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198

        

         저 건너편에서 부담가지지 말라는 것처럼 손짓하는 노인과 이죽거리는 여성을 잠시 동안이나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더 분위기를 살피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이렇게 몸소 초대까지 해 주셨는데 멀뚱히 앉아서 눈치만 보는 것도 못할 노릇이다.

         

         “……그럼 어디, 사양하지 않고!”

         

         그래도 너무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이기는 뭣해서.

         살짝 망설였다는 여지만 준 다음 이내 깨작거리던 접시와 음료는 내가 직접, 준수한 사이즈를 자랑하게 된 칩 케이스는 제로가 든 채로 자리를 옮겼으니.

         

         과연, 가까이서 본 카드 게임용 책상은 멀리서 구경하는 것과는 그 느낌부터가 달랐다.

         

         윗면 전체가 터치 패널로 구성된 전자 테이블이 출력하는 이미지가, 갈색 테두리에 은은한 초록빛이 감돌아야 할 진짜 나무 테이블보다 더 진짜처럼 보였다면 믿겠는가?

         일단 나는 아니라고 여겼는데… 따로 집중된 조명이 없음에도 스스로 밝기를 조절하며, 렌더링 된 사물의 경계선을 강조하는 형태가 되어 두 눈을 현혹하는 걸 경험하니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이래서 시각만큼 속이기 쉬운 감각도 없다고 하는구나~ 라는 감상으로 금세 납득한 걸로도 모자라.

         오죽하면 손가락에 느껴지는 매끈한 유리 필름의 감촉도 ‘나무에 코팅이 잘 됐네.’ 하고 착각하려다 흠칫했고.

         

         드드득!

         

         ‘어, 이걸 비켜주네.’

         

         앉을 위치를 살피는 와중, 거침없이 의자를 끌어 옆자리를 넓혀준 무표정한 남자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마무리로 스마일 서비스를 잊지 않는 딜러가 설정을 조작하자 순식간에 내 칩을 내려놓을 공간과 베팅 칸 또한 확보되는 풍경은 테이블의 또 다른 장점을 자랑하는 것 같았지만.

         

         ……후, 좋아. 잡생각은 이만하고 여기 선수들의 면면이나 살펴볼까?

         친근한 합석 요청과는 별개로, 카드 게임이라는 게 내 할 것만 잘하면 되는 경우도 아니니 대전 상대가 되실 분들을 파악하는 걸 게을리해서는 안 되지.

         

         “어서 오시게, 어서 오시게! 오프라인 포커의 즐거움을 알아주는 이들이 하룻밤에 둘이나 늘다니. 이거 조금 기쁘구만…!”

         

         “아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먼저 포문을 연 건 아까부터 나쁘지 않은 무드를 유지하고 계신 가면 노인 분으로.

         

         수상쩍어 보인 외형과는 달리 현재 이 인원들 중에서 가장 극강의 친화력을 자랑하고 계시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심지어 겉치레 인사로도 모자라 손까지 내밀어서 악수를 요청하시는 게 굉장히 예의 있으신….

         

         “요크셔 캐피탈이라는 작은 대부업체를 굴리는 알프레드라 하네. 중간에 급하면 언제든지 부탁하게, 싸게 싸게 빌려줄 테니.”

         

         “그…… 그렇군요. 네.”

         

         …십, 정정하겠다. 격식은 잘 차리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평범이나 정상과는 거리가 좀 먼 사람이었다.

         

         신분부터 이름까지 전부 스스로 밝힐 거면 가면은 왜 쓴 거야 대체. 설마 진짜 ‘포커 페이스’ 하나를 위해서? 그리고 빌려준다는 건 또 뭔데요. 어떤 식으로 받아 낼라고.

         

         더군다나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폼도 꽤 익숙해 보이고, 게임 자체에 애정을 가진 것도 분명하니 주의하도록 하자. 요주의 플레이어가 될 수도 있겠다.

         

         “음… 가까이서 보니까 완전 인형이네. 그래도 노출을 대부분 가린 건 마음에 들어! 우리 자기가 하반신에 휘둘리는 인간이라 반응하면 영 곤란해서. 사샤 브루웍스, 편하게 사샤라고 부르던가 말던가.”

         

         “…….”

