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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8

     새삼스럽지만, 한 가지 분명히 언급하고 가야되는 부분.

     “나리아 공주에게는 ‘완전기억능력’이라는 게 있다.”

     

     카를로스 경과 수수께끼의 트윈테일 미소녀 엘프와 검은 로브를 쓰고 이동하는 동안, 나는 그들의 속에 있는 궁금증을 해결해주기 위한 비밀을 폭로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망각의 축복이 없다는 거지.”

     “망각의 축복…?”

     “그 어떤 것도 잊지 못한다는 말이란다.”

     미소녀 엘프…백금경이 내 말을 거들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역겨운 일도 전부 다 머릿속에 남아있다는 거야. 떠올리려고 하는 순간 바로 그 형상이 하나하나 정확하게 드러난다는 거지.”

     “그리고 나리아 공주는 어려서부터 살해 위협에 시달렸다. 다름아닌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에 의해서 말이지.”

     “그런…?!”

     카를로스 경이 경악하며 입을 떡 벌렸다.

     “설마 그 소문이 진짜였단 말입니까?”

     “소문?”

     “세인트 지오 노스트럼이 나리아 공주보다 더 말 잘 듣는 아이를 몰래 낳은 다음, 나리아 공주를 죽이고 자기가 50, 60살 노환이 들어 죽을 때까지 왕위를 가지고 버티려고 한다는 소문.”

     “행동하는 걸 봐서는 일찍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그냥 소문일 뿐이다.”

     세인트 지오의 사생아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카르멘 왕비가 그 부분은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돌 정도로 세인트 지오를 향한 민심은 바닥을 기고 있지. 나리아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지금, 나리아를 향해 암살자들도 일부 움직이고 있다.”

     “…이제는 왕국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제국에서 굳이 암살자를 보낼 이유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굳이 긁어부스럼을 낼 필요는 없지.”

     제국에게 있어 나리아는 변수다.

     호랑이에게서 개가 태어나는 법은 없다고 하지만,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나리아는 무능왕과는 다른 유능왕이 될 수 있다.

     링 위에 올라오지도 않는 자를 상대하는 것과 그래도 링 위에 올라오는 자를 상대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어렵냐고 하면 이견의 여지는 있을 수 있으나, 적어도 상식의 선에서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상대하기 버거운 게 사실.

     적어도 왕국의 핵심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웅’이라는 이들은 나리아가 나서고 난 뒤에야 모습을 드러내고 그럴 테니까.

     “나리아 공주는 지금 캠프에서 학생들을 돌보고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다.”

     “…학생들 사이에서 인재를 찾고 계신 거군요.”

     “극한상황에서 드러나는 본성을 살펴보려고 하는 거지. 이 정도 상황에서도 되바라진 인성을 보인다면, 훗날 왕국을 이끌어나갈 인재로서 중용할 수 있을까? 글쎄.”

     “그레이. 슬슬, 목적지다.”

     “그렇습니까.”

     이야기를 하면서 이동하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는….”

     “렘부르 군터 자작령에서 빠져나가는 식량이 짐마차를 통해 이쪽으로 빠져나간 걸 확인했지. 제국산 소시지라거나, 술이라거나.”

     숲 속, 2층으로 이루어진 넓은 목조건물이 있다.

     그냥 숲에다가 지어놓은 오두막치고는 너무나도 드러나는 특징이 불순한 구조.

     “왜 창이 하나도 없을까요?

     “밖에서 안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려는 거지. 아마도 암막커튼까지 설치되어 있을 거야.”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혹시나 누군가가 이곳을 찾게 된다고 하더라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 도련님.”

     “진정해.”

     카를로스가 별장의 창에서 보인 무언가를 보고 검을 뽑아들 뻔 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큭….”

     별장의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쳐나온다.

     옷이 헝클어진 채 금방이라도 벗겨질 것 같은 상태로, 맨발로 밖으로 달려나온다.

     “누가 좀-”

     덥썩!

     “으읍!”

     “으으, 짜증나게. 어딜 도망가. 응?”

     “으읍, 으으읍!”

     옷이 반쯤 벗겨진 여인은 발버둥치며 저항하지만, 여인보다 과장 좀 보태면 두 배는 더 큰 체격의 근육질 사내가 입을 손으로 막고 허리를 우악스럽게 붙잡고 있으니 도망칠 수 없었다.

     “으으읍!”

     “크으, 이제는 손까지 깨물려고 하네. 짐승이냐? 뭐, 그런 짐승을 가지고 노는 것도 나름 재미있기는 하다만.”

     여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했으나, 남자는 그런 여인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데리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저…!”

     “진정해.”

     “지금…!”

     “알아. 저 여자, 자작이 보낸 여자다.”

