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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99

       “어…. 나, 살았어……?”

       ​

       로즈마리는 멍한 표정으로 자기 몸 구석구석을 훑었다.

       ​

       그렇게나 구멍이 많이 뚫려 있었는데, 지금은 깔끔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기적적으로 치료받고 살아난 모양이었다.

       ​

       “…어떻게 살았지?”

       “그야 언니가 구해다 줬으니까.”

       ​

       로즈마리의 고개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갔다.

       ​

       “작은 언니…?”

       “큰 언니 돌아오셨다. 가서 인사드려라.”

       ​

       로즈마리는 안색이 대번에 밝아졌다. 캡슐에서 일어나자마자 에테르가 주로 쓰던 방까지 도도도 달려갔다.

       ​

       벌컥!

       ​

       “언니이!”

       ​

       로즈마리는 그대로 에테르에게 다이빙했다.

       ​

       “언니 내가 미안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이제부터 말 잘 들을 테니까……!”

       ​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건 기쁨도, 안도감도 아니었다.

       ​

       에테르가 자기 때문에 더는 틸레트에 있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두려웠다.

       ​

       물론 로즈마리는 에테르가 그날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황성에 있다가 백야를 맞고 뻗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에테르가 이곳 마왕성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정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

       틸레트에서 업무를 볼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어쨌거나 깨 버렸다. 닥치고 잘못했다며 비는 수밖엔 없었다.

       ​

       “언니, 한 번만 용서……!”

       “…알았으니까 떨어져.”

       “어, 언니…?”

       ​

       로즈마리는 당황하며 잡고 있던 팔을 스르르 놓았다. 에테르의 어조는 얼음장처럼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

       에테르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

       아렌스 대륙이 그려진 지도였다. 지도 곳곳에 빨간 사무용 펜으로 그어진 X자 표시가 눈에 띈다. 로즈마리는 그 위치를 대략 가늠했다.

       ​

       필리우트 제국의 수도. 각 나라의 군사시설. 카우렐리아의 대통령이 거처하는 백옥관, 국회의사당, 산업공장…….

       ​

       찍, 찌익.

       ​

       에테르가 마지막 장소에 X자를 그었다.

       ​

       정령계로 향하는 입구. 브릴뤼움 대폭포의 하류 지점이었다.

       ​

       “언니, 뭐 하는 거예요?”

       “청소 준비.”

       “…예?”

       ​

       에테르가 지도의 각 지점을 얇은 봉으로 짚으며 말했다.

       ​

       “제국, 엘프국, 정령계, 모두 상관없다. 이성적인 사고도 못 하고, 그렇다고 용서도 빌 줄 모르는 우매한 새끼들에게는 매타작이 딱 맞지.”

       ​

       따악! 에테르는 들고 있던 봉을 내던졌다. 로즈마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테르는 마력초를 피워 스태프를 꺼냈다.

       ​

       파아악! 캘리퍼스의 날이 카우렐리아의 수도, ‘메르헤름’에 꽂힌다.

       ​

       메르헤름은 태초의 세계수가 뿌리내린 곳. 동시에 공(空)의 로드스톤이 숨겨진 장소였다.

       ​

       “특히 정령을 사역하던 미천한 새끼들.”

       ​

       로즈마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에테를 바라보았다. 큰 언니의 눈가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

       “조만간 엘프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

       엄청난 살기였다. 로즈마리는 저도 모르게 말을 떨었다.

       ​

       “어, 언니 왜 그래요…. 원래 이런 성격 아니었잖아요….”

       “이제 다 끝났다, 로즈마리. 이 세상에 대한 논증은 모두 마쳤다. 앞으로 1년 이내에 모든 걸 마무리 지을 것이다.”

       “…….”

       ​

       로즈마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조금은 다정한 구석이 있는 언니였데. 작은 언니처럼 가끔가다 귀여운 면모도 있는 착한 언니였는데…….

