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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5

     나리아가 나에게 자주 그러는 것처럼 나도 합스베르크 황제에게 ‘해달라’라고 요청을 했다.

     

     ‘이렇게 직접 말하는 건 처음인데.’

     부탁이라거나, 요청이라거나 그런 건 원래 에둘러서 요구하는 게 정치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그건 곧 청탁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고, 뭐든지 간접적으로 해야 직접적인 이해당사자 관계에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

     ‘그래도 이득이 더 크다면 해야지.’

     누아르의 멘탈 케어.

     그로 인해 짐승 누아르는 사라지고 인간 누아르만 남게 된다면, 그것만으로 내게는 충분한 이득이다.

     “웬즈데이. 누아르를 잘 부탁한다.”

     “예, 이사장님.”

      

     주로 나의 정신건강을 위하여.

     “형….”

     “그렇게 기뻐할 때가 아니다. 책임에는 그만한 무게가 따르는 법이고, 황제의 의중은 나도 어떨지 모르니까.”

     누아르가 무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나를 바라보지만, 나는 황제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 확신할 수 없다.

     “제2 황녀가 생겨날 수도 있고, 아니면 은근한 뉘앙스를 풍길 수도 있지. 어쩌면 나의 청탁을 거절할 수도 있고.”

     “형의 부탁인데?”

     “내가 부탁한다고 다 되는 거였으면,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도 지금처럼 그러지 않았겠지.”

     “아.”

     부탁만으로 뭐든지 통하는 건 단 하나의 경우 뿐이다.

     어머니의 부탁.

     그리고 그 당사자는 아버지일 것.

     “누아르. 명심해. 세상에 공짜는 없어. 특히 정치에서는 이게 다 빚이 되고 업보로 돌아오게 되지.”

     “으음….”

     “황제가 이번 부탁을 들어준다면, 나는 나중에 황제의 부탁을 들어줘야해. 그게 어떠한 요구든 내가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더더욱.”

     “형….”

     “나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순간적으로 누아르가 움찔거린다.

     무슨 ‘산책’이라는 말을 듣고 기뻐하는 강아지와 같이 조건반사적으로 ‘실망’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어딘가 겁을 먹는 모습이 다소 미안하기는 하지만-

     ‘진짜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이번 일로 내가 크게 실망하게 된다면, 앞으로 누아르를 대함에 있어 기대를 여러모로 내려놓게 되는 것도 사실.

     ‘마음 같아서는 황제가 그냥 정치적인 부담을 들어서 어렵다고 거절해줬으면 좋겠네.’

     이상한 변수가 생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낫다.

     상황이 꼬이는 게 싫다면, 변수가 등장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아무런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게 맞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흘러가는대로 놔둔다면.

     누아르와 웬즈데이가 그냥 참기만 하고,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은 무시하고 계속 들러붙는 여자들을 밀어내고 그런다면.

     ‘기대해봐도 되려나.’

     크게는 황제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지금까지 누아르는 많은 걸 보여줬다.

     조금, 기대해봐도 되지 않을까.

     “편히 쉬어. 잠시 뒤에 아스타시아 오면 넷이서 조용히 식사나 하지.”

     “여기에서?”

     “넷이서요?”

     “왕국 사람과 제국 사람 반응이 판이한 게 신선한데.”

     열차에서 식사를 한다는 개념이 없는 노스트럼 사람은 식탁을 찾고, 그 개념을 가진 이는 식사를 하는 사람의 구성에 관심을 가진다.

     “그래. 넷이서. 근데 장소는 여기가 아니야.”

     “그러면 학생들 옆에서 밥 먹는데 같이 먹는 거야? 그….”

     누아르가 귀를 쫑긋 세우며 밖을 가리켰다.

     “학생들 지금 고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기사단 훈련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면….”

     “점심은 제대로 먹기 글렀지.”

     나는 잘 우려낸 솜누스 차를 가볍게 홀짝였다.

     “학생들 중에 노숙을 해본 애들이 몇 명이나 되겠어. 애초에 군용 막사를 펼쳐본 애들이 몇 명이나 되겠어.”

     누아르는 해봤다.

     아버지는 검만 가르친 게 아니며, 기사의 다양한 소양을 가르쳐주셨다.

     ‘본인이 아닌 카를로스 경 같은 기사들이지만.’

     누아르를 교육한 당사자가 지금 이 캠프에 있다.

     분명 지금쯤 다른 기사단과 비슷하게, 학생들을 열심히 쪼아대고 있겠지.

     표현을 정정한다.

     쪼아댄다는 표현은 저기 세인트 지오와 황금여명 기사단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좀스러운 단어.

