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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이는 전투의 양상은 실비아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날카롭게 벼려낸 호흡을 내쉬며 휘두르는 검은 흉물의 몸뚱이를 거칠게 꿰뚫고, 징그러운 촉수는 대부분 쳐내버린다.
맞부딫히는 칼날도 없기에 날카로운 금속의 파열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가 베이는 듯한 소리와 미처 막지 못한 촉수가 실비아를 스치는 질척한 소리만이 수없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몸 안에 스며드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랜 시간 단련되어온 실비아의 팔 근육은 폭발적인 열기를 내뿜으며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사정없이 마왕의 몸을 찔러대는 실비아의 장검은 잔상을 만들어 수십 개로 보일 정도였다.
마왕은 촉수와 흉측한 팔 끝에 달린 날카로운 손톱으로 반항해 보지만 몇몇 공격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과거에도 마왕은 강력한 주문을 사용하는 마법사였기에 접근전으로 붙으면 질 리가 없다는 실비아의 생각은 거의 그대로 들어맞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실비아는 어떤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 빌어먹을,”
마왕이 좀처럼 죽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목이 완전히 떨어지고도 멀쩡히 살아있었던 전적이 있던 만큼, 그를 죽이는 게 쉽지 않으리라는 것 쯤은 예상하였다.
하지만 정말 이상한 점은, 그가 좀처럼 제대로 된 반격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있었다.
주문을 사용하지도, 정령을 부리지도 않는다.
전투의 기본은 상대의 공격 간격을 벗어나 자신의 간격으로 상대를 집어넣는 것이다.
응당 검을 쓰는 실비아보다 사악한 술수를 부리는 마왕이 압도적으로 긴 사거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마왕이 취해야 할 기본적인 태도는 실비아를 밀쳐내던가, 물러나 거리를 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왕은 그 역겨운 노폐물들을 질질 흘리며 실비아를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예비동작이 훤히 보이는 저열한 휘두르기와 귀찮을 뿐인 촉수를 마구 흩뿌리는 마왕의 모습은 마치 자신을 베라고 도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어디 끝까지 버텨봐라.”
실비아는 기꺼이 그 도발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냉정함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손맛은 마왕의 몸이 베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고, 실비아의 검은 한번 휘두를 때마다 확실하게 목숨을 가져갈 위력이 있었다.
아무리 마왕이 끊임없이 회복하고, 죽여도 죽여도 계속 되살아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 능력엔 분명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그 무시무시한 신성력을 두른 앨리스조차 제압해 본 적이 있었던 실비아는 이를 악물며 더욱 거칠게 마왕을 제압해 나갔다.
하지만, 이 위화감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몰아치는 것은 분명 자신인데, 어째선지 점점 몰리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마치 그녀의 흔들거리는 내면을 은유하는 듯, 실비아의 귓가에는 바퀴벌레의 날갯짓과 비슷한 소름이 끼치는 소리마저 윙윙대고 있었다.
실비아는 불안을 떨쳐내려 검을 더욱 단단히 틀어쥐었다.
‘정신 차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실비아는 위화감과 불안감에서 억지로 눈을 돌리며 검을 쥔 손가락을 활짝 폈다가 다시 쥐었다.
손에서 난 땀 때문에 검을 놓치기라도 한다면 그 때문에 마왕에게 당하기라도 한다면 그것만큼 웃긴 일도 없을 것이다.
실비아는 어느새 발치에 수북이 쌓인 잘려 나간 촉수다 발들을 짓밟으며 팔꿈치로 마왕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주춤거리는 마왕의 겨드랑이 아래쪽으로 빠르게 밀어 넣은 검을 힘껏 들어 올리자 단숨에 마왕의 팔 한 짝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마왕은 비명을 지르며 잘려 나간 어깨를 부여잡으면서도 그 파충류의 것 같은 얼굴을 히죽이며 입을 열었다.
“여기를 베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지? 애쉬라는 저 꼬마의 어깨도 베었잖나.”
“입 닥쳐”
실비아는 건틀릿의 손등 부분으로 마왕의 턱주가리를 깨버릴 듯 후려쳤다.
