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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5

       꼬박 하루가 지났다. 수도는 여전히 활기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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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는 그쳤지만 구름 낀 날씨가 계속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올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

       도로들은 뱀처럼 뒤틀린 지 오래였다. 아예 부서진 곳도 많았다. 수도에 있는 아크등 중 절반은 깨진 상태였다.

       ​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길가에 마차 하나가 정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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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자님들, 멀미는 하지 않으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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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남자가 마차에서 먼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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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뒤로 두 소년이 내린다. 남자는 소년들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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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듣던 대로 심각하군요.”

       ​

       두 황자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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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탁이네. 지금 믿을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토츠펠 공작도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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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리온이 고개를 내저었다.

       ​

       “그 여자는 영 아니더군. 몰래 사병을 거느리던 것에서 이미 눈 밖에 내보냈어.”

       “혹시 어린 시절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아버님 앞에서 스태프를 꺼내고 돌아다니던데 알 법도 하지.”

       ​

       남자, 레너윌 하스펠트는 허허 웃었다. 입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눈은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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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랜튼, 아르가나가 죽었단 말씀이시지요.”

       “블랜튼은 황실에 숨어든 마수였다. 정확히는, 토벌당한 거지.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

       레너윌이 고개를 끄덕였다.

       ​

       “여하튼 급한 일부터 처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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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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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너윌은 1황자를 새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자마자 일부 대신들이 반대했다.

       ​

       황제가 황태자로 점지한 건 2황자인데, 왜 감옥에 있던 1황자를 황제로 앉히느냐는 이유에서였다.

       ​

       그러나 레너윌의 의지는 확고했다.

       ​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하스펠트 공자, 아아악……!”

       “현 황실에서 결정한 일이다. 뭘 반대하고 마시고 할 거 있나?”

       “그렇다고 생전 폐하의 어명을 거스르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다!”

       “선대께선 마수에게 조종당하셨다.”

       “그리 얘기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믿을 것 같……!”

       “달아.”

       ​

       레너윌은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했다. 알고 보니 대부분이 마수와 연루되어 있던 자들이었다.

       ​

       이는 공문서를 보며 확인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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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 죄다 위조가 되어있군.’

       ​

       황실에 마수가 숨어들었으니 모든 문서를 의심해야 했다. 레너윌은 최대한 중요한 문서 위주로 검수했다.

       ​

       여러 분석관을 데리고 확인한 결과, 필체가 어긋나거나 인장이 잘못 찍힌 부분이 많았다. 이를 바탕으로 문서가 작성된 날짜, 장소, 종이의 공급처를 전부 따졌다. 여기까지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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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 모든 걸 알아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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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뫼스바이어 자작, 제국을 배신하다 걸린 기분이 어떠시오?”

       “나, 나는 배신하지 않았다!”

       “마수가 확정된 블랜튼 공작과의 유착이 있더군. 어디 보자, 최초 접견은 983년 10월 4일…. 국방부에서 블랜튼과 함께 요호족 마을을 사찰, 그리고 습격. 당해 11월 27일, 포획한 수인들을 노예로 만들어 엘랑카야로 이송….”

       “거, 거짓이다! 감히 네가! 공작이 어떻게 황실의 문서에 손을 대려 하느냐! 이건 조작……!”

       ​

       레너윌은 피식 웃었다.

       ​

       “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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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귀족만 열일곱에 달했다. 전부 블랜튼 공작이 무언가 할 때마다 붙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레너윌은 그들을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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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걸로 끝낼 순 없었다. 아직도 다뤄야 할 문제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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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머, 너무 막 나가시는 거 아닌가요?”

       ​

       업무 중. 토츠펠 공작이 찾아와 능청을 떨었다. 레너윌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펜을 놀렸다.

       ​

       “공포정치를 하시면 민중이 두려워합니다.”

       “농담은 삼가시오. 시기가 엄중하니.”

