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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7

        

         

       완전히 뻗어버린 공손요예를 무천각 객실에 던져두고는, 청이 부지런하게 또 밖으로 나섰다.

       뱃속에 술이 얼마나 들어찼는지 발걸음 한 발짝 한 발짝에 처얼썩 처얼썩 위장 속에 파도가 치는 기분이었다.

       역시 채우려면 음식으로 채워야지, 물배를 채우면 움직이기가 힘드네.

         

       무림맹 정문 나서서 물어물어 반 시진쯤 걸어가니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중림객잔.

       중화의 행정성 중에는 제 위치가 중화의 중심이라 주장하며 자부심을 갖는 지역들이 있었는데, 하남 땅 역시 개중 하나였기에 유난히 중 자 들어간 가게들이 많다.

         

       안으로 들어서니 저쪽 트인 벽 안쪽 식탁에 삿갓 눌러 쓴 팽대산이 보였다.

         

       청이 척척 다가가 반대편에 의자를 엉덩이로 깔고 뭉갰다.

         

       “혹시나 오면 어쩌나 하고 말이나 전하러 왔더니, 아예 와 있네? 할 일 없어?”

         

       나중에 팽대산이 와서 청을 찾다가 허탕을 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니 객잔 주인에게 동전 찔러주고 무천각에 자리 잡았다고 전해달라 할 생각이었건만.

       하기야 얼굴 가렸다고 아주 살판이 났으니, 정체 감추고 돌아다니는 데에 재미가 들린 모양.

         

       “맹주께 인사는 잘 드리고 왔나?”

         

       “응. 아주 으리으리한 숙소도 받았다니까. 무천각이라고. 끝내줘, 아주.”

         

       “무천각을?”

         

       팽대산이 의아함을 숨기지 않았다.

       무천각은 무림맹의 최고 귀빈만을 모시는 객청이었다.

       이 최고 귀빈이란 왕후장상을 말하는 것이라서, 관무불가침의 기록 없는 합의 이후로는 거의 쓰이지 않은 시설이기도 했다.

         

       “맹주님께 어지간히 잘 보인 모양이군.”

         

       “원래 어르신들이 날 좀 좋게 봐. 그리고 또래도 좋게 보지? 애들은 아주 나만 보면 환장을 하니까 사실상 만인의 사랑을 받는 몸이라고 할 수 있지.”

         

       “또래는 빼는 게 좋겠군. 알면 알수록 더 실망하고 거기에 더 실망할 거리가 있다는 점이 놀라우니까.”

         

        팽대산이 어울리지 않게 웃음기 가득한 농담을 던졌다.

       

       “음. 왜 내 친구들은 점점 박하게 구는지 모르겠네. 제갈 놈도 그렇지. 난아도 그래. 검우조차 묘하게 그 언사가 귀가 아니라 입으로 먹히기 시작한단 말이지.”

         

       “정말 몰라서 묻나?”

         

       대려면야 과격한 식사 예절, 막돼먹은 언행과 끝없는 농담 따먹기, 진지할 줄 모르는 태도.

       무엇보다 저는 선이 없이 남의 일에 마구 들이대는 주제에. 정작 제 일에는 딱 그어 내 일이라 잘라내는 거리감까지.

         

       하지만 청은-

         

       “몰라. 그치만 계속 모르고 있을 거니까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돼.”

         

       그저 본인이 알려고 하지 않으니 계속 모를 수밖에는.

       게다가 원래 덜 친하면 서로 추켜세우고 많이 친하면 서로까기 하는 법이라고.

       허물없이 친해졌다고 할 수 있겠으니, 슬슬 서로의 허물을 들출 시간인 것이다.

          

       “아쉽게 되었군.”

         

       “할 말이 많은 표정인데, 다 털어버려. 어차피 듣는다고 고치지도 않을걸.”

         

       “당당하게 개소리를 하는군.”

