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96

   “큰일 났군요.”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 했다.

   

   양아치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평온한 얼굴을 유지하며 목소리를 냈다.

   

   “아르테아 여백작은 대륙에서 손에 꼽는 거상입니다. 저 분과의 경쟁에서 이기기는 무척 어려울 겁니다.”

   

   그의 의견은 내 의견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저 여자가 석판을 가지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내가 경매에서 승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긴 다른 꼼수도 뭣도 없는 돈과 돈의 승부가 벌어지는 장소니까.

   

   이사벨이 출현할 것을 미리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준비했겠지만 루시가 출입금지인 것도 몰랐던 나한테 뭔가가 있을 리가.

   

   “일단 계속해보겠습니다만. 기대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양아치는 그리 이야기를 하곤 표지판을 치켜들었지만 상대는 집요했다.

   

   가격이 올라가기 무섭게 올라오는 표지판을 보고 있으면 이사벨이라는 사람이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저 여자는 반드시 석판을 손에 넣을 생각인 것이다.

   

   “삼백! 삼백 골드입니다!”

   

   가파르게 올라간 경매 금액은 순식간에 내 소지금에 도달했다.

   

   이 정도까지 가격이 올라갈 걸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경매장 안에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진행자의 얼굴에는 환희가 가득하지만 우리가 있는 개인실에는 침묵이 감돌고 있다.

   

   모두가 내 눈치를 살피는 게 보인다.

   

   아. 젠장. 마음대로 되는 게 없네.

   

   어떡하지.

   

   급하게 돈을 끌어 쓸 방법은 있다.

   

   지금 내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여러 가치 있는 아이템을 양아치에게 넘기고 이 지점이 지닌 돈을 사용하면 된다.

   

   지난 번 게오르크 가문에서 받아온 것에 더해 여태까지 모아두었던 여러 물건들이 있으니 꽤 많은 돈을 끌어올 수 있겠지.

   

   근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사벨에게 더 많은 소비를 강요할 뿐 결국 저 물건은 그녀의 손 안에 들어갈 텐데?

   

   게임 속에 있었던 한 이벤트를 기억한다. 이사벨이 자신이 바라는 물건을 사기 위해 1천 골드를 일시에 내놓던 모습을.

   

   한숨을 내쉰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양아치가 표지판을 내린다.

   

   “삼백! 삼백! 삼백! 낙찰되었습니다!”

   

   좋게 생각하자.

   

   이사벨 저 여자가 석판을 지녔다는 것은 그녀의 창고에 저 물건이 보관된다는 이야기야. 다른 데로 흘러가지 않을 거라는 소리지.

   

   행방불명이 되는 것보다야 소재가 명확한 게 훨씬 나아.

   

   더욱이 이사벨은 나름 신실한 신도다.

   

   방식이 평범한 신도들과 많이 다르긴 하지만 주신을 믿는다는 점은 명확.

   

   그러니 나중에 페이비를 데리고 가거나, 할배를 담보로 맡기거나, 최악의 경우 내 정체를 드러내는 식…

   

   이건 아냐. 일이 괴상하게 흘러갈 것 같으니까.

   

   <운이 안 좋았구나.>

   ‘그러게요.’

   

   저거 하나 때문에 고스로리까지 몸에 걸쳤는데 바라는 물건을 눈앞에서 놓치다니!

   

   이래서야 페도 변태 주신과 얼빠 여우만 좋아할 일을 해준 거잖아!

   

   억울해!

   

   억울하다고!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저 석판이 비교적 앞에 나와 주었다는 것이다.

   

   저 석판보다 내가 바라는 물건들이 먼저 나왔더라면 눈물을 머금고 그 모든 걸 포기해야 했을 테니까. 그리고 석판마저 놓쳐버리고는 한탄했겠지.

   

   그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쨌든 본래 바라던 물건들은 챙길 수 있을 테니까.

   

   “경매가 뜨겁게 달아올랐는데요! 이번에 나온 물건은 유희의 팔찌입니다!”

   

   원래 사람의 스트레스가 쌓여 있을 때는 돈을 팍팍 써야한다고 그랬어.

   

   어디 한 번 과소비를 해보자고.

   

   “일 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수중에 있는 돈 다 쓰고 만다.

   

   *

   

   열이 받은 김에 무작정 돈을 내던지던 나였지만 모든 돈을 사용하는 데는 실패했다.

   

   내가 노리는 물건들은 사치품보다는 실용성에 중점을 둔 경우가 대부분이라 가격이 잘 안 올라가더라고.

