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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7

       *

         

         

         비라도 내렸다면 좋으련만.

         

         엘리자베타는 쾌청한 하늘을 작게 원망하며 시선을 돌렸다.

         

         프리첸카야는 봄을 맞고 있었다. 무릇 크라실로프의 봄이란 ‘조금 덜 추운 겨울’ 정도였으며, 지긋지긋한 라스푸티차 탓에 포장이 덜 된 시외 도로들은 죄다 진창으로 변했지만.

         

         그럼에도 어쨌건 봄이다. 회백색 하늘이 사라지고, 조금씩 날이 맑아지고 있었다.

         

         그런 탓에.

         

         

         “전하. 드미트리 체르카토프 중령의 입전입니다.”

         “들라… 하라.”

         

         

         비가 내리지 않아서 얼굴을 숨길 수 없다.

         

         

         “전하. 신 드미트리 체르카토프, 복귀를 신고합니다.”

         “보고는… 이미 받았다. 그대가 직접 이리 올 이유가 없었는데….”

         “책임자로서 전하께 직접 아뢰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누가 있어 이 일에 본인보다 더 큰 책임이 있겠는가?”

         

         

         드미트리는 휠체어에 탄 채로 초췌하게 웃었다. 엘리자베타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서, 총장실 문가에 가만히 앉아있는 드미트리를 향해 걸었다.

         

         

         “소신 드미트리 체르카토프 이하, 총원 삼인. 복귀했나이다.”

         “…본인이….”

         

         

         건조한 문자가 나열된 보고서와 달리, 두 다리를 잃은 충신의 생존 보고는 엘리자베타의 몸을 허물어트리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순간 비틀거리며 테이블을 짚었다. 황급히 다가온 시녀가 그녀를 부축해야 했다.

         

         

         “본인이, 대체 무슨 낯으로….”

         “전하.”

         

         

         엘리자베타의 새파란 눈이 조금씩 흐려졌다. 툭, 툭. 물기가 원목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시종과 시위무관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크라실로프의 임금은 신 아래 누구의 앞에서도 눈물을 보일 수 없으므로.

         

         그러나 드미트리는, 고개를 숙인 채로도 그녀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며 말했다.

         

         

         “전하. 그들의 죽음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드미트리 체르카토프 중령….”

         “저들은 전하의 명령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결코 아니지요. 우리는, 저와 제 부하들은, 그리고 선배님….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 대령은 전하의 명에 의해 사지로 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 시절과는 다르다.

         

         알렉산드르의 명령에 따라 사지로 가야 했던 그 시절과는 다르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하며.

         

         

         “저희는 세상을 구했습니다. 평생을 살수로 살았으되, 역사에 남을 수 없는 죄인들이었으되, 그 순간 우리는 의인이 되어 스스로 사지를 향해 걸었나이다. 전하, 하오니 웃으소서.”

         

         

         엘리자베타는 고개를 들었다. 드미트리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눈물 젖은 얼굴로, 힘겹게 입꼬리를 밀어 올리며 웃고 있었다.

         

         

         “우리는 그 날, 마침내 찬란했나이다.”

         

         

         그는 가져온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린 후, 뒤로 물러섰다.

         

         엘리자베타의 떨리는 손이 작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엔 방부 처리가 된 손이 비단에 감싸여 있었다.

         

         힘줄이 솟은 남자의 손이다. 거칠지 않고 곱상한. 그리고 검지에 굵은 반지 하나가 끼워 있는 오른손이었다.

         

         그녀는 검지에서 굵은, 검은 반지를 뽑았다. 크라실로프의 국장이 양각된 인장 반지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옥새와 같았다.

       

         왕실의 모든 명령서에 밀랍 봉인을 할 수 있는. 왕실의 오랜 유물이다.

         

         엘리자베타는 천천히 그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주문이 걸린 반지는 그녀의 약지에 꼭 맞게 줄어들었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크라실로프여 영원하라.”

         “”크라실로프여 영원하라!!””

         

         

         시종과 시위무관들이 동시에 외쳤다.

         

         알렉산드르가 공식적으로 죽었으며, 그가 생전 크라실로프의 거의 모든 왕혈을 끊어버렸으므로, 이제 이 나라의 유일한, 그리고 적법한 계승권은 오직 왕녀에게만 존재한다.