         

         변태가 있다고 외치려는 입을 가까스로 제어.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그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화장녀 사샤의 태도는 어느 쪽으로 보나 즉흥적, 경박한 말투하며 흥과 분위기에 취해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즐기는 그 모습은 카지노 측이 바라는 일등 손님이 아닐까 싶었다. 특별히 좋아할 이유도, 미워할 필요도 없이 크레딧만 넘치는 적당한 대전 상대라면 환영해야 할 터.

         

         단지, 그녀의 곁에서 반쯤 헐벗은 상태로 애교부리는 남자를 내가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게 거슬렸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기도 짜증나지만 ‘아잉~ 내가 언제~’ 같은 비음 섞인 아양은 정말….

         

         아오… 그냥 좀 작작했으면 좋겠지만 아무튼.

         여기까지가 주로 소란과 분위기를 담당하던 시끄러운 두 사람, 거기에 나와 눈이 마주쳤던 과묵한 아저씨를 마지막으로 각자의 차례가 한 바퀴 돌았다.

         

         “…………슈거, 라고 하면 된다. 잘 부탁하겠네.”

         

         “어… 설탕 할 때, 그 슈거요?”

         

         “……그렇지.”

         

         불편한듯이 중얼거린 입술은 그걸로 닫혔고, 머리마저 팩 돌아가버렸다. 마치 이런 대화는 그만하고 싶다는 것처럼.

         

         이걸 정말 소개라고 해야 해…? 어색하고 궁색한 변명이라고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나저나 정말 누가 봐도 중후한 아재가 마지못해 쓰는 가명이네요. 차라리 감사합니다.

         괜히 앞선 사람들의 상세한 자기 소개 때문에 저렇게 미주알고주알 다 밝히는 게 예의인가 했는데, 이런 비밀 주의로 일관해도 상관없는 자리라면 나 또한 대환영이다.

         

         시시콜콜한 잡담이나 하려고 모인 것도 아닌 만큼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 최초 만남의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푸는 행위)은 짧고 간결하면 그걸로 좋지 뭐.

         

         “거, 게임하는데 부를 호칭이 필요하다면 아나스타샤. …너무 길면 그냥 대충 아가씨라고 불러도 되고요.”

         

         집중된 좌중의 시선이 얼른 정체를 밝히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져서, 짐짓 새침한 인사말을 던지고는 옆에 정리된 내 칩들을 매만졌다. 발사되기 직전의 장전된 실탄을 가지고 노는 느낌이 들어서, 피부가 오싹오싹한 게 썩 마음에 들었다.

         

         덤으로 알프레드 씨도 이쪽의 건들거리는 선전 포고가 취향에 직격했는지, 짝짝짝! 하고 박수까지 쳐가며 호응하셨고.

         

         “프흐흐…. 확실히. 카지노가 통성명이나 하려고 오는 곳은 아니지, 아니고 말고. 여기 테이블의 종목이 뭔지는 아나? 어차피 큰 줄기는 기본적인 텍사스 홀덤을 따르니 그렇게 헷갈리지는 않을 테지만!”

         

         “그… 그렇다면야 다행인데요…?”

         

         말꼬리를 더듬으며 알프레드 씨의, 더 나아가 제로가 은근슬쩍 보내는 타박의 시선으로부터 고개를 돌려버렸다.

         

         실은 트럼프 포커의 족보만 겨우 알고 세부적인 룰이나 진행 같은 건 전혀 모르기에. 농담으로라도 큰 돈을 베팅하기 적합한 처지는 아니었으나.

         그런 사람도 즐길 수-돈을 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카지노의 역할이니, 눈치껏 딜러의 안내에 따라 행동하면 알아서 잘 굴러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허세를 부렸다.

         

         도중에 꼬이면…. 뭐, 많이 아쉬운 셈이고! 그러니까 제로 너는 그 못 말리겠다는 눈 좀 어떻게 하지!? 왜 입이랑 폐만 달려있었어도 아주 한숨도 푹푹 쉬었겠다??

         오늘 한 푼도 못 따도 사달라던 병렬 연산 장치랑 메모리 카드는 어련히 다 사줄 테니까 믿어봐라 쫌.