         

       “거봐. 이렇다니까. 점점 박하니까. 아예 헌 친구 버리고 새 친구 사귀면서 좋은 말만 들어야 하나.”

         

       “그런 소리를 하니 개소리 소리를 듣는 거다.”

         

       “뭐, 농담도 못 하나.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용봉지회에서 그 사람 봤다. 조 형.”

         

       청이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 무슨, 여인을 꾀려면 좀 제대로 꾀어야지. 뭐만 하면 다 예쁘다고 난리야. 웃긴 게, 얼굴만 빼고 다 나왔어. 그런 소리가 도대체 먹히냐고. 그에 비하면 공손네 동생은 아주 여심 사냥꾼이지.”

         

       “공손네 동생이라고?”

         

       “아. 예, 그러니까 공손요예 남동생인데 아주 여인 꾀는 데는 타고났다니까. 아주 졸졸 따라다니면서 앉으면 손수건 꺼내 줘 접시 대 주고 수저 챙겨주고 요리도 먹기에 딱 좋게 잘라주고. 먹여달라고 하면 먹여주기까지 할 기세더라니까.”

        

       팽대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삿갓에 가려 청은 못 보고, 팽대산은 본인 눈썹이라서 관찰이 불가능했다.

       그러니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 무의식의 발현이었다.

          

       “흐음. 그래서, 좋았나?”

         

       “편하긴 한데, 역시 좀 부담스럽지. 아주 꼬시려고 작정을 한 게 보이니까.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고.”

          

       “하. 얼굴이라도 보여준 모양이지? 내게 했던 것처럼?”

         

       “아니? 이 미모를 모르는데도 그래. 듣자하니 예가, 그러니까 공손요예 소저의 친구가 나 하나뿐이라니까, 아예 가족으로 만들어주고 싶은 모양인가 봐. 음. 남동생으로는 기특하지만, 사내로서는 좀, 불순하지?”

         

       “흐음…….”

         

       “뭐가 흐음이야?”

         

       그러나 팽대산은 대답 대신,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그래서, 그놈이 잘생겼던가?”

         

       “누구? 공손네 동생? 잘 생기기야 아주 잘 생겼지. 아니, 좀 여리여리하니 선이 얄쌍하니 미남이라기 보다는 예쁜 쪽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근데 외모야 그렇다 쳐도 아주 입만 열면 닭살 돋는 소리를 해.”

         

       “흐음.”

         

       “여인들만 아주 까무러치지. 뭐 백기린이라나. 봉황회 여인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그래. 따뜻한 백기린에 차가운 흑기린이 어쩌구 뭐니 하던데. 아마 산이 흑인가 봐.”

         

       “흐음.”

         

       “아니, 아까부터 뭐 숨만 쉬고 앉았어?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맞장구도 쳐 주고 그래야지.”

         

       “맞장구라.”

         

       팽대산이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라도 하듯이 툭 던져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놈이 마음에 들었다?”

         

       “뭐, 친구 동생으로는 합격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 지 누나 위한다고 면사녀 뒤를 쫓아다니는 게 보통 할 수 있는 발상인가. 면사 아래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내 경우야 왕대박 큰잔치 아주 당첨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거다.”

         

       “응? 뭐가?”

         

       “그놈이 누나 위한다는 소리 말이다. 굳이 제 누나를 위해서만 네게 접근하지는 않았겠지.”

         

       “그럼?”

         

       “공손공가가 오래도록 이를 갈아온 숙원이 있으니, 아무래도 네 지위와 인맥도 탐이 났을 거다. 구파의 어르신에 오대세가 두루 친해 놓지 않았나.”

         

       “동기가 불순할 것이다? 그런데 말이 좀 그렇네? 얼굴 가렸는데도 접근하는 놈은 내 배경이 목적이다?”

         

       그러자 팽대산의 삿갓이 천천히 좌우로 회전했다.

