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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6

    국왕은 먼 거리에서 검은 재가 피어오르는 영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크라이어 가문. 전투와 명예를 중시하는 늑인족 가문이었다.

     

    블랙우드만큼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명망을 지닌 그들이었다.

     

    지난 전쟁에서도 크라이어 가문만큼은 제 힘으로 모든 풍파를 견뎌냈었다.

     

     

    “…생존자는?”

     

    “영지민들은 몇 살아남았으나…크라이어 가문은…”

     

    “…”

     

    하지만 그 가문이 오늘부로 멸문해버리고 말았다.

     

     

    크룬드의 첫 공격. 전쟁의 재개를 알리는 소리가 강렬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사실에 한숨을 내쉬며 고민을 이어가는 사이, 왕가의 기사들이 누군가를 데려왔다.

     

     

    기사는 고개를 숙인뒤, 데려온 인물을 소개했다.

     

    “크라이어 가문의 병사입니다. 전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 데려왔습니다.”

     

    “…”

     

    퀭한 눈으로 몸을 덜덜 떨고 있는 병사.

     

    꼬리가 말려 다리 사이로 들어가 있었다.

     

    그들의 종족적 특성을 생각해본다면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전황을 설명해.”

     

    국왕이 병사에게 명령했다.

     

    하지만 병사는 듣지 못한 듯, 그대로 굳어 있을 뿐이었다.

     

     

    -딱! 딱!

     

    왕가의 기사가 늦는 병사의 반응에, 그의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두어번 튕겼다.

     

    그제야 병사는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깜빡이다, 국왕의 모습을 보고 헛숨을 삼켰다.

     

    “구…국왕 폐하…?”

     

    렉스 드레이고는 이 모든 비극에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조금은 더 무거운 말투로 그가 명령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병사는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 둘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 했다.

     

    한참을 방황하던 그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 더듬어가며 설명을 이어갔다.

     

     

    “…마…마왕의 오른팔이 나타났습니다.”

     

    “…”

     

    “어…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가, 갑자기 땅이 흔들리면서…”

     

     

    크룬드는 제 하수인들을 땅에서 불러낸다는 사실을 이미 국왕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땅이 흔들리고 적이 나타났다고 한다면, 상대가 크룬드라는 점은 확실해진다는 이야기였다.

     

     

    “…마물들에 대응을 못했나?”

     

    국왕이 병사에게 물었다.

     

    그 말에 병사는 고개를 격하게 저었다.

     

    “아, 아닙니다….충분히 대응했고, 모두가 잘 싸워줬는데…”

     

    “그럼 왜 이꼴이 난거지?”

     

     

    병사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마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한 눈이었다.

     

    다시금 퀭해진 눈으로 그는 무언가를 회상하듯 중얼거렸다.

     

     

    “….크룬드를….아무도 죽일 수 없어서…”

     

    “…”

     

    “한꺼번에…수십명이 달려들어도….다 토막이 나서…”

     

     

    병사의 증언에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적막한 분위기가 흘렀다.

     

     

    순수 무력으로는 마왕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던 크룬드였다.

     

    그 존재 하나를 죽이지 못해, 이렇게 크라이어 가문이 멸문하게 된것이라면…문제는 예상보다 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병사 옆에 서 있던 왕가의 기사가 부연설명을 촉구했다.

     

    “크룬드 하나에 이렇게 가문이 멸문 했다는 말이냐?”

     

    “…크라이어 공과 도련님들이 전부 크룬드에게 주,죽고나서는 지휘해주실 분이 안계셔서…”

     

     

     

     

     

    애초에 마왕은 크룬드와 달리 전장에 나서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더 껄끄러웠고, 전쟁도 그토록 오래 이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크룬드는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거칠게 최전선에서 날뛰고 있다는 것이다.

     

    무식한만큼, 더 파괴적이었고…더 치명적이었다.

     

    전쟁을 이기는 방법은 아닐지는 몰라도, 막대한 피해를 주기에는 적절한 방법이었다.

     

     

    “…어쩌면 크룬드는 이길 생각이 애초부터 없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국왕의 곁에 있던 보좌관, 겐드리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국왕에게 말했다.

     

     

    “…마왕에 대한 복수인가?”

     

    국왕도 나름의 이유를 생각해보며 답했다.

     

     

    그는 다시금 높은 벽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문제 하나를 넘기면 또 다른 문제가 피어난다.

