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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7

    “…베르그, 크룬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군.”

     

    아침부터 입을 게일은 새로운 소식을 건네왔다.

     

    스멀스멀 피어오른 소문에 어느정도 예상은 했다지만, 그 소식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건 변함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가슴에 놓인 짐이 들어올려진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돈된다.

     

    추상적인 적보다 실체가 있는 적이 내게는 편안했다.

     

     

    어쩌면 여태 배운것이라고는 싸움밖에 없었으니 그런걸지도 모른다.

     

     

    대비해야할 존재가 있는 편이 편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죠?”

     

    “크라이어 가문이 멸문했어. 하루 아침에 격한 전투가 벌어졌다는군.”

     

    “…”

     

    “…크룬드가 직접 전투에 나서서 날뛰고 있다고 하네. 그런만큼, 제대로 된 대책이 준비되기 전에는 아마 많은 피해자가 탄생할 것 같아.”

     

     

    나는 게일의 말을 반복했다.

     

     

    “직접 날뛰고 있다고요?”

     

    “마왕을 죽인것에 대한 복수를 찾는게 아닐까하는 예상들이 있네. 그게 맞다고 한다면, 복수의 대상도 정해져 있겠지.”

     

     

    그 예측이 맞다는 가정 하에, 크룬드가 노릴 적은 게일의 말대로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투사들.

     

    용사와 아크란, 실프리엔과…시엔. 그리고 나까지.

     

     

    “…이곳으로 오겠군요.”

     

    내가 속삭였다.

     

    당장 스탁핀에만 크룬드가 노릴 대상이 세 명이나 포진되어 있었으니.

     

     

    게일도 그 불안함을 느끼고는 있는 듯, 크게 부정을 하지는 않았지만…또 동시에, 너무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는 걸 경계했다.

     

    “그야 모르지. 크라이어 가문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머니까 말이야. 만약 정말로 이곳으로 향해온다고 해도 이전에 알 수 있을것이고.”

     

    “…”

     

     

    그렇게 불편한 침묵속에서, 게일은 한숨을 흘렸다.

     

    그는 한참을 고뇌하다 내게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왔다.

     

     

    “베르그.”

     

    “…”

     

    “…만약 크룬드가 정령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건가?”

     

     

    이번에도 결정권이 내 손에 쥐어졌다. 수많은 목숨이 손에 달려있는 느낌.

     

    아담 형이라면 이 순간 뭐라 답했을까.

     

     

    게일은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도망칠 준비를 해야할 것 같네.”

     

    “예?”

     

    게일은 착잡한 목소리로 제 의견을 전달했다.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 자네들은 예전의 그 홍염단이 아니야. 실전감각도 떨어졌고, 무기도 여럿 녹여 농기구로 바꾸었어. 역병에 걸려 쓰러진 자들도 많으며, 예전과 달리 말도 그리 많지 않지. 싸울 수 있는 조건이 아니네.”

     

    “…”

     

    “크룬드의 힘은 우리가 가장 잘 알지 않나. 최상의 상태에서도 우리는 크룬드에게 패배했어. 아담을 잃었고, 수많은 대원들을 잃었지. 이 상황에서는 비참하게 패배하고 크라이어 가문처럼 멸문을 맞이할 뿐이야.”

     

     

    갑작스러운 도주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그의 말이 당혹스러우면서도…완전히 그의 말을 배제하지는 못했다.

     

    따지고 본다면 크룬드의 존재부터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도망쳐서 어디로 간답니까?”

     

    “모르겠네. 어디든 가야겠지. 드레이고, 블랙우드, 셀레브리엔…어디든.”

     

     

    게일의 제안은 그리 간단한게 아니었다.

     

     

    “말씀하셨듯, 우리는 예전의 홍염단이 아닙니다. 대원들이 아닌 인족들도 다수 영지에 살고 있고요. 이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흩어져야겠지. 흩어져서라도 살아남아야해. 죽는 것보다 나으니까.”

