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나, 살았어……?”
로즈마리는 멍한 표정으로 자기 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렇게나 구멍이 많이 뚫려 있었는데, 지금은 깔끔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기적적으로 치료받고 살아난 모양이었다.
“…어떻게 살았지?”
“그야 언니가 구해다 줬으니까.”
로즈마리의 고개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갔다.
“작은 언니…?”
“큰 언니 돌아오셨다. 가서 인사드려라.”
로즈마리는 안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캡슐에서 일어나자마자 에테르가 주로 쓰던 방까지 도도도 달려갔다.
벌컥!
“언니이!”
로즈마리는 그대로 에테르에게 다이빙했다.
“언니 내가 미안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이제부터 말 잘 들을 테니까……!”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건 기쁨도, 안도감도 아니었다.
에테르가 자기 때문에 더는 틸레트에 있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두려웠다.
물론 로즈마리는 에테르가 그날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황성에 있다가 백야를 맞고 뻗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에테르가 이곳 마왕성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정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틸레트에서 업무를 볼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어쨌거나 깨 버렸다. 닥치고 잘못했다며 비는 수밖엔 없었다.
“언니, 한 번만 용서……!”
“…알았으니까 떨어져.”
“어, 언니…?”
로즈마리는 당황하며 잡고 있던 팔을 스르르 놓았다. 에테르의 어조는 얼음장처럼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에테르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렌스 대륙이 그려진 지도였다. 지도 곳곳에 빨간 사무용 펜으로 그어진 X자 표시가 눈에 띈다. 로즈마리는 그 위치를 대략 가늠했다.
필리우트 제국의 수도. 각 나라의 군사시설. 카우렐리아의 대통령이 거처하는 백옥관, 국회의사당, 산업공장…….
찍, 찌익.
에테르가 마지막 장소에 X자를 그었다.
정령계로 향하는 입구. 브릴뤼움 대폭포의 하류 지점이었다.
“언니, 뭐 하는 거예요?”
“청소 준비.”
“…예?”
에테르가 지도의 각 지점을 얇은 봉으로 짚으며 말했다.
“제국, 엘프국, 정령계, 모두 상관없다. 이성적인 사고도 못 하고, 그렇다고 용서도 빌 줄 모르는 우매한 새끼들에게는 매타작이 딱 맞지.”
따악! 에테르는 들고 있던 봉을 내던졌다. 로즈마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테르는 마력초를 피워 스태프를 꺼냈다.
파아악! 캘리퍼스의 날이 카우렐리아의 수도, ‘메르헤름’에 꽂힌다.
메르헤름은 태초의 세계수가 뿌리내린 곳. 동시에 공(空)의 로드스톤이 숨겨진 장소였다.
“특히 정령을 사역하던 미천한 새끼들.”
로즈마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에테를 바라보았다. 큰 언니의 눈가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조만간 엘프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엄청난 살기였다. 로즈마리는 저도 모르게 말을 떨었다.
“어, 언니 왜 그래요…. 원래 이런 성격 아니었잖아요….”
“이제 다 끝났다, 로즈마리. 이 세상에 대한 논증은 모두 마쳤다. 앞으로 1년 이내에 모든 걸 마무리 지을 것이다.”
“…….”
로즈마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조금은 다정한 구석이 있는 언니였데. 작은 언니처럼 가끔가다 귀여운 면모도 있는 착한 언니였는데…….
큰 언니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사실상 처음 본다. 지금 그녀는 인간에 대한 복수심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로즈마리도 인간은 싫다. 그들은 오만하고, 또 이기적이다. 웬만하면 싹쓸이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로즈마리는 처음으로 자기 생각이 너무 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새끼들, 대체 어느 정도로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긴 거야? 언니가 완전히 맛이 가 버렸잖아…!’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남동생을 잘 부탁해요.
며칠 전. 아카데미를 습격했을 때 죽어가던 자신을 구해줬던 정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로즈마리는 침음을 삼켰다.
‘남동생이 대체 누군데, 이 빌어먹을 정령년아.’
물론 정령이 꺼낸 말이었으니 들어줄 생각도 없었지만.
‘나한테는 언니뿐이야.’
아무리 그래도 생명의 은인이다. 심지어 자신을 마왕군이라는 공동체에 소속하게 한 장본인. 큰절을 백 번이고 올려도 부족하다.
‘잠깐, 그러면 그 정령도 생명의 은인인가…?’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로즈마리는 고개를 털었다. 그 사이 에테르는 방 밖으로 나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로즈마리는 언니를 쫄래쫄래 쫓아갔다.
“언니, 어디 가요?”
“곧 다른 사천이 깨어난다. 그들을 맞이할 때다.”
“다른 사천…?”