     

     

    그리고 이번 문제는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하는건지 알 수 없었다.

     

     

    아직 모든 가문이 지난 전쟁의 여파에서 일어난게 아니다.

     

    역병도 돌고 있다.

     

    용사도 팔을 잃었다.

     

    게일도 나이가 들었다며 최고전사 자리를 내려놓고 스탁핀에서 생활중이었다.

     

    아크란도 사라졌고, 실프리엔은 원래부터 보조역할이었다.

     

    성녀는 힘을 잃었으니 남은 것은….베르그였지만.

     

     

    베르그가 고독의 투사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걸 국왕도 오래전부터 이해하고 있었다.

     

    정 문제가 커진다면 그를 이끌어내야겠지만, 당장은 그게 가능한 순간은 아니었다.

     

     

    “…하.”

     

    국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지도자란 힘든 것이었다.

     

    가문의 역사와, 피에 흐르는 지배욕만 없었더라면…그 또한, 국왕의 자리를 언제든 내려놓았을 것이었다.

     

     

     

    ****

     

     

    아르윈은 베르그와 서서 오늘도 농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많은 농기구가 완성이 되고, 그걸 이용하는 대원들도 숙련도가 늘자, 농사일에는 놀라울 정도의 가속도가 붙었다.

     

    이 넓은 땅을 한번 뒤엎는 작업은 이미 끝이 났으며, 이제는 밭을 갈고 있었다.

     

    씨앗을 심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갔다.

     

     

    무언가가 이렇게 나아가는 느낌이 들자, 대원들 사이에서는 이전보다 더 환한 미소가 흘렀다.

     

    미래에 대한 안도감이 그들을 웃게 만드는 듯 했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역병에서 벗어나 다시금 일반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번즈도 마찬가지로 병상에서 일어나, 이제는 기운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이길 수 없을것만 같았던 역병을, 스탁핀이 이겨내고 있었다.

     

     

    그렇게 그 동안의 문제들이 차근차근 풀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막상 베르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깊어지기만 했다.

     

     

    바로 곁에서 그 모든걸 지켜보는 아르윈은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단지 하나였다.

     

     

    …시엔의 병세가 깊어가고 있었으니.

     

     

    “…”

     

    네르는 모든 사람들이 겪는 과정이라며 베르그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당연히 베르그에게는 들릴 리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소중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잃었고, 그 아픔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누군들 경험하기 싫은 아픔일 것이다.

     

     

     

    아르윈도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베르그가 역병에 걸려 병상에 눕는다면 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단명종은 너무나도 쉽게 죽음을 맞이했으니.

     

     

    아르윈이 당장 할 수 있는거라고는 그런 베르그를 위해 노력하는 것 뿐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결해 가야했다.

     

     

    “…후.”

     

    곁에서 굳은 표정을 이어가던 베르그가 이내 아르윈에게 말했다.

     

    “아르윈.”

     

    “…네?”

     

    “나 갔다올게.”

     

    “…”

     

    갔다온다는 말은 당연히 시엔을 만나보고 오겠다는 이야기였다.

     

    아직 하루가 많이 남았음에도 이미 2번이나 그녀를 보고 온 베르그였다.

     

     

    “…”

     

    피어나는 질투에 아르윈이 의견을 제시했다.

     

    “…괜찮으실 거예요.”

     

    “…”

     

    하지만 베르그는 고개를 짧게 저은뒤,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아르윈은 떠나가는 베르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를 따랐다.

     

    따르기밖에 못하는 현실이 힘겹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도 그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베르그의 곁에 있을수 있는것만으로도 당장은 축복이라 생각하려 했다.

     

    언젠가는 베르그와 기나긴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꿈을 그리며, 아르윈은 마음을 억눌렀다.

     

     

    .

    .

    .

    .

     

     

    아르윈은 복도 바닥에 앉아, 열린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대화를 엿들었다.

     

    엿듣고자 이러는건 아니었고…그저 밖에서 기다리다보니 모든게 들렸다.

     

     

    ‘콜록! 콜록…!’

     

    조금 더 거칠어진 시엔의 기침소리.

     

    ‘…물 좀 마셔.’

     

    그리고 그에 따른 베르그의 대답.

     

     

    아르윈은 이어지는 베르그와 시엔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평소에는 시엔이 말이 많고, 베르그가 듣는 쪽이었다면…이번에는 반대였다.