   

   덕분에 목표로 했던 물건들 대부분 구매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들고 있던 돈의 절반밖에 사용하지 못했지.

   

   경매가 끝난 후에도 나는 바로 경매장 바깥으로 향하지 않았다.

   

   지금의 난 루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루시가 지닌 권능 중 하나인 인파가르기를 쓸 수 없다는 거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 부대껴가며 시선을 몸으로 받아내야 할 텐데 그럴 바에야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후에 천천히 나가는 게 낫지.

   

   “물건 수령해왔습니다. 영애님.”

   

   이번 경매에서 내가 구매한 물건들을 받은 후에도 꽤 오랜 시간 늑장을 부리던 나는 바깥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개인실에서 빠져 나왔다.

   

   여전히 경매장 안에는 여러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었지만 길을 가로막을 수준은 아니었다.

   

   좋아. 이제 빨리 돌아가서 이 거지 같은 고스로리를 벗어던지고 원래 옷을.

   

   “거기. 잠시.”

   

   말을 걸어 온 남자의 시선을 확인한 나는 모자챙을 잡아 내려서 얼굴을 가렸다.

   

   녀석은 정중한 체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눈에 담긴 감정은 명확했다.

   

   알지도 못하는 귀족 남성이 탐욕을 드러내며 말을 걸어오는 이유?

   

   뭐겠어.

   

   뻔하지.

   

   “안녕하십니까. 럼리 가의 영식.”

   

   남자가 내게 다가오려 하자마자 포셀과 에린이 내 앞을 가로막았고, 그와 동시에 앞으로 나아간 양아치가 남자를 막는다.

   

   “넌 뭐지?”

   “사르투스 영애를 모시는 사람입니다. 저희 영애께서는 부끄러움이 많으신지라 제게 말씀을 드리면 대신 전달을 하겠습니다.”

   

   트집 하나 잡을 수 없을 만큼 정중한 태도를 무기로 남자에게 대응하던 양아치였지만 그 대응은 상대방이 정상이란 가정 하에 먹히는 것이었다.

   

   “비키도록. 난 직접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

   “허나.”

   “이해가 안 되나? 난 부탁을 하는 게 아니다. 대 럼리 가의 장자로써 명령을 하는 것이다.”

   

   상대가 상식 이하의 병신이라면 그 대응은 무의미했다.

   

   하. 안 그래도 일이 안 풀려서 기분이 개 같은 데 어디서 개 같은 게 달라붙어서는 열 받게 만드네.

   

   “천한 것답게 생각하는 것도 느리군. 생각해봐라. 이는 네 주인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천한 가문에서 인생을 역전할 기회를 얻는 것 아닌가. 가문은 비천하나 얼굴은 괜찮으니 어쩌면 첩 정도로는 받아줄 수 있겠지.”

   

   고민은 짧았다.

   

   자기한테 화풀이 해달라고 저렇게 난리를 치는데 한 번 해줘야지.

   

   내가 앞으로 향하자 포셀과 에린이 날 만류하려 했지만 난 그를 무시했다.

   

   뭐 어때. 어차피 경매도 끝났는데. 기껏해봐야 쫓겨나기밖에 더 하겠어?

   

   그리고서 양아치의 옆에 도착한 나는 고갤 들어 남자를 올려다봤다.

   

   가볍게 미소를 지어 주었더니 남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봐라. 영애께서도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지…”

   

   허나 그 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가 말을 잇는 도중에 내가 그의 다리사이를 걷어차 버렸으니까.

   

   행복으로 가득하던 남자의 얼굴이 이내 시퍼렇게 물들더니 그 몸이 뒤로 고꾸라진다.

   

   몸상태가 안 좋아서 강하게 때리지도 못했는데 엄살이 심하네.

   

   “오라버니?!”

   

   남자가 바닥에 쓰러지기 무섭게 뒤 편에서 시종 여럿과 함께 한 여자가 달려온다.

   

   그 여자의 얼굴은 내게 익숙한 것이었다.

   

   애버리.

   

   조이가 속한 영애 그룹의 2인자이자 나를 미워하지만 내게 약점이 잡혀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하는 녀석.

   

   어떤 의미로 조이보다 훨씬 악역영애다운 들러리.

   

   쟤 가문이 럼리였었구나?!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머리에 올랐던 열이 식는 게 느껴졌다.

   

   하필이면 엮여도 아카데미 내에서 아는 사람이랑 엮이다니.