         

         따라서, 이미 지극히 강대한 권한을 휘두르던 그녀라 할지라도, 이제야 비로소 내부의 모든 불안요인을 제거한 셈이 되었다. 그 어떤 대귀족도 그녀에게 정통성을 따질 수 없게 되었으니까.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 대령의 작전 최종목표는 폐세자 알렉산드르 키릴로비치 크라실로프의 추포와 처형이었습니다. 전하.”

         “알고 있다.”

         

         

         엘리자베타는 창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잠시 후 말을 이었다.

         

         

         “반카는?”

         “치유술이 사라진 탓에 의원들의 진료를 받고 있습니다. 과로라는 소견이 있었습니다만, 언제 깨어날 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가.”

         

         

         엘리자베타는 창틀을 짙고, 밝은 낮의 프리첸카야를 굽어보며 말했다.

         

         

         “장례는 국장으로 한다. 지금껏 잊혀져야 했던 모든 이들의 이름을 함께 담아라. 이 나라에 있었던 가장 성대한 장례를 치르겠다. 이는 본인이 크라실로프의 임금으로 하는 첫 번째 어명이다.”

         “어명을 받듭니다.”

         “옥좌를 비워라. 대관식은 하지 않겠다. 이제 혹독한 겨울이 끝났으니, 본인의 못난 아비가 더 이상 본인과 같은 하늘을 바라보길 원하지 아니한다.”

         “전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명령권자는 언제나 그녀였다. 이 나라의 모든 행정기관은 그녀의 인가 아래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이 날부터, 명령서의 마지막에 박힐 이름은 왕녀가 아닌, 크라실로프의 대왕이란 칭호로 이루어지리라.

         

         

         “앞으로 바빠지겠구나.”

         

         

         정세는 극도로 수상하고, 연합 왕국의 뭇 국가들은 내전과 재난으로 피폐해졌으며, 본국의 국체는 여전히 위태롭다.

         

         임금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산재해 있다. 나라를 다시 정상궤도로 올려 두는 것에도 충분히 분주하다.

         

         그러니.

         

         

         “본인은 누군가를 사랑하기엔 너무 분주하다.”

         

         

         평소와 같은 하루를 시작하고, 사랑하는 이와 아침을 들고, 차를 마시며 하루를 맞이하고.

         

         거리를 거닐고, 이따금 꽃과 낙엽을 바라보고, 같은 석양을 내려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런 평범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이며, 국가의 안위이며, 국가의 미래가 아니겠는가.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모여 있다는 이야기는, 곧 다시 말해 그 한 사람이 국가의 모든 대소사에 직접 개입해야 함을 의미했다.

         

         권력의 핵심은 그것에 있다. 도장을 찍는 행위. 모든 사안을 굽어보며, 조율할 권리. 국가라는 기계장치에 결코 빠질 수 없는 핵심 기관.

         

         이 권력을 누군가와 나눠 가질 것이 아니라면 그래야만 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과로로 학대하며 권력의 기반을 다진 군주였으므로.

         

         

         “그러나, 드미트리 체르카토프. 사랑하지 않기엔 너무 힘들구나.”

         

         

         그녀는 창틀을 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새하얀 손에 끼인 작은 반지를 내려보며. 약지에 반짝이는 검은 인장 반지를.

         

         이 나라의 전부를 그녀에게 가져온 한 남자에게.

         

         그녀의 유일한 약점을 명령 없이 잘라내기 위해, 사지를 돌파해, 목숨을 걸고 쟁취해낸 이 남자를.

         

         

         “어찌 사랑하지 아니할 수 있겠느냐.”

         

         

         그녀의 말에 드미트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역죄인의 거처를 옮기시렵니까?”

         “본인이 경을 아끼는 이유는, 그대는 본인의 명령 이전에 본인의 의사를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소신이 전하를 보필한 햇수가 십년이 넘었습니다.”

         “그리하라. 대역죄인이 감히 본인의 손 밖에서 노니는 모습을 더 이상 좌시하기 어렵구나. 형벌은 징역형, 형장은 본인의 침실로, 형기는….”

         

         

         드미트리를 돌아보며, 엘리자베타는 작게 미소 지었다.

         

         

         “본인의 남은 일생으로 하겠다.”

         “어명을 받듭니다.”

         

         

       

       

       

       EP32. 크라실로프의 평범한 봄.

       

       

       

         

         

         “…그래서 아저씨가 갑자기 병동을 옮겼다고요?”

         “네, 아이고, 저도 어쩔 수가 있나요? 어명인걸요. 알잖아? 우리 다 공무원들이야. 나랏님이 하라는데 우리가 뭘 어째요.”