       “저는 그저, 충고를 드리고 싶었을 뿐이랍니다.”

       ​

       토츠펠은 큭큭 웃으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그녀가 다리를 꼬며 레너윌을 쳐다보았다. 뭉근한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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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보면 유혹이었다. 철저히 계산하고 벌이는 유혹.

       ​

       토츠펠은 미망인이었고, 레너윌 또한 젊은 시절 정부를 잃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

       “저도 좀 보시고 쉬엄쉬엄 하시지요. 어때요, 잠깐 차나 하시는 게…….”

       “당신 가문과 규합할 생각 없소.”

       “어머머, 망측하여라.”

       ​

       토츠펠은 손거울을 꺼내보며 립스틱을 한층 더 진하게 발랐다. 이젠 자신의 의중을 숨기지 않았다.

       ​

       “두 공작이 무너진 상황이죠. 지금이라면 황권도 약해요. 어떠세요, 저희 둘이 힘을 합치는 것이…….”

       ​

       그러나 레너윌은 꿈쩍도 하지 않고 앞일을 생각했다. 토츠펠은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

       “저기요, 당신. 제 말 듣고 있나요?”

       “……토츠펠 공작.”

       ​

       달깍. 레너윌이 깃펜을 내려놓았다. 그는 곧 시가를 물며 눈을 흘겼다.

       ​

       스피넬을 박아넣은 듯한 눈동자. 그 눈동자 깊숙한 곳에선 은은한 분노가 피어오른다.

       ​

       “당신, 이 시국에 그런 말을 하고 싶소?”

       “……예?”

       “나라가 엄중한 상황인데 그런 소리가 나오느냔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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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츠펠이 그러하듯, 하스펠트 가문도 제 의중을 숨기지 않았다.

       ​

       “우리 가문의 모든 구성원은 두 가지 목표만을 가슴에 품고 살지. 하나는 마수의 절멸, 다른 하나는 제국의 영원. 그 외에는 과분한 돈도, 권력도 필요 없다는 것이 내 신조요.”

       ​

       돈과 권력이라면 이미 충분히 얻었다.

       ​

       마수를 잡아 마석을 팔면 돈이 되었고, 하스펠트는 그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벌벌 떨 만큼 위세가 높다.

       ​

       꽈악. 하스펠트가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

       “오로지 필요한 건 명예. 귀족으로서의 드높은 자긍심과, 황실을 모실 충의를 뒷받침할 명예라.”

       ​

       레너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문서 하나를 작성한 뒤였다.

       ​

       새 황제가 임명할, 새로운 내각의 조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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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은, 하스펠트 가문은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되오. 그리고 그건 토츠펠, 당신네 가문도 마찬가지고.”

       “…….”

       “허튼 권력욕에 취하여 지금 있는 것까지 잃으려고 하지 마시오. 후대에 볼썽사납다는 소리 듣기 싫으면.”

       ​

       덜컥.

       ​

       레너윌은 그대로 집무실을 나왔다. 황성에 입궁한 뒤 곧바로 품에 안은 조직도를 알리온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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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고가 많네.”

       ​

       꾸벅. 레너윌은 고개를 숙인 뒤 다음 업무를 말했다.

       ​

       “폐하, 장례 절차는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그대 의견부터 들어보고 싶소.”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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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선대의 이야기가 섞여 있다 보니까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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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대한 검소하게 하시지요.”

       “예산을 아끼기 위해서?”

       “예, 그렇습니다.”

       “문제없네. 나중에 국가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 재차 치러도 상관없으니.”

       ​

       알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한데, 구체적으로 어느 계획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 묻고 싶군.”

       “알겠습니다.”

       ​

       레너윌과 알리온은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대화를 나눴다. 오고 간 말들을 두 줄로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

       하나. 국토재건을 위한 기초자금을 확충하여 인프라를 복구하고 경제를 다시 쌓아올린다.