     

    “…흩어져서 아무곳으로나 흘러들어가, 슬럼 생활이라도 하라는 겁니까?”

     

    “…그렇게 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인족에 대한 더한 왜곡된 인식이 퍼져나갈 일입니다.”

     

    아담 형의 유지를 생각해서라도 피해야하는 선택지였다.

     

    “그나마 영웅으로 추대받는 저와 시엔의 영지에서 나온 인족들이…다른 도시에서 바퀴벌레처럼 살아남는다고 한다면…”

     

    “…”

     

    아담 형 같은 피해자가 또 탄생할지 모른다.

     

    우리에 대한 혐오가 더 크게 퍼져나갈 일이다.

     

    형의 유언도 이뤄주지 못할 일이다.

     

     

    “…하.”

     

    …그렇다고 게일의 말이 잘못됐다 싶은것도 아니었다.

     

    살아남는게 무엇보다 우선시 된다는 건 안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난 그저 내게 주어진 그 모든 선택지가 내키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도망칠 고민은 해봐야 해. 끝내 그 선택을 내리지 않더라도, 대비는 되어있어야만 해.”

     

    게일은 내 말에도 흔들리지 않은채로 말해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어째서인지 모든게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

     

     

     

    나는 시엔을 만나러 왔다.

     

    문 앞에서 미소를 연습하다 안으로 들어선다.

     

     

    “콜록! 콜록!”

     

    들어서자마자 들을 수 있던건, 건조한 시엔의 기침소리였다.

     

    수책해가는 얼굴, 힘없이 침상에 누워있는 몸.

     

     

    병세가 악화되고 있다는 건 누가봐도 분명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방에 내가 들어온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기침만을 흘리고 있었다.

     

     

    “…시엔.”

     

    “…아.”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그녀의 눈꺼풀이 힘겹게 떠졌다.

     

    그 약해진 눈가가 반달로 휘며 내게 미소를 그려준다.

     

     

    “…잘못 들은건 줄 알았어.”

     

    시엔이 속삭였다.

     

     

    나는 어렵게 미소를 지으며 시엔 곁에 앉았다.

     

    이마를 천천히 쓸어 식은 땀을 닦아내주었다.

     

    약해진 그녀를 보며 드는 감정은 형용하기 어려웠다.

     

     

    눈물을 흘리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몸은?”

     

    “…”

     

    내 질문에 시엔은 미소만을 보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괜찮다고 말하던 그녀는 어디에 간 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시엔, 몸은?”

     

    하지만 억지로라도 나는 좋은 말을 듣고 싶어, 그녀에게 대답을 촉구했다.

     

    시엔은 끝내 내게 답을 속삭여주었다.

     

     

    “….아파.”

     

    “…”

     

    그 대답에, 몰래 쥔 두 주먹이 덜덜 떨렸다.

     

     

    대신 아파해주고 싶은데 못해주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힘겨웠다.

     

    나는 그럼에도 억지로 말을 이었다.

     

     

    “괜찮을거야, 시엔. 조금만 더 참아줘. 이겨내야지.”

     

    “…응. 당연…하지.”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계속해서 쓸었다.

     

    시엔은 기침을 하다, 나를 어렵게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어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기시감이 느껴지는 행동이 나를 불안하게 한다.

     

    아담 형과의 이별에도 이런 비슷한 느낌을 전달받았으니.

     

     

    시엔이 나를 올려다보다 쿡쿡 웃었다.

     

    처음에는 기침인줄로만 알았던 그 소리가 웃음이라 다행이었다.

     

     

    “벨…웃긴게…뭔지 알아…?”

     

    “뭔데?”

     

    이 상황속에 대체 우스울게 무엇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녀가 웃고 있기에 나는 시엔이 말을 꺼내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런…상황…콜록!…하아…속에서도….네가 걱정해주니까…너무 행복하다…”

     

    “…”

     

    “정말…너만 있으면…난 평생…행복하게 살겠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행복하게 살거야.”

