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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7

     늦은 오후.

     “아직도 텐트를 설치하지 못했단 말인가!”

     

     기사들의 탄식이 곳곳에서 이어진다.

     “우리는 이미 너희들에게 편의를 봐줬다. 원래는 텐트를 설치하지 못하면 점심도 먹지 말라는 이야기도 있었어!”

     기사의 호통에는 탄식과 안타까움, 그리고 분노가 섞여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어, 밥은 먹었다! 비록 마지막 순서였고, 양이 적기는 했지만!”

     거의 끝자락에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는 바람에 준비된 고기의 양이 생각 이상으로 적어서 몇 점 먹지도 못했으나, 그래도 굶주림 정도는 면할 수 있었다.

     “다녀와서도 오후에 따로 훈련이 준비되어 있는데, 이것이 지금 무슨 추태인가!”

     하지만 밥을 먹은 건 먹은 거고, 나중에 잘 곳은 자야하지 않겠는가.

     “그, 그치만…! 이런 거 해본 적 없고…!”

     “저희는 그냥 야영이라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이런 게 있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고요…!”

     학생들은 학생들 나름대로 억울했다.

     그저 아카데미 수업이 야외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길래 자연을 벗삼아 뭔가 야외에서 시를 읽고 체험활동을 즐기는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기합을 넣고 군사훈련을 하라고 하면 누가 반기겠는가.

     “도대체 왜 이런 군사훈련을 한다는 겁니까? 전쟁이라도 나는 겁니까?”

     덩치가 큰, 이미 전신에 땀이 줄줄 흐르고 있는 귀족 출신의 학생이 딴지를 걸었다.

     “왕국과 제국은 평화로운 분위기에 있는데, 왜 우리가 군인도 아닌데 전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비상상황을 체험해야 하냐는 겁니다.”

     

     일견,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실제로 당연하기도 하다.

     

     학생들은 전쟁을 앞으로 체험할 일도 없고, 설령 전쟁이 일어나도 이렇게 직접 텐트를 치거나 야영을 하며 생존캠프를 처음부터 만들 필요가 없는 이들도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그 이야기는 교수회의 이전에 정리되었다.

     “그대들은 전쟁을 겪을 일이 없겠지! 미래는 평화로울 것이며, 더 이상 칼이 아닌 언어와 논리, 제도와 법리를 들고 이성으로 싸울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군사훈련이 아니라…!”

     “그러나!! 만일!! 세상에 갑작스러운 재앙이 생겨난다면!! 인류가 맞서게 될 미증유의 적이 나타난다면! 바로 이곳, 렘버리에 남은 오랜 전설 속 존재와도 같은 ‘마족’들이 이 세계에 다시 나타난다면!”

     기사들의 반박논리는 간단하다.

     “전쟁을 경험해본 이들이 없다면 더더욱 그에 대한 대비를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너희들 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후대에도!”

     해본 적이 없기에, 더더욱 해봐야 한다.

     비상상황에 대한 대처 방법과 다를 바가 없다.

     “결코 우리가 너희들을 괴롭힌다거나 그런 목적으로 이러는 게 아니다! 이것은 교육이며, 너희들이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정이다!”

     “크윽….”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라! 하다가 막히면 의논하고 토론하고, 방법을 아는 자에게 하는 방법을 물으라! 굶주리고 배고프다고 밥을 달라고 구걸하지 말고, 스스로 사냥을 하고 불을 지피는 법을 배워라!”

     렘버리 캠프의 모토는 하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군가가 떠먹여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자기 스스로 변화하고 환경을 바꾸어나가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자기주도적 극복.

     렘버리 캠프를 기획한 어느 누군가의 의도가 깊게 담겨 있으며, 그걸 깨닫거나 그 의도에 편승한 이들은 군사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몇몇 학생들은 당황한다. 

     신입생 뿐만 아니라, 기존 재학생들도 좀처럼 뭐라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저, 억울할 뿐.

     “저희는 기사가 아니고, 전쟁이 나더라도 따지자면 민간인인 걸요….”

     “그, 저는 몸이 약합니다. 야영도 간신히 허락을 받았습니다.”

     “레이디라거나 그런 걸 다 떠나서, 망치를 들 힘도 없는데 어떻게 텐트를 치라는 거예요…! 우리가 뭐 같이 안 해본 줄 아세요?”

     기사지망생이 없다거나. 조 편성이 하필 기가 막히게 책을 가까이 하는 이들만 모여있다거나.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이들이 있다거나.

     “기사단에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라 아카데미에 학생으로 들어왔는데,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그러면 캠프에 오지 말았어야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죠! 각오를 했어도, 이 정도로 진짜 기사훈련을 하는 것처럼 할 줄은 몰랐죠!!”

