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으로 간 이유는 달리 없었다.
‘로즈마리.’
그녀의 의자매를 찾기 위해서였다.
“크악!”
“크헉…!”
“으윽….”
황성을 수색하던 이들이 몇 명 있었다. 에테르는 이들을 보이는 족족 때려눕히며 지나갔다.
‘캘리퍼스를 꺼낼 가치도 없다.’
스태프를 쓴 건 아니었다. 금안족과 수인족이 쓰는 호신술. 체술을 사용했다. 이런 약자들은 엎어치기 한 번으로도 기절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1층부터 정리하며 올라갔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시체의 수도 늘어났다.
‘전부 토터스에게 당한 모양이군.’
에테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아갔다. 그녀의 목적지는 상층에 위치한 어느 방이었다.
끼익.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천장이 뜯어진 곳이다. 양옆으로 시체가 쌓여있다. 방바닥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축조진. 토터스를 이곳에 소환할 때 쓴 대형 스크롤이었다. 해당 스크롤 주변에는 검은 액체가 흩뿌려진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한쪽에는 소녀의 신형이 널브러져 있었다.
에테르는 그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힘없이 풀린 동공. 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본다.
“……로즈마리.”
에테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여기 온 이유는 로즈마리를 추궁하기 위함이었다. 왜 토터스를 풀어 놓았느냐.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내가 인간들과 잘 살려고 했던 것을 방해했느냐. 그리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어, 언니…….”
로즈마리는 고개를 까딱였다. 끄으으, 하고 신음까지 흘린다. 그런 와중에도, 소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내가, 내가 미안해.”
에테르는 멍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팔다리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고운 드레스는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몸 곳곳이 그을렸다. 군청색 머리카락은 산발이었다.
처량한 모습. 눈가에 주었던 힘이 풀린다. 에테르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너, 너 왜 그래.”
“내, 내가 미안해….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줘….”
로즈마리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화를 내고 싶었는데.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원, 래, 로드스톤만 먹고 튀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사장이 나타나서…. 그래서, 마법을 맞아서….마력초 물 시간이 없어서……. 그래서, 그만…. 내, 내가 미안해…….”
로즈마리는 거기까지 말하고 핏물을 토해냈다.
“저, 저거…….”
로즈마리가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에테르는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담배처럼 돌돌 말린, 손가락 크기의 스크롤. 에테르는 그것을 보자마자 눈에 핏발을 세웠다.
‘내가 만든 거잖아.’
백야의 열화판이었다.
‘그래, 그렇게 된 거였어.’
한순간에 타올랐던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에테르는 망연자실한 사람처럼 고개를 푹 떨구었다. 동생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백야는 플레어보다 관통력이 수십 배는 높다. 심지어 물질을 이온화하는 효과를 지닌다. 마법이 관통했을 때. 맞은 부위 일부가 순식간에 플라스마처럼 변했다가 돌아왔을 것이다. 지금은 치료가 급선무였다.
‘그런데 어떻게 치료하지?’
에테르는 사고를 더듬었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생각나 고개를 들었다.
‘양장본.’
여신이 자신의 또 다른 자아에게 준 아이템.
여신 르퀴네스. 그녀는 미덥지 않은 상대였다. 하지만, 로즈마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여신의 힘이라도 기꺼이 써 주겠다.
에테르는 아공간에서 양장본을 꺼냈다.
“치유, 치유 마법 같은 거 없나…?”
책의 목차를 펴보았다. 그러나 이전까지와는 달리 목차는 다른 글들로 빼곡히 적혀있었다.
[치료 마법을 찾으십니까?]
[현재 당신이 해야 할 것은 파괴입니다.]
에테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TIP : 모든 마법을 파괴하고 다음 앙상블로 이동하십시오.]
[화계마도 : 0/1049]
[수계마도 : 0/992]
[지계마도 : 0/1007]
[공계마도 : 0/824]
[전계마도 : 0/2252]
[미분류 : 0/149]
무언가가 바뀌었다. 에테르는 책을 아무렇게나 동댕이쳤다.
보통 이렇게 책을 막 굴리면 툴툴대는 소리가 들려와야 하는데, 양장본은 조용하기만 했다. 마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빌어먹을.”
이젠 다른 방법이 없다. 직접 마왕성으로 가서 치료하는 수밖에.
‘시간이 촉박하다.’
에테르는 로즈마리를 끌어안았다. 그때 뚫린 천장 사이로 누군가가 내려왔다.
붉은 로드스톤을 들고 있는 용인이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두 달 만이군. 안 그런가?”
“…….”
민천(旻天)의 요르문간드.
둘 사이에 꾸민 말은 불필요했다. 1천 년을 함께한 동료란 그런 것이었다.
대화는 짧게, 행동은 빠르게.
요르문간드가 잔잔하게 미소지었다.
“기운이 달라졌군. 결의라도 바꾸었나?”
“…이제 다 끝났다.”
“그렇군.”
