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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7

       헤를라인은 레너윌 앞에서 한참이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동이 트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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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레너윌은 말없이 기다려주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은 헤를라인의 눈두덩은 퉁퉁 부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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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좀 진정됐나?”

       “……험한 꼴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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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손짓했다. 이전 일을 계속해서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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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저는 그 뒤로 의식이 없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모든 게 끝나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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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를라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뜻인지 안다. 레너윌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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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진 학생에게 들었나 보군.”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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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학생. 헤를라인은 프레이 셸커니라는 아이에게 기절한 이후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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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아이는 어떤가요…?”

       “솔직히 얘기하지. 상태가 영 좋지는 않아.”

       “그 아이를 만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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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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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를라인은 교사다. 학생의 슬픔에 공감할 줄 아는 참된 교사. 그녀는 틸레트의 그 어떤 교수진과도 다르다는 걸 소문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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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이런 검문은 한 번에 한 명씩 하는 게 보통이지만, 레너윌은 프레이라는 소녀의 정신상태를 고려하여 헤를라인의 곁에 있는 걸 허락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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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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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이가 덜덜 떠는 목소리로 다가왔다.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러더니 헤를라인을 꽉 붙잡고 끅끅 울어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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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떡해요, 내 친구…. 이제 어떡해요……! 흐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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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이는 모자를 벗은 지 오래였다. 자색 머리카락 사이로 작고 뾰족한 여우귀가 보인다. 헤를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는 프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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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교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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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해, 레너윌은 수인족에 대해 그리 좋은 시선을 가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런 시국에 종족 차별까지 하기엔 제국도 수인족도 너무 많은 걸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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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레너윌은 북부에서 한평생을 살았다. 수인족. 그들이 사는 곳은 서쪽이다. 레너윌에게 수인족에 대한 인상은 책이나 신문에서 보던 것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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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이 말하자면 중립인 셈이다. 당장 이 소녀가 요호족인지 아닌지를 신경 쓸 겨를조차 없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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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립구나. 잠을 너무 못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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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은 꾸벅꾸벅 졸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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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님, 이제 저희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저도 잡혀가나요? 감옥에서 평생 살아야 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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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이의 귀여운 질문에, 레너윌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마치 구멍가게에서 사탕을 훔쳤다가 걸린 꼬맹이가 벌벌 떨면서 용서를 구하는 모습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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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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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지, 잘못한 게 없는데 투옥할 이유가 없지.”

       “그치만, 이 나라는 마수와 친하게 지내면 감방 간다고….”

       “셸커니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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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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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는 자네 친구가 마수로 보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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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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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그어서 피 색깔을 보여주었다. 검은색…. 그때의 광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프레이는 그 사실을 레너윌에게 진작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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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하지만 피가…….”

       “마수가 맞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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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제 에테르가 한 말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속여서 미안했다. 그걸 생각하니 또 눈물이 봇물 터지듯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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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마수라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레너윌은 그 점에서부터 의구심을 느끼고 사건에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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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에 하나, 마수라고 해도 마왕군의 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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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지고 보면 모든 게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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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당시 사람들이 보였다던 반응도, 전혀 해명하려 하지 않았던 에테르의 반응도. 마지막에 자신의 친구에게만 밝힌 고민과, 무언가 의도된 듯한 일련의 행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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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 신원 보증 좀 서 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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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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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게 만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경우, 하스펠트 공작님께서 절 어떻게든 변호해주시면 됩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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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계(深計)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자신을 혼란하게 하려는 계략이었더라면 마지막에 프레이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서는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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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플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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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테르는 하스펠트 가문보다 플레어를 먼저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불상사가 여럿 발생했다. 그 와중에도 그 소녀는 모든 사람이 플레어를 사용할 수 있도록 특허를 포기했다.

       ​

       로베스피에르 후작의 사후. 레너윌은 조사단을 꾸려 그의 집안도 수색하도록 했다. 그리고 몇 시간 전, 그의 자택에서 혈서가 하나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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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새 무기가 완성되는 즉시 황실을 급습한다. 이는 한마음 한뜻이다. 우리는 필리우트 제국의 영광을 위해, 이곳에 혈서를 작성하여 각자 나눠 가지도록 한다. 우리는 조국을 좀먹는 블랜튼 공작과 그 일당을 적당한 시기에 뿌리 뽑고, 제국에게서 마수를 절멸할 것을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서 서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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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무기라면, 플레어의 다음 단계를 의미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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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스피에르가 에테르에게 주었던 장학금과 재료 지원을 남겨진 명세서로 유추했다. 여기까지 확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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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셸커니 양이 그리 증언했으니 마수일 가능성도 없잖아 있겠군. 하지만 내 얘기도 들어보고 결정을 내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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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은 서류 가방에서 공문서 몇 장을 꺼냈다. 모두 조작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자료였다. 그는 이것들을 책상 앞에 올려놓고 이전까지 추리했던 과정을 두 사람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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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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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들어도 깔끔한 말이었다. 모든 논리구조를 갖추었고, 추론을 정당화하는 자료도 여럿 존재했다. 헤를라인과 프레이는 얕은 탄식을 연달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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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에 오래 몸담고 있으면 사람이 이리 변한다. 수사에 능통해진다. 선동도 잘 하게 되지만, 반대로 타인의 선동을 듣고 진실을 가려내는 일도 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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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대충 감이 오지 않나?”