     “…….”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그런 이야기가 절로 나오는 사람이 카를로스 경이지만, 나는 그가 그걸 외쳐서 민망해지지 않도록 불편한 진실을 드러냈다.

     “애초에 저런 걸 당하도록 준비한 여자라는 거지.”

     “하지만 강제로….”

     “자작령에도 창부는 있어. 그리고 저런 걸로 돈 받아먹는 게 저 여자의 역할인 거고.”

     “…….”

     “모르가니아를 통해 얻은 정보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

     음지에서 일어나는 디테일한 일들은 양지에서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알고 있다면 그건 양지 사람이 아니라 음지에 발을 걸쳐놓은, 혹은 음지에 있다가 양지에 올라간 이들이다.

     “오히려 자네가 저걸 알아냈다고 한다면, 내가 자네에게 실망했을 것이야.”

     “크흠.”

     카를로스 경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민망함의 방향이 자신이 실수할 뻔 했던 것과는 달라진 것에 조금 다행인 것처럼 생각하는 듯하지만, 그래도 불편한 건 숨길 수 없는 모양이다.

     “카를로스 경. 자네는 저런 일들을 자네 여동생에게 말씀드릴 수 있는가?”

     “……전혀요.”

     “나도 마찬가지야. 동생들에게 저런 게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지도 않고, 나리아 공주는 더더욱 그렇지.”

     우리는 방금 본 장면이라거나 그런 걸 금방 잊을 수 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시간이 지난다면, 그걸 전부 잊어버릴 수 있다.

     “나리아는 전부 기억할 거거든. 제국력 98년 6월 1일 오후 7시 44분, 렘부르 군터 자작의 별장에서 황금여명의 기사가 자작이 보낸 별장 관리 메이드를 덮쳤다. 메이드는 옷이 찢어져있었고,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고 있었다.”

     “…….”

     “그리고 저 별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눈’으로 보게 된다면, 그 장면은 나리아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게 될 거야. 그저 지나가는 한 장면조차도.”

     이미 나리아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 순간이나 그 때의 눈빛 같은 것도 잊어버리고 싶겠지만, 그것조차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모든 걸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뒤에서 움직이는 우리가 나서야 하는 거지.”

     마침, 별장으로 향하는 넓은 길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 자들은….”

     “에르난데스 바르셀. 그리고 그 외 기타, 황금여명 기사단.”

     “……야영지를 따로 만들었다고 하더니, 야영지가 아니라 별장에서.”

     “특혜지.”

     교관이 굳이 학생들처럼 군용 텐트를 펼치고 노숙할 필요까지는 없다.

     별장에서 머무르는 것도 그들이 가진 정치력의 일환이며, 뒷배를 이용하여 누리는 특혜 중 하나다.

     “편한 곳에서 자는 건 좋아. 업무 후에 자기네들끼리 술을 마시든 담배를 빨든, 아니면 그 술에 캐롤라인을 섞거나 연초에 백은을 뿌리듯 그건 본인들 자유지. 하지만….”

     찰칵.

     

     “아직 성년도 아닌 학생들을 불러다가 그 남자들의 파티에 초대하는 건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

     “뭐, 그것도 본인들이 즐기는 거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도련님, 그…증거 사진을 모으기 위해, 기다리실 겁니까?”

     “글쎄.”

     방법은 여러 가지다.

     “모든 일이 끝난 뒤 술에 취해 골아떨어져있을 새벽 4시에 진입하는 것도 괜찮고, 한창 폭주가 일어나고 있는 자정 무렵에 들어가는 것도 괜찮고, 서로 주물주물거릴 때 진입하는 것도 괜찮지. 어느 때든, 진입해서 확인할 수 있으니.”

     “도련님이 생각하시기에 가장 좋은 선택지는 무엇입니까?”

     “글쎄. 흰색이냐, 회색이냐, 검은색이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

     “나로서는 검정이 취향이기는 하지만, 회색이나 흰색 쪽으로 가는 것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하기는 해.”

     마도영사기를 통해 별장의 사진을 찍은 뒤, 나는 그걸 품 속에 집어넣고 지팡이에서 칼을 뽑았다.

     “하지만 그러려고 했다면 혼자왔겠지. 카를로스 경, 그대를 데리고 왔겠나?”

     “저는 저를 회색이나 검정으로 만들려고 하는 줄 알았습니다.”

     “양지에 있을 때 가장 빛나는 사람에게 굳이 스스로 오물을 묻힐 필요가 있을까.”

     오물을 접하는 건 나 하나로 충분하다.

     “하얀색을 선택하기로 했다면, 조금 고생은 해야겠지. 둘 다, 이걸 쓰게.”

