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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8

       버멜은 땅을 찍으며 고성방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레너윌을 보고는 합죽이가 된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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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딴에도 겸연쩍은 일이었다. 다 큰 성인이, 그것도 남정네가 타인 앞에서 눈물을 질질 흘리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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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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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멜은 지난 20년간 흑주 이벤트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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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트 지점부터가 최악이었다. 엘프들의 나라, 카우렐리아. 사건이 벌어지는 틸레트 아카데미와는 멀리 떨어진 그곳이 그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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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프국에서 적응하느라 십수 년을 보냈다. 그 사이에 기연도 찾고 인맥도 만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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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도, 본래 인간이었던 버멜에게 엘프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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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그 아이와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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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멜은 레너윌에게 가능한 모든 걸 털어놓았다. 에테르와 그가 동향 사람이라는 점은 물론 얘기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믿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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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신 레너윌도 납득할 수 있도록 잘 둘러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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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프이다 보니 학교생활이 힘들었죠. 혼자 겉도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고요.”

       “금안족과 엘프라,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군.”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취미가 맞았어요. 좋아하는 것도 비슷했고, 그리던 미래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교내에선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 친구와는 고민을 털어놓고 살 정도로 친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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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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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와 그 아이가 둘도 없는 친구였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자네 대신 희생하려 했던 거군. 그래, 그러면 납득이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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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터스가 최후의 발악을 했던 순간. 에테르는 버멜의 손을 끌어당긴 뒤 그 반동으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결국 물대포를 대신 맞고 자신이 마수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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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에테르가 아니었더라면 전 여기 없었을 겁니다.”

       “말만 들어보면 마수가 아니라 천사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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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수록 애매해진다. 인류를 위해 플레어도 개발하고, 친구 하나를 살리고자 대신 몸을 던져주는 마수가 당최 어디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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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마수에게도 동료 의식이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누굴 살리고 말고 할 정도까진 아닐세. 마수는 기본적으로 약육강식개념을 진리처럼 받들어 움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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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료라도 약하면 가차 없이 버린다. 그것이 마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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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저는 버리는 패입니다. 전 약해요. 에테르가 절 살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맞아요, 그녀가 마수였더라면…….”

       “아네, 알아. 자네가 무얼 얘기하려는 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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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멜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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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진정됐나?”

       “…예.”

       “뭘 그리 서럽게 우는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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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은 모른다. 버멜과 에테르는 이전에 같은 세계에서 나고 자랐다. 같은 문화권을 공유하고, 비슷한 사고방식을 지녔다. 버멜에게 있어 에테르는 내던져진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진심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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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정네로 태어났으면 그렇게 울지만 말고 대책을 생각하게. 친구가 떠났다고 해서 세상이 망하는 것도 아니지 않나.”

       “……망할지도 모릅니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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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멜은 흑주에 관한 이야기까지 털어놓았다. 에테르는 예술제에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닌 폭탄을 만들어 출품했다. 그 기술이 마왕군에 넘어가면 제국은 영락없이 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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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들은 레너윌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고는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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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아이와는 당최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상관없네. 관계가 파탄 났어도 바로잡으면 그만이지. 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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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은 버멜을 못마땅해하는 대신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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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전쟁에서 소중한 사람을 여럿 잃었지. 당장 최근에만 해도 딸을 둘이나 잃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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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멜도 아는 사실이었다. 클라라, 그리고 클라이스 하스펠트. 두 사람은 실종…… 사실상 사망 처리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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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아내와 사별했을 땐 좌절했지. 마수를 깡그리 잡아 죽이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야. 하지만 나이를 먹으니 생각이 조금이나마 바뀌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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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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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절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다. 그동안에도 시간은 흐른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마수는 엘랑카야 밑으로 계속해서 내려올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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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와중에 뭐라도 하지 않으면 상황은 계속해서 나빠지지. 무력은 나태를, 나태는 다시 무력을 부르는 법이네. 그러니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제때 일어서서 처리하게. 감정적인 일은 뒤로 미루고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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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보면 정신론이나 다름없었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질질 짜지 말고 눈앞에 산적한 과제부터 해결하라. 지구,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숱하게 들어왔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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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멜은 그런 정신력 운운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꼰대 같다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게 얼마나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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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이 망겜만 해도 그렇다.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까? 갑자기 여신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가망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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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YSTEM : 현재 네 번째 시련을 진행 중입니다.]

