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자네로군! 연회는 잘 즐기고 있나?”
“예, 성주님. 덕분에 여독을 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의례적인 감사 인사를 내뱉곤 연회장을 둘러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 성주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나를 오랫동안 방치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보니 마치 어디 팔순 잔치라도 연 것 같군…”
“저희 별동대원들이 나이가 많긴 합니다.”
나랑 목경이 빼면 평균 연령이 최소 60대 근처까지 올라가니 뭐.
사실 따지고 보면 금분세수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대인데 이렇게 전장에 나와준 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솔직히 나이를 이유로 참가 안 해도 이해할만한 나이잖아.
21세기면 모를까, 중세 중국이면 평균 연령이 그리 높은 시대는 아닐 테니까.
워낙 자연사하기 힘든 요소가 많은 시대기도 하고, 틈만 나면 쌈박질을 하는 게 무림인이니.
당장 나도 몇번의 사선을 넘은 건지 세기도 힘들 정도로 굴러댔으니, 이제 와서 생각하면 사지 멀쩡하게 살아있는 게 기적에 가까웠다.
“노인들로 만들어진 부대라, 내가 무림인이 아니었다면 농담인 줄 알았을 걸세.”
“무림인들도 놀라곤 합니다. 노익장이라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허허. 그렇지.”
우리는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연회장에서 일 이야기를 꺼내긴 좀 그렇고, 그렇다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
대부분의 질문은 별동대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그 사이에 나에 대한 호기심을 푸는 질문도 많았다.
색목인이 무림맹에서 중원을 지키는 행렬에 동참하다니,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좋은 소재였으니까.
나는 천자께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적당한 답변을 던졌다.
가능하면 발언에 통일성을 유지하는 게 내 신상에 좋아질 테니.
“자네 같은 색목인은 또 없을 걸세.”
“시간이 지나면 또 나오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단 게 무슨 뜻이겠나? 아주 드물 거란 뜻이지.”
그렇긴 하네.
나는 성주의 말에 납득하며 곁눈질로 목경이를 살폈다.
목경이는 연회를 즐기기는커녕 긴장한 얼굴로 술잔을 만지작거리는 중이었다.
술 좋아하는 애가 술도 제대로 못 마시는 걸 보니 사람이 많아서 긴장한 모양이다.
뭐라고 해야 할까.
물가에 애 내놓은 것 같은 기분이네.
“허허, 내가 눈치 없이 자네를 너무 붙잡았군. 자네도 슬슬 연회를 즐기러 가게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배려는 무슨, 이 늙은이가 눈치 없이 잡아둔 거지. 가보게나.”
나는 성주에게서 벗어나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술잔만 깨작거리는 목경이 옆에 앉았다.
“목경아, 연회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즐겨.”
“어, 어떻게 즐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 저는 이런 곳이 처음이라…”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고, 적당히 음식 맛도 좀 보고…대화를 나누면 좋지.”
“대, 대화라니…”
얘가 음침하게 왜 이러지. 나는 대화라는 말에 얼굴이 새하얘진 초절정고수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원래부터 소심한 면이 있긴 했지만 좀 더 심해진 것 같은데.
사회생활이라도 빡세게 시키는 게 맞았나.
“언제까지고 피할 순 없잖아. 최소한 초절정고수 되는 것보다 사람이랑 대화하는 게 훨씬 쉽잖아. 안 그래?”
“어…”
‘친구 만드는 것보다 초절정고수되는 게 더 쉬운데요?’ 같은 얼굴로 올려다보지 마라.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지잖아.
“어쩃든, 즐겨라.”
“…같이 술 마시시겠습니까?”
결국 결론은 그건가.
뭐, 그러라는 연회니까.
나는 목경이와 마주 본 상태로 술잔을 들었다.
———————-
연회가 끝난 다음 날, 나는 별동대원들을 불러 모았다.
배분으로나 실력으로나 내가 막 부를 위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내가 대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기에 고수들은 내 말을 들어주었다.
“에고고, 오랜만에 즐겼더니 머리가 아프구나.”
“팽 장로, 벌써 노망났소?”
“에라이! 장무곡 네 놈의 걸걸한 입은 여전하구나. 나 때는 말이다-”
“나 때는 무슨, 우리 배분도 같지 않소?”
“내가 너보다 다섯 살은 많아 이녀석아!”
“무림에서 다섯 살이면 별 차이도 아니지.”
그런…가?
나는 말다툼을 벌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고는, 둘에게 다가갔다.
어쩃든 별동대장으로서 둘의 사이가 험악해지지 않도록 조율해야 했으니까.
“팽 장로님. 장 대협. 일단 진정하시지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정찰을 나서야 하니 말입니다.”
“흠흠, 알았네.”
“이 녀석이 말하니까 여기서 멈추는 거다, 이 노인네야.”