     

     

    베르그가 나아지고 있는 영지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일상적인 이야기로 시엔을 웃게끔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시엔이 걱정되어 왔다기보다는, 그녀를 웃게 만들어주기 위해 찾아온것만 같았다.

     

     

     

    특수한 상황이라는 걸 아르윈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르그가 저렇게까지 해준다는 게 언제나 부러웠다.

     

    마치 습관처럼 아르윈은 자신이 시엔의 입장이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아마 몸이 아프더라도…베르그의 사랑이 느껴져 행복했을 것이다.

     

    지금은 알 수 없었다.

     

    쓰러진다면 베르그가 걱정을 해줄까?

     

    “…”

     

     

    그렇게 상상을 이어가는 사이, 베르그와 시엔이 조용해졌음을 깨달았다.

     

    아르윈은 몰래 몸을 돌려 문틈을 바라보았다.

     

    베르그는 시엔을 품에 다시금 안아주고 있었다.

     

     

    “…병에 걸린다니까…벨…”

     

    “…좋네. 아파도 같이 아플테니까.”

     

    “…”

     

    시엔은 그 말에 킥킥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눈물의 소리도 어렴풋이 담겨 있었다.

     

     

    이내 베르그는 시엔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시엔은 베르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이제 가 봐, 벨. 난 괜찮아.”

     

    “…”

     

    하지만 베르그는 그 말에도 움직이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그가, 끝내 말한다.

     

     

    “…우리…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아르윈은 베르그의 그 말에 숨을 삼켰다.

     

    아무런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었겠지만, 어째서인지 베르그가 금방 사라지기라고 할것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지도자였던 베르그가, 저 말로 하여금 다시금 평민처럼 느껴진다.

     

    베르그가 시엔의 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우리 여행하면서 살기로 했는데.”

     

    “기억하네, 벨?”

     

    “근데…여기서…나 때문에…넌…”

     

    “….”

     

     

     

    어쩌면 그 말이 더 두렵게 들리는 건, 아르윈이 베르그라는 사람을 잘 알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선택도 내리는 베르그였다.

     

    어느날 갑작스레 사라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순간적인 상상에 아르윈의 불안함이 크기를 키운다.

     

    ‘…어?’

     

     

    수명은 얼마든지 건네줄 수 있다. 베르그도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있다. 고통을 견디는 건 익숙하니까.

     

     

    …하지만 베르그가 어느날 사라진다면?

     

    그렇게 없어진 그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그녀의 파랑새조차도 베르그를 놓칠지도 모른다.

     

    그 한번의 실책이 터져나면 그대로 베르그를 잃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

     

    그나마 다행인건, 베르그가 책임감이 짙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말은 저렇게 할지 몰라도 갑작스레 떠날 사람은 아니었다.

     

     

    “…”

     

    하지만 베르그의 행복을 생각해본다면 대체 어느쪽이 옳은걸까?

     

    당장 베르그가 느끼는 그 책임감이 그를 힘들게 하고 있는걸지도 몰랐다.

     

    족쇄가 되어 자유를 억압하는 무언가가 된걸지도 몰랐다.

     

    갇혀서 170년간 살았던 아르윈으로서는 그게 얼마나 답답한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아르윈은 금방 들은 이야기에 대한 보충설명이 필요했다.

     

     

    “…벨. 난 너랑만 있으면 어디서 살아도 괜찮아.”

     

     

    …하지만 당장은 불가능했다.

     

    시엔과 이야기하는 베르그를 방해할 생각은 더는 하지 못했다.

     

     

    시엔의 말에 베르그는 다시금 시엔을 안아주었다.

     

     

    아르윈은 그 모습에, 결국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눈을 감으며 주문을 외운다.

     

    그 주문에 그녀의 파랑새가 답했다.

     

    ‘짹! 짹!’

     

    아르윈은 파랑새에게 강하고 확실하게 명령했다.

     

     

    ‘이제부터 베르그는 절대 놓치지 마.“

     

    ****

     

     

    다시금 시작된 농사일이 끝나고, 저녁 노을이 하늘에 물들기 시작했을 때 아르윈이 물어왔다.

     

     

    “베르그. 저번에 하셨던 이야기 기억나세요?”

     

    “…?”

     

    “…왜, 당신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스탁핀을 지켜봐달라는 말…하셨잖아요.”

     

    “…아.”

     

    “그때 술도 한잔 하시기로 하셨던 것 기억하세요?”

     

    “…”

     

     

    나는 아르윈이 술을 같이 마시자는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최근에 술을 필요로 하긴 했다.