요르문간드는 감았던 눈을 떴다. 딱, 하고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하늘 위로 메카닉 와이번 두 체가 날아들었다. 1군단의 정예. 그녀의 먼 친척뻘 되는 마수들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에테르를 향해, 요르문간드가 손짓했다.
“동포의 귀환을 환영하지. 자, 타라.”
**
와이번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지구에 있는 전익기와 다름없다.
안에 사람이 탈 수도 있고, 아래쪽에는 폭약을 적재할 수도 있다. 머리 부분만 도마뱀처럼 생겼을 뿐이다.
이 또한 ‘철화의 저주’를 받은 결과다. 본래 와이번은 날아다니는 도마뱀에 불과했다. 마왕의 저주가 단순한 육식성 동물을 완전한 괴물로 뒤바꾼 셈이다.
이런 와이번은 동작도 날렵하다. 제트기에 맞먹는 수준. 아니, 그 이상이다. 제국에서 마왕성까지 30분이면 날아간다.
“이 정도면 됐겠지.”
그동안 요르문간드는 로즈마리를 응급처치했다.
“이러고 있으니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나는군.”
“대전쟁 때 말인가?”
“그래.”
1천 년 전, 대전쟁 시절.
그땐 야전사령관이 곧 치료사이기도 했다. 요르문간드는 직접 전투하면서 전선의 장병들을 치유했었다.
“처치 실력은 녹슬지 않았어. 호천(昊天)보단 아니지만.”
“물의 로드스톤도 얻었다고 했나?”
“물론. 이제 녀석의 영혼을 끌어올 수 있을 터다.”
먼 옛날. 대전쟁에서 마왕군이 정령에게 대패했을 때,마왕과 홤께 봉인되었던 두 존재가 있었다.
‘창천(蒼天)’의 파스모.
‘호천(昊天)’의 길라흐.
각각 봄 하늘과 여름 하늘을 다스리던 사천(四天).
그들은 전쟁 마지막까지 정령을 도륙했다. 패색이 짙어짐에도 항복하지 않았다. 하여 각각 불의 정령왕과 물의 정령왕에게 덤벼들었다. 그 결과는 영 좋지 못했다.
“놈들이 깨어나면 우리보고 한 소리 하겠군. 마왕군 기강이 말이 아니라면서 말이다.”
“봉인 당한 것보단 백 배 낫다고 받아치면 그만이다. 주군이 그랬잖아? 강자는 늘 살아남아야 한다고.”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때웠다. 그 사이에 증기의 비에 젖었던 옷도 다 말라갔다.
문득 창가를 내려다보았다. 하늘 아래로 구불구불한 설산이 보인다.
눈발 날리는 날씨였다. 이따금씩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강도 보였다. 세상이 온통 하얀색이었다.
누나타크 지형. 엘랑카야 산맥을 마주한 에테르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집이군.”
생소했다. 마왕군에 못 있겠다 싶어서 뛰쳐나왔더니, 결국 돌아온 곳은 원점이었다.
쿠우우웅! 와이번은 꽤나 요란하게 착지했다.
에테르는 로즈마리를 둘러맸다. 곧바로 탑 입구까지 달려갔다.
척, 처걱!
머리가 모니터처럼 생긴 마수 둘이 에테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한 팔에는 드릴, 다른 팔에는 경기관총을 단 이물들. 얼굴에선 치지직, 하는 소리가 났다. 또한 키는 5m에 육박하는 듯했다.
까가각!
두 마수가 머리를 위아래로 한 바퀴 돌리며 총을 겨누었다.
“…신원을 밝혀라.”
에테르는 고개를 들었다.
“비켜. 뒤지기 싫으면.”
“……넵.”
철의 마탑.
마왕성은 아니지만, 마왕성과 가까운 장소. 여기라면 야전병원으로 써도 그만이다.
얼마 만일까. 복잡하게 얽힌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테르는 헤매는 일 없이 치료소에 도착했다.
‘메디컬 캡슐이…. 저기 있군.’
에테르는 로즈마리를 캡슐에 넣었다.
[치료를 시작합니다.]
마수는 마석을 적출당하지 않는 한 명줄이 질기다. 오장육부가 다 뜯겨 나가더라도 마석만 간직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살아난다. 다행히 로즈마리는 마석이 있는 곳에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 흔적이 없었다.
“후우.”
급한 불도 껐겠다. 에테르는 담배를 물고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타고 상층으로 올라간 것이다.
마탑의 최상층. 청소를 안 한 건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다. 에테르의 시선이 자연스레 하늘로 올라갔다.
‘벌써 보름인가.’
만월. 대륙의 자전축을 안정시키는 위성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손을 호호 불어서 덥힌다. 에테르는 목도리를 풀어서 두 손으로 펼쳤다.
하얗고 보드라운 목도리. 여전히 누가 준 건지는 모르겠다. 상표명도 없다.
하지만.
‘따듯하군.’
어째서인지 계속 두르고 있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