     

    “…”

     

    시엔은 또 미소를 짓다, 어렵게 제 손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그 손이 내 얼굴에 닿았다.

     

    “…난 실격이네.”

     

    “뭐가…?”

     

    “난 널…이렇게나 슬프게…하니까…”

     

    “…”

     

    “몸이…약해서…미안해.”

     

     

    나는 끝내 입술을 악물고, 그녀에게 부탁했다.

     

    “그런 말은 안했으면 좋겠어.”

     

    “…”

     

    “뭐가 미안하다는 건데. 약한 소리는 그만해.”

     

    “…벨.”

     

    시엔이 그 순간 나를 힘겹게 불렀다.

     

    졸린 듯 눈을 감으며 호흡을 내쉰다.

     

     

    “…네가 참고 있는거 알아.”

     

    “…뭘.”

     

    “…네르님과…아르윈님.”

     

     

    그 말에 나의 몸이 굳었다.

     

     

    “…나를 잊었다고 해놓고…이렇게 다시 사랑해주는 걸 보면…네르님과 아르윈님도…결국 나를 위해 밀어내고 있는거잖아…? 그때…내게 그랬던 것처럼…”

     

    “…”

     

    시엔은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계속해서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다 알면서도…내가 욕심을 부린거야….널 독점하고 싶어서…네가 나만 봐주었으면 해서…”

     

    “…”

     

    “참게 만들어서…미안해. 욕심부려서…네가 더 힘든 듯 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선택이었어.”

     

    “…거짓말. 너는…한 번 가슴에…들인 사람은….못놓아.”

     

    “…시엔, 너만 나의 아내야.”

     

    “…왜?”

     

     

    나는 그 질문에 의문을 표했다.

     

    “…뭐?”

     

    “일부…다처제가…폐지되서…?”

     

    “…”

     

    “…벨….넌 그런 걸 신경쓰는 성격이…아니었잖아…”

     

    시엔은 미소를 계속해서 지어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어떠한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시엔이 이 모든 말을 꺼내는 이유가,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벗어던질수가 없었다.

     

    자신이 떠나고 힘들어할 나를 위해 이런말을 하는 게 아닐까.

     

     

    그런 그녀에게, 나는 나도 모르게 협박을 해버리고 말았다.

     

    “…시엔.”

     

    “….”

     

    “네가 혹시 잘못될까봐…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거라면, 하나만 말해둘게.”

     

    “…”

     

    “…네가 죽으면 나도 같이 따라갈거야.”

     

    시엔의 힘없는 눈동자가 커졌다.

     

    “남겨진 문제들만 해결하고…바로 따라갈거야.”

     

     

    나는 이제 더 이상 이별을 경험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시엔이 죽고 내 아이도 마찬가지로 죽는다면, 나는 이제 떠나간 내 동료들과 아담 형, 그리고 시엔과 내 아이를 만나러 갈 것이었다.

     

    그녀까지 세상을 떠나면,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저 편에 더 많을테니.

     

     

    시엔의 눈꼬리에 눈물이 차올랐다.

     

    또 다시 기침을 터트리며 웃던 그녀가 말한다.

     

    “이러면 안되는데…”

     

    “…”

     

    “…그 말이 기쁘게 다가오는건 왜일까…”

     

    시엔은 제 얼굴에 덮은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 어느때보다 단호한 말투로 그녀가 말했다.

     

    “…난 꼭 이겨낼게.”

     

    “…”

     

    “그러니…너도 참지말고…행복하게 있어줘.”

     

     

    나는 적절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그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나를 안아주지 못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연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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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ncompatible Interspecies Wives

IIW 섞일 수 없는 이종족 아내들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Polygamy is abolished.

We don’t have to force ourselves to live together any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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