     

    그나마 술을 마실때면 어깨에 실린 짐이 가벼워졌으니.

     

     

    시엔이 그렇게 병에 걸리고 난 이후, 폭음을 하고 싶은 욕구조차 참아내고 있던 참이었다.

     

     

    “…오늘은 힘들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또 한번 마음을 억눌렀다.

     

    정말로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끝을 제어하기 힘들것만 같았다.

     

     

    걱정이 걱정을 물고 물어, 술이 끝없이 넘어갈 듯 했다.

     

     

    “…가볍게만요, 베르그.”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르윈이 다시금 부탁했다.

     

    “게일님도 초대할게요. 다 같이 한 잔 해요.”

     

    “…”

     

    “…걱정을 잠시만 내려놓아요.”

     

     

    나는 이것이 아르윈 나름의 위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네르가 그러했듯, 둘 다 나에게 걱정과 안타까움을 표한다.

     

     

    휴식의 중요성은 나도 알고 있었다.

     

    시엔도 나의 이런 점을 가장 걱정하기도 했고.

     

     

    나는 아르윈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농사일로 그녀에게 고마운 점이 많긴 했다.

     

     

    농사가 끝이 난건 아니지만, 그녀 덕에 그나마 한 가지 걱정을 덜어내고 있었다.

     

    “…”

     

    나는 결국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윈은 미소를 지으며 그런 내게 말했다.

     

    “게일님도 불러올게요.”

     

     

    .

    .

    .

    .

     

     

    이번의 술자리는 특이하게도 밖에서 이루어졌다.

     

    불을 가볍게 피워놓고, 그 앞에서 다들 도란도란 둘러앉는다.

     

     

    이 편이 방에 다 함께 앉아있는것보다 역병에 걸릴 확률이 적을것이라는 네르의 말 때문이었다.

     

    그게 정말 관련이 있을까, 나는 의아했지만…결국 이 문제와 관련해 네르의 말만큼은 따라야했다.

     

     

    불이 타오르는 모습에 그나마 머리가 가벼워지기도 했다.

     

    아무런 생각없이 앉아있을 수 있는 것 또한 하나의 축복이었다.

     

     

    “자, 마시자고.”

     

    게일이 먼저 잔을 들어올려 말했다.

     

    나는 그를 따라 불을 바라보며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래서. 시엔님은?”

     

    게일은 굳이 간을 보지 않고 처음부터 물어왔다.

     

    이게 그의 성격이었다.

     

     

    “…”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좋아지고 있다는 말만큼은 내 스스로 내뱉기 어려웠다.

     

     

    -툭툭.

     

    게일이 내 등을 두드렸다.

     

    “다 잘 풀릴걸세. 모든게 잘 풀려가고 있는 시점 아닌가.”

     

     

    그는 곁에 앉은 네르를 보며 말했다.

     

    “네르님과 라안님의 노력으로 완치자도 많이 발생하고 있고.”

     

    이어서 그는 아르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르윈님 덕에 농사일도 잘 흘러가고 있지 않나. 마찬가지로, 시엔님의 일 또한 잘 풀릴 걸세. 난 그렇게 믿고 있다네.”

     

    “…”

     

    난 피식 웃으며 그에게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턱을 쓸던 그가 묻는다.

     

    “그나저나. 모든게 잘 풀린 이후…아이 이름은 어떻게 할 건가?”

     

    “…”

     

    게일은 정말로 행복한 미래만 생각하라는 듯, 아이에 대한 주제를 던졌다.

     

    솔직한 마음으로 내게는 아직 부담되는 이야기였다.

     

    시엔의 미래를 걱정하는 입장속에서 아이의 이름을 떠올리는게 쉽지만은 않다.

     

     

    생각해둔게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결정했다가, 또 무엇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그 상실을 버틸 힘이 없을것만 같다.

     

    이름을 주는 순간 혹여라도 있을 이별이 더 힘들것만 같아서.

     

    그렇기에 아직 내 입으로 결정하지 않은것이었다.

     

     

    하지만 게일의 호의를 아는만큼, 나는 그저 억지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말을 둘러대, 주제를 피해갔다.

     

     

    그때, 아르윈이 목을 풀었다.

     

    그 소리에 이목이 집중되니, 그녀가 말한다.

     

     

    “…베르그. 질문할게 하나 있어요.”

     

    “말해.”