       ​

       큰 언니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사실상 처음 본다. 지금 그녀는 인간에 대한 복수심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

       로즈마리도 인간은 싫다. 그들은 오만하고, 또 이기적이다. 웬만하면 싹쓸이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

       그러나 오늘. 로즈마리는 처음으로 자기 생각이 너무 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인간 새끼들, 대체 어느 정도로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긴 거야? 언니가 완전히 맛이 가 버렸잖아…!’

       ​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 남동생을 잘 부탁해요.

       ​

       며칠 전. 아카데미를 습격했을 때 죽어가던 자신을 구해줬던 정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로즈마리는 침음을 삼켰다.

       ​

       ‘남동생이 대체 누군데, 이 빌어먹을 정령년아.’

       ​

       물론 정령이 꺼낸 말이었으니 들어줄 생각도 없었지만.

       ​

       ‘나한테는 언니뿐이야.’

       ​

       아무리 그래도 생명의 은인이다. 심지어 자신을 마왕군이라는 공동체에 소속하게 한 장본인. 큰절을 백 번이고 올려도 부족하다.

       ​

       ‘잠깐, 그러면 그 정령도 생명의 은인인가…?’

       ​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로즈마리는 고개를 털었다. 그 사이 에테르는 방 밖으로 나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

       로즈마리는 언니를 쫄래쫄래 쫓아갔다.

       ​

       “언니, 어디 가요?”

       “곧 다른 사천이 깨어난다. 그들을 맞이할 때다.”

       “다른 사천…?”

       ​

       사천이라. 들어본 적은 있다. 구천지대계가 형성되기 전, 마왕군을 도맡던 네 명의 최고위 사령관.

       ​

       에테르와 요르문간드가 사천인 것까지는 알았다. 그러나 나머지 두 명은 본 적이 없었다. 로즈마리는 호기심이 동해 에테르 뒤를 따라갔다.

       ​

       그곳에는 요르문간드를 포함한 인간형 구천지대계가 모두 합석해 있었다. 7석인 오를레이앙은… 없다. 역시 그때 죽은 게 맞나 보다.

       ​

       ‘쌤통이다.’

       ​

       뒤통수를 쳤으면 천벌을 받아야 하는 법. 암, 그렇고말고!

       ​

       요르문간드. 에테르, 아카샤. 로즈마리. 3석인 빌헬름과, 5석인 엔테로까지. 절멸급 마수들이 모두 원탁에 둘러앉았다.

       ​

       원탁 한가운데는 뻥 뚫린 공간이었다. 그 안에 붉은빛과 푸른 빛을 내는 부등변다면체가 공중에 뜬 상태로 있었다.

       ​

       각각 불의 로드스톤, 그리고 물의 로드스톤이었다.

       ​

       땅의 로드스톤도 확보하긴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로드스톤은 필요하지 않았다.

       ​

       요르문간드가 말했다.

       ​

       “당장 우리의 목표는 대전쟁 시절 이곳에 봉인 당한 등신 두 마리를 꺼내는 것이다. 마왕을 부활시키는 것보단 훨씬 쉬운 일이지.”

       ​

       요르문간드는 로드스톤 주위에 마법진을 그렸다. 두 로드스톤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이 만들어진다.

       ​

       “꼬맹이, 세세한 건 너에게 맡기겠다.”

       ​

       요르문간드가 로즈마리를 불러 분필을 건넸다.

       ​

       타원 형태의 마법진. 봉인을 해제하는 ‘분해진’의 일종이다.

       ​

       로즈마리는 대략적인 윤곽 위에 자세한 부분을 채워나갔다. 그녀보다 스크롤이나 마법진을 잘 그리는 마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에테르 언니 정도가 그에 버금가는 수준.

       ​

       그럴 수밖에 없었다. 로즈마리는 수백 년간 스크롤만 팠다. 때문에 수련을 게을리할 수밖에 없어 신체적인 능력은 낮았지만, 그 대신 축조진을 사용한 신출귀몰한 작전과 다인전에 뛰어나 4석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

       “다 그렸어요.”