         

       “십대세가에 이름만 올렸다고 끝이 아니니 그간 없었던 관계도 정립해야 하지. 한 번 역모로 빼앗긴 성씨를 되찾으려면 어지간한 성세로 가능한 일이 아닐 테니. 아마 이번 용봉지회에 사돈을 들이려고 작정을 했겠지.”

         

       듣고 나니 또 일리가 있는 것이, 공손요예는 아예 유년기와 청년기를 통째로 수련 속에 처박지 않았던가.

       아무래도 그쪽 가문 사람들이 곱게 안 보이는 차에 후계자를 가만히 놔 두었겠는가 생각도 들고.

         

       실제로도 팽대산의 말이 맞았다.

       한 가문이 대를 이어 내려온 숙원에서 그 후계자가 자유로울 수 없으니, 공손천일의 입장에서도 여인의 미모니 외양이니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던 것이다.

       마침 성품도 좋아 보이고(?), 배경은 실제로 어마어마하며, 무엇보다 짧은 삶이나마 통째로 무공에 바치고 있는 안쓰러운 누이에게도 희소식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만나는 모든 여인에게 친절하다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는 법이다. 조 형처럼 병적으로 여색을 밝히지 않는 한에야.”

         

       청이 픽 웃었다.

         

       “뭐, 그러면 어때? 그런 목적이면 부인에게도 깍듯하니 잘 모시겠네. 동기야 어쨌건 서로 행복해서 잘 살면 그만이지. 그렇다고 조 형에 빗댈 정도는 아니고. 그 사람은 좀 많이 징그럽더라.”

         

       “정략으로 여인을 꾀어봐야 결국 목적이 전부인 게 아닌가. 그렇게 혼인해서 배경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내칠 텐가?”

         

       “음? 뭐야. 그야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가 왈가왈부할 건 아니잖아? 아. 맞다. 혹시 설이리 소저 알아? 빙설화 설이리 소저.”

         

       “정략으로 정 붙이고 잘 산다고 하는 소리라고 해 봐야 이득이나 꾀하려는 어르신들이 하는 소리지, 당사자가 그래서야 서로 불행한 것이 아닌가.”

         

       “음. 산이 연애관이 의외로 좀 보수적인 구석이 있었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지금 계속하는 거야?”

         

       원래 대화란 흘러가야 하는 것이라서, 억지로 화제를 붙잡고 쭉 떠들어봐야 고인 물 썩듯이 말싸움이나 나고 만다.

         

       청이 조 형으로 한번 화제를 흘렸고, 또 빙설화로 흘려냈음에도 또 또 정략혼 이야기가 나오니.

       얘가 좀 맺힌 게 있나 싶기도 하고.

         

       “왜. 가문에서 정략혼 이야기라도 나와? 원래 어르신의 의무 중 하나가 혼인으로 달달 볶아서 잔소리하는 거긴 한데.”

         

       “팽가의 혼사는 전적으로 본인의 자유다. 다른 세가들은 아니겠지만. 게다가 뭐, 딱히 걱정도 하지 않으실 테지.”

         

       “오올, 뭐야. 언제든 아무나 잡아서 혼인할 수 있다는 자신감? 하긴, 틀린 말도 아니긴 한가. 그러고 보니 초려도 딱히 잔소리를 듣는 건 아닌 모양이니까. 뭐야, 그럼, 산도 비혼이야? 여인이라면 질색하잖아?”

         

       “그렇다고 세가의 안주인을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하긴. 그것도 그렇네. 뭐, 걱정하진 마. 짚신도 짝이 있다던데, 산한테도 얼굴 말고 자체로 좋다고 하는 여인이 나타나겠지.”

         

       “그걸 기다리느니 차라리, 음. 아니다. 그보다 넌 어떻지? 그렇게 남 말처럼 해도, 혼인을 생각해본 적이 없나?”

         

       그러자 청이 손을 내저었다.

       딱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라는 태도였다.