   

   지금 내가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오늘의 일이 오늘로 끝날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고스로리를 입고 돌아다녔단 사실이 다른 곳으로 퍼져서 오늘로 끝나지 않는다면…

   

   안 돼.

   

   그건 진짜로 수치사야.

   

   “당신! 감히 훗날 럼리 가문을 이을 저희 오라버니를 공격하다니! 무슨 자신감이죠?!”

   

   저 페도 변태가 먼저 접근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니? 자기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구나?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를 억지로 눌렀다.

   

   무슨 말이라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체를 들켜버릴 테니까.

   

   <이래서 감정에 휩쓸려 일을 저지르면 안 되는 것이다. 오늘 일을 교훈 삼도록 하거라.>

   ‘할아버지. 지금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에요?!’

   <무어 어떠냐. 무슨 일이 있든 간에 기껏해야 경매장에서 쫓겨나는 정도일 텐데.>

   

   그러면 제 정체가 들키잖아요!

   

   진짜 섬세함이라고는 손꼽만큼도 없으시네요!

   

   <어쩌겠느냐. 이미 일어난 일을. 최선은 시선이 모이기 전에 수습하는 거겠지.>

   

   그렇겠죠오오오.

   

   그래.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애버리는 내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녀석이잖아.

   

   이 녀석에게 정체를 들키더라도 입만 막아버리면 아무 문제 없어.

   

   “왜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고 있는 거죠? 대답하세요!”

   

   애버리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본 나는 한 손으로 모자 챙을 살짝 들어 붉은 색의 머리카락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서 여태까지 감추어 두었던 목소리를 입 밖으로 냈다.

   

   “좆밥 영애♡”

   

   애버리만이 들을 수 있도록 작게 목소리를 냈더니 애버리의 손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방금 전까지 당당하고 확고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어버린 채 허공을 떠돈다.

   

   “…알른 영애?”

   “이 더러운 손 좀 떼주겠어?♡ 같이 숨쉬는 것도 기분 나쁜데 몸까지 닿으니까 토할 것 같거든♡”

   

   애버리는 부정도 의심도 하지 않았다.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내 정체를 확신한 그녀는 재빠르게 손을 물리고 두 손을 앞에 끌어 모았다.

   

   “죄송!…”

   “네 돼지 같은 목소리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닥쳐♡”

   “…네.”

   

   입을 일자로 만들고 우물거리는 애버리의 멱살을 잡아 끈 나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말을 전했다.

   

   “잘 들어. 오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다? 멍청한 금붕어 영애라도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

   

   우리는 오늘 경매장에서 만나지 않은 거야.

   

   네 오라비는 제 권력을 믿고 나대다가 정체 모를 영애에게 얻어맞았을 뿐이고.

   

   내가 닥치라고 말한 것 때문일까. 애버리는 대답을 하는 대신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만하면 이해했겠지.

   

   내가 그녀의 멱살을 풀고서 양아치 뒤로 물러서자 애버리가 사람들을 물렸다.

   

   시종들은 이 명령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애버리의 명령을 어기지도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바닥에서 거품을 물고 있는 남자 하나를 내버려 둔 채 경매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후일에 들은 이야기지만 안타깝게도 럼리 영식의 성기능은 멀쩡한 모양이다.

   

   하나 정도는 깨버릴 생각이었는데.

   

   몸 상태가 안 좋아서 힘조절을 제대로 못했나 보네.

   

   *

   

   밤중에 내가 몇 번이나 이불을 걷어차게 만든 경매장에서의 일이 지나가고서 며칠이 지난 후 파트란 공작 가문에서 우리 가문 측으로 편지가 하나 날아들었다.

   

   그 편지는 두 개였다.

   

   하나는 파트란 가문의 주인이 보낸 초청 편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조이가 나에게 보낸 편지.

   

   [알른 영애. 며칠 전에 먼저 오셔서 함께 시간을 보내시지 않으시겠어요? 파트란 영지를 꼭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요.]

   

   그에 대한 답장은 정해져 있었다.

   

   내 최애캐가 나랑 놀고 싶다는 데 그걸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Ilham Senjaya님 보러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하던 물건은 못 먿었지만 축제 준비에는 성공했네요!

다음화 보기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u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aki Tank Enters the Academy, Messagg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Mesugaki tanks are not properly educated., 메스가키 탱커는 참교육 당하지 않는다.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2 Native Language: Korean
“You sloppy orc~ You can’t take down a girl?” He became the Mesugaki character in the Academy game. But the taunt works too well.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