       ​

       척. 로즈마리는 분필을 내려놓으며 샐긋 웃었다.

       ​

       “마력 방출은 내가 하도록 하지.”

       ​

       철컥, 철컥! 무거운 발소리가 성을 울렸다.

       ​

       성인 남성 두 명 정도의 체고를 지닌 거한이 스태프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

       아니, 저걸 스태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애초에 누가 머리에 스태프를 이고 다닌단 말인가.

       ​

       구천지대계 3석. 빌헬름 폰 슈델가이거. 그가 쓰고 있던 후드를 벗으며 손을 머리에 얹었다.

       ​

       철컥.

       ​

       “귀 막든지 말든지.”

       ​

       로즈마리나 엔테로는 귀를 막았다. 나머지는 조금 떨어져서 빌헬름을 지켜보았다. 빌헬름은 머리를 점점 돌려가더니, 이내 마법진에 처박을 기세로 고개를 숙였다.

       ​

       드르르르르르르륵!

       ​

       머리 아래로 탄피가 떨어진다. 빌헬름은 한동안 기관포를 발사했다. 그러다가 자기 머리를 뚝 떼버리고는 같이 다니는 시종에게서 화염방사기를 받아 장착했다.

       ​

       이번에는 불길이 마법진을 태운다. 불의 로드스톤 근처에는 붉은 불꽃이, 물의 로드스톤 근처에는 푸른 불꽃이 일렁인다.

       ​

       “지금 뭘 하는 건가요?”

       ​

       로즈마리가 물었다. 곁에 있던 아카샤가 대답했다.

       ​

       “정제 작업을 하는 거야. 로드스톤을 여신이 만들어낸 건 알지? 그래서 정령의 기운이 강해. 그 기운을 약하게 만들면 두 사천이 알아서 봉인을 깨고 나오게 되어 있어.”

       “아하.”

       ​

       알았다는 듯 로즈마리가 고개를 끄덕인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벌써 정화 작업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

       우웅! 두 로드스톤이 웅혼한 빛을 내뿜었다.

       ​

       에테르는 수첩을 들어 과정을 기록했다. 3천 도, 5천 도, 7천 도. 나중에 폭탄 제조에 써먹을 수 있겠군.

       ​

       그리고 다음 순간이었다.

       ​

       ‘증기의 비’ 때처럼 짙은 안개가 바닥에 내리깔린다. 가마솥에 들어온 것처럼 공기가 푹푹 쪘다. 불과 물이 동시에 만난 까닭이다.

       ​

       얼마간 지나자 뿌연 안개가 걷힌다. 그 사이로 검은 두 체의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

       “히흐흐흐, 지루해 죽는 줄 알았네요.”

       “참으로 오랜만이다, 나의 자랑스러운 부하들이여.”

       ​

       위압이 짙게 깔린 두 남자의 목소리.

       ​

       꿀꺽. 로즈마리가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

       ‘이, 이들이 창천(蒼天)과 호천(昊天)…….’

       ​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다. 이 금안족들, 에테르 언니나 요르문간드와 동급이다.

       ​

       나머지 두 사천은 처음 본다. 로즈마리가 등용된 게 대전쟁 이후였으니 말이다. 눈앞의 두 남자는 대전쟁 때 봉인되었다가 지금 풀려난 것이다.

       ​

       척, 척, 척. 로즈마리를 포함해 세 구천지대계가 절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

       유이하게 가만히 서 있는 건 에테르와 요르문간드뿐.

       ​

       “음…? 모르는 얼굴이 많군.”

       “여전히 멍청한 분이시군요. 시대가 그만큼 지났으니 세대교체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

       엘프처럼 뾰족한 귀를 지닌 사천이 먼저 앞으로 나왔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색 머리카락에, 그 키는 7척에 달했다.

       ​

       상당한 미남이었다. 역시 금안족. 미형뿐인 우수한 종족이다.

       ​

       그런데 로즈마리는 그의 얼굴에 집중하지 않았다.