     

    “아까 엿들으려고 들은건 아니고…같이 있다가 듣게 된 거였는데.”

     

    “…”

     

     

    아르윈이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행하면서 사시려고 했다는 건…무슨 말이었어요?”

     

    “…”

     

    일전에 시엔과의 대화에서 나는 그녀와의 꿈을 떠올렸었다.

     

    시엔은 세상을 여행하며 살고 싶다고 했었다.

     

     

    어렸을때부터 몸이 아팠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부모님을 따라 세계각지를 여행했고, 그 과정속에서 자신이 본것들을 내게 보여주고 싶다고 여러번 말했었다.

     

    아직까지 단 한번도 이뤄보지 못한 우리의 약속이었다.

     

     

    병상에 앉아, 야위어가는 그녀를 보니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생각이었다.

     

     

    “…”

     

    나는 대답 대신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뒤늦게 그녀에게 답했다.

     

    “…그냥 스쳐지나간 생각이었어.”

     

     

    게일도 그런 내 대답에 나를 천천히 보았다.

     

    그의 표정에 다시금 진지함이 떠오른다.

     

     

    “…결정을 내릴건가?”

     

    “…?”

     

    “베르그, 말했지만…이 곳은 내가 잘 돌보겠네.”

     

     

    게일의 속삭임에 네르가 옆에서 헛숨을 삼켰다.

     

    아르윈도 굳어 게일을 본다.

     

    “그건 또…무슨…말씀이세요?”

     

    “………베르그, 이게 무슨 말이야?”

     

     

    네르의 꼬리가 순간적으로 내 발목에 감긴다.

     

    “…혹시 어디로 떠나…?”

     

     

    나는 큰 숨을 들이쉬다, 네르의 꼬리를 풀어냈다.

     

    그녀의 꼬리에 내 손이 닿는순간 네르가 몸을 움츠리기도 했다.

     

     

    게일에게 나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게일, 그 이야기는 끝난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네가 오늘 시엔님께 이야기를 꺼낸것이지 않나.”

     

     

    게일은 그렇다 하더라도, 그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믿는 네르와 아르윈이 놀라웠다.

     

    마음은 끌리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답했다.

     

     

    “…아직 해야할 일이 이렇게나 많이 남아있는데 가긴 어딜 갑니까. 말처럼 작위를 내려놓는게 쉬운 일도 아니고.”

     

     

    아르윈이 속삭였다.

     

    “….그러면 해야할 일이 다 끝나시면요…?”

     

    “…”

     

    “이번에 발생한 문제들이…다 해결되면요? 작위든 뭐든…신경쓰는 성격이 아니셨잖아요.”

     

     

    나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그런 순간이 오기나 할까 싶다.

     

     

    -콱!

     

     

    그때 네르가 옆에서 나를 붙잡았다.

     

    “아…미, 미안.”

     

    스스로의 행동에 놀란 그녀가 다시금 나를 놓았다.

     

     

    “베…베르그. 어디 가도 괜찮은데…아, 알려주고 가야해?”

     

    “…”

     

    “아, 아니 그러니까…도, 돌아와야 해?”

     

     

    나는 두려워하는 그녀를 그냥 내버려둘만큼 성격이 꼬여있지는 않았다.

     

    “아니…아니면….나도 데려…”

     

     

    거짓말도 아니었고, 당장은 어디에 갈 생각도 없었으니 그녀에게 솔직히 말했다.

     

     

    “어디 안 가.”

     

     

    술을 다시금 넘겼다.

     

     

    “…그냥 평온하고 싶은 마음에 한 이야기야.”

     

    그리고는 그들에게 말했다.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타들어가는 장작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베르그.”

     

    아르윈이 나를 부른다.

     

     

    “…혹시라도 어디론가 떠나시고 싶으시면…제게 이야기해주세요.”

     

    “…”

     

    “저만큼은 도와드릴게요. 언제나 당신만을 생각….아…그. 친구니까요.”

     

     

    네르가 옆에서 속삭였다.

     

     

    “나도, 베르그.”

     

    “…”

     

    “나도…세상이 다 너에게 등을 돌려도…나만큼은 네 편이 되어줄게. 그러니까…말 없이 떠나지만 말아줘.”

     

     

    나는 술을 한 번 더 꺾어마셨다.

     

    다시금 타오르는 장작만을 바라보았다.

     

    안 떠난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이렇게 남은일이 많은 상태에서, 나는 떠날 수 없었다.

    다음화 보기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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