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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5

     

    샤를이 교차해서 쥔 성검을 크게 휘둘렀다.

     

    진조가 권왕의 몸으로 반격한다. 쾅! 매서운 주먹에 충격파가 터져나간다.

     

    그때마다 팔이 징 울리며 근섬유도 함께 뜯어지고, 손바닥의 피부가 마찰열에 벗겨지지만 성검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지금 움직이는 몸이 아니라 이 검이 자신의 본체라고 자각할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그렇다고 소중하지도 않지만.

     

    몇 번이나 망가진들 다시 손에 든 채 다른 장소에서 눈을 뜰 뿐. 증오스러운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진조. 이놈도 수도 없이 상대해 봤다. 3개나 되는 비장의 소체와 동시에 싸우는 건 처음이다. 조금 힘에 부쳤다.

     

    아직 리셰의 몸도 완전히 성장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눈이 둔하다. 안근이 약해서 반응속도가 느린 건 전투에서 굉장히 불편했다.

     

    ‘일단은 싸워야지.’

     

    그래도 지금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마족을 보자마자 검을 휘두르던 지난번과는 조금 달랐다.

     

    이유가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라스와 함께 싸운다는 이유.

     

    이번에는 그가 함께 회귀했다. 이미 한참 전부터 과거가 바뀌었다.

     

    혹시 이번엔 정말 마왕을 쓰러트리고도 세상이 안 끝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도 시계탑 1층에서 사이좋게 부부싸움을 하는 라스와 아셀라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참.’

     

    라스는 어쩌다 저 악녀와 엮였을까. 기구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셀라 때문에 라스가 죽는 걸 자신이 본 장면만 수십 번은 다 되어 간다.

     

    자신이 항상 세상의 최후를 본 게 아니라 리셰일 때도 있었으니 실제론 그 몇 배는 되겠지.

     

    그래서 어떻게든 말리고는 싶었다. 이대로는 라스가 또 아셀라에게 죽을 게 뻔하니.

     

    무엇보다.

     

    ‘나도 라스가 갖고 싶었어.’

     

    용사 파티에서, 아니.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자신이 리셰였던 첫 번째 삶까지 포함해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리 찾아봐도 그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하게.’

     

    이미 라스는 아셀라의 편이다.

    혼약자이자 주치의고.

    자각은 없는지 적은지, 일부러 없는 척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셀라를 좋아하는 것도 분명하고.

     

    샤를은 거기에 끼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내가 라스를 뺏는다고 쳐.’

     

    운 좋게 여태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던, 마왕도 쓰러트리고 세상에 멸망이 찾아오지 않는 기적 같은 ‘굿엔딩’이 찾아왔다 치자.

     

    라스와 둘이서 행복하게 호사를 누리다 늙어서 죽는다 해도.

     

     

    그럼 그 다음엔?

     

    자신은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게 아닌가?

     

    ‘그건 진짜 싫어.’

     

    그때야말로 샤를은 버틸 자신이 없었다.

     

    분명 지금 이상으로 정신이 무너지고 깨져 산산조각이 나고 마리라.

     

    더는 움직일 기력이 없어 멍하니 서 있다가 마족에게 목이 날아가겠지.

     

    그러니 지금.

     

    아직 조금이라도 움직일 힘이 남아있을 때.

     

    ‘이 감옥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해.’

     

    샤를은 눈앞의 억지 희망 따위는 좇지 않기로 한 지 오래였다.

     

    싸울 땐 싸운다. 용사니까.

     

    하지만 기회가 있다면. 설령 이번 시간대의 역사와 세상을 멸망시키는 한이 있어도, 그래서 자신의 여정이 끝날 수 있다면.

     

    거리낌 없이 성검이라도 부술 각오였다.

     

    실제로 몇 번이고 부숴왔고.

     

    그게 지금의 샤를이 움직이는 이유였다.

     

    ‘샤를, 이라는 이름도.’

     

    언제였더라. 라스가 처음 가명으로 지어줬을 땐 기뻤다. 어감도 마음에 들었고.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자신은 더 이상 용사 리셰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이 시간대의 리셰는 뭐랄까.

     

    이때의 자신을 3자의 시점에서 본 건 처음이라 그랬을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저땐 저랬었구나, 하고.

     

    언니언니 부르는 모습도 귀엽고.

     

    호구같이 착해 빠져서, 해야 할 의무는 하나도 저버리지 않으면서 권리는 안 챙기고.

