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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8

       “저흰 어차피 돌아갈 곳도 가족도 없습니다. 당신은 전 주인보다 훨씬 나을듯한데, 이참의 저희 주인이 되어주시죠!”

       ​

       화상 입은 노예의 요구.

       자유를 주겠다고 했는데, 굳이 자신들의 주인이 되어달란다.

       ​

       뭔가 특이한 녀석 같긴 했다만….

       설마 이런 식으로 답할 줄은 몰랐다.

       ​

       다만.

       ​

       ‘자기 미래를 아는 건가?’

       ​

       보기보다 냉철한 판단이다.

       이대로 자유를 얻고 나가봐야 비참한 삶을 연명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럴 바엔 노예로 살지라도 더 강하고 괜찮은 주인 밑에서 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

       녀석에겐 내게 그런 자로 보였을지도.

       하지만 받아준다고 한 적은 없다.

       이쪽의 일방적인 손해라고.

       ​

       “별로 안 내키는군. 너희 삶은 너희가 알아서 찾아. 나는 노예가 필요 없어. 노예라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

       “저, 저희는 저희가 책임집니다! 신경 일절 안 쓰셔도 됩니다. 안전만 보장해주신다면 저희끼리 잘살아 보겠습니다. 손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온 힘을 다해 돕겠습니다.”

       ​

       녀석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어차피 잃을 것도 없기 때문인지, 당당한 태도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뒤쪽 노예들 대부분이 그녀의 말에 수긍하는 분위기라는 것.

       ​

       ‘정말 노예의 대표 격이었던 건가?’

       ​

       노예들 사이에서 이미지가 좋은 듯했다.

       괜히 이놈을 불러들였단 생각이 들 정도.

       ​

       덕분에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안전만 보장해주면 알아서 살 것이며, 도움이 필요하면 온 힘을 다해 돕겠다. 이 한마디가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

       ​

       게다가.

       ​

       ‘마냥 나쁘진 않아.’

       ​

       여긴 제법 괜찮은 곳이다.

       숲속에 숨겨져 있어 정겹기도 하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으면, 나중에 유용히 쓸 수 있을지 모른다. 지금 잠깐의 도움으로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

       그렇다면야.

       ​

       “이곳에 아무도 못 오게 해줄 수는 있다. 그러면 방금 말들 지킬 수 있나?”

       ​

       “네?… 물론이죠!!! 당신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

       화상 입은 노예는 당돌히 외쳤다.

       처음 보는 내게 믿을 수 있을 것 같단다.

       전 주인을 죽인 것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들에게 관심 가지지 않는 나의 태도 때문인지. 섣부른 판단이 아닌가 싶지만.

       ​

       뭐튼, 나쁘지 않은 녀석이다.

       그 정도라면 도와줄 수 있다.

       ​

       대신.

       ​

       “성의 동력은 없어질 텐데 괜찮나?”

       ​

       히페리온 동력원은 회수할 거다.

       아무리 그래도 1억짜리 아이템을 이들을 위해 방치하는 건 좀 그렇잖아.

       ​

       가져가서 잘 써먹어야겠지.

       ​

       “지하에 동력 장치를 가져가는 건가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희는 제대로 쓸 줄도 모르고, 불빛 정도는 저희도 밝힐 수 있으니.”

       ​

       “좋아. 입구를 봉쇄해주지.”

       ​

       “진짜죠!?”

       ​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아칸벨리 잔당이 다시는 여길 못 찾도록 만들어 주는 것쯤이야.

       ​

       입구 자체를 없애면 되거든.

       오히려 내게 이득이 되겠지.

       ​

       이곳은 이제 내 영토다.

       ​

       우선.

       ​

       “이거 먹어라.”

       ​

       톡~

       “으헛?”

       ​

       생명과를 만들어 던졌다.

       이거면 화상을 치료할 수 있을 거다.

       왜인지 보고 있으려니, 거북했기 때문이다.

       별다른 생각 없는 기분에 내킨 호의라고 보면 된다. 아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성을 관리해주는 비용이라 해도 되겠지.

       ​

       다음으론 확신을 심어줬다.

       ​

       “입구를 막아주겠다. 내가 아니면 앞으론 누구도 오지 못할 거야. 네가 여길 대표해서 잘살아 봐. 그리고 밖에 나가고 싶은 자들이 있으면 따로 한곳에 모이도록 하고.”

       ​

       “진짜로 도와주시는 거죠!?”

       ​

       “그 말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군. 언젠가 여길 내 거점으로 삼을 수도 있어. 그때까지 이곳에서 잘 살아 있다면 노예가 아닌, 정당히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해줄 수도 있다.”

       ​

       “그럼 성을 잘 관리해야겠군요! 그 말 꼭 지키셔야 합니다? 저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

       “너희야말로 말 바꾸지 말도록.”

       ​

       즉흥적인 결정이지만, 만족한다

       훗날 101층에 등반했을 때, 이곳을 쉽게 거점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

       고로.

       ​

       스륵~

       ​

       차원 줄기를 꺼냈다.

       아칸벨리 입구를 막을 시간이다.

