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95

        

         “으휴…!”

         

         바로 몇 일 전에 이상한 장난칠 생각은 접으라는 경고까지 딱 부러지게 했는데 정신 못 차린 아론이 저런 인간을 보냈을 리가 없지 그래.

         

         더군다나 마음껏 쓰라는 의미로 카드도 주었으니… 적당히 놀고 있으면 급한 쪽이 알아서 먼저 찾아 주지 않을까? …아님 말고!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헌팅남을 노려보다가, 이 정도면 나름대로 충분히 노력했다는 감상과 함께 앞에 예쁘게 정리된 블루 칩 중 하나를 집어 들어 물끄러미 바라봤다.

         

         전체적으로 푸른 광택을 자랑하며 정중앙에는 100,000이라는 숫자가 예쁘게 새겨진 플라스틱 동전.

         매끄러운 질감과 그냥 단순히 구경하는 것뿐인데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트럼프 무늬가 인상적인 물건이었다.

         

         아, 적어도 이 카지노 안에서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부의 상징이나 다름없으니 당연한 이치려나?

         

         옛날에도 칩 형태와 색깔로 그 가치를 나눠서 게임에 썼다는 건 알지만 이것과는 기준이 많이 달랐으리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요 녀석은 시민권 등급을 본 따 비슷하게, 한 개 천 크레딧이 부여된 옐로우부터 천만짜리 블랙까지 십 단위로 달라진다 하는데.

         

         어떻게 또 딱딱 알맞게 로우 플로어 게임장은 대부분 옐로우와 그린 칩으로, 하이 플로어는 최소 블루나 레드. 간간히 시선을 사로잡는 블랙 칩으로 미친듯이 굴러가고 있는 생태를 보면 찰떡같이 정한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전자 화폐가 일반화된 세상이라 그런가?

         손으로 돈의 무게감을 느낀다는 행위 자체가 도박의 즐거움을 한층 크게 만드는 것도 무시하기 어려워 보였다. 사이버웨어에 표시된 막연한 숫자보다는 코앞에 쌓인 칩 무더기가 훨씬 인상적이긴 하니까.

         

         팅…! 탁!

         

         검지 마디에 올려 놨던 칩을 위로 튕겼다가 떨어지는 걸 가볍게 낚아챘다.

         보통 조금만 실수해도 앞이나 뒤로 크게 넘어가는 걸 고려하면 지금은 컨디션도, 손맛도 꽤 괜찮은 상황이니. 아주 좋다… 좋아.

         

         ……응? 고스톱은커녕 제대로 해 본 카드 게임이라곤 컴퓨터에 기본으로 깔려 있던 스파이더 카드밖에 없는 주제에 무슨 폼을 그렇게 잡냐고?

         

         어허! 처음이니까 더더욱 분위기부터 찬찬히 만끽해야지!

         

         – 허면 특별히 마음에 담아두신 종목이라도 있으십니까? 아까부터 기대감을 제어하기 힘드신 것처럼 보입니다. –

         

         “그야 속으로 정해 둔 건 있는데…. 아, 그래. 움직이기 전에 가이드는 제대로 살펴보고 갈까?”

         

         정렬한 칩을 다시 칩 케이스에 담아 ‘이제 이동할까요~’ 하고 묻는 제로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굴던 다리에 제동을 걸었다. 여기서 잠깐 흥분을 가라앉히는 판단? 나쁘지 않다.

         

         쓰잘데기 없는 팝업을 모조리 차단해 놨던 사이버웨어 화면을 조정해 잔뜩 쌓인 메시지 로그에서 랑데부 카지노로부터 온 문서, 그리고 파일을 살폈다.

         환영 인사… 아니고, 하이 플로어 전용 서비스 수칙… 이건 나중에 읽고. 오, 찾았다. 카지노 시설물 안내도.

         

         흡사 놀이공원에 설치된 그림 안내판처럼, 바보라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아기자기하게 내부 게임장들이 데포르메 된 조경도가 쫙 펼쳐졌다. 딱히, 내가 경험했던 건 아니지만 짐을 한계까지 구겨 넣었던 가방 입구가 터진 것 같다고 할까. ……크흠!