     나는 두 사람에게 미리 준비한 물건을 각각 건넸다.

     “가면…입니까?”

     “처음보는 형태로구나.”

     “예. 이거, 제가 깎아온 거니까요.”

     렘버리 캠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할까봐 미리 준비한 나무 가면.

     “역사 강의를 할 건 아니지만, 이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이의 행동원리를 이해하고 움직여야 더 잘 행동할 수 있을테니.”

     “…저기, 도련님? 저, 이거 뭔가 알 것 같은데요.”

     카를로스 경이 복잡해진 얼굴로 가면의 위를 손으로 쓸었다.

     “이거, 저기 80년 전에 멸망했다고 하는 나라의 전통 가면 아닙니까?”

     “멸망…?”

     “예, 백금경. 제국의 전대 황제에게 정복당해서 멸망당한 나라의 것으로….”

     “가장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면, 그에 맞게 ‘개연성’과 ‘설정’을 만드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나는 멸망한 나라의 가면을 얼굴에 눌러썼다.

     “선택하지. 여자들이 들어가고 난 뒤에 온갖 정사가 일어난 뒤 새벽 4시에 진입하여 알몸으로 뒹구는 황금여명 기사들의 자는 사진을 찍어서 배포할지, 아니면….”

     “쓰겠습니다.”

     카를로스 경은 가면을 썼다.

     “이제, 뭘 하면 되겠습니까?”

     “두 가지.”

     나는 검지로 입을 두드렸다.

     “어눌한 왕국어.”

     “…….”

     “그리고 하나 더.”

     별장을 향해 칼을 겨눴다.

     “분탕.”

     * * *

     5분 전.

     “이번에 몇 명이나 낚았어?”

     “몰라, 젠장. 어느 공주님 눈치 보여서 뭐 말을 못 붙이겠더라.”

     황금여명의 기사들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기가 익기도 전에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짜증을 토해냈다.

     “젠장. 오랜만에 좀 즐기나 싶었더니….”

     “너는 성공하지 않았냐?”

     “몰라. 성공은 무슨. 초대장 간신히 건넨 걸로 끝나버리고 말았는데.”

     “초대장이라…. 발자크 자작이 알아서 잘 하겠지?”

     “그럼. 이쪽으로 바로 오는 것도 아니고, 수면향 뿌리고 눈 가리고 마차까지 태워서 올 거잖아. 흐흐. 짠.”

     맥주가 든 유리잔이 부딪치며, 황금여명 기사들은 단숨에 맥주를 뱃속에 들이부었다.

     “그보다, 조장. 다리병신한테는 왜 간 거야?”

     “…….”

     조장이라고 불린 남자, 에르난데스는 묵묵히 맥주를 홀짝였다.

     “혹시 라이오넬을 몰래 빼돌렸을까봐?”

     “살아있다고 생각해? 나는 이미 죽었다에 한 잔.”

     “야. 그래도 조장의 동생인데 너무 그러는 거 아니냐?”

     “조장부터가 저런 표정인데 뭘.”

     “훗.”

     에르난데스는 맥주를 한 모금 더 홀짝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떻게 동생을 사랑하는 친형인 것처럼 낚아보려고 했더니, 반응조차 없더군.”

     “없었어?”

     “그래. 살려놨다면 대충 언질이라도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무런 일언반구도 없더군. 오히려 라이오넬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눈치였어. 그걸 봐선….”

     키득.

     “라이오넬인지도 모르고 죽여버렸거나, 뭐 그런 거겠지.”

     “하지만 조장. 시체는 아직 못 찾았잖아? 시체 나갔다고 들은 적도 없고.”

     “모르지. 거기 재단 이사장실에 비밀 통로 같은 게 있어서, 그쪽으로 시체를 처리한 걸수도.”

     “그런 건가….”

     “그런 거지. 그보다, 약은 제대로 있어? 정 안 되면 자작이 보내준 메이드라도….”

     콰ㅡㅡㅡ앙!

     폭음과 함께 문이 거칠게 ‘부서지자’, 황금여명 기사들은 바로 유리잔을 내려놓으며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누구냐!”

     “우리는 그림자.”

     “…뭐?”

     검은 옷.

     “진정한 황제의 의지를 이어받은 투쟁의 불꽃.”

     정체불명의 가면.

     “죽어라, 왕국의 쓰레기들.”

     “저, 저 자세!!”

     가면을 쓴 이가 검을 드는 모습을 본 에르난데스가 소리쳤다.

     “제국식…! 테르시안 검법이다ㅡㅡ!!”

     “너희들의 죽음으로, 이 땅에 전란을 가져오겠다.”

     가면 너머의 눈동자는 회색으로 짙게 물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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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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