     “시간상 지금쯤이면 주어진 재료를 이용해서 팀 별로 임시캠프 만들었겠네. 밥도 먹고.”

     ‘원칙과 질서에 맞게 행동하라’고 규범을 제시하고 있을 것이다.

     “누아르. 너 예전에 수습기사들이랑 같이 야영훈련할 때 뭘 먹었지?”

     “어, 음….”

     누아르가 생각만 해도 역겹다는듯 인상이 일그러졌다.

     “…육포랑 말린 과일?”

     “그렇지.”

     이곳은 렘버리.

     “아무리 극한체험이라고 하더라도, 한창 먹고 자랄 나이의 학생들에게 밥을 제대로 안 먹이는 건 심각한 문제거든.”

     비리의 온상으로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모두 발생할 수 있는 장소.

     “식당은 마련되어있지만, 과연 식단은 제대로 준비될까 모르겠네.”

     “…형?”

     “별 건 아니고.”

     정말 별 건 아니다.

     “어제 렘버리 근처에서 기록적인 폭우가 발생했거든.”

     “…….”

     “뭐, 예산 엄청 받아갔으니 알아서 다 대비를 해뒀겠지.”

     “그, 괜찮아?”

     “괜찮아.”

     무능과 비리가 판을 쳐도, 모든 상황에 대한 대응책은 마련되어있다.

     “밥은 먹여야지.”

     * * *

     렘버리 캠프 첫째날, 오전 11시 57분.

     캠프 숙영지로부터 조금 떨어진 대형 목조 건물에 모인 이들 사이에 고성이 오간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그게…! 식사를 준비하려면 최소한 30분은…!”

     “30분이, 왜!!”

     “그, 그게…!”

     실눈에 장신의 노인, 발자크 자작은 식사 준비를 맡은 하인들을 향해 호통을 내질렀다.

     

     식사 관련된 업무를 맡은 주방장이 호되게 질책을 받는 사이, 뒤에 있는 다른 고용인들은 사색이 된 채 식재료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

     아니다.

     요리가 아니라, 하나의 ‘작업’이라고 말해도 무방했다.

     시든 채소를 걸러내고, 살릴 수 있는 부분은 다듬고, 육고기는 썰기 전에 한 번 더 고기의 냄새를 맡고 육색을 확인하기 바빴다.

     “그, 그게…! 자작님! 저희도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더 최선을 다 하란 말이야! 이제 곧 학생들이 하나둘 오기 시작할 거라고!”

     “그, 어느 ‘팀’부터 오는 겁니까…?”

     

     주방장의 목소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렸으나, 그 떨림 아래에는 울분이 서려있었다.

     “제대로 ‘귀족분들’부터 오는 거 맞습니까…?”

     “크윽…!”

     본래.

     식사 순서는 전부 정해져있었고, 명단은 정해져있었고, 그에 맞는 식자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게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윈체스터 총장이 비룡기사단장 마스터 윈체스터가 되어 현수막을 갈라버린 순간부터, 모든 게 뒤죽박죽 섞여버리고 말았다.

     “해, 행여나 귀족분들이 배탈이라도 난다면…!”

     “재수없는 소리하지 말게! 준비는, 완벽했어!!”

     완벽했다.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소규모이기는 해도 국가단위 사업에 대한 책임 소재가 어느 한 사람에게로 향하게 된다.

     재료는 정량에 맞게 준비했다.

     단지 그 재료에 있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나눠버렸을 뿐.

     최고급 소고기가 평민 학생의 입에 들어가고, 저품질에 금방 쉴 것 같았던 걸 양념에 절여놓은 고기가 귀족의 입에 들어가게 생겼다.

     “자작성 창고에서 식자재가 올 때까지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대로 활용해봐!”

     “무슨 일이 있소?”

     “그, 그게…!”

     식사장 근처, 학생 한 무리를 인솔하여 데려온 기사가 다가와 물었다.

     “카이튼 경…!”

     “음.”

     하필이면 처음부터 상대하기 껄끄러운 흑장미 기사단의 ‘귀족출신’ 용기사가 나타났다.

     그것도 나이가 적당히 비슷하면서, 후작인.

     “가장 먼저 군용막사를 설치한 팀부터 식사를 하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버, 벌써 설치를 다 끝낸 겁니까?”

     “유능한 학생들이 리더가 되어 금방 설치하더군.”

     기사 카이튼이 뒤를 가리켰다.

     그 중에는 평민처럼 보이는 학생이 겸연쩍게 웃고 있고, 그 옆에는 제국 출신이라고 하던 유학생이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

     ‘일반’학생들로 보이는 이들이 두 사람을 마치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우러러보고 있다.

     “저 학생들은…?”