         

       “그런 소리 말고. 보면 몰라? 산, 검우, 제갈이, 창빈이. 다 여인하고는 거리가 먼 친구들이잖아? 누가 나한테 사내처럼 굴면 아으, 생각만 해도 어색해 죽겠네.”

         

       “음.”

         

       “게다가 지금은 그런 생각 하기에는 내 앞가림도 힘들다고 해야 할까. 애초에, 음. 그래. 그렇지……”

         

       청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무림 생활도 어느새 오 년 차였다.

       이제 더러운 변소를 볼 때 말고는 딱히 현대 문명 그 편리한 이기들이 생각나지도 않았으니, 적응을 해도 제대로 적응을 했다 싶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래. 즐거운 삶이었다.

       어쩌면 출도 이전의 삶보다도 더욱.

       너무 즐거워서 그간 잊고 지냈다.

         

       하지만, 이런 시간이 언제까지지?

       당장, 지금이라도 ‘익숙한 천장이다’ 하고 눈을 뜨면?

       그냥 거창하게 꾸었던 한밤의 꿈, 혼자 간직한 남모르는 추억으로 결론이 나면?

         

       그리고 나니 머리 속이 새하얗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이다.

       청이 그저 그렇게 멍하니 손가락 꿈지럭거리며 깍지를 꼈다가 풀고, 애꿎은 손톱을 긁다가 손바닥 붙여 비비고, 탁자를 살살 더듬고……

       어느새 촉촉하니 손바닥에 땀이 밴다.

       불안한 사람의 특징이었다.

         

       “이봐, 청? 왜 그러지?”

         

       “어, 어. 응. 좀. 무슨 얘기 했더라. 음. 그래. 좀 그렇네. 내가 좀 그렇지.”

         

       “괜찮나? 지금 상당히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무슨 문제라도 있으면-”

         

       “아냐. 그래. 아냐. 괜찮아. 어쩐지. 그래. 아니다. 좀 오늘은 먼저 들어가 봐야겠다.”

         

       “……괜찮나?”

         

       그에 청이 후우, 하고 긴 숨을 내뱉었다.

         

       사람의 마음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서, 피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잠을 잔다.

       저 고대 코쟁이들이 잠과 죽음을 형제로 여겼으니, 사람이 근심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평온함을 느끼는 순간이란 자고 있거나 죽어 있거나 둘 중 하나뿐인 까닭이었다.

         

       그래서 청은 계속 잤다.

       밥 먹고 자고, 시간이 나면 자고, 밤에도 또 잤다.

       깨어서 친구 만나 떠들거나, 혹은 뭔가를 제 입에 처넣어 씹고 삼키지 않는 시간에는 그저 눈을 감았다.

         

       그래선 안 됐는데.

       그 시간에 검을 휘둘렀어야 했다.

       첫 번째 위기도 그냥 천운이 따랐을 뿐, 절정 초월은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일단 이 좆같은 상태창부터 치우고 나서, 잠이야 그때부터 자도 될 일이 아닌가.

         

       이 상태창이란 놈도 그렇다.

       보통 뭘 해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던가?

       사람을 중원 한구석에 툭 던져놓고 그래, 어디 하고 싶은 대로 막 해봐라 하고 방치해버리면 내가 뭘 해야 할지 어떻게 알아.

       그러니 좆같다는 소리를 들어도 뭐.

         

       청이 면사 너머 창백한 안색을 하고서는, 떨리는 손을 꽉 쥐어 억눌렀다.

         

       “그냥, 조금 복잡해서 그래. 요즘 조금 게을렀나 봐. 지칠 때까지 검이나 휘두르다 잘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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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This Murim’s Crazy B*tch

I Am This Murim’s Crazy B*tch

이 무림의 미친년은 나야
Score 4.3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 became a female character in a martial arts game I’ve played for the first time. I know absolutely nothing about Murim, th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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