       나는 친위대에게 노예들을 맡기고 성 밖으로 나섰다.

       ​

       ​

       ​

       *

       ​

       ​

       ​

       착!

       ​

       가볍게 달려 한 지점에 멈춰섰다.

       ​

       정면에는 동굴 통로가 보인다.

       뒤를 돌면 아칸벨리 성이 보인다.

       ​

       “작업을 시작해볼까.”

       ​

       여기 온 이유는 하나.

       아칸벨리의 거점화를 위해서다.

       원래는 지배자와 아칸을 처리하고 히페리온 동력원만 쏙 빼내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조금만 투자하면 이 성과 저 노예였던 자들까지 부려 먹을 수 있게 된다.

       ​

       숲속에 잘 숨겨진 지어진 외딴 성.

       양분도 많고 잠깐 몸을 숨기기도 좋다.

       ​

       굳이 무시하고 갈 이유도 없단 말씀.

       그러니 내가 등반 할 동안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해줄 생각이다.

       ​

       싸악.

       ​

       우선 식물의 시야로 땅을 훑었다.

       ​

       이곳은 그렇게 넓진 않다.

       성으로부터 반경 200m가 이곳의 전부다.

       입구도 동굴로 이어진 통로 하나뿐인 요새 같은 곳이다.

       ​

       적당한 크기.

       이 정도라면 무리 없다.

       ​

       푹!

       ​

       차원 줄기를 땅에 심었다.

       어차피 다크레아에서 10개의 차원 줄기가 또 자라나고 있어 크게 아깝지도 않다.

       ​

       스르르륵.

       ​

       땅 깊은 곳에 뿌리내리는 차원 줄기에 양분을 듬뿍 투여했다. 가능하면 자체 양분 생산이 가능하게 만들 생각이다.

       ​

       이것으로 얻는 효과는 많다.

       이걸로 피뢰침 삼아 찾아올 수 있고.

       양분을 저장하는 은신처가 될 수 있으며.

       동력원을 대체하여 노예들에게 붉을 밝히고 식량을 제공할 것이며.

       ​

       무엇보다.

       ​

       스륵.

       사르르륵!.

       ​

       이 땅을 봉쇄할 수도 있다.

       방금 전 아칸벨리 성을 포함한 반경 200m 공간의 경계가 살짝 일그러졌다. 다크레아처럼 분리된 세계를 만들긴 힘들지만, 공간을 어긋나게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쉽게 말해 공간 막이 처졌다.

       웬만한 방어막보다 강력한 실드다.

       공간이 일그러질 정도의 물리적인 공격이거나, 공간 능력을 사용하는 능력자가 아니고서야 쉽게 뚫을 수 없을 터.

       ​

       이걸로 아칸벨리는 봉쇄됐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누구도 이곳을 찾지 못하게 하는 거겠지. 

       ​

       슥.

       ​

       계속 작업하자.

       동굴 입구로 나아갔다.

       ​

       ​

       ​

       *

       ​

       ​

       ​

       아칸벨리 성 1층.

       무찬이 퇴장한 시각.

       ​

       “이제 우리 어떻게 되는 거야?”

       “정말 아칸 주인님이 죽으신 걸까?”

       “계속 노예로 살아왔는데… 우리도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거야? ”

       ​

       소곤소곤.

       ​

       노예들이 서로 대화 나눴다.

       아칸벨리의 노예 대우는 별로 좋지도 않고, 강압적인 게 전부였기에 대부분 불만 있어도 굴욕적이고 순종적으로 따라왔으며, 대부분이 그런 생활에 적응된 자들이다.

       ​

       허나.

       ​

       ‘…어쩌면 정말…….’

       ​

       붉은 머리 노예, 리에나.

       그녀는 일절 굽히지 않았었다.

       처지가 불쌍한 다른 노예를 대변하여 총대를 메고, 온갖 고진 일과 벌을 받으며 흉측한 꼴이 되어서도 여러 차례 반항했다.

       ​

       노예들이 올 때마다 가르치고.

       그들의 부당한 대우에 따지고.

       당연히 간부의 심기에 거슬린 적도 많았으며, 그때마다 벌을 받았다. 하지만 워낙 일을 잘하고 노예들을 잘 통솔하여 노예 교육인으로 아예 보직 받기도 했다.

       ​

       사실 이미 한참 죽었어도 모자랐다.

       일을 매우 잘하지 못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다른 노예의 처벌까지 함께 받으며 상처만 늘어갔다.

       ​

       그 때문일까.

       ​

       “모두 들어줘.”

       ​

       대부분의 노예는 그녀를 따른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빚진 것이 있기에 거부할 수 없다.

       ​

       “리에나… 우리 정말 괜찮을까?”

       “아까 그 사람도 우릴 못되게 굴지 않을까?”

       ​

       곧장 노예들이 불안감을 나타냈다.

       이에 리에나는 웃으면서 답했다.

       ​

       “모두 걱정 마! 방금 봤잖아. 그 남자는 굳이 필요 없는 호의를 베풀었어. 그것만으로도 전 주인보다 백배 천배는 나을 거야. 게다가 우리끼리 잘살아 보라고 하잖아?”