“내가 분노 때문에 정신적으로 동요하는 걸 노리는 건가? 그럴 일은 없다.”
“하,”
실비아의 검이 그 기다란 마왕의 주둥이를 밑에서부터 꿰뚫었다.
실비아가 그대로 팔을 들어 올리자 마왕은 날카로운 검에 찔린 채로 발이 공중에 띄워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검에 온몸의 무게가 실리는 고통은 괴물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것일까.
마왕은 그 창백하고 앙상한 다리를 버둥거리며 신음을 흘려댔다.
“난 이미 너를 넘치게 증오하고 있거든.”
실비아가 간단하게 손목을 돌리는 것만으로 마왕의 주둥이를 꿰뚫은 검은 그대로 한 바퀴를 회전했다.
커다란 절단면을 드러내며 얼굴이 잘려 나간 마왕이 무게에 의해 바닥에 넘어지는 것과 동시에 실비아는 그의 등을 짓밟고 울퉁불퉁 튀어나온 그의 징그러운 척추 사이로 검을 찔러 넣었다.
마왕은 땅바닥에서 버둥거렸다.
실비아는 그런 마왕의 몸을 꾹꾹 눌러 밟은 채 기이한 소리 때문에 간질거리는 귓가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어디 더 해봐. 더 까불어 봐. 얼른.”
“케에엑”
“이 개 같은 소리도 다 네가 한 짓이지?”
“켁케케게”
마왕은 목구멍에서 역겨운 액체를 토해내며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들린 실비아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그의 척추를 찌른 검을 비틀었다.
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버둥거리던 앙상한 다리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축 가라앉았다.
“안 통한다고 했지. 도발도, 성가신 소리도, 좆같은 말로 내 신경 긁으려는 그 모든 시도도 다 안 통한다고. 이 개새끼야.”
“크히히헤헤”
“다 실패하고 짓밟힌 주제에 뭐가 웃기지?”
마왕은 부들거리던 얼굴을 천천히 돌렸다.
리자드 맨 특유의 얼굴 탓에 눈이 양옆으로 박혀있던 마왕은 어렵지 않게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실비아와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실비아는 자신의 것과 똑같은 그 붉은 눈을 보며 이를 갈았다.
마왕은 그런 실비아를 비웃으며 어눌한 발음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충분히… 통한 것 같은데?”
“뭐?”
“그래, 그 소리는 내 정령들의 날개짓 소리지. 내 주변을 항상 날아다니는 충실한 종.”
실비아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뭐, 그런 거겠지. 보는 것만으로 두렵게 만든다는 네 위용도 결국 남의 신경을 어지럽게 만드는 이런 속임수에 불과한 것뿐. 너한텐 바닥을 기는 꼴이 딱 어울려. 이 빌어먹을 도마뱀아.”
“그런데… 그거 알고 있나?”
“뭘, 시발이.”
마왕은 킥킥대며 말했다.
분명 자신의 발아래 짓밟힌 상대인데도, 실비아의 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왜 정령들에게 그저 내 주변을 날아다니라고 시킨 걸까? 충분히 정령술로 반격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안 궁금해.”
“예전에 내 앞에 마법사와 함께 도착했던 너는 이런 소리 같은 건 못 들었을 테니.”
“안 궁금하다니까? 이 병신 새끼야.”
실비아는 그의 목을 부러트릴 기세로 짓밟았다.
하지만 마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정령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도리어 약점이 되었구나.”
“뭐래,”
“주변을 살피는 능력도 줄었고, 정신력도 닳아버렸지. 넌 약해졌다. 내가 약해진 것만큼이나.”
“패배자가 할 말이 아니다.”
마왕은 키득거렸다.
“패배?”
그리고는 천천히 자신을 짓밟은 실비아의 발을 밀어내며 마왕은 몸을 일으켰다.
실비아는 갑자기 자신의 힘을 이기고 일어나는 마왕의 모습에 당황하며 황급히 그의 몸에 박힌 검을 옆으로 뽑아냈다.
갈라진 복부 사이로 왈칵 쏟아지는 싯누런 진물과 내장들을 거칠게 손으로 쓸어 옆으로 털어낸 마왕은 천천히 그 징그러운 얼굴을 이죽거렸다.