       

       둘. 반타 토터스에게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게 치료비, 장례지원금, 재난지원금을 주어 민심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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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 가지가 되어야 민중이 황실을 지지하고 나라가 안정을 되찾을 겁니다.”

       “과인도 그리 생각하네. 내 믿고 맡기지.”

       ​

       그 뒤로도 일만 해댔다. 잠? 그런 건 죽어서 자면 그만이다. 당장 한시가 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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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다가 오십견이 또 오겠군.’

       ​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샐녘이었다. 하루를 꼬박 새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레너윌은 멈추지 않았다.

       ​

       슬슬 검문소로 갈 시간이었다.

       ​

       검문소.

       ​

       보통은 출입국관리소를 부르는 또다른 말이었다. 그러나 레너윌이 가는 검문소는 그런 것과는 결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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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틸레트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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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검사하고 질문하는 곳.

       ​

       레너윌은 임시로 설치한 검문소에 발을 디뎠다. 어깨를 풀며 자리에 앉는다. 곧 창구 너머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실눈인 것이다. 그러나 퀭한 몰골이라는 건 알겠다.

       ​

       윤기 넘치던 잿빛 머리카락은 더는 없었다. 여자는 얼굴을 감싸며 한숨만 픽픽 내쉬었다.

       ​

       “헤를라인 백작.”

       ​

       레너윌이 입을 열었다.

       ​

       “내 하나 물어보지.”

       ​

       ​

       **

       ​

       ​

       사태가 끝난 직후.

       ​

       에테르는 갈 곳이 없었다. 일단 도망쳐 나오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

       일단 근처 숲으로 몸을 피했다. 정령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발악이었다.

       ​

       근처 냇가에서 목을 축였다. 산딸기를 몇 개 뜯어먹고 아무 돌에나 앉았다.

       ​

       빗물에 홀딱 젖어 목 근처가 답답했다. 에테르는 목도리를 벗어서 물기를 쭉 짜냈다.

       ​

       “…….”

       ​

       흰색 목도리. 분명 누군가가 줬는데, 기억이 안 난다.

       ​

       “어디서 받았더라?”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그런데도 무언가, 이 목도리를 보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횡격막 근처가 답답해서 자꾸만 팍팍 치게 된다.

       ​

       일단 한숨도 돌렸겠다. 에테르는 상황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

       ‘그 요호족 꼬맹이, 그리고 헤를라인 교수는 잘못이 없다.’

       ​

       끝까지 자신을 변호했던 이들. 그들에게까지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

       그런데.

       ​

       – 모든 종족은 각자 연대책임의 의무를 진다.

       ​

       어느 때부턴가 그런 환청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 나약한 것, 나약하여 일을 막지 못하거나 그르친 것. 그 자체가 죄악이라. 약자는 태어난 것부터가 죄다.

       ​

       마왕의 목소리였다.

       ​

       ‘1천 년도 더 되었군.’

       ​

       정겨우면서도 역겨운 음색.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모양이다.

       ​

       기억 속 마왕은 종족 간의 우열을 부르짖던 존재였다. 금안족은 위대하고, 다른 종족은 미개하다. 그런 사상을 주입하며 당시 핍박받던 각지의 금안족을 규합하였다.

       ​

       에테르는 그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그를 따르는 신도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

       역설적이게도, 마왕의 오른팔이었던 소녀는 마지막까지 마왕의 생각을 의심했다.

       ​

       ‘이젠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

       그냥 다 날려버리고, 세상을 리셋하면 얼마나 좋을까.

       ​

       에테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략적인 방침은 정했다.

       ​

       인간이고 뭐고, 자신의 고유마도를 완성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

       그렇게 생각한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쌉싸름한 충동이 그녀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

       무엇보다도, 정령.

       

       정령에 대한 적개심이 머리끝까지 차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 죽여버리겠다.”

       ​

       에테르는 입수월보한 채 황성으로 향했다. 레너윌이 수도에 도착하기 하루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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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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