       “…그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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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를라인이 어깨를 떨며 말했다. 묘하게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곧 그녀가 레너윌의 눈치를 보며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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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공작님…. 그렇다면 제 제자가 공작님의 따님 밑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건…….”

       “그것도 고려해 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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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은 말 사이에 잠시 뜸을 들였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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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 제자가 마수라면, 못해도 절멸급이지. 재앙급은 그 정도로 강하지 않아.”

       “구천지대계, 아니면…….”

       “현장에 나타난 검은 거북의 공격을 맞고도 멀쩡했다면 사천(四天) 급이라도 되는 모양이겠군.”

       “하지만 사천은 신화에서만 존재하는 개념 아닌가요?”

       “…거기까진 이쪽도 잘 모르겠고. 여하튼, 말이 잠시 새어 나갔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다른 게 아니네. 그 정도 되는 거물이라면 노예로 시작하지는 않았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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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우트 제국에서 노예로 잠입해봐야 효율이 안 나온다. 노예. 그 계급으로 취급받는 자들은 인간 소리도 못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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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에게 사회적 영향력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마수들도 잠입할 때 하층민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어떻게든 상류층 중 하나를 타겟으로 잡아 숨어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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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왜 노예로 있었던 걸까요…? 그것도 3년이나….”

       “하는 짓을 보아하니 성정이 변태일 리는 없겠고.”

       “무언가 확인하려고 했던 걸까요…?”

       “그렇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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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알아낸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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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진 조사가 진척된 이후에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 지금 여기서 추론만 한다고 해서 진실이 변하는 건 아니니.”

       “……네.”

       “이대로 별일 없으면 두 사람은 풀려날 걸세. 인생에 빨간 줄 그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도와주겠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헤를라인. 지금 제국에 인재가 많이 부족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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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은 대뜸 그런 말을 꺼냈다. 눈물 자국을 거의 다 닦은 헤를라인이 실눈을 크게 뜨며 레너윌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레너윌은 탁자에 무언가를 꺼냈다.

       ​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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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의 인장이 찍힌 임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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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가 헤를라인 후작을 필리우트 제국 제 758대 국토부장관으로 임명함. ─ 알리온 필리우트 황제]

       ​

       “저, 제 작위가…….”

       “장관 하기에는 급이 부족해서 말일세. 이번 사태에서 큰 공도 있었으니 내 폐하께 앙탈 좀 부렸네.”

       “아, 아…….”

       “교수 일까지 합쳐서 이제 주 110시간 노동하게 생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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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 같은 사람! 헤를라인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었다. 그런데도 입꼬리는 미묘하게 위로 올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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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고 있는 헤를라인을 제쳐 두고, 이번에는 프레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레너윌이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프레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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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는 연성진도 없이 물건을 연성한다고 들었네.”

       “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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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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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재능을 지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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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레너윌이 사람을 고르는 기준은 단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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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력. 현재 제국에는 우수한 마도사가 많이 필요하다. 이들을 종족 때문이니 뭐니 하며 차별할 처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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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즉석연성이 가능한 수준이다. 헤를라인 이상 될 거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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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든 제국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레너윌은 그런 꿍꿍이를 숨기며 프레이의 귀가 솔깃할 소리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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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셸커니 양은 원한다면 학교를 계속 다니게 해 주겠네. 혹여 요호족이라고 차별받는 일이 없도록 내 힘을 써 주도록 하지. 허튼 언동을 서슴는 자가 있다면 본관이 친히 친위를 보내 엄벌에 처하도록 할 걸세.”

       ​

       그 말에 프레이까지 울음보를 터뜨렸다. 등 뒤로 난 여우 꼬리가 하염없이 살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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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에 대한 검문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레너윌은 하품을 하며 임시 설치된 대합실에 앉았다. 시종을 시켜 블랙커피를 가져오게 했다.

       ​

       ‘가지치기는 얼추 끝났나.’

       ​

       제국 정치는 험난하다. ‘가지치기’를 해서 제 편을 만들어 두지 않으면 언제 포위될지 모른다. 헤를라인도, 저 프레이라는 아이도 모두 좋은 인재이니 이런 식으로 도움을 줘 놓으면 훗날이 밝을 것이다.

       ​

       의도가 불순하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것이 하스펠트가 살아온 방식이다. 고위 귀족은 곧 정치인. 어느 정도 약은 면모를 보여야만 생존할 수 있는 법이었으니.

       ​

       레너윌은 피식 웃었다.

       ​

       “남은 검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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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를 홀짝이고 있자니 수행원이 붙어서 그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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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좀 붙이고 이어서 하겠네.”

       “그러십시오.”

       ​

       레너윌은 그 자리에서 턱을 괴고 졸았다. 못해도 두 시간은 자야 힘이 날 것이다. 그렇게 꿈나라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

       – 흐으, 으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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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서 곡하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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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을 못 자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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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은 벌떡 일어났다.

       ​

       “저거 몇 시간 째지?”

       “여기 온 뒤로 계속 저랬습니다.”

       “엘프 중에 병신 많다더니.”

       ​

       어쩔 수 없다. 레너윌이 한숨을 쉬며 서류가방을 들었다.

       ​

       쿵, 쿵, 쿵!

       ​

       해당 방에 가까이 다가가자 땅 찍는 소리가 연거푸 들렸다.

       ​

       ‘뭐 세상이라도 망하는 줄 알겠군.’

       ​

       끼익.

       ​

       레너윌은 헛웃음을 토하며 문을 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너무 졸려..
    일단 한편만 올리고 일어나서 다시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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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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