“나는 시간을 끈 거란다. 당연하게도.”
뭔가, 다르다.
이상하다.
마왕이 자신의 속셈을 털어놓는다.
저 흉물이 바보도 아니고, 자신의 작전을 적에게 술술 읊어댈 리가 없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이미 그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었다는 뜻이리라.
실비아는 자기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억지로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시간을 끌어? 뭐 하러? 고통받는 게 네 작전이었나? 말하지 그랬어. 얼마든 베어줄텐데.”
마왕은 말없이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실비아의 귓가에 윙윙대던 날개짓 소리가 딱 멈추었다.
“…?”
그리고 동시에, 날카로운 마리아의 비명이 들렸다.
“실비아!”
실비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 애쉬?”
애쉬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고 있었다.
마리아는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채 쓰러진 애쉬의 몸을 받쳐 주고 있었다.
쓰러진 애쉬의 입에서 시커먼 핏물이 쿨럭이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설명할 시간 없어… 그러니까,”
“당장 튀어와!”
마리아의 말을 이어받듯이, 피아가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실비아는 깨달을 수 있었다.
마왕이 말한 시간 끌기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마기…”
농도가 짙다.
소용돌이 숲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짙고 탁한 마기.
앨리스와 비교하면 적을 뿐, 제법 든든한 양의 신성력을 몸에 품은 실비아는 멀쩡했다.
정령인 피아와 마리아도 마기의 영향을 크게 받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간과했다.
마왕이 무엇을 노리고 시간을 끌던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곳에는 마기에 영향을 받는 인간이 딱 한명 있었다.
“안돼!”
앨리스는 분명 애쉬의 몸에 신성력을 나눠 주었다.
실비아의 눈에도 꽤 많은 양의 신성력이었다.
하지만 실비아나 앨리스와는 달리 애쉬의 몸에 깃든 신성력은 한번 소비되어 버리면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곳은 앨리스가 보았던 숲속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짙은 마기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짙은 마기가 애쉬 몸속에 깃든 신성력을 빠르게 태워버린 것이리라.
“애, 애쉬!”
실비아는 지면을 디딘 발끝에 힘을 바짝 주었다.
단 한 번의 도약만으로 애쉬에게 닿기 위해, 모든 힘과 의식을 발끝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마왕을 향한 의식이 끊긴 아주 짧은 그 순간.
실비아는 등 뒤에서 자신의 가슴팍을 뚫고 나오는 커다란 촉수를 발견했다.
“크억!”
실비아 본인이 스스로 생각해봐도 참 바보 같은 실수였다.
적을 등 뒤에 두고도 정신을 빼앗기다니,
“빌어… 먹,”
내내 무기력하게 압도당하던 마왕을 우습게 본 것일까.
그렇다면 여태껏 실비아의 검에 무참히 베여온 마왕의 계략이 통한 것이었다.
쓰러진 애쉬를 보고 혼란스러워진 것일까.
그렇다면 마왕이 말한 대로 그가 자신의 약점이라는 뜻이었다.
지난 몇 년간 자신을 죽일만한 위협이 모조리 차단되었기 때문에 방심한 것일까.
병신, 그건 마왕이 남긴 저주다. 마왕의 공격마저 보호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진작 버렸어야 했다.
“어, 허억,”
폐를 찢어버린 촉수에 의해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죽음.
한때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그 죽음이 지금, 이 순간 실비아의 눈앞에 넘실거렸다.
안돼, 왜 하필 지금. 그토록 찾아 헤매일 때엔 없더니, 왜 하필 지금!
“큭!”
실비아는 양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촉수를 붙잡았다.
그러나 그 촉수는 악랄하게도 실비아의 몸을 꿰뚫은 채 그 안에서 역겹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만으로 실비아의 피로 흠뻑 젖은 촉수는 실비아의 손안에서 미끄러지며 잡히질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저 가문이 네 가장 큰 약점이구나.”
마왕은 등 뒤에서 실비아를 조롱했다.
마치 조금 전까지의 그녀가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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