         “….”

         

         

         이자벨은 일인실에 누워서 헤죽헤죽 웃는 드미트리를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살벌한 표정에 드미트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리를 가리켰다. (다리가 있었던 곳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다.)

         

         

         “저, 환자에요? 그것도 되게 중환자.”

         “와 진짜 한 대만 때려도 될까?”

         “참아, 벨라.”

         

         

         에시디스는 악기를 내려놓고 시무룩하게 의자에 앉았다.

         

         분명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라고 쓰여 있던 병실이었는데, 막상 들어와보니 뱀처럼 생긴 아저씨 하나가 하반신이 사라진 채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처량하게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삼촌이 잔뜩 필요해요….”

         “힘이 나는 병문안이네요. 여러분.”

         

         

         드미트리는 싱글거리며 대답했다.

         

         

         “이제 그냥 포기해요. 나도 어지간해선 여러분 응원하고 있었다니까? 근데 어떡해. 내가 제일 응원하는 사람은 우리 전하인걸.”

         “좋아, 이제 피아 구분이 확실히 되네요.”

         “잘 됐네요. 전쟁은 원래 그것부터 시작이죠.”

         

         

         드미트리가 실실 웃으며 대답하자, 이자벨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 이런 정보도 알려주고. 그럴 필요 없잖아요.”

         “흐으음…. 글쎄요. 제가 존경하는 어떤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지는 평생을 곁에서 봐도 잘 모르겠더라구요. 제가 호기심이 많은 직업인데, 어떡해. 그럼 직접 알아봐야지.”

         

         

         드미트리는 손을 휙휙 휘저으며 말을 마쳤다.

         

         

         “그러니 최대한 여럿 모아다 시험해 보게요. 가서 이제 할 일들 하셔요. 시간이 없잖아?”

         

         

         평생을 겨울 속에서 보내온 것만 같은 그 사람이, 과연 어떤 봄을 맞이할 지는 모르겠지만.

         

         후보가 많다면, 그 중 하나엔 봄이 있지 않겠는가.

         

         

        *

         

         

         이자벨은 상식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음란한 고위 귀족’에게 납치당한 ‘파티 동료’라는 상황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야, 그런 이야기는 너무 흔하지 않던가. 문예로 꽃피운 문화대국 틸레스에선 이미 한물간 소재에 불과했다. (주로 성인용 도색소설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빠르게 사태를 파악한 후, 분노와 경악 대신 검과 분필을 들었다.

         

         

         “아아, 이 익숙한 감각.”

         

         

         방학 동안 늘어져서 하릴없이 시간이나 보내던 이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동아리방에 집결한 든든한 잠재적 경쟁자들을 한차례 훑어보며, 그녀는 스산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용사파티로 돌아갈 시간이다.”

         

         

         [마왕에게 피랍된 공주의 정조 지키기]

         

         

         유진은 칠판에 쓰여 있는 굵은 글씨를 보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여러분 이제 2학년이야. 성인들이라구요.”

         “그러니 성인물을 단속하기엔 더욱 적합한 나이가 된 셈이지.”

         “옳소!”

         “파티 탈퇴 신청서 어딨죠?”

         “나도 빠질래. 인간들이란. 저속하기는.”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주말에 급한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가 잘못 이해를 했더군요! 19금 회차는 20화당 1화 가능하다 하여, 저는 최대 10화 정도를 쓸 수 있답니다!
    19회차를 진행할 지는 아직 고민 중입니다. 아무래도 우려가 되는 점이 몇몇 부분 있어서요!
    *
    슬픈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틸레스 에피소드를 진행할 때 혹시 일러를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틸레스 에피소드가 끝난 것이 3월 말이었고, 해당 에피소드 기획을 끝내고 일러를 미리 주문한 날이 3월 2일이었습니다만…

    5월이 끝나는 지금 시점에도 해당 일러는 완성되지 않았으며,
    해당 일러 작가님은 지금 연락이 두절된 상태입니다.

    그것이 제가 일러 외주 고려 자체를 단념하게 된 사유입니다. 들인 품과 노력과 정신력에 비해 얻는 것이 좀 허무하더군요.

    많은 분들이 일러 관련 질문을 해주실 때마다 드릴 말씀이 없이 죄스러운 심정입니다.

    Ai 일러라도 잔뜩 뽑아볼까요? 그걸 원치 않으시는 분들이 더러 계시긴 했습니다만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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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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