     텐트를 치고 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이들은 진심으로 분노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밥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그래도 텐트는 쳐야지! 안 잘 거야?!”

     “그런 식으로 윽박지르지 마세요!”

     

     분위기가 점차 신경질적이고 험악해지기 일보직전.

     터벅, 터벅.

     어딘가 군화로 진흙을 밟는 듯한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다, 당신은…!”

     “학생회장?!”

     나리아 지오 노스트럼.

     “고, 공주전하.”

     

     학생들 입장에서는 학생회장이라는 게 더 익숙하지만, 렘부르 군터 자작령에서 동원된 기사나 병사 입장에서는 공주가 더 익숙하다.

     “학생들이 힘들어하고 있군. 학생회장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다.”

     “하, 하지만….”

     “물론 그대들도 주어진 명령을 따르겠지. 렘버리 캠프가 끝나면 그대들의 상관에게 밉보이게 될 것이야. 훈련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고.”

     나리아가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은 텐트를 향해 다가갔다.

     “텐트를 바로 쳤군. 땅이 고르지 않아.”

     그러고는 바로 옆에 놓여있던 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고, 공주전하! 그런…!”

     “나는 지금 학생회장으로서, 학생들을 도우러 온 것 뿐이다.”

     “교, 교육은…!”

     “우리팀의 오후 훈련은 이미 끝났다. 우수한 성적을 거둔 팀에 대해서는 훈련이 조기종료된다는 것도 알고 있을텐데?”

     “그건…!”

     “방해하지마라. 그리고, 그대들도 거기 가만히 있지 마라.”

     나리아가 땅 속에 박힌 큰 돌을 퍼내며, 주변에 널브러진 텐트 부품들을 가리켰다.

     “누군가가 도우러 왔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은 하지 마라.”

     “그….”

     “뭐지? 할 말이라도 있나?”

     “…저희는 뭘 하면 되겠습니까? 비록 저희가 힘은 없지만….”

     “그렇다면.”

     나리아가 흙 묻은 장갑을 옆으로 뻗었다.

     “저기 제식훈련 순서도 못 외우는 멍청이들에게 가서 좀 도와주고 와라.”

     “…예?”

     나리아가 가리킨 곳.

     얼굴이 시뻘게진 황금여명 기사단의 앞에, 덩치가 큰 훈련생들이 깃창을 마도구에 저장된 음악 소리에 맞춰 휘두르고 있다.

     모두가 똑같은 게 아닌, 제각각의 방식으로.

     “군사훈련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의 융통성은 있겠지. 애초에 팀을 나눈 것도 수면의 효율성을 위해 구분한 것이지, 모든 걸 팀 단위로 쪼개어서 순위를 측정하기 위한 것도 아니니.”

     나리아가 삽을 바닥에 푹 찍으며 렘부르 군터 자작령 출신 교관의 앞에 섰다.

     “이건 경쟁이 아니고, 화합이니까. 그렇지 않나?”

     “…….”

     “대답은?”

     “알겠습니다, 공주님.”

     “그래.”

     나리아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명심하라. 사람마다 잘하는 점이 다르고, 우리는 그 다름을 인정하고 살아가야 하며.”

     푸ㅡ욱.

     “극한의 상황이기에, 우리는 대화를 통해 서로가 잘 하는 점을 찾아나가야 한다.”

     푸ㅡ욱.

     “각자 잘하는 분야에서, 최선을.”

     나리아는 열심히 빈 땅에 삽질을 했다.

     * * *

     아스타시아에게 몇 가지 계획을 알려주고, 그녀를 누아르와 웬즈데이가 있는 열차 특등석으로 보냈다.

     시각은 대략 오후 5시.

     아마도 지금쯤, 나리아가 열심히 학생들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치고 있을 것이다.

     오후 교육이 끝난 뒤의 식사는 팀 자체적으로 음식을 준비해 먹어야 하며, 식재료는 렘부르 군터 자작령에서 준비한 걸 사용해야 한다.

     ‘저녁 한 끼 정도는 굶어도 돼.’

     

     아침은 기숙사에서 먹고 나왔을 것이며, 점심은 그나마 어느정도 수습되었다고 하더라.

     저녁은 생으로 된 채소를 씹어먹든 그걸 이용해 그럴싸한 비프스튜를 만들어 먹든, 다들 어떻게든 밥을 알아서 잘 챙겨 먹을 것이다.

     학생들이 알아서 저녁을 준비하는 지금.

     나리아가 요리를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직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대신 요리를 해주는 모습까지 보이며 ‘미래의 성군’을 연기하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부터’.

     햇빛이 드러나는 곳에서 학생들의 시선이 나리아에게 쏠린 지금 이 순간, 서서히 세상을 밝힌 햇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몰려와 그림자에 뒤덮이는 이 시간.

     어둠 속에서 움직일 이들의 시간이다.

