감자?”

       “그래, 노란 감자.”

         

       이전 프란체의 화를 풀어줄 때도 말했지만, 나는 그녀 이외의 여자는 감자로밖에 안 보인다. 말하는 감자.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거 같으니 정정해주지.”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스칼렛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심히 일렁였다.

         

       “내가 너를 이렇게 잡아둔 이유는 한 가지야. 네가 유용한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이지. 그것도 특이한 성질을 띠고 있는.”

         

       장점이 많은 빛 속성이라면 여러 방면에서 많은 도움이 될 거다. 그 역할도 잘 수행할 수 있겠지.

         

       “…나를 어떻게 할 셈이지?”

       “너를 우리 가문에서 고용할 거다.”

         

       스칼렛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뭐? 미친 건가?”

       “네가 저지른 죄를 알아봤다.”

         

       의문은 가뿐히 무시해주고. 드르륵, 의자를 끌어와 그녀의 앞에 앉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가장 많은 건 수송선 약탈. 그 외에는 관료나 귀족을 인질로 잡아 몸값 받아내기.”

         

       단순히 해적들이 저지르는 범죄에 불과했다만, 그녀에게는 여타 해적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런데 네가 절대 하지 않는 게 있더군. 노인과 아이, 여성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 먼저 저항하며 싸움을 걸어오지 않는 이상 목숨을 함부로 가져가지 않는다는 점.”

         

       이런 해적은 보기 드물다. 무법자면 무법자답게 갈 것이지, 뭐하러 선을 지키고 있나.

         

       “이유가 있나?”

         

       도끼눈을 뜬 채 스칼렛을 노려봤다.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대답했다.

         

       “이유랄 것도 없지. 마굴에 살고 있다고 해서 꼭 마물이 되라는 법이 있나? 나는 마물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웃기는 대답이었다. 마치 범죄자들이 자신은 사정상 어쩔 수 없이 이 길에 빠졌다는 것처럼.

         

       “남들 눈에는 어차피 똑같은 해적인데.”

         

       노란 감자 아니랄까 봐 감자들이 말할 것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아무튼, 타 해적과 달리 이력이 비교적 가벼워 우리 데카르트 수용소에서 받는 거로 했다. 제국으로 가면 꼼짝없이 판옵티콘에 갇힐 처지였는데, 잘됐군.”

         

       그 말에 스칼렛은 칫,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짜증이 가득했다.

         

       “내가 네게 맡길 건 한 가지야. 우리 가문의 그림자가 되어라.”

         

       그림자. 한 마디로 원래는 내가 하던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할 사람이다.

         

       “지금은 조용해도 데카르트에는 수많은 적이 생길 거다. 제국이 가진 권력의 최정점이니까.”

         

       나중에는 내 존재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길 거다. 나는 예전과 달리 귀족이라는 틀에 묶여 섣불리 움직일 수 없으니까.

         

       그런 면에서 범죄자 신분이자 높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스칼렛 비스콘티는 적임자였다.

         

       “나보고 건방진 귀족을 처리하라는 건가?”

       “정확히 알아들었군.”

       “허, 내 무엇을 믿고?”

         

       어깨를 으쓱이곤 비릿하게 웃는 스칼렛. 나는 조용히 카자르에게 받은 구속구를 짓눌렀다. 초록빛으로 반짝이던 수정이 빛났다.

         

       “크으윽…!”

         

       스칼렛이 이를 악문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 과도하게 하진 않았다. 저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나도 알고 있었으니.

         

       “네가 저항할 방법은 없어.”

       “큿…….”

         

       휙.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긴 금발 머리가 찰랑거렸다.

         

       “아무튼, 이는 너한테 좋은 선택지라고 생각하는데? 정당하게 봉급도 줄 거고 가문의 기사 취급도 해줄 거다.”

         

       그녀는 입술을 짓이길 뿐 말이 없었다. 나는 잠시 기다리다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내저었다.

         

       “뭐, 싫으면 판옵티콘으로 가든가. 딱히 붙잡진 않겠다.”

         

       등을 돌리며 아, 하고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네 특성상 판옵티콘으로 수용되면 잠도 못자겠군. 더러운 시선을 견디고 매일 밤 몸을 지켜내야 하니까.”

         

       인간의 밑바닥 중 가장 심연이라 말할 수 있는 판옵티콘이다. 그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건 버틸 수 없을 터.

         

       이쯤에서 다시 제안.

         

       “마지막으로 묻지. 우리와 함께할 건가? 네가 할 일은 그저 데카르트의 적을 처리하는 것밖에 없다.”