“뭐?”
“장 대협. 이제 등을 맡겨야 할 사람끼리 그러면 되겠습니까.”
내가 다시 한번 말을 꺼내고 나서야 칠성검왕은 시비 걸기를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다른 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9명의 초절정고수의 시선을 받은 채로 입을 열었다.
“저희는 이제부터 꽤 오랜 시간을 서장의 산맥에서 보내게 될 겁니다.”
“말년에 고생 좀 하겠군.”
천매신검 백자기가 꺼낸 말에 다른 노고수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초절정고수이니 만큼 어지간해서 힘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그의 나이에 사실상 최전선에 서는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단지 각자 싸워야만 할 이유가 있었기에, 맹주의 제안을 수락했을 뿐.
“가장 중요한건 적들이 세운 야영지를 찾는 겁니다.”
“야영지를 찾는다라…찾은 다음엔 어쩔 생각인가?”
“저들도 정찰대를 보낼 겁니다. 그놈들을…”
나는 손가락으로 내 목에 수평으로 선을 그었다.
내 손짓에 모두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저놈들이 야영지 바깥에 함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의미가 있나? 우리 정도라면 야영지를 몰래 기습해서 막대한 피해를 주는 것도 가능하거늘.”
“물론 그것도 유의미한 전략입니다. 하지만…상대는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저희가 지금 서역의 맘루크들을 만나서는 안 됩니다.”
“맘루크?”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로구나.”
“그놈들이 뭐 어쨌다고?”
“제국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국가에서 작정하고 재능있는 놈들을 골라 키운 괴물들입니다. 그놈들의 수장인 파르스는…천마와 비교해도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없을 겁니다.”
실제로 얼마나 강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내가 처음 봤던 시점에서 단장님과 동수를 이루다시피 했으니, 지금쯤이면 화경 쯤 되겠지.
이것도 말이 안 되지만, 그게 가능한 괴물이 아닌가.
“자칫 잘못하면 그놈에게 심대한 피해를 입고 야영지 위치를 알려주러 가기도 전에 전멸당할 수도 있습니다. ”
“뭐 그런 놈이 서장에서 튀어나오는 건지 모르겠구나.”
“원래 무공이란 게 실전을 거치면서 성장하는 법이니 말입니다. 지옥 같은 전쟁터를 찾아다니면서 싸움을 거는 괴물이 성장하질 않을 수가 없죠.”
정파의 무공처럼 심대한 깨달음을 얻어야만 하는 무공이라면 모를까, 서양의 아츠는 죄다 실전 지향에 가까운 무예라 실전을 겪으며 성장하는 경향이 강했으니.
꼭 그런 아츠가 없는 건 아니지만 주류 아츠들은 대체로 그랬다.
“생각보다 재미없는 임무가 되겠구나.”
“그래도 여러분들의 활약으로 하여금 수많은 희생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상대가 강군인 만큼 어중간한 정찰대는 포착되는 순간 전부 끝장날 뿐.
그러니 확실하게 기동성이 보장되면서, 전투력이 뛰어나고 유사시에 적들을 물리치고 도망칠 수 있는 고수들로 작전을 진행하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제자들이 죽는 것보다야 낫구나.”
“세가의 아해들이 다치는 것보단 노구를 움직이는 게 낫겠지.”
대부분의 정파의 명숙들이라 그런지 납득이 빠르시네. 물론 다들 알고 온 거니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서 가장 망나니 기질이 강한 편인 칠성검왕도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막을 우회해서 산맥을 탈 겁니다.”
하나하나가 더럽게 높은 산들이지만, 전쟁에서 이기려면 타야지.
자고로 전쟁은 고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쪽이 유리한 법이니까.
당장 청해성 자체도 고지대에 있으니, 우리가 청해성에 틀어박히면 놈들은 큰 희생을 각오하고 들어서야 할 터였다.
…일단 관군이 도착해서 방어선을 구축한 다음이지만.
우리가 이렇게 나서는 것도 관군이 도착할 시간을 벌어두려는 것도 있었다.
우리에게 모든 주의가 쏠리는 동안 적들은 출정을 나갈 수 없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물건을 다 챙기셨습니까?”
“에잉, 누굴 노망난 노인으로 보느냐?”
“아니었소?”
“이놈이!”
“장 대협.”
“알았다 알았어.”
“이놈한테 비무에서 졌다더니, 아주 얌전하게 구는구나.”
팽 장로는 놀릴 거리가 하나 생겼다는 듯이 낄낄댔다.
…임무만 제대로 하면 됐지.
“문제없으시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어디 오랜만에 파르스 얼굴이나 볼까.
나는 허리춤에 매달린 롱소드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선두에 섰다.
저는 제사 지내러 갑니닷….
나중에 뵈어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