사천이라. 들어본 적은 있다. 구천지대계가 형성되기 전, 마왕군을 도맡던 네 명의 최고위 사령관.
에테르와 요르문간드가 사천인 것까지는 알았다. 그러나 나머지 두 명은 본 적이 없었다. 로즈마리는 호기심이 동해 에테르 뒤를 따라갔다.
그곳에는 요르문간드를 포함한 인간형 구천지대계가 모두 합석해 있었다. 7석인 오를레이앙은… 없다. 역시 그때 죽은 게 맞나 보다.
‘쌤통이다.’
뒤통수를 쳤으면 천벌을 받아야 하는 법. 암, 그렇고말고!
요르문간드. 에테르, 아카샤. 로즈마리. 3석인 빌헬름과, 5석인 엔테로까지. 절멸급 마수들이 모두 원탁에 둘러앉았다.
원탁 한가운데는 뻥 뚫린 공간이었다. 그 안에 붉은빛과 푸른 빛을 내는 부등변다면체가 공중에 뜬 상태로 있었다.
각각 불의 로드스톤, 그리고 물의 로드스톤이었다.
땅의 로드스톤도 확보하긴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로드스톤은 필요하지 않았다.
요르문간드가 말했다.
“당장 우리의 목표는 대전쟁 시절 이곳에 봉인 당한 등신 두 마리를 꺼내는 것이다. 마왕을 부활시키는 것보단 훨씬 쉬운 일이지.”
요르문간드는 로드스톤 주위에 마법진을 그렸다. 두 로드스톤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이 만들어진다.
“꼬맹이, 세세한 건 너에게 맡기겠다.”
요르문간드가 로즈마리를 불러 분필을 건넸다.
타원 형태의 마법진. 봉인을 해제하는 ‘분해진’의 일종이다.
로즈마리는 대략적인 윤곽 위에 자세한 부분을 채워나갔다. 그녀보다 스크롤이나 마법진을 잘 그리는 마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에테르 언니 정도가 그에 버금가는 수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로즈마리는 수백 년간 스크롤만 팠다. 때문에 수련을 게을리할 수밖에 없어 신체적인 능력은 낮았지만, 그 대신 축조진을 사용한 신출귀몰한 작전과 다인전에 뛰어나 4석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다 그렸어요.”
척. 로즈마리는 분필을 내려놓으며 샐긋 웃었다.
“마력 방출은 내가 하도록 하지.”
철컥, 철컥! 무거운 발소리가 성을 울렸다.
성인 남성 두 명 정도의 체고를 지닌 거한이 스태프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아니, 저걸 스태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애초에 누가 머리에 스태프를 이고 다닌단 말인가.
구천지대계 3석. 빌헬름 폰 슈델가이거. 그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손을 머리에 얹었다.
철컥.
“귀 막든지 말든지.”
로즈마리나 엔테로는 귀를 막았다. 나머지는 조금 떨어져서 빌헬름을 지켜보았다. 빌헬름은 머리를 점점 돌려가더니, 이내 마법진에 처박을 기세로 고개를 숙였다.
드르르르르르르륵!
머리 아래로 탄피가 떨어진다. 빌헬름은 한동안 기관포를 발사했다. 그러다가 자기 머리를 뚝 떼버리고는 같이 다니는 시종에게서 화염방사기를 받아 장착했다.
이번에는 불길이 마법진을 태운다. 불의 로드스톤 근처에는 붉은 불꽃이, 물의 로드스톤 근처에는 푸른 불꽃이 일렁인다.
“지금 뭘 하는 건가요?”
로즈마리가 물었다. 곁에 있던 아카샤가 대답했다.
“정제 작업을 하는 거야. 로드스톤을 여신이 만들어낸 건 알지? 그래서 정령의 기운이 강해. 그 기운을 약하게 만들면 두 사천이 알아서 봉인을 깨고 나오게 되어 있어.”
“아하.”
알았다는 듯 로즈마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벌써 정화 작업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우웅! 두 로드스톤이 웅혼한 빛을 내뿜었다.
에테르는 수첩을 들어 과정을 기록했다. 3천 도, 5천 도, 7천 도. 나중에 폭탄 제조에 써먹을 수 있겠군.
그리고 다음 순간이었다.
‘증기의 비’ 때처럼 짙은 안개가 바닥에 내리깔린다. 가마솥에 들어온 것처럼 공기가 푹푹 쪘다. 불과 물이 동시에 만난 까닭이다.
얼마간 지나자 뿌연 안개가 걷힌다. 그 사이로 검은 두 체의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히흐흐흐, 지루해 죽는 줄 알았네요.”
“참으로 오랜만이다, 나의 자랑스러운 부하들이여.”