         

         “자자, 여기 딜러는 자는감? 얘기가 끝났으면 재깍재깍 패를 돌려야지 않겠나?”

         

         “죄송합니다 알프레드님. 그렇지만 전 판에 사용하신 카드들을 바닥에 내려놔 주셔야 다음 라운드를 진행할 수 있….”

         

         “어허! 귀한 새 플레이어가 왔으면 그에 맞춰 칼같이 새 덱을 뜯어야지! 어딜 재수없게 지난 게임의 악운을 끌어들여? 이래서 요즘 것들은 낡은 전통이라면 무조건 안 좋은 줄만 알지, 그게 왜 생겼는지에 대한 존중이 부족…!”

         

         찌이익! 찍!!

         

         주름진 손으로 인해 호쾌하게 찢어진 카드패의 잔해가 게임장 옆구리에 있던 쓰레기통으로 직행.

         

         23세기 제조 기술력이 듬뿍 담긴 질긴 코팅지에, 고급용지 여러 장이 겹쳐 있던 상태라 찢는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을 텐데도. 순식간에 카드 몇 장이 가로 세로로 한 번씩 조각나서 사라지는 게 보였으니.

         

         거 노인네가 힘도 좋으시지. 어찌나 기운이 남아도시는지 어설프게 말 한 번 잘못 꺼낸 딜러 씨는 혓바닥에 멱살이 잡힌 채로 일장연설을 듣는 형벌에 처해지기까지 했다.

         

         …숫제 꼬장에 가까운 훈계를 한바탕 듣는 와중에도, 요청받은 대로 성실하게 손을 움직여 새 카드 팩의 봉인 씰을 뜯고 핸드 셔플을 실시하는 건 가히 서비스직의 귀감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응? 그저 감정 노동을 참고, 자기 할 일 하는 것가지고 무슨 그런 극찬까지 하냐고?

         아니, 촤라락! 하며 마술사 마냥 카드가 허공을 날아다니게 하는 솜씨도 충분히 감상하면서 떠든 건데?

         

         “에잉…!”

         “♬…… ♪”

         

         리듬감과 현란함이 넘치는 딜러의 동작에, 상대가 일개 카지노 직원이 아니라 게임 진행자 역할로 완전히 돌아선 걸 느낀 그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흥얼거리는 타이밍에 맞춰 개봉된 카드 덱이 꼼꼼하게 뒤섞인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굽힌 카드를 튕겨 보내는 눈만 즐거운 행위도 포함되긴 했지만, 저건 진짜 중요한 과정이다. 더럽게 중요하고 말고.

         

         내가 트럼프를 자주 만져본 건 아니어도 보드 게임은 조금 해봤었는데.

         제대로 섞지 않고 대강 몇 번 치대다가 다음 판을 시작해버리면, 전판에 썼던 녀석들이 고대로 뭉쳐서 나와 게임이 엉망이 되는 것쯤은 여러 번 경험해봤다.

         

         저건 심지어 방금 막 뜯었으니 스페이드 12345… 같은 식으로 예쁘게 정렬되어 있었을 게 뻔한데 미친듯이 섞어주지 않으면 어찌 되겠나? 너도 나도 스트레이트 플러시(Straight Flush; 숫자가 이어지고 무늬가 같은 카드 5장으로 이루어진 족보)가 나오고 딜러만 매질 당하겠지.

         

         ……아, 맞다. 텍사스 홀덤이랬으니 아무리 패가 꼬여도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는 않겠구나 참.

         

         “그럼… 알프레드님부터, 차례대로 컷(Cut; 덱을 나누는 행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내밀어진 카드 뭉치의 윗부분을 호명된 노인이 신중하게 잘라서 내려놓자, 딜러가 위아래의 순서를 바꿔서 재빨리 다시 정리했다.

         

         마찬가지로 사샤는 한 손으로 술을 홀짝이면서 대충 잡히는 대로, 슈거 씨는 무심하게 적당량을.

         나는… 괜스레 많이 집으려다 볼품없이 떨어트릴까 봐, 약간만. 요청받은 대로 셔플에 동참해서 조작을 방지하는데 동참했고.

         

         그렇게 내 소심한 커팅을 최후로 완전히 정리된 덱이 그대로 옮겨졌다.