         

         [ 블랙잭(Blackjack) : 인류에게 가장 사랑받아온 손장난으로 오늘의 운세를 점쳐 보시는 건 어떨까요? ]

         [ 바카라(Baccara) : 알고 계십니까? 과거에는 바카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전문 플레이어도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이라고 안 될 건 뭐가 있습니까! 바로 도전해보세요! ]

         [ 커뮤니티 포커, 텍사스 홀덤(Texas hold ’em) 룰 : 적을 읽어내십시오. 그게 어렵다면 승리의 여신께 기도를 올리셔도 되고요! 일단 테이블에 들어온 칩은 정해진 주인이 없는 법이랍니다? ]

         

         “오….”

         

         게임 목록을 졍렬하자 어디서 한 번쯤은 들어본 친구들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굳이 카지노 측에서 손님들을 충동질하기 위해 덧붙여 놓은 간략한 설명이나 승리 시 수익 기댓값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름만으로 와르르 쏟아지는 칩의 산이 보이는 기분이랄까.

         

         간혹 구경꾼들의 환호성이나 비명에 가까운 고음이 터져 나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 산이 테이블 중앙 베팅 구역으로 일거에 쏟아지는 풍경을 구경하긴 했으니, 어쩌면 나도 벌써 도박을 즐기기에 최적화된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외에도 ‘카지노의 여왕’이라 불린다는 룰렛(Roulette), 주기적으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연주해 시선을 앗아가던 주사위 게임 다이 사이(Tai Sai)나 크랩스(Craps).

         

         무려 십 몇 초만에 현장에서 즉석으로 복권 결과를 알려주어 베팅한 사람들을 애타 죽게 만드는 키노(Keno)나 빅 휠(Big Wheel) 등등 다양한 게임들이 내 관심을 갈구하긴 했는데… 어차피 시드 머니도 자비 부담이 아닌 만큼 다 한 번씩 체험해봐도 문제가 없기는 했는데!

         

         사람은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면 익숙한 걸 선호하는 법이고,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은 확률 뽑기(Gacha)에 환장한 민족 출신이었다는 걸 상기시켜주듯이 내 눈은 목록 하단부에 있는.

         따로 게임 진행을 관장하는 딜러나 스태프조차 없이 보통 셀프로 즐기다가 알아서 파산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고도의 희망 분쇄기에 꽂혔다.

         

         [ 슬롯 머신(Wheel of Fortune) : 당겨서 맞추세요. 그리고 대박(Jackpot)을 터트리세요! 이만큼 간단하게, 오래오래 즐기실 수 있는 녀석도 드물답니다. ]

         

         “…역시, 내 이론을 검증하는데는 이것 만한 게 없다니까?”

         

         벌떡!

         더는 볼 것도 없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무도 당당하게 하이 플로어에 설치된 고액 기계로 걸어갔다. 마치 마왕을 상대하러 가는 용사처럼, 혹은 오랜 숙적과의 결판을 짓는 전사처럼.

         

         번개같이 움직인 제로도 당연히 칩 케이스를 든 채 뒤에 졸졸 따라붙었고.

         

         – 일반적으로 각각의 슬롯 머신에는 중앙 시스템의 제어를 받는 회수율이 설정되어 있기에, 기기를 잘못 고르시면 당첨되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정말 아무 자리에나 착석하셔도 괜찮겠습니까? 혹시 능력을 사용하실 예정이라면…. –

         

         “쓰읍! 누가 정정당당한 승부에 치트를 써? 아니, 남들 다 쩔쩔맬 때 혼자 쓰면 더럽게 재밌기야 하겠지. 하지만 난 지금 그 미묘하게 불공정한 확률이 딱 필요한 거야.”

         

         대충 비어 있던 슬롯 머신 앞에 앉아, 전면부 홀로그램 인터페이스에 표시된 당첨 족보를 훑어보다가… 매 게임마다 결과에 일희일비할 예정이 아니라는 걸 상기하고는 무시해버렸다.

         

         7이 많으면 이득, 하지만 체리가 포함되지 않으면 지급 불가, BAR는 일단 정렬되면 배수…. 다 무의미한 가정이오, 그저 손님보고 플레이하면서 알아만 두라는 희망사항에 가까웠으니까.

         당첨이면 알아서 반환해주고 아니면 말겠지 뭐.

         

         한편 내가 괜찮다고 대답하기는 했어도 제로의 지적은 합당했다.