     “저녁 먹을 시간에 이렇게 불러내서 미안하군.”

     “이미 다 먹고 왔습니다.”

     렘버리 캠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공터.

     “협곡기사단, 현 시각부로 그레이 지브롤터의 명을 따릅니다.”

     교관용 제복을 입고 있던 카를로스 경이 셔츠 단추를 풀며 내 앞에 고개를 숙였다.

     “어디부터 치시겠습니까?”

     “친다니. 벌써 그렇게 각 잡을 필요없네.”

     “…바로 움직이시는 게 아니신지?”

     “움직일 거야. 움직이는데, 저들도 그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꺾는 시늉을 했다.

     “저녁 5시, 6시부터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을 거 아닌가.”

     “그건…확실히, 그렇군요.”

     “그 동안은 순찰을 돌아다니면서 음험한 자들을 처리할 건데, 아무래도 그게 오늘부터 바로 시작일 것 같거든?”

     “????”

     “내 말은 저들의 본거지를 바로 치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지. 지금, 뭔가 낌새가 느껴지는 게 하나 있거든.”

     나는 발로 가볍게 바닥을 두드렸다.

     “땅에 흐르는 마나가 느껴지나?”

     “…희미하기는 하지만, 맥을 짚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마침 그쪽으로 전문가가 있으니.”

     “이러려고 나를 부른 것이냐.”

     등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온다.

     

     “도련님. 제가….”

     “아군이야. 도우미지.”

     “도우미? 하, 듣던 중 기가 다 차는군.”

     “……마스터?”

     다가오는 소녀를 향해 경계심을 보이던 카를로스 경이 소녀를 가늠한 순간, 소녀가 씩 웃었다.

     “너, 재능있구나.”

     “!!”

     “벽을 허무는 건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뚫릴 것 같군. 축하하마.”

     “어, 언제 또 이런 마스터가…!”

     “누군지 몰라보겠나?”

     카를로스 경은 자신보다 훨씬 작은 소녀가 자신을 압도한다는 것에 사색이 되었으나, 나는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긴장을 풀었다.

     “누굽니까? 혹시 마법으로 변장을…?”

     “변장을 하기는 했지. 여기 귀만 위장을 했다네.”

     “……아, 설마?”

     “로버트, 그 아이가 전해달라고 하더구나. 엘프들 중에 카를로스, 네게 관심이 있다는 아이가 있다고.”

     “……!! 반갑습니다, 경!”

     카를로스 경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뵙게 되어 영광이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주 그냥 엘프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좋아 죽는군, 카를로스 경.”

     “당연하죠! 엘프인데!”

     “그 엘프랑 뭘 해보려고 하는 건데?”

     “그야 당연히…. 크흠.”

     카를로스 경은 우리와 합류한 정체불명의 트윈테일 마스터급 소녀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저는 협곡의 기사. 어디 황금여명의 놈팽이들처럼 술을 먹이고 약물을 쓰는 그런 치졸한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뭘로 엘프를 꼬시려고?”

     “그야 당연히.”

     카를로스 경은 가슴을 다시 주먹으로 두드렸다.

     “사나이로서의 매력, 아니겠습니까?”

     “……뭐, 최소한 잠시 뒤에 보게 될 걸 엘프들에게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그런가? 본인은 지금부터 본인을 향한 추파를 카를로스 경이 어떻게 처리해주느냐를 보고 판단할 건데.”

     소녀가 품에서 편지지 비슷한 걸 하나 꺼냈다.

     “낚아왔단다. 그레이. 황금여명의 기사들 중 하나가 보낸 편지란다.”

     “이건, 언제…?”

     “세 시간 전, 훈련을 조기 종료하고 쉴 때 따로 불러내서 이걸 주더군.”

     아주 은밀한, 초대장.

     “오빠들 숙소가 여긴데, 혹시 놀러오지 않을래. 라면서.”

     “…오빠들?”

     “뭐, 왜.”

     소녀는 자신의 귀를 쫑긋 세웠고, 곧 트윈테일이 좌우로 팔랑거렸다.

     “탓할 거면 황금여명을 탓하렴.”

     “알겠습니다. …후.”

     나는 초대장을 접수한 뒤, 지팡이를 가볍게 들었다.

     “칼을 휘두르는데, 망설일 이유는 없어졌군요.”

     아스타시아에게는 보여줄 수 없다.

     그녀는 지켜줘야 하니까.

     나리아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본 모든 것을 기억해버리니까.

     “황금여명이 하는 짓, 전부 찍어서 쓰레기처리장으로 보내버리도록 하죠.”

     찰칵.

     “나리아에게는 ‘최종결과’만 보고서로 전해지게끔.”

     쓰레기들이 쓰레기짓을 하거나 죽어나가는 모습을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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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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