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대는 먼저 출발한다!”
“혜령아, 목경아.”
“네!”
“네, 은공. 말씀하십시오.”
“전쟁터는 다른 곳과는 다르니 평소처럼 챙겨주기는 힘들 거다. 살아남아도 오롯이 너희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해.”
레이디를 지키는 게 기사의 낭만이라지만, 아쉽게도 전쟁터는 낭만이 통하는 곳이 아니었다.
되려 낭만 생각하다가 모가지나 안 따이면 그만이니, 어느 정도는 자기 스스로 몸을 지킬 필요가 있었다.
서련이야 맹주와 함께 있다지만 혜령이는 일단 후방이긴 해도 떨어져 있으니.
그래도 해남검문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게 다행인가.
“…아저씨랑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건 슬프네요.”
혜령이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와 목경이는 별동대로 따로 움직이다 나중에야 본대에 합류할 예정이니, 혜령이는 한동안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
혜령이야 나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겠지만, 전쟁터는 장난이 아니니 그럴 수가 없었다.
큰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여야 하는 별동대 특성상 데리고 다니기도 쉽지 않고.
초절정고수만 모인 곳에서 절정고수가 뭘 하기도 쉽지 않을 테니…
“그래도 전장까지는 같이 가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
“아니에요. 아저씨는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시러 가시잖아요. 그냥…몸 성히 돌아와 주시기만 하면 돼요.”
“가능하면 지켜보마.”
나는 우울한 표정을 지은 혜령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장갑을 낀 탓에 평소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혜령이는 조금이나마 기분이 풀린 듯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 정말 다치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마. 내가 전쟁터에서 잡병으로 시작해서 기사까지 올라간 사람 아니냐. 2년 동안 그 짓을 했으니 그렇게 쉽게 다치진 않아.”
최소한 여긴 환경이 훨씬 나은 편이니, 파르스를 상대하는 것을 빼면 그렇게 까지 위험하진 않으리라.
그때와 다르게 나는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섰으니까.
마스터.
그 정도면 어떻게든 이 예정된 전쟁을 조금이나마 비틀 수 있겠지.
가장 확실한 건 그랜드 마스터가 되는 거지만…그게 말이 쉽나. 서양 전체를 따져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게 3명이고, 중원 전체를 따져도 채 내가 아는 고수는 다섯이 안 되는데.
그나마도 오늘내일하는 노인들인데다 위치를 알기도 힘들었다.
태허진인…은 그 봉우리에 있는 거야 알지만 무작정 데려오기엔 속세랑 연을 끊다시피 한 사람이고. 애초에 내가 처음 만난 시점에서도 나이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던 분이실 텐데.
검성은 위치를 모르고, 권성은 북방에 있을 테고. 그나마 위치를 아는 소림사 방장은 전쟁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함부로 전면에 내세울 수는 없었다.
화경이라도 나이를 완전히 거스를 수는 없는데다…기본적으로 스님이었기에 살생을 저지르는 데 거부감이 강한 게 컸다.
그래도 자기도 참가하겠다며 방장직 내려놓고 참가해주신 게 다행이지.
스님이랑은 상성이 최악인 전쟁터인데 말이야.
“…각원방장님이 파르스를 잘 막아 주실 수만 있다면 할만하겠지.”
경지에 이른 고수는 같은 경지의 고수가 되어야 비로소 상대할 수 있는 법.
철저하게 설계된 암습을 하거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자기보다 윗줄의 고수를 2대1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니, 각원 대사님은 파르스와 대치하기 위해 본대에 계속 남아있어야 했다.
그놈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각원방장님이 발을 묶어놓으시는 동안 상대의 본대를 기습해야지.
다 같이 달려들기엔 파르스라는 놈이 원체 영악한 놈이라, 그렇게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을 거고 도주 방법 하나 정도는 확실하게 만들어두었을 터.
아마 그놈 주변에 고수가 깔려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각원 대사님이면 누가 오든 안심이에요.”
“그렇게 됐으면 좋겠는데. 전쟁터라는 게 원체 변수가 많아서.”
차라리 소림사가 아니라 다른 문파였으면 괜찮았을 것 같은데, 소림이라서 약간 불안하네.
…뭐, 지금 내가 남 걱정할 때인가.
나 자신부터 걱정해야지.
“혜령아, 슬슬 위치로 돌아가라.”
“아저씨, 잠깐만요.”
“왜?”
“잠깐만 귀 좀 대주세요.”
나는 혜령이의 말대로 몸을 기울여 혜령이 쪽으로 귀를 내밀었다.
그러자 혜령이의 손이 내 얼굴을 붙잡더니, 얼굴이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입술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가벼운 입맞춤.
얼굴을 떨어트린 혜령이는 자기도 부끄러운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 힘내요.”
“…그래, 너도 힘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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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 달이 걸려 도착한 청해성의 날씨는 정말 건조했다.
사실상 서장이나 다름없는 곳이니 만큼 사막이 가까이 있는 탓도 있을 테고, 요 근래 이 근방에서 비가 내리지 않은 것도 연관이 있겠지.