         

         네오 헤이븐에 열 올리기 전에 했던 온라인 게임의 확률형 도박처럼. 슬롯 머신 또한 레버를 당기거나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이미 운영 측에서 설정한 확률 모델과 도출된 난수에 따라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화려한 이펙트나 현란한 회전이야 모두가 알듯이 눈속임이고, 승산 자체가 플레이어 측이 한없이 낮아서 끝까지 삽질을 한다고 다이아몬드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는 폐광산.

         

         다른 말로 하면 누군가의 개인적인 판단이나 의사 결정이 개입할 여지 따위 없이 순수하게 카지노에서 책정한 환수율과 내 행운, 그리고 시행횟수를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능력치의 존재 여부와 효능을 알 수 있다는 말씀이지!

         

         “아? 한 게임에 몇 크레딧씩 투입되는지도 내가 골라야 해? 이건 좀 고민이네… 한 번 고르면 끝까지 그 설정대로만 가고 싶은데.”

         

         그런데 멈칫 하고, 레버를 당기려 올라간 팔이 멈췄다.

         

         칩 투입구는 물론, 즉석에서 홧김에 얼마든지 결제할 수 있도록 친절히 스캐너까지 설치된 기계를 신기하게 만지작거리다 바로 본게임에 들어가려고 했건만.

         

         23세기 슬롯 머신의 우월함을 자랑하려는 모양인지, 각종 설정을 먼저 마치고 플레이를 시작해달라는 건방진 요구에 직면했으니.

         

         “어….”

         

         그, 벳(Bet)이야 뭔지 대강 알겠는데 페이라인(Pay Line)에 블랭크 허용은 대체 어느 나라 언어일까.

         와일드 삭제를 통한 배율 증가? 스캐터 제거 시 프리 게임 확률 재배열…? 이게 다 뭐람. 진짜로.

         

         – ……아샤님? 슬롯 머신 경험이 풍부하시거나, 자세히 알고 계셔서 선호하신 게 아닙니까? –

         

         “아니, 전혀? 그저 잠들어 있던 승부사의 영혼이 날 이리로 불렀단다…… 아…! 농담은 이만 됐고, 몰라! 대충 많이 쓰는 프리셋 중에서 적당히 비싼 걸로 돌려버려!”

         

         덜컹—!

         삐링… 삐링! 띠리리, 띠리리리—…….

         

         이대로 시간을 더 끌다간 나중에 제로가 임의대로 도파민 중독 치료용 약물을 박스 단위로 주문할 것 같아서 급하게 개시해버렸다. 결과를 대신 데이터로 치환하느라 메모리가 분산된 만큼 잔소리도 줄어들기를 바라면서.

         

         투입액은 블루 칩 10개, 총 100만 크레딧. 거기에 게임 1회 당 벳은 만 크레딧이니 정확히 100번의 연속 시행.

         

         혹시 그거 아십니까? 모바일 게임에서 1%의 등장확률을 가진 캐릭터가 정확하게 100연차를 시도했을 때 1회 이상 등장할 확률은 불과 63%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만큼 확률과 통계는 사람이 가진 직관과 차이가 극심하고, 소수점 단위의 낮은 가능성을 기대하기엔 100회의 독립 시행은 터무니없이 낮은 모집단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따라서 원래 나는 끽해야 10분도 안 걸릴 이 기계의 회전이 끝나는 대로 나머지 백만 크레딧을 또 넣고, 그것도 동나면 직불 카드를 써서 나만의 작은 실험을 계속할 예정이었고.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냐고…?

         

         ………그러니까 약 십 분 후에 자본금이 두 배, 삼 십분 후엔 다섯 배까지 불어난 걸로도 모자라.

         등 뒤에 선글라스 쓴 직원이 둘이나 달라붙은 건 기가 막히는 우연의 일치였다고 주장하고 싶어서 꺼낸 얘기다. 음.

         

         ““…….””

         “그……… 왜요.”

         

         현존하는 미지의 신적 존재에게 맹세코, 저는 어떤 부정 행위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이에요 시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강한 힘에는… 대충 어쩌구.

    슬롯 머신의 과일 아이콘과 BAR 기호는 당시 경품으로 증정되었던 풍선껌 향과 회사 로고에서 기원했다고 합니다.
    근데 이거 허리가 또 얼얼해서 좀 무섭네요.

    항상 재밌게 봐주시고, 추천과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