       [─ SYSTEM : 해당 시련을 돌파하지 못할 시 1년 이내로 세계가 멸망함에 유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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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회는 한 번뿐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네 번째 시련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에테르의 스트레스 수치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실패했으니 이제 무얼 해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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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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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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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친구가 마수라고 치자. 품어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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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그녀는 마수가 아니다. 괴물이 아니다. 감정 표현은 서툴러도, 생각보다 정이 많은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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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그렇지 않은가. 자길 흠씬 두들겨 패놓고도 다음 날부터 꼬박꼬박 병문안을 왔다. 와서 괜찮냐고 물었다. 마수는 절대로 그런 일에 시간을 쏟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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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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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이 끌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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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를라인도, 그 프레이라는 소녀도 그렇고. 못해도 세 명이나 그 학생을 감싸려고 할 줄이야. 덕이 많은 친구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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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피를 지녔다. 그걸 안 순간부터 마수라는 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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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레너윌은 생각했다. 마수라도 우리 편이 되길 원한다면, 잘 끌어들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는 다시 한번 에테르와 이전에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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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세상에 절망적인 상황은 없고, 오로지 절망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라고.”

       “…….”

       “어찌 되었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게나. 뭔가 알고 있는 듯하니.”

       “저 같은 나부랭이를 도와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자네 말대로라면 전 세계적인 비상사태 아닌가? 가능하면 그 아이를 되찾아야지. 자네가 신뢰하던 친구라고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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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멜은 입술을 꾹 씹었다. 어깨는 축 늘어졌고, 깍지 낀 손은 자꾸만 떨려왔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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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 상태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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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루트가 가능하려면 엄청 강해야 한다. 만렙부터 시작하거나, 아니면 최상급 이상의 정령을 지닌 상태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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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높은 레벨. 재능. 운. 그리고 정령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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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박자가 맞아떨어져야 겨우 시도해볼 만한 루트. 때문에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공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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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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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멜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탁자 위에는 어느새 따뜻한 차 한 잔이 올라와 있었다. 레너윌이 마법으로 끓인 것이다.

       ​

       “라벤더를 달인 것일세. 신경안정에 좋다는 얘기가 있더군.”

       “…감사합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검문은 이것으로 끝일세. 원하면 귀가하고, 그 전에 천천히 생각해보게. 앞으로도 틸레트를 다닐 건지, 아니면 그 친구 만나러 북쪽으로 갈 건지 말이야. 어느 쪽이든 손 닿는 대로 도와주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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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윌은 등을 돌린 채 손을 흔들었다. 덜컥. 문이 닫히자 랜턴 말고는 아무런 빛도 남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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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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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멜은 문득 상태창으로 들어갔다.

       ​

       한쪽에 퀘스트 창이 있다. 그곳에 손을 올려놓자 돋보기가 떠오른다. 무언가를 검색할 때 쓰는 아이콘이었다.