       ​

       모두를 진정시켰다.

       괜히 이들이 이상한 말을 해 주변에 서 있는 남자의 친위대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된다. 남자에게 잘못된 비방을 하는 순간, 호의가 적의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호의와 적의의 경계는 의외로 얕다.

       한순간에 180도 바뀌곤 한다.

       리에나는 그것을 잘 안다.

       ​

       ‘내가 통제해야만 해.’

       ​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리더의 모습에 큰 영향을 받으니까.

       입구를 봉쇄하겠다면서 혼자 나간 무찬이 돌아오기 전까지 아무 일 없도록, 자신부터가 괜찮은 척 모범을 보여야 한다.

       ​

       “우리는 대부분 노예 경매로 팔려 왔고, 이전에는 다른 삶을 살았어. 원래라면 여기서 매일 노예로 일하다가 죽었을지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기회가 생겼어.”

       ​

       무찬의 호의.

       아칸벨리의 괴멸.

       그것을 강조하며 자유를 찾아 떠나거나 어쩌면 여기서 다 같이 살 수 있을 거라며 희망적인 연설을 이어 나갔다.

       ​

       이후 한 손을 들었다.

       ​

       “이걸 봐. 방금 그 남자가 주고 간 거야.”

       ​

       무찬의 생명과.

       자기에게 먹으라고 줬던 거다.

       갑자기 먹을 걸 준 것이 의문이었지만, 이걸 먹어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어 모두에게 믿음을 심게 할 생각이었다.

       ​

       이게 별 효과가 있냐 싶겠지만.

       ​

       “굳이 이런 것을 줬다는 건 나쁜 의도가 있거나, 순수한 호의 중의 하나겠지. 그리고 나는 후자라고 믿어.”

       ​

       그런 식으로 밑밥을 깔았다.

       연설은 시각적인 효과도 매우 크다.

       따라서 이걸 먹고 괜찮으면 무찬이 괜찮은 자일 거라고 암시하듯 말했다.

       ​

       그리곤.

       ​

       훅!

       ​

       입에 생명과를 털어 넣었다.

       이제 ‘거 봐. 아무렇지도 않지?’ 라면서 자연스럽게 경계를 한 단계 푼 뒤에 말재주로-

       ​

       파아아!!~

       “어엇?….”

       ​

       웬걸.

       은은한 초록빛이 피어올랐다.

       굉장히 당황스럽게 자기 몸을 내려보았다.

       ​

       그러자.

       ​

       “이상한 빛이 나고 있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사, 상처가 치료되고 있어!!”

       “어떻게!?….”

       ​

       노예들의 말대로다.

       상처가 치료되고 있다.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과 함께 자신을 괴롭혀온 상처들이 씻겨나가기 시작했다.

       ​

       ‘대체 무슨 일이?….’

       ​

       리에나는 떨떠름하게 몸을 살폈다.

       따뜻한 빛무리가 상처를 쓰다듬는다.

       ​

       뒤늦게 정신 차리고 보면.

       ​

       

       ​

       “내, 내 몸이…….”

       ​

       상처 없는 멀쩡한 몸이 보였다.

       깨끗이 회복된 자기 모습을 깨닫는 순간 울컥 무언가가 올라왔다.

       ​

       ‘회복되었어…… 아픈 게 모두….’

       ​

       그녀는 소녀였다.

       꾸미고 싶은 나이였다.

       그런 나이에 불합리한 처지에 맞서 흉측한 상처만 생겼고, 몰래 울며 밤을 지새우곤 했었다. 아침이 되면 언제나 강인한 척 다른 노예를 돌보곤 했지만, 정작 그녀를 돌볼 자는 없었다.

       ​

       당연히 이런 상처를 얻고 싶지 않았다.

       매일 상처를 보며 후회하고 참아냈다.

       영원히 짊어질 상처라 여겼었다.

       

       “나는… 언제나 괴로웠는데.”

       차라리 죽고, 내려놓고 싶었는데.

       ​

       잠깐이나마 고양감을 느꼈다.

       아픈 것이 사라지고 포근함이 몰려왔다.

       눈물 아래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는 주변을 숙연하게 만들었고, 그 한마디에 담긴 진심은 모두에게 전파되어 심금을 건드렸다.

       ​

       투둑.

       ​

       리에나는 두손을 내려보았다.

       떨어지는 눈물은 괘념치 않았다.

       그녀에게 작은 호의는 억만금과 같았다.

       살기 위해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는 연설이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 없다.

       ​

       작은 미소를 짓고.

       ​

       “우리. 한 번 믿어보자.”

       ​

       연설이 아닌 진심을 말했다.

       별거 아닌 호의가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하고 충성을 얻어낸 것이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The Broken Goddess Tries to Raise Me

The Broken Goddess Tries to Raise Me

망가진 여신이 나를 키우려 한다.
Score 8
Status: Ongoing Author:
I have become the World Tree that the goddess is obsessed with. I ended up taking care of the broken goddess, and at some point, she started exerting her strength to raise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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