         

         어디로? 딜러 외에는 그 누구도 손대기 힘든 투명한 분배용 케이스로. 비스듬하게 눕혀진 탑 카드만 차례차례 뽑을 수 있게 되어있으니, 저 정도면 공정성 확보를 위해 딜러 분도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네.

         

         “크흠! 그럼 뉴 게임에 앞서 하이 플로어의 명물, 헤이븐 홀덤이 손님 여러분의 시간 대비 만족도를 챙겨드리기 위해 준비한 특별한 룰을 몇 가지만 공지해드리면서 진행하겠습니다. 먼저 저희는 앤티(Ante; 게임 시작 전 플레이어가 의무적으로 내서 팟을 키우는 돈)가 없는 대신, 최초의 프리 플랍(Pre-Flop) 순서에서 폴드를 하셔도 기본 판돈인 10만 크레딧을 원칙적으로 징수하므로. 웬만하면 콜 이상의 액션을 취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와, 씨. 잠깐만요. 벌써 어지러운데…?’

         

         딜러 씨는 예상만큼 친절하셨지만, 상상한 것보다 고유 명사가 많이 튀어나오는 심오한 포커의 세계에 일단 나는 급히 게임 용어 사전을 검색해서 한 쪽 망막에다 띄워 놓았다.

         

         그래 어디… 프리 플랍이란 건 핸드(Hand; 각 플레이어가 가지는 2장의 개인 카드)를 받는 단계, 콜은 판돈을 올리지 않고 넘어가는 것, 폴드는 그 핸드를 내던지고 ‘어~ 죽으면 그만이야~’ 를 시전하는 행위.

         

         오케이. 요건 다 외웠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내 머리도 막상 어디서 들어본 용어들을 확인하자, 각종 영상 매체에서 본 장면에 현실을 끼워 맞추며 순식간에 적응해 주어서 그나마 숨통이 좀 틔었다.

         

         딜러의 손에 의해 내 앞에 정중히 덮어진 카드가 한 장, 얼마 안 있어 두 장으로 늘어났다.

         영화에선 멋있게 막 푝푝 발사하듯이 던지는 것도 본 것 같은데, 이런 자리에서 감히 그럴 배짱은 없었는지 조심스럽게 놓고 가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쓰으읍…!”

         

         침을 삼킨다.

         여기서부터는 전인미답의 영역이나 다름없다.

         

         내게 강한 행운이란 게 실존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타고난 운이 있을 터이거늘. 그것들이 상충한다면 과연 일이 어떻게 돌아갈까, 그리고 방금 이 게임 시작에서 내가 직접적으로 손 댄 부분이라곤 마지막 덱 나누기뿐인데 이게 정말 어떤 변수를 만들 수 있을까?

         

         설마 양자역학 파워로 아직 확인하지 않은 내 핸드가 달라지기라도 하나? 어쩌면 제로보고 몰래 본 다음 입다물고 있으라고 해야 할지도.

         

         하지만 각종 기대를 품은 채, 두근거리면서 카드 뒷면을 쓰다듬던 나는 다양한 가설을 후순위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럼 10만, 가볍게 최소 벳만 넣을게.”

         “흠! 레이즈! 200만 크레딧…!!”

         

         “……예?”

         

         왜냐하면… 미처 핸드를 상세히 확인하기도 전에, 보란듯이 레드 칩을 두 개나 따닥 하고 내려놓은 알프레드 씨가 이쪽을 도발해왔기에.

         

         나머지 세 플레이어의 액션이 있어야 게임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이 발생해서 나만의 생각을 계속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데 십, 이 인간이 지금???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 쫄리면 뒤지시던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어제 연재분을 갈아엎고 다시 쓰느라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그대로 쓰다가는 카드 치는 걸로 한 10화는 넘어갈 것 같아서.
    쳐낼 부분은 쳐내고, 최대한 독자분들이 재미를 느끼되 규칙을 잘 모르셔도 생생한 포커 게임 장면 또한 떠오르도록 이렇게저렇게 노력해보는 중입니다.

    텍사스 홀덤은 각자 두 장씩 가지고, 바닥에는 5장 깔고 최고 족보를 만들어서 겨루는 그 게임 맞습니다. 네.

    08/20 07:20 일부 묘사가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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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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