     

    그러면서 신념은 확실하다. 주장을 굽히지 않아야 할 때는 목소리를 낸다.

     

    아셀라에게 대들 때 리셰를 보고 샤를은 확신했다.

     

    악당에게 반항하는 체질은 확실히 용사 답네, 하고.

     

    조금은 질투가 나서 독을 풀었다.

     

    독이라고 해도 나쁜 습관 몇 개를 가르쳐 준 것뿐이지만.

     

    그만큼 싸우는 기술도 알려줬으니 이 정도면 착한 언니 아니겠어.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그나저나.’

     

    얘는 첫눈에 라스한테 반하네.

     

    …나도 그랬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당연히 언니로서, 리셰가 라스와 이어지면 좋겠다 싶기도 하지만.

     

    ―쏴아아아!!

     

    하늘에서 내리는 폭우.

    아셀라가 일으킨 마법이다.

     

    서로 사랑스럽게 눈빛을 보내는 라스와 아셀라의 모습을 보니, 진즉에 글러먹었다고 샤를은 생각했다.

     

    “박쥐야, 서로 처지가 말이 아니네. 너도 여기서 나한테 안 걸렸으면 좀 더 멋있게 죽었을 텐데.”

     

    파악!

     

    샤를이 진조 창병의 목을 쳐내며 말했다.

    파스스 재가 되어 사라지는 창병.

     

    진조가 권왕의 몸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맞는 말이다.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인간을 놓치는 것만큼 비통한 일이 또 어디 있겠나.”

     

    “어쭈, 마족이 뭘 안다고 지껄여.”

     

    샤를의 스텝이 빨라졌다. 지면에서 물 자국이 정신없이 사방으로 튀었다.

     

    “나는 마족이지만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너희 인간도 먹이의 품질엔 민감하지 않는가.”

     

    “하하, 웃기네.”

     

    “나 역시 인간을 사랑한 적이 있었다.”

     

    꿰뚫어 보는 듯한 진조의 말에 샤를이 미간을 찌푸렸다.

     

    “인간에게 나를 드러내고 선물을 주었다. 허나 좋은 반응을 받지 못했지.”

     

    “그래서 죽였어?”

     

    “그럴 리가. 나는 궁금해졌다. 왜 인간은 마족을 이해하지 않는가.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가.”

     

    파악!

    진조의 주먹이 샤를의 이마를 스쳤다. 그녀가 떨어트릴 뻔한 성검을 간신히 붙잡으며 뒤로 한 바퀴 굴렀다.

     

    진조가 얼굴의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소체로 만들었다. 그 육체에 혼으로 들어가 그녀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어우 진짜.”

     

    샤를이 구역질하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다시 달려들었다.

     

    합이 이어진다.

     

    “오랫동안 탐구를 거쳐 나는 인간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됐다.”

     

    “아, 그래? 나도 마족은 오래 봐서 잘 알아. 잔인하고 비정하지.”

     

    샤를이 코웃음 쳤다. 이미 진조의 심장을 꿰뚫은 경험은 수도 없이 있었다. 그의 말은 전부 허세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 합이 길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도, 리셰가 성검을 공명해 자신이 의도적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샤를은 간과하고 말았다.

     

    ―파악! 검격이 적중해 진조의 팔에 깊숙한 일격이 들어간다. 한쪽 팔이 너덜거린다. 무투가인 권왕의 소체는 무기를 잃은 것과 다름없었다.

     

    샤를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지만 그건 진조도 마찬가지였다.

     

    “알겠다. 그 검이 네 영혼이군.”

     

    “뭐?”

     

    순간 샤를은 섬뜩해졌다.

     

    어쩌면 뜬금없이 사랑 이야기를 꺼낸 것도.

    혹시 진조는 정말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자신을 파악해버린 게 아닐까.

     

    “용사여.”

     

    그가 빨려들어갈 것 같은 매력적인 웃음과 함께 말했다.

     

    “지친 게 죄는 아니잖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말.

     

    그 진의를 파악하기도 전에.

     

    ―콰아앙!!!

     

    발밑에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전투에 집중해 있던 샤를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포위해오던 기사들이 어느새 멀찍이 대피라도 한 포진으로 바꾸고 있다.

     

    라스와 아셀라는 진작에 보이지 않는다.

     

    폭발이 일어난 근원지는 진조의 본체.

    방어 마법으로 접근할 수 없던 바로 그 장소의 지하였다.

     

    “음―”

     

    공격당했다고 깨달은 진조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바닥이 무너지고 지하로 떨어진다.