         

       스칼렛이 조심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내 부하, 선원들은 어찌됐지?”

       “운이 좋은 놈들은 살았겠지.”

       “그게 무슨…?”

       “네 선박을 침몰시켰다.”

       “설마 녀석들까지!?”

       “그래.”

         

       입이 살짝 벌려진 채 눈이 커졌다.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새파랗게 질린 스칼렛의 얼굴이었다.

         

       “잔혹하다고는 말하지 마라. 너희들도 해적인 이상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잖나?”

         

       범죄자, 무법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들.

         

       “그래서, 제안은 어쩔 거지?”

       “…추잡하게 나 혼자 살라는 건가.”

       “…….”

         

       범죄 집단인 만큼 자신만을 생각하는 콩가루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정이 있었나.

         

       “우리는 전부 더러운 해적이었지만 사정이 없는 녀석은 없었다. 파티안은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손을 털고 결혼을 약속했지. 루샨은 병든 어머니의 치료비를 다 마련해서 해적을 그만둘 예정이었고.”

         

       스칼렛은 조용히 자신의 선원들 이야기를 읊었다. 딱히 감상은 들지 않았다.

         

       “레단샤는 고향으로 돌아가─”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나는 그녀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제안을 받을 건지, 말 건지나 대답해라.”

       “…조건이 있다.”

       “조건?”

         

       얘는 지금 자기 위치를 알고 있는 건가? 나는 고개를 내젓곤 까딱였다. 일단 말은 해보라는 의미였다.

         

       “우리 비스콘티 선원들이 해적이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모두 책임질 순 없지만, 한 때 그들의 선장으로서 이 정도는 해주고 싶다.”

         

       하찮은 해적들에게도 명예는 있다는 건가. 웃기는 상황이다. 근데 뭐,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목숨을 잃었으니까.

         

       “알겠다. 그 정도는 해주지.”

       “…그럼 조건을 받아들이겠다.”

         

       이거로 교섭은 끝. 데카르트 대신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할 청소부를 얻었다.

         

       “자세한 건 저택에 도착하고 알려주지.”

         

         

       * * *

         

         

       볼 일이 끝난 나는 일행에게 돌아왔다.

         

       “왔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내실 입구에서 프란체가 반겨주었다.

         

       “일은 끝났어. 근데 왜 혼자야?”

       “다들 잠들었어. 케일만 일어나 있네.”

         

       하긴, 잠도 줄여가며 실컷 놀았으니 피곤할 만도 하다. 이 얘기는 저택으로 돌아가서 해야겠군.

         

       “일단 바닷바람이 차가우니 들어가자.”

         

       그녀의 손에 이끌려 지정된 내실로 들어와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프란체는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복귀구나.”

       “그러게. 시간이 참 빨라.”

         

       나는 프란체의 어깨에 손을 올리곤 더욱 품으로 끌어당겼다.

         

       “여행은 어땠어?”

       “재밌었어.”

       “다음에도 오고 싶을 만큼?”

       “응.”

         

       프란체가 배시시 웃었다. 환한 미소에 거짓은 없었다.

         

       “계속 이렇게 평화로웠으면 좋겠어.”

       “…….”

       “아무런 걱정 없이 느긋하게.”

         

       그녀의 사소한 바람에 나는 따스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붉은색의 긴 머릿결. 꽃내음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걱정 마. 예전처럼 복잡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혹시라도 우리를, 프란체를 건드는 놈이 있다면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게 할 예정이다.

         

       그 중심에는 이번에 데려온 스칼렛 비스콘티가 있는 거고.

         

       ‘인원은 소수 정예로 차근차근 늘려가야겠지.’

         

       정보 취득은 셀다스의 엑시드에게 맡기면 될 거다. 그는 이제 데카르트의 산하 귀족이라 하여도 무방하니까.

         

       ‘이 부분은 확실하게 해야지.’

         

       프란체와 함께하는 이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

         

       “왜 그리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어?”

         

       내 볼을 콕콕 찌르는 프란체. 나는 바로 표정을 풀고 싱긋 웃었다.

         

       “내가 심각한 표정이었나?”

       “그래.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크흠…….”

         

       나의 속마음을 완벽하게 읽고 있었군.

         

       “아무튼, 진? 오늘은 모처럼 조용한 단둘의 시간인데…….”

         

       프란체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내 가슴팍을 더듬었다. 이는 그녀가 주는 신호다.

         

       “그러네.”

         

       나는 자연스레 프란체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는 늘 그렇듯 웃으며 내게 입술을 맞춰왔다.

         

       절대 잊지 못할 신혼여행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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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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