위압이 짙게 깔린 두 남자의 목소리.
꿀꺽. 로즈마리가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이, 이들이 창천(蒼天)과 호천(昊天)…….’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다. 이 금안족들, 에테르 언니나 요르문간드와 동급이다.
나머지 두 사천은 처음 본다. 로즈마리가 등용된 게 대전쟁 이후였으니 말이다. 눈앞의 두 남자는 대전쟁 때 봉인되었다가 지금 풀려난 것이다.
척, 척, 척. 로즈마리를 포함해 세 구천지대계가 절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유이하게 가만히 서 있는 건 에테르와 요르문간드뿐.
“음…? 모르는 얼굴이 많군.”
“여전히 멍청한 분이시군요. 시대가 그만큼 지났으니 세대교체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엘프처럼 뾰족한 귀를 지닌 사천이 먼저 앞으로 나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색 머리카락에, 그 키는 7척에 달했다.
상당한 미남이었다. 역시 금안족. 미형뿐인 우수한 종족이다.
그런데 로즈마리는 그의 얼굴에 집중하지 않았다.
“흐히히, 꼬마 아가씨. 제 팔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남자는 기괴하게 목을 비틀며 로즈마리에게로 다가왔다.
“저는 교월(皎月) 길라흐라고 합니다. 긍지 높은 하이엘프 출신이자, 금안의 피를 물려받은 가장 우수하고 지고한 존재이지요. 마왕님께선 호천(昊天)이란 이명으로 부르십니다.”
남자, 길라흐가 팔이 있는 부분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로즈마리는 그가 내민 손을 쉬이 잡을 수 없었다.
길라흐는 양팔이 없었다. 아니, 양쪽 팔 모두가 갈고리였다.
“멍청한 건 너구나, 길라흐. 생판 처음 보는 이에게 병신이 된 팔을 내밀다니.”
터벅. 이번에는 다른 남자가 몸을 움직였다. 스스슥, 하고 바닥에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더불어 남자가 걸어올 때마다 주변이 밝아졌다.
묘한 열감이 들었고, 곧 몸에 들어있는 마석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느낌이 로즈마리를 엄습했다.
“본인은 파스모다. 사람들은 날 등불이라 부르지.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파스모의 주변에는 형형색색의 호롱불이 돌아다녔다. 등불 내부는 비쳐 보였는데, 그 안에서 눈알처럼 생긴 것이 굴러다녔다.
로즈마리는 기겁하며 파스모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키는 150 정도. 작다. 자신과 비슷하다.
눈은 붕대로 칭칭 감긴 상태였다. 넝마 비스름한 질감을 지닌 붕대는 머리의 절반을 덮었다. 철구처럼 생긴 대두 위로 자그마한 중절모가 얹혀있었다.
무엇보다도 팔.
팔이 더럽게 길다. 관절은 네 마디나 되었고, 무슨 공장에서 뽑아 올린 가공육처럼 각 부분이 분리되어 흐느적거렸다.
손목에는 사슬이 달린 수갑을 차고 있었는데, 조금 전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는 이 소리였던 듯하다.
이 사람이 사천의 나머지 한 명. ‘창천’일 것이다.
“눈도 안 보이는 장님 드워프에겐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 흐하하하!”
졸지에 진짜 앞이 안 보이는 요르문간드가 데미지를 받고 눈살을 찌푸렸다.
“개떡 같은 웃음소리 좀 고쳐라. 들을수록 볼썽사나우니까. 그리고 난 장님이 아니다. 눈을 바깥에 두고 다니는 것이지.”
“그러게 눈을 왜 바깥에 두고 다니십니까? 그쪽이야말로 볼썽사납게.”
“또 꼬투리를 잡는군. 넌 예전부터 그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후하하! 저와 싸우고 싶은 모양이군요!”
요르문간드는 한숨을 쉬었다. 에테르는 연구용 수첩을 끄적이다 말고 둘이 말다툼하는 소리에 쯧, 하며 혀를 찼다.
“아, 그러고 보니 익숙한 얼굴도 있군요. 민천과 상천. 오랜만입니다?”
요르문간드가 몇 마디 건네며 창천과 호천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와는 달리, 에테르는 수첩을 내려놓고 손을 까딱이기만 했다. 그런 상천을 본 호천이 입매를 씩 비틀며 말했다.
“특히 상천. 미천한 부랑아 출신 인족 계집애가 아직도 우리 진영에 남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으하하하하!”
길라흐가 숨을 꺽꺽대며 웃었다.
“부랑아……?”
갑자기 튀어나온 모욕적인 발언.
“지금 우리 언니보고 부랑아라고 한 거야…?”
에테르보다 로즈마리의 얼굴이 먼저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