       ​

       “흐히히, 꼬마 아가씨. 제 팔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

       남자는 기괴하게 목을 비틀며 로즈마리에게로 다가왔다.

       ​

       “저는 교월(皎月) 길라흐라고 합니다. 긍지 높은 하이엘프 출신이자, 금안의 피를 물려받은 가장 우수하고 지고한 존재이지요. 마왕님께선 호천(昊天)이란 이명으로 부르십니다.”

       ​

       남자, 길라흐가 팔이 있는 부분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나 로즈마리는 그가 내민 손을 쉬이 잡을 수 없었다.

       ​

       길라흐는 양팔이 없었다. 아니, 양쪽 팔 모두가 갈고리였다.

       ​

       “멍청한 건 너구나, 길라흐. 생판 처음 보는 이에게 병신이 된 팔을 내밀다니.”

       ​

       터벅. 이번에는 다른 남자가 몸을 움직였다. 스스슥, 하고 바닥에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

       더불어 남자가 걸어올 때마다 주변이 밝아졌다.

       ​

       묘한 열감이 들었고, 곧 몸에 들어있는 마석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느낌이 로즈마리를 엄습했다.

       ​

       “본인은 파스모다. 사람들은 날 등불이라 부르지.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파스모의 주변에는 형형색색의 호롱불이 돌아다녔다. 등불 내부는 비쳐 보였는데, 그 안에서 눈알처럼 생긴 것이 굴러다녔다.

       ​

       로즈마리는 기겁하며 파스모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

       키는 150 정도. 작다. 자신과 비슷하다.

       ​

       눈은 붕대로 칭칭 감긴 상태였다. 넝마 비스름한 질감을 지닌 붕대는 머리의 절반을 덮었다. 철구처럼 생긴 대두 위로 자그마한 중절모가 얹혀있었다.

       ​

       무엇보다도 팔.

       

       팔이 더럽게 길다. 관절은 네 마디나 되었고, 무슨 공장에서 뽑아 올린 가공육처럼 각 부분이 분리되어 흐느적거렸다.

       ​

       손목에는 사슬이 달린 수갑을 차고 있었는데, 조금 전 무언가가 끌리는 소리는 이 소리였던 듯하다.

       ​

       이 사람이 사천의 나머지 한 명. ‘창천’일 것이다.

       ​

       “눈도 안 보이는 장님 드워프에겐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 흐하하하!”

       ​

       졸지에 진짜 앞이 안 보이는 요르문간드가 데미지를 받고 눈살을 찌푸렸다.

       ​

       “개떡 같은 웃음소리 좀 고쳐라. 들을수록 볼썽사나우니까. 그리고 난 장님이 아니다. 눈을 바깥에 두고 다니는 것이지.”

       “그러게 눈을 왜 바깥에 두고 다니십니까? 그쪽이야말로 볼썽사납게.”

       “또 꼬투리를 잡는군. 넌 예전부터 그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후하하! 저와 싸우고 싶은 모양이군요!”

       ​

       요르문간드는 한숨을 쉬었다. 에테르는 연구용 수첩을 끄적이다 말고 둘이 말다툼하는 소리에 쯧, 하며 혀를 찼다.

       ​

       “아, 그러고 보니 익숙한 얼굴도 있군요. 민천과 상천. 오랜만입니다?”

       ​

       요르문간드가 몇 마디 건네며 창천과 호천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와는 달리, 에테르는 수첩을 내려놓고 손을 까딱이기만 했다. 그런 상천을 본 호천이 입매를 씩 비틀며 말했다.

       ​

       “특히 상천. 미천한 부랑아 출신 인족 계집애가 아직도 우리 진영에 남아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으하하하하!”

       ​

       길라흐가 숨을 꺽꺽대며 웃었다.

       ​

       “부랑아……?”

       ​

       갑자기 튀어나온 모욕적인 발언.

       

       “지금 우리 언니보고 부랑아라고 한 거야…?”

       

       에테르보다 로즈마리의 얼굴이 먼저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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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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