     “아. 저들이 다 알고 있더군. 자르만 학생은 고향에서 사냥꾼을 하면서 텐트치는 법을 배웠다고 하고, 제국 유학생 만데사르는 제국소년 훈련캠프에서 익혔다고 하더군.”

     “서, 설마…?”

     “모의군사훈련이니, 어느정도 환경에 따라 배운 학생들도 있겠지. 능숙하더군.”

     흑장미 기사단의 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할 정도의 실력.

     그딴 것만 아니었으면, 음식을 준비하는데 시간이 더 필요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자작. 어딘가 표정이 좋지 않은데.”

     “…별 일은 아닙니다. 식재료 준비에 있어 약간의 문제가 있으나, 일정에 차질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되지.”

     기사 카이튼은 숲길 너머를 가리켰다.

     “다른 건 몰라도 학생들이 저렇게 열심히 텐트를 치느라 동분서주하는데,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야 어디 되겠는가.”

     “…….”

     “먹고 탈이라도 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 * *

     ‘슬슬 첫 팀이 들어갈 시간인가.’

     텐트를 쳐본 경험이 있는 이들이 리드하는 팀부터 하나둘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갈 것이다.

     고생고생을 하며 야영장을 펼치는 것도 힘들겠지만, 일단 자신들이 생각했던 그런 캠프가 아닌만큼 정신적 피로감을 토로하는 이들도 상당하겠지.

     “형.”

     “왜.”

     “그, 원래 우리 팀이었어야 할 사람은….”

     “나리아 공주지.”

     미리 도시락으로 준비해온 샌드위치를 막 먹으려던 누아르가 그대로 굳었다.

     “그, 그러면 나리아 공주 혼자서 텐트를 치고 있다는 거야?”

     “그런 셈이지.”

     “…….”

     “아스타시아와 웬즈데이가 여기에 있는데, 나머지 한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나?”

     “어, 그, 그게….”

     “괜찮다. 본인이 원한 거니까.”

     누아르와 웬즈데이가 특혜를 누리겠다고 한 반면, 나리아는 스스로 특혜를 내려놓고 다른 이들과 평등해지기를 선택했다.

     “지금쯤 본인팀 텐트를 스스로 펼치고 다른 이들을 돕고 있겠지.”

     “텐트, 남녀 따로 되어있지 않아?”

     “방법을 알고 절차대로 하면 금방 세워지는 게 텐트다. 혼자서 못할 것도 없지.”

     나리아는 방법을 헷갈리는 사람이 아니며, 텐트 두 개 펼칠 정도의 체력은 충분하다.

     “누아르. 사람은 말이야, 누울 자리가 불편하면 뭐든지 기분 나빠지고 불편해지는 법이야.”

     “그거, 잠자리가 편해야 다 편하다는 말 반대 아니야?”

     “그렇지. 나리아 공주가 펼치는 텐트는 엄청 푹신할 거다. 텐트의 질을 떠나서, 나리아는 텐트를 펼치기 전에 땅부터 평평하게 고르고 작업을 시작했을 테니까.”

     호록.

     “혼자서.”

     “…….”

     “웬즈데이를 선택한 순간부터, 이미 너는 공주를 위한 귀족이 되기를 포기했다는 거지.”

     “형, 지금이라도 가서 돕기만 하는 건….”

     “앉아라. 이미 늦었다.”

     이미, 열차는 떠났다.

     “공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충성하는 이들을 직접 캠프에서 살펴보시겠다는데, 가만히 놔둬야지.”

     “…….”

     “너는 나리아 공주를 모실 게 아니라, 네가 모실 공주님을 모셔야 하지 않겠냐.”

     “어, 으, 그게….”

     “선택은 끝났다. 네가 이 자리에 앉아서 내가 준비한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동안, 나리아 공주는 혼자서 망치 들고 텐트 치고….”

     호로록.

     “밥도 혼자 먹고 있겠지.”

     뭐든지. 

     혼자.

     ‘본인이 원한 거기는 하지만.’

     호록.

     

     “저기, 형. 역시….”

     “너는 네 공주님 모시라니까?”

     “그래도, 그, 그게…! 호, 혹시 화났어…?”

     “화? 내가? 그럴 리가. 내가 이런 걸로 화를 낼 리가 없잖나.”

     아스타시아를 혼자 내버려뒀다고 하면 바로 엎어버리겠지만.

     “나리아 공주는 혼자서도 잘 할 거니까, 너는 거기 편한 방석에 앉아서 느긋하게 학생들 군사훈련 하는 거 구경만 하면 돼. 웬즈데이가 먹여주는 아이스크림 받아먹으면서.”

     “…….”

     “왜 그래? 뭐, 불편한 거라도 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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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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