     

    허를 찌른 공격. 라스가 틀림없었다.

     

    “앗.”

     

    생각보다 폭발의 범위가 거대했다. 샤를이 서 있던 지면도 쩌적 금이 가더니 순식간에 조각나며 무너진다.

     

    그녀는 낙하하는 가속도를 느끼며 착지할 준비를 했다.

     

     

     

    ***

     

     

     

    “대피, 대피!!”

     

    나는 지하수로를 달리며 타냐의 어깨를 쳤다. 생각보다 다이너마이트의 위력이 어마무시했다.

     

    ―쿠르르릉!

     

    위에서 낙석과 먼지가 떨어지며 우리를 덮쳐올 기세로 무너졌다. 이 정도면 분수대 광장 전체가 엉망이 됐겠는데.

     

    안전한 지역까지 빠지고 진동이 겨우 멈추고 나서야 타냐가 말했다.

     

    “진조의 본체만 떨어트려 기습하는 작전 아니었습니까?”

     

    “폭탄이 이렇게 강할 줄 몰랐어.”

     

    “내 머리카락으로 만들었으니 이 정도 위력은 나와야지.”

     

    아셀라가 뒤통수를 매만지며 말했다. 몇 가닥 안 빌렸건만, 아셀라는 한참을 투덜대며 내게 불평을 했다.

     

    그리고는 굳이 냄새나는 하수도까지 기사들을 끌고 와서 직접 지휘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작은 막대기에서 이만한 위력이 나오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폭탄 재료는 희귀한데다 이 정도를 만들려면 몇 달을 준비해야 하는 양인데….”

    “연금술까지 이리 조예가 깊으시다니.”

     

    월광궁 기사들이 무너진 통로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내가 손가락을 튕겼다.

     

    “멍때릴 틈 없어. 진조가 도망치기 전에 찾아야 해.”

     

    “그래. 놈이 마법사와 분단된 틈을 타 목숨을 끊자꾸나.”

     

    아셀라의 지휘하에 지하도 탐색을 시작했다. 횃불은 가스 때문에 위험하기에 조명 마법을 써서 기사들이 신속하게 나아간다.

     

    ―쿠릉!

     

    어둠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층계를 내려가자 넓게 파놓은 공동이 나타났다.

     

    오물 하나 묻지 않고 번쩍이는 새하얀 도신이 반짝인다.

     

    성검을 휘두르며 진조와 싸우는 인영.

    샤를이다.

     

    “하앗!”

     

    그녀의 검이 진조의 손톱과 부딪친다. 하지만 어딘가 맥아리가 없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 지쳐 보였다. 당장에라도 눈꺼풀이 감길 것 같은 모습이다.

     

     

    ―――――――――――

    대상 : 샤를

     

    스트레스 안정 ■■■■■■■□ 긴장

    자율신경 부교감 ■■■□□□□□ 교감

    피 로 도 건강 ■■■■■■■□ 피로

    ―――――――――――

     

     

    상태가 안 좋은데. 정신공격이라도 당했나.

     

    “샤를, 리셰와 교대해!”

     

    내 말을 무시하고 전투를 이어나가는 샤를.

     

    마침내 한계가 찾아왔을까. 그녀의 팔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번뜩, 틈을 찾아낸 진조가 손톱으로 파고들어 휘두른다.

     

    “앗…!”

     

    역수로 바꾸지 않으면 막아낼 수 없는 각도. 하지만 샤를은 검을 잠시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억지로 팔을 비틀다가 결국 파악!

    강력한 일격을 허용하고는 꼴사납게 나가떨어졌다.

     

    ―챙그랑!

     

    바닥에 성검이 떨어진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는 용사.

     

    눈빛이 바뀌었다. 리셰다.

     

    그녀는 바로 상황을 파악하고는 성검을 다시 줏으려 했다. 하지만 진조가 발로 차 구석으로 밀어 넣어 손에 닿지는 않는다.

     

    맨몸으로 일기토에 이길 수는 없다. 일격을 맞고 물러서는 리셰.

     

    “타냐.”

     

    “예.”

     

    나는 옆에 서 있던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한 자루 뽑아 그녀에게 쥐어주었다.

     

    “이거 용사에게 전해줘. 둘이서 쟤 잠깐만 막아봐.”

     

    타냐가 내 명령에 응답하며 두 자루의 검을 들고 뛰었다. 나도 반대쪽을 향해 달렸다.

     

    성검, 샤를에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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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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