그나마 날씨 자체는 선선하다는 게 위안이었다.
“은공, 여기 물입니다.”
“고맙다.”
나는 목경이가 건네준 물통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평소라면 좀 더 많이 마셨겠지만, 전쟁터는 언제 보급이 끊길지 모르니 가능하면 아껴 먹고 아껴 마시는 쪽이 나았다.
내가 후방에서 뻗대는 역할이었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나는 최전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별동대였으니까.
“이제 곧 국경에 도착하게 되겠군요.”
“그렇겠지. 이 빌어먹을 전쟁이 시작되는 곳에 말이야.”
청해성.
여긴 마교와 파르스를 제하더라도 아주 어지러운 곳이었다.
티베트 산맥의 동북부 쪽이 몰려있어서 해발고도가 드럽게 높고, 그 와중에 서장의 세력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라 중원도 청해성 지역의 동부만을 확고한 영토로 지정해두고 있을 뿐, 그 이상 나아가질 못했다.
그리 비옥한 땅도 아닌데 굳이 무리해서 먹을 필요가 없으니,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관문을 적당히 지키는 선에서 땅을 먹어둔 상태.
파르스의 목표는 이곳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놈이 원하는 건 전쟁이지, 숨어들어 가서 난리를 치는 게 아니니까.
그놈들이 빈집 털이 시도를 아주 안 하진 않겠지만, 그것 때문에 중원의 문파들도 청해성 위아래로 경계망을 구축한 상태이니 뭔 일 생기면 전서구를 보내겠지.
최소한 물량은 이쪽이 훨씬 많으니 할 수 있는 작전.
나는 끝도 없이 이어진 티베트 산맥을 보며 전략을 고민했다.
아무리 초절정 고수라도 산을 계속 타면 지치는 법이니까.
“고지대를 먹어두면 훨씬 유리할 것 같긴 한데.”
파르스라면 무조건 저 산맥을 활용하려 들겠지.
“은공, 저기 성벽이 보입니다.”
고민에 빠져있던 나는 목경이가 꺼낸 말에 앞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시야가 닿는 지평선을 끝자락에서 거대한 성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곳이 청해성이로군요.”
“수성하기 좋은 구조로군.”
“흠…저기가 내가 묫자리를 세울 곳인가.”
“당 장로님, 그런 소리 하면 정말 제 명에 못 사십니다.”
“에잉, 난 이미 여기에 묫자리를 세울 각오로 왔다. 장로 직함도 버렸으니 그냥 당 노야라 부르거라.”
“…예. 당 노야.”
“수십 년 동안 갈고닦은 암기술을 보일 때가 됐구나.”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실험 대상이 썩어 넘칠 테니 마음껏 펼치셔도 됩니다.”
“내 자네에게 만천화우를 보여줌세.”
“만천화우…말입니까?”
그거 당주만 쓸 수 있는 비전초식 같은 거 아니었나?
“1차 정마대전 시절에 소실된 무공을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복원했지. 할 일이 없어 복원에만 매달렸는데, 이제 다시 한번 실전에서 만천화우를 써볼 수 있겠구나.”
당노야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가문의 비전을 되살려 실전에서 써볼 기회가 온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 흥분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분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네.
나도 신기술 배우면 전장에서 한 번쯤 써먹었으니까.
“실전에서 몇 번 쓰다 보면 온전한 만천화우를 복원하실 수 있을 겁니다.”
“끌끌, 그렇고말고…”
“꽃하나 피우기 쉽지 않은 땅이로구나…”
나는 백자기가 불쑥 말을 꺼내자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미묘하게 간사해 보이는 얼굴로 염소수염을 쓸어내리며 산맥을 둘러보고 있었다.
“화산도 돌산이지 않습니까?”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니 뭐니 하지만 화산도 돌산 아니었나.
“그게 무슨 소린가? 화산은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는 산이라네…1년의 대부분은 돌산에 가깝지만 말일세.”
꽃은 짧게 피니 뭐.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귀에는 조용히 우리를 따라오는 별동대의 일원들이 보였다.
권왕 황보승.
창천일검 남궁원.
삼절도 팽성운.
무영창 단사영.
칠성검왕 장무곡.
무당검귀 무연.
하나하나가 무림에서도 알아주는 고수들.
맹주가 직접 부른 별동대들은 내가 뒤를 돌아보자 나를 쳐다보았다.
“여러분, 이제 곧 청해성입니다. 이는 곧 저희가 움직일 시간이 되었단 뜻입니다.”
“그래, 별동대장. 뭐부터 할 생각인가?”
“손무가 말하길 지피지기 백전불태 부지피이지기 일승일부 부지피부지기 매전필태라 하였으니, 적들을 알아볼 생각입니다.”
“허어. 색목인이 손자병법을 입에 담다니, 기묘하구나.”
별동대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왜.
이 정도면 평범하잖아.
소울만은 나도 동양인이야.
“…흠흠. 그러니, 저희는 정찰작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어디 마교 놈들 견적 좀 내보자.
장염이…도져써…
살려조…
설사 몇시간 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