       ​

       [검색어 입력 : 정화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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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정화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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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를 사면받기 위해 악인들이 모이는 장소. 고대 정령들이 잠든 유적 한가운데에 위치하며, 유적 중앙에 거대한 샘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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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괴’나 ‘타락’ 상태에 있는 캐릭터가 이곳에 진입하면 지속적인 데미지를 입는다. 체력 피해를 받은 만큼 스트레스가 감소하고, ‘고행’ 효과를 부여받는다. 1일 동안 ‘고행’ 작업을 거치면 ‘붕괴’ 상태를 해제, 30일 동안 같은 작업을 거치면 ‘타락’ 상태가 해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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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 상태의 해제는 샘에 24시간 동안 몸을 담금으로써 해제할 수도 있다. 단, 이 경우에는 남은 수명에 막대한 페널티를 부여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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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상 게임에서 만들어 둔 유일한 해결책. 이곳에 에테르를 ‘자의’로 끌어들이지 않는 이상 대륙의 멸망을 막을 방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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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한 금안족이 제 죄를 뉘우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다키스트 아카데미아>를 플레이했던 수많은 회차 중에서 그런 케이스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

       버멜은 스스로 물었다.

       ​

       불가능한가?

       ​

       “불가능할 거야.”

       ​

       버멜은 차를 마시며 물었다.

       ​

       정말로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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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했는데 거기까지 데려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

       버멜은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

       왜 불가능한가?

       ​

       그는, 그녀는 너에게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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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다.”

       ​

       버멜은 뜨거운 차를 단번에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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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다. 혀와 목구멍이 다 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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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콱! 이를 악문 채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

       – 계약이다. 너와 나, 함께 다니는 거야. 기한은 마왕을 쓰러뜨릴 때까지. 동향인이니까 그나마 믿을 만하겠네. 혹시라도 뒤통수치면 알지? 먼저 어긴 쪽이 두들겨 맞는 거야.

       ​

       그래, 생각해 보니 그런 얘기를 했었지.

       ​

       “아냐, 불가능해선 안 돼.”

       ​

       계약은 성사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

       에테르는, 그 사람은 그 무엇보다도 약속을 중요시했다. 이런 식으로 맺고 끊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

       그런데 자신이 먼저 도망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믿지 못했던 건, 나였나.”

       ​

       버멜은 서둘러 상태창을 열었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스트레스 관리창에 들어가지 않았다. 타락. 그 두 글자를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

       [에테르 : 65 – ‘타락’ 상태]

       ​

       잘못 본 게 아니다. 여전히 타락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그것도 볼드체로 말이다.

       ​

       하지만.

       ​

       자세히 보니 이상했다.

       ​

       ‘붕괴나 타락이 뜨려면 85 이상이 찍혀야 하는데….’

       ​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았다.

       ​

       [65]

       ​

       그땐 85인 줄 알았는데, 다시 보니 65였다.

       ​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니면 지금 꿈을 꾸는 건가?

       ​

       그 사이에 스트레스 지수가 낮아질 리는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날의 정보다. 지근거리에서 인물을 보고 다시 열람하지 않는 한 스트레스 수치는 갱신되지 않는다.

       ​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

       ​

       ‘그 녀석, 몸의 주도권을 일부러 내어줬어.’

       ​

       타락은 토터스의 공격을 맞기 전부터 당해있었다. 아니, 그런 건 타락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육신의 원래 인격이 주도권을 잡은 것에 불과하다.

       ​

       버멜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내가 왜 이걸 재차 확인해 볼 생각을 못 했을까? 심장이 마라톤을 뛴 것처럼 쿵쾅거렸다.

       ​

       승산, 승산이 있다.

       ​

       이건 게임이 아니다. 그리 다짐한 지 오래였거늘. 버멜은 잠시 에테르를 게임 속 NPC로만 생각하고 말았었다.

       ​

       얼굴을 쓸어내렸다.레너윌의 말대로였다. 지금은 눈물 닦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뭐라도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

       “…조금만 기다려.”

       ​

       에테르의 지력 스텟은 1천. 마왕을 상회하는 수치. 이건 빙의한 대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아카데미의 모두를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심지어 본인조차도 속여낸 심계(深計)였다. 상태창이 없었더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

       ‘반드시 되찾아 줄 테니까.’

       ​

       멸망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1년.

       ​

       버멜